소설리스트

이세계에 천재가 가면-46화 (46/93)

〈 46화 〉 46화 쿠르시카 도적단

* * *

달빛과 별빛 아래.

빽빽하게 솟아오른 초목들 사이를 한 인영이 내달리고 있었다. 별빛과 달빛이 아름다운 백금에 반사되었다. 어둠 속의 유일한 빛. 내색하지는 않아도 평소엔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머리카락이었지만, 지금은 애처로운 도망자의 빛일 뿐이다.

유리 베르실은 쫓기고 있었다.

“후우… 후우… 후우….”

호흡을 정돈한다.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지난 두 시간 동안 계속된 도주는 그녀의 체력을 거의 바닥까지 떨어트렸다. 길이 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추격자들의 수준과 그녀의 계획을 결과적으로 실패에 가깝게 만든 존재는 결코 쉬운 길로 가게 놔두지 않았다.

부 오 오 오 오 오 오

“…후!”

멀리서 들려오는 괴이한 고함에 유리 베르실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사방에서 그녀를 향해 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수는 아홉. 이제까지 베어버린 적의 수가 벌써 30이 넘어가는데 여전히 백 명이 넘는 인원이 그녀를 쫓고 있었다.

천라지망????

동방에서 전해지는 말이다. 그 말처럼 촘촘하게 짜인 포위망은 도적단이라 볼 수 없는 조직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평범한 도적단이 아니라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다. 전력도 전술도 전략도. 배후에 놈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쿠르시카 도적단은 처음부터 도적단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군대다.

놈들이 준비한 군대.

‘언제부터였지? 이만한 규모를 고작 몇 개월 만에 만들 수는 없어. 최소 몇 년 전부터……. 근처 영주 중에 은밀하게 협력하는 자가 있다.’

냉철한 이성이 그러한 결론을 돌출해냈다. 지금 당장은 쓸모없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살아나간다면 놈들을 공격할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그녀는 쿠르시카 도적단의 본거지에 잠입해서 본 것을 차분하게 머릿속에 정리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상대를 분석하면서 마음을 차분하게 해야 할 때였다.

“…으, 으윽.”

그때 등에 업고 있던 여성이 신음과 함께 깨어났다. 유리는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다급하고도 조용하게 말했다.

“정신이 드느냐.”

“…스, 스승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으, 으윽.”

유리 베르실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렸을 때부터 계속 스승이라 부르지 말라고 말해왔지만, 그녀는 언제나 자신을 스승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것을 가당치 않은 호칭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제자 같은 건 두 번 다시 두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 정도로 테르시아 영애. 시엘 테르시아는 빛나는 재능과 아름다운 외모와 사랑스러운 인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스승이라 불리는 것만은 그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마음 편히 나눌 대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직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조용히 들어라. 우리는 지금 최소 100명 이상의 적에게 포위당했다. 너도 겪어 봤으니 알겠지만, 놈들은 단순한 도적단이 아니다. 아주 잘 단련된 군대지.”

“………네,”

“말하지 말래도. …어쨌든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지금부터는 조금 격하게 움직이게 될 테니,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어라.”

유리 베르실은 그리 말하고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소리를 죽이고 다가오던 기척 다섯 개가 그 순간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이를 악물면서 유리 베르실은 달빛에 빛나는 검을 휘둘렀다.

쿠르시카 도적단 아지트의 감옥에서 시엘 테르시아를 꺼내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았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경계는 삼엄했고, 곳곳에 갖가지 함정과 경보 마법이 깔려 있었다. 일반적인 도적이라 볼 수 없는 강자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고 체계적인 움직임은 절대로 도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뚫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유리 베르실을 방심하게 만들었다.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돌파하기 힘든 수준의 철저한 경계였기 때문에, 설마 그 정도 수준의 경계조차도 함정이라는 사실을 쉽사리 떠올릴 수 없었다.

경계가 약했거나 어설픈 부분이 있었다면 당연히 함정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상대는 그녀의 실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함정이라 생각하기 힘든 수준의 경계 태세를 만들어 놨다.

명백히 자신을 노린 함정.

……사실, 설사 함정이라는 걸 깨달았어도 유리 베르실에 시엘 테르시아의 구출을 포기할 일은 없었겠지만, 방심한 순간 날아든 일격 정도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급하게 치료를 해서 출혈은 없었지만, 옆구리를 꿰뚫었던 일격은 지금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후우…. 후우…. 후우….”

“……스, 스승님…….”

거칠게 내몰아 쉰 호흡에 조금이지만 피 냄새가 섞였다. 시엘의 처절한 목소리에 파리한 미소를 지어주면서 입가에 흐른 핏물을 닦았다. 그리고 검을 휘둘러서 허공에 핏물을 뿌렸다.

그녀의 발아래에는 깔끔하게 심장이나 목을 관통당한 여섯 구의 시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시엘 테르시아가 정신을 차린 뒤에 유리 베르실이 쓰러트린 적의 숫자가 이걸로 40명을 넘어섰다.

이전에는 최소한의 적만 상대하면서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이동하는 시간보다 싸우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 정도로 포위망은 촘촘해지고 있었다.

상대하는 적들의 수준도 점차 올라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 실험을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동시에 훈련이었다.

단 한 명의 초인을 사냥하기 위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도적들. 그들의 움직임은 처음보다 훨씬 매끄럽고 정교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압도적인 강자를 상대로 행해지는 협공도 수준이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이게 어딜 봐서 도적이냐. 죽는 순간에도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 굉장히 잘 단련된 전사들이지 않나?’

무엇보다 유리 베르실을 지치게 만드는 것은 도적들의 끝없는 투지였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 명의 몸이 꿰뚫리면 곧바로 다른 한 명이 빈틈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놈까지 처치하면 또 다른 놈이 달려들었다.

압도적인 실력 차이가 있을 때는 그 정도 합공은 가볍게 뿌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점차 강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그녀의 몸에도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다.

‘약이나 세뇌 마법 같은 게 아니다. 놈들의 두 눈에 보이는 열망은… 종교적인 신념이야. 역시 이놈들은 잊힌 신들의 추종자들이 키우고 있는 군대다!’

알고 있던 사실의 재확인에 불과하다. 다만, 조금이지만 의문이 들었다. 이정도 군대를 키우는데 들어갔을 노력은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도 몰래 키우고 있었으니 더욱 더 많은 돈과 시간이 들어갔겠지. 그런데 그런 군대를 자기 하나를 잡겠다고 벌써 70명을 넘게 잃었다.

…힘들게 키운 병사들을 자기 하나 잡겠다고 이렇게 날릴 필요가 있을까?

물론, 자신을 잡는데 희생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유리 베르실은 그 희생의 방식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적에는 자신이 전력을 다해 싸워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는 강적이 있다.

그 강적이 처음부터 나섰다면… 하다못해 부하들의 공격 사이에 기습을 날렸다면 이만한 인원을 소비하는 일은 없었을 거다. 하지만 계속 경계하고 있음에도 강적의 기척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마치 이쪽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아내기 위한 것처럼 순차적으로 전력을 투입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하다.

이만한 군세를 기껏 힘겹게 키웠는데 그런 장난질로 소비하다니…. 정상이 아니다. 그야, 잊힌 신들의 추종자나 악신의 추종자나 제정신이 아닌 놈들이지만, 지금 벌이는 짓은 그런 것과는 궤가 달랐다.

그렇다고 해서 좋은 상황인 건 아니다.

유리 베르실은 계속 지치고 있었고, 몸만 멀쩡하면 강력한 전력이 될 수 있었을 시엘 테르시아는 아직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으며, 덤벼 오는 적들의 수준은 꾸준히 상승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포위망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는다.

자신도. 시엘 테르시아도.

“…아직, 몸은 움직일 수 없느냐?”

“……크, 윽! 죄, 죄송합니다….”

힘없이 대답하는 제자처럼 생각하는 아이를 보면서 유리 베르실은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여기가 내 무덤인 것 같군. 하지만 이 아이 만큼은…….’

그러기 위해선 시엘의 몸을 좀 먹고 있는 약을 중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가문의 기공을 5성까지 익힌 시엘이 몸을 가누지 못하게 만들 정도의 강력한 약이다. 오래 살아온 유리조차도 놈들이 사용한 약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계속 기공과 마법으로 해독 시도를 하고 있었지만,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은 조금씩이지만 통하고 있다는 소리다. 제대로 집중해서, 오로지 해독에만 힘을 쏟는다면 자신이 추격자들을 막고 있을 때 시엘 혼자 도망칠 수 있을 정도로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 경우 자신은 반드시 죽는다.

그래도 둘 다 죽는 것보단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믿을 만한 후임도 생겼지.’

돌연 듯이 나타나 그녀를 연달아 경악시킨 청년을 떠올린다.

검은 옷에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청년.

등에 특이한 문양이 그려진 특이한 옷을 입은 청년은 혜성처럼 나타나 태양 같은 업적을 쌓았다.

그가 있으면 괜찮다.

유리 베르실은 그렇게 생각하고 시엘 테르시아를 바닥에 눕혔다.

“……스승님?”

“가만히 있거라.”

잠시 추격이 끊기긴 했지만, 여전히 주변에 도사리는 적들은 많다. 그런 상황에서 치료에 전념한다는 건 죽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현명한 시엘은 그 사실을 깨닫고 스승을 말리려고 했지만, 유리는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의 아혈??을 짚어서 입을 막았다.

그리고 배에 손을 올려서 해독에 모든 힘을 집중했다.

위이이이잉.

금색 빛이 넘실거렸다. 그것이 스승이 목숨을 걸고 하는 치료라는 걸 깨달은 시엘의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것을 보고 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체감상으로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지만, 실제론 그다지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았을 때 유리 베르실은 시엘 테르시아의 배에서 손을 땠다.

그와 동시에 시엘 테르시아가 상반신을 번쩍 일으켰다.

“스승님!”

“…스스로 점혈을 푼 것이냐. 훌륭하구나.”

“그런 말씀을 하실 때인가요?!”

시엘의 항의에 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미소를 보고 시엘은 다시 왈칵 눈물을 흘렸다. 유리는 그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이제 몸을 움직이는데 큰문제는 없을 거다. 하지만 싸우긴 힘들겠지. 그러니 남은 모든 힘을 도망치는 데에만 집중해라. 여기서 서쪽으로 달리다 보면 타라스트가 나온다. 거기까지만 가면 괜찮을 거다.”

“스승님도 같이 가세요!”

“그럴 수는 없다. …너도 알잖느냐?”

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엘은 그런 유리를 올려보다가, 그 뒤에 보이는 거대한 그림자들을 보고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삼켰다. 유리는 몸을 돌려서 차가운 눈으로 그 거대한 그림자들을 노려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 사이에 있는 한 여성을 노려보았다.

전체적으로 붉은색의 미녀였다.

붉은색 베레모. 허리까지 내려오는 붉은색 장발을 하나로 묶은 리본도 붉은색. 가늘게 뜨고 있는 눈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도 붉은색에 입고 있는 가죽 재킷과 가죽 바지와 가죽 신발도 붉은색이었다. 심지에 손에 쥐고 있는 채찍도 붉은색이었다. 붉은색이 아닌 건 새하얀 피부와 새하얀 셔츠 정도다.

붉은색에 대한 열렬한 집착이 느껴지는 여성.

그녀가 휘두른 채찍에 유리 베르실은 옆구리를 관통당했었다.

그리고 그녀의 좌우에 있는 거대한 그림자….

[부오오오오.]

[쿠아아아아.]

그것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기괴한 소리를 내고 3m가 넘어가는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는 거병을 들고 있는 괴물들.

왼쪽에는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달리고 소를 닮은 붉은색 피부의 인간형 몬스터.

미노타우르스.

오른쪽에는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달리고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울퉁불퉁하고 험악한 인상의 붉은색 피부를 가진 인간형 몬스터.

오우거.

각각 대부大?와 대검大?을 들고 마치 호위기사처럼 여성의 옆에 서 있는 몬스터들의 붉은색 눈동자에선 그 어떤 이성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유리 베르실은 이죽거렸다.

“어울리는 호위기사들이로군.”

“호위기사는 무슨~ 얘네들은 그냥 내 장난감이야. 뭐, 장난감들 중에선 제법 아끼는 것들이지만.”

여성의 목소리는 아름답고 고혹적이었다. 끈적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노리고 한 게 아니라 천성이다. 유리 베르실은 그녀의 두 눈에서 일렁이는 가학심을 느끼고 혀를 찼다.

“…멍청할 정도로 순차적인 전력투입은 네년의 악취미였나?”

“어머, 그건 너무한 모함이네. 유리 베르실. 단순한 취미로 귀중한 병력을 낭비할 만큼 나는 멍청하지 않아.”

그리 말하면서 여성은 빙글 웃었다.

동시에 그녀의 손이 휘둘러졌다.

쨍!

밤하늘 아래 붉은 궤적을 날리며 날아온 채찍은 유리의 검에 튕겨나갔다.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붉은 궤적을 자연스럽게 회수한 여성은 즐겁게 웃었다.

“흐음~ 아직 팔팔하네. 이 이상 병력을 보내봐야 재미 보기 힘들다고 생각해서 직접 나왔는데, 이거 꽤 오래 즐길 수 있겠는걸?”

“…역시 네년의 악취미였군.”

“아아. 글쎄 아니라니까~ 다 깊은 심모원려가 있었다고~”

태연하게 웃고 있는 그녀와는 달리 유리의 미소는 잔뜩 굳어 있었다.

검이… 검을 쥐고 있는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가볍게 내지른 일격을 막아냈을 뿐인데도 몸에 무리가 왔다. 지치지 않았다면… 부상을 입지 않았다면…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떨쳐냈다.

그래도 저 붉은색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거기에 양옆의 몬스터들까지 더해진다면?

“…시엘.”

“……스, 스승님?”

오래간만에 불린 이름에 넋이 나가있던 시엘은 정신을 차렸다. 유리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신호하면 곧바로 도망쳐라. 뒤도 돌아보지 마.”

“…그, 그럴 수는…!”

“닥쳐라.”

“………!!!”

이제껏 스승에게 들었던 적이 없는 욕설. 하지만 유리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격정적이지 않고 그렇다고 자포자기한 것도 아니다. 그저 의연하게 유리 베르실은 말을 이었다.

“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헛되이 할 생각이냐.”

“………!!!”

“이제 네 목숨은 너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라. …내 제자야.”

“…………네.”

시엘은 눈물을 삼키고 기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스승의 말대로… 그렇게나 원했음에도 불러주지 않았던 제자라 불러준 스승의 유언대로 살아남기 위해서 힘을 모았다.

그것을 보진 않았지만, 느낀 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아암~ 그래서 신파극은 이제 끝? 나 빨리 끝내고 가서 자고 싶은데.”

하품까지 하면서 그녀들의 행동을 비웃은 붉은 여성은 이내 씨익 웃으면서 채찍을 손으로 툭툭 쳤다. 그걸 보고 유리 베르실은 짐승 같은 미소를 지었다.

“천박한 년아. 그 입에 칼을 박아주마.”

“어머, 천박하다니. 어딜 봐서? 노출하나 없는 복장에 어투도 당신보단 나은데?”

여유롭게 웃으면서 여성은 채찍을 든 손목을 천천히 회전시켰다. 유리 베르실은 이를 악물고 남은 힘을 끌어 올렸다.

“천박함이란 복장이나 어투가 아니라 행태에서 드러나는 법이지.”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들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세 사람의 고개가 번개처럼 그쪽으로 향했다.

남쪽에서 한 남자가 터벅터벅 걸으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큰 키에 온통 검은색 투성이인 남자.

그 남자의 오른손에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장검이 들려 있었다.

시그는 얼빠진 얼굴의 유리를 보고 즐겁게 웃으면서 말했다.

“진짜, 어딜 그렇게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시는 건지. 찾느라 한참 걸렸잖습니까아.”

그리고 번개처럼 붉은 여성에게 달려들었다.

밤공기를 은색 섬광이 가르고, 피가 대지를 적셨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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