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에 천재가 가면-44화 (44/93)

〈 44화 〉 44화 구출 작전

* * *

“길드 마스터 유리 베르실의 전언이야.”

“……조금 전에 그대에게 전달한 거다.”

“우리도 내용은 확인 못 했어. 애초에 이 마법은 1회 용이고… 메시지로 반드시 후배님과 함께 보라고 했으니까.”

“그렇습니까. 그런데 지금 길드 마스터는….”

“그래. …외근 중이시지.”

샤리스의 중얼거림에 나는 핑크색의 유리 베르실을 봤다.

분홍색 입자가 만들어낸 그녀의 모습은 상당히 정교해서 표정까지 구현하고 있었다.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기색에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게 아니면 도시의 상황을 듣고 한숨밖에 안 나오는 거겠지.

잠시 침중해져 있었던 샤리스는 이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습격이 있을 때 우리는 시청에 있었어. 우리가 주로 하는 일이 시청에서 대기 하다가 중요한 일이 있으면 출격하는 거였는데… 놈들이 시청도 습격하는 바람에 발이 묶였었지.”

“병사급 늑대인간 여섯에 흑마법사 셋이었다. 노골적인 시간 끌기였다.”

그녀의 말을 조용히 있던 데르카가 받았다. 조금 전 같이 소심한 목소리는 아니라서 샤리스도 제지하지 않았다.

흠. 그런데 그 정도면 천공탑을 습격한 전력의 절반도 안 된다. 주공이 아니었다는 건 확실하다.

…가장 중요한 목적은 시청의 도서관이었지만, 그쪽은 거울을 쓰는 놈이 몰래 잠입했겠지. 천공탑 습격도 시청 습격도 오로지 그 한 가지 목적을 위한 연막에 불과했다.

“그래도 빠르게 처리하고 움직이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그때 이틀 전에 후배님이 잡아 온 흑마법사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왔지 뭐야. 엎친 데 덮친 격이었어.”

배신자 취급으로 암살한 건지, 아니면 실패자라서 암살한 건지. 어느 쪽이든 꼼꼼하네. 뭐, 연막역할도 있었겠지.

샤리스의 말에 이번에 데르카는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의원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이런 대담한 습격을 벌이고 감옥에 있는 아군까지 암살하는 자들이라면 당연히 그들의 목숨을 노릴 거라고 여겼지.”

“……생각 같아서는 그냥 죽으라고 두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었어. 우리 일 중 하나가 그것들을 보호하는 거였으니까. …아아! 생각만 해도 열 받네! 씨바아아아아아!!!”

분노를 참지 못한 샤리스는 양팔을 하늘로 들며 고함을 질렀다. ……감정 표현 한번 화끈하시네요. 시르도 접수원도 깜짝 놀라서 얼어붙었잖아. 반면에 데르카는 더욱 침울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시청에서 그들을 지키느라 도시를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마음이 아팠다.”

조금 전까지라면 그런 태도에 열 받았을 샤리스는 그것보다 더 열 받는 대상들 때문에 이를 갈며 말했다.

“아예 이쪽도 공격이 없었으면 모르겠는데, 웬 고위 마법사 한 새끼가 와서 그것들을 노리는 바람에 더더욱 빠져나올 수 없었어! 망할 거울 새끼! 그런 실력으로 왜 이딴 짓을 하고 다니는 거지?!”

거울 놈. 한 번 찌르러 가보긴 했구나?

두 사람의 발을 확실하게 묶기 위해서였겠지. 꼼꼼하고 철저하다. 역시 상대하기 힘든 녀석들이야. 하지만 인력 부족이 눈에 띄는군. 한 놈이 대체 몇 가지 일하는 거냐.

“그래도 후배님이 토론토라의 재앙을 잡고 북문 위병장을 통해 전달해준 말 덕분에 의원들도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어. 그 순하기만 한 줄 알았던 시장님이 그렇게 열성적으로 행동할 줄은 몰랐다니까. 뭐,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겠지. 맨날 반대만 하는 다른 의원들 콧대를 눌렀으니. …속 시원했지!!”

“덕분에 우리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마스터에게 상황을 전달한 것도 그쯤이었다.”

“…그런 일들이 있었군요.”

타임라인이 현재로 왔군. 그나저나 갑자기 열성적으로 변한 시장님이라니. 시청에서도 한바탕 난리가 있었나 보네.

이 도시는 꽤 오랫동안 평화로웠던 것 같고. 놈들의 무력도 행동력도 보통이 아니었으니까.

대가리들이 제대로 대응 못 한 걸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정신을 차렸다고 하니, 정상참작은 가능할까.

나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두 분 다 고생이 많으셨군요. 하지만 자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두 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신 거잖아요?”

“팔까지 부러지면서 싸운 후배님이 그렇게 말하니 더 부끄러워지는데. ……그거, 자주랑이랑 싸워서 그런 거라며?”

그때 샤리스는 이제까지 일부러 시선을 피하고 있던 내 오른팔을 보고 있었다. 당연히 여전히 내 팔을 치료하는 시르에게도 시선이 향했다. 조금 전부터 일부러 시르를 무시하던 샤리스는 그런 시르를 보고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결국 눈을 감고 말을 삼켰다.

파고들까? 싶었지만, 핑크색으로 만들어진 유리의 환영을 저대로 두는 것도 뭣하다. 일단, 저들과 시르에게 얽힌 사연은 나중에 듣자. 시르도 지금 말하고 싶은 분위기는 아니고. 나는 연인이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을 굳이 파해 칠 정도로 배려심이 없는 남자가 아니니까. 스윗하지.

“천공탑에 쳐들어왔었죠. 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큰 부상은 아니라서.”

“……자주랑을 큰 부상 없이 패퇴시켰다는 건가. 토론토라의 재앙을 순식간에 잡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믿기 어려웠는데…….”

데르카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뭐, 믿지 못할 수도 있지. 겉보기만 보면 나는 20대 초반으로 봐도 무리 없다.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재앙도 잡고 특급 범죄자도 패퇴시켰다면 믿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

거기다가 나는 신분이 확실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샤리스는 데르카의 반응이 못마땅한지 혀를 찼다.

“또 이러네. 소심한 게 은근히 자존심은 강해선. 그냥 후배님이 겁나 강한 거야. 세상에 천재들이 얼마나 많은데? 너나 나나 우물 안 개구리나 다름없다고.”

“……그렇군. 세계가 넓다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그녀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데르카는 눈에 의혹을 지웠다. …단순하네. 주변 사람들 만에 너무 쉽게 영향을 받는 거 아니야? 아니면 상대가 샤리스라서 그런 거야? 두 사람의 관계가 흥미롭긴 했지만, 지금은 유리의 전언이 더 중요하다.

“그럼 이제 길드 마스터의 전언을 들어도 될까요?”

“아! 그래. 그래야지. 흠흠. 미안. 사담이 길었어.”

샤리스는 조금 얼굴을 붉히며 사과하고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팡이에 달린 수정구에 분홍색 빛이 점차 강해지더니, 유리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변했다.

이윽고 환영의 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말이 조금 끊겼지만, 얼마 안 가서 그런 것도 없어졌다.

[얘기는… 들었다. 정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군. …그래도 나는 모두가 힘을 합치면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샤리스. 데르카. 두 사람은 시그와 시르를 전적으로 믿고 도와주기를 바란다. 너희라면 후배를 돕는 것에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을 거라 믿고 있다.]

“………마스터.”

신뢰가 뚝뚝 묻어나오는 말에 데르카의 눈가가 반짝였다.

…아니, 이 아저씨는 감수성이 왜 이리 풍부한 거야? 샤리스도 기가 막힌 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그녀도 기뻤는지 입가가 조금 꿈틀거리고 있었다.

유리는 꽤 사랑받는 길드 마스터라구만. 접수원도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리를 좋아하는 것 같았고.

다만, 예전부터 아는 사이여서 당연히 사이가 좋다고 생각했던 시르는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말없이 유리의 전언을 듣고 있는 시르의 표정은 지나치게 무표정했다. …대체 무슨 사정이람. 지난번에는 꽤 살가워 보였는데.

[그리고 시그…. 그대에겐 정말 고개를 들 수가 없군. 도시를 지켜줘서 정말로 고맙다. 돌아간다면 합당한 사례를 하지. 그대는 우리들의 자랑이자 영웅이다.]

유리의 환영은 그리 말하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 광경에 나를 제외한 네 사람은 숨을 삼켰다. 지구나 여기나 고개를 깊게 숙이는 건 굉장히 공손한 태도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감사 인사를 받았다.

겸양할 이유가 없는 인사였다.

보상을 목적으로 싸운 건 아니지만, 보상이 없었다면 상당히 실망했을 거다. 타인을 도울 때 보상을 바라고 돕지는 않지만, 후안무치한 사람은 두 번 다시 도와주지 않는다. 아예 인간관계를 끊어 버린다. 그러면 100% 그 사람의 손해다. 반드시 손해 보게 했다. 나는 악인보다 선행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인간을 더더욱 혐오한다.

[적들의 강함은 들었다. 아무리 그대라 하더라도 아무런 부상 없이 물리치긴 힘들었겠지. 그러니 그대에게 이 이상 무리한 부탁은 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대로 계속 휴식을 취해 줬으면 좋겠다.]

역시 배려심이 있군. 하지만 이런 전언을 남겼다는 것 자체가 말은 이렇게 해도 내게 바라는 게 있다는 소리다.

물론, 나쁜 의도는 아니다. 만약 내가 그녀의 바람을 들어 주지 않더라도 그녀는 나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내게 선택의 기회를 주고 어떤 선택을 하든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을 뿐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을 아주 좋아한다. …당연히 연애 감정은 아니다.

그래서 이 뒤에 나온 그녀의 말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도시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쪽은 그대들에게 맡기겠다. 나는 지금부터 테르시아 영애 구출 작전을 시작하겠다. 만약 내가 6시간 이내로 연락하지 않는다면 사망했거나, 그에 필적하는 상태로 여기고 샤리스를 임시 길드 마스터로 임명. 상부에 현지의 상황을 전달하고 지원군이 올 때까지 도시를 지킬 것을 명령한다. 데르카는 샤리스를 보조해서 모험가의 기치를 지켜라. ……시그와 시르도 샤리스에게 도움을 줬으면 좋겠군. 강요는 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이미 나와 타라스트는 그대들에게 많은 은혜를 받았다. …이건 부탁이다. 이상이다.]

그건 유언이었다.

……………………

………………

…………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정도로 유리가 남긴 말은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어왔다. 슬쩍 고개를 돌려서 시르를 보니 그 어떤 때보다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사이가 나쁜 건 아닌가 보네. 뭔가 말 못 할 복잡한 사정이 있는 건가? 그래도 유리를 걱정하는 걸 보면 크게 걱정할 것 없는 문제다.

다시 고개를 돌려서 정면의 두 사람을 봤다.

“……우, 우우. 마스터…….”

데르카는 아예 울고 있었다.

아니, 씨발. 다 큰 남자가 이런 말 좀 들었다고 울면 어떻게?

“…………….”

샤리스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날카로워진 눈빛과 은근히 들리는 어금니 갈리는 소리는 그녀가 느끼고 있는 격정을 알려 주었다. 그래도 데르카보다는 어른스럽네. 괜히 임시 길드 마스터를 맡긴 게 아닌가.

“…으으윽.”

접수원조차도 흐느낌을 간신히 삼키고 있었다.

…음. 확실히 유리가 사랑받긴 사랑받았구나? 아니면 이 사람들의 감수성이 특별하든지. 뭐, 어느 쪽이든 내가 해야 할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샤리스 님.”

“……어, 응. 후배님.”

얼빠진 샤리스의 대답에 나는 곧바로 본론을 얘기했다.

“벌써 우울해하기엔 아직 많이 이르지 않습니까?”

“……그렇지.”

내 단호한 말에 데르카와 접수원이 움찔했다. 샤리스의 눈에도 어느 정도 힘이 돌아왔다. 그래도 대화할 자세는 빠르게 갖춰지는군.

“여섯 시각은 길면서도 짧은 시간이죠. 길드 마스터 혼자 남쪽으로 갔을 리는 없으니, 그쪽에도 모험가가 있을 거 아닙니까? 일단, 그쪽 상황을 정확히 하는 게 우선인데. 혹시 아시는 거 있습니까?”

“…쿠르시카 도적단은 평범한 도적단이 아니었어. 놈들의 뒤에는 ‘악신의 추종자’와 ‘잊힌 신들의 추종자’들이 있었지.”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라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접수원은 안색이 조금 창백해졌다. 음. 도적단에 토벌대가 전멸당한 것은 알아도 그 뒤에 있는 것들이 뭔지는 정확히 몰랐나 보지?

“네. 그래서 토벌대가 전멸당하고 거기에 참가하고 있던 남쪽 영지의 영애도 인질로 잡혔다고 들었습니다.”

“…마스터는 후배님을 굉장히 신뢰하고 있네. 웬만한 사정은 다 알고 있다고 가정하고 얘기할게. 맞아. 남쪽 테르시아 영지의 영애 님이 인질로 잡혔어. …병사 200, 기사 10명의 대규모 토벌대를 전멸시킨 도적단에 말이야.”

“토벌대의 규모나 도적단의 규모는 들은 게 없습니다. 인질이 어떤 사람인지도.”

“토벌대의 규모는 조금 전에 말한 데로. 우리 도시에선 후방지원으로 강철 모험가 다섯에 순은 모험가 한 명을 보냈어. 주력은 테르시아 영지의 병력이었지. 그리고 테르시아 영애는 마법과 기공을 전부 5단계로 익힌 실력자. 어지간한 기사들보다 훨씬 강하고, 정의롭고 백성들을 아끼는 동화책에서 나올 법한 영애지. 그래서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인기가 많아. ……도적들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다면 그것만으로도 테르시아 영지가 흔들릴 정도로 말이지.”

“토벌대가 전멸한 시점에서 큰일 난 거 아닌가요?”

“영지의 전력 20%가 사라졌으니 엄청나게 큰일이긴 하지. 다행히 인근 영지들과의 관계가 우호적이고 테르시아 영애가 근처에서 큰언니로 통할 정도로 명망이 높아서 그것만으론 엄청난 위기는 아니야. 그 테르시아 영애의 몸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야말로 큰 위기가 오겠지.”

“아가씨 한 명이 가지는 영향력이 엄청나군요. 괜히 인근 영지의 길드 마스터를 급히 부른 게 아니예요.”

“……사실, 마스터도 테르시아 영애를 상당히 아꼈거든. 거의 준제자 취급이었어.”

어이쿠. 공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사적인 문제도 있었나?

테르시아 영애는 이 근처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 냉정한 유리가 사감만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구출할 필요가 있는 인재인 건 맞다.

도적놈들도 그 사실을 아니, 죽이지 않고 생포한 거겠지. 구하러 오는 사람을 노리고 함정을 파놓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일 테고. 이 경우 유리까지 인질로 잡히면 놈들이 테르시아 영지와 이 도시에 어떤 요구를 할지 궁금할 정도였다.

……흠. 어쩌면 나를 요구할지도 모르겠어.

그렇다면 역시 개인적인 감정으로나 실리적으로나 유리 베르실을 이대로 둘 수는 없다.

“반드시 구출해야겠네요. 길드 마스터가 비장한 각오로 작전에 임하는 것도 이해가 가요. 자아. 그럼 길드 마스터의 연락이 다시 올 때까지 제각각 할 수 있는 일을 하죠.”

“……할 수 있는 일? 뭘 말하는 거야?”

샤리스의 반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걸 저에게 물으시면 어떡합니까? 샤리스 님도, 데르카 님도 지금 해야 하는 일이 산더미처럼 있지 않나요? 비단, 시청과의 일만이 아니라 길드 내부에서 해야 하는 일이 잔뜩 있을 겁니다. 대표적으로 모험가들을 본격적으로 지휘하는 일이 있겠네요. 모험가가 군인은 아니라지만 이런 일에는 최고 등급 모험가이자 길드 마스터 대행을 맡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현장의 혼란도 줄고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겠죠. 안 그렇습니까?”

“……그렇지.”

청산유수처럼 쏟아 낸 말에 샤리스는 이제야 제대로 정신을 차렸는지 진지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데르카도 울적함을 떨쳐 내고 사명감에 불타는 얼굴이 되었다. …이 양반은 덩치와 안 어울리게 감정변화가 극적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이곳에서 우울하게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죠. 그래야 나중에 길드 마스터가 돌아왔을 때 떳떳하게 맞이할 수 있겠죠?”

“…후. 그러게. 이거참. 부끄럽네. 설마, 후배님에게 이렇게 혼날 줄이야.”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샤리스는 이내 강인한 눈으로 말했다.

“그래. 이렇게 있을 수는 없지. 후배님 말처럼 해야 할 일이 산더미야. 야! 데르카! 언제까지 궁상거리고 있을 거야? 까마득한 후배님이 이런 말을 하는데 가만히 있을 거냐!”

“…물론, 아니다. 음.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후배님.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마스터는 반드시 돌아온다.”

데르카는 그리 말하고선 강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닌가 보군. 뭐, 거기까진 내가 캐어해 줄 부분이 아니다.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나 해야지.

“네. 돌아올 겁니다. 아. 그런데 혹시 밥을 막고 잘 수 있는 곳이 있나요?”

“그건 왜?”

의욕에 불타던 샤리스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아니, 척하면 척 아닌가? 나는 여전히 한마디도 안 하던 시르를 봤다. 시르도 의아한 얼굴로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 시선을 보고는 뒤늦게 떠오른 게 있었는지 탄성을 터트렸다.

“아리야 님에게 하셨던 부탁이….”

“맞아. …힘을 너무 많이 써서 에너지 보급을 안 하면 조금 위험해. 잠도 좀 자야 하고. 그래서 식사할 장소와 잠을 잘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해요. 부상자들이 잔뜩 있는 곳에서 밥을 먹고 잘 수는 없겠죠?”

시르가 목소리를 내자 두 사람의 시선은 잠시 그쪽으로 향했다가 쏜살같이 다시 내게 향했다. …하아. 이건 나중에 물어보자. 나중에. 지금은 빨리 밥 먹고 자고 싶다.

샤리스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과 침대가 같이 있는 방이라면 2층에 두 곳 있어. 나와 데르카는 길드에서 잠을 자는 경우가 많아서 아예 방을 따로 만들었거든. 데르카의 방은 지저분하고 냄새가 날 테니, 내 방을 쓰면 돼. 히리에. 후배님에게 내 방까지 안내해 줘.”

“…아, 알겠습니다.”

“…내 방은 지저분하지도 냄새가 나지도 않다.”

데르카가 조용히 항의했지만 샤리스는 무시했다.

그나저나 자기 방을 내주다니. 씀씀이가 크그만. 그런데 여자 방에서 자도 되나? …본인이 신경 쓰지 않으니, 주는 대로 받지 뭐.

“그럼 잘 쓰겠습니다. 아. 시르도 함께 써도 되죠?”

“시, 시그 님?!”

시르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외쳤다. 아니, 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의아한 생각에 두 사람을 보니 그들도 입을 쩍 벌리고 놀라고 있었다. 조금 싸해서 접수원을 보니 경멸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 이런. 오해를 샀구만.

나는 진심으로 당황해서 양손을 마구 흔들면서 말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시르도 피곤할 테니, 같이 쉬어도 되냐는 소리지! 대체 다들 무슨 생각하는 거얏?!”

“…아, 그, 그런 뜻이셨습니까? 저, 저는 괜찮습니다.”

자신이 한 오해가 진심으로 부끄러웠는지 시르는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그래도 귀엽게 사과하는 모습을 보니 화가 사르륵 녹아버렸다. 후. 이 아리따운 아가씨를 어찌하면 좋을꼬.

가당치 않은 오해했던 두 사람도 헛기침을 내뱉었고 접수원은 미안해하는 눈빛을 보냈다.

“흠흠! 아, 뭐. 그거라면 얼마든지. 내 방은 넓어서 …두 사람이 사용해도 충분하니까. ……그래도 너무 어지럽히진 말아줘. 그런 걸 청소하는 것도 고역이니….”

“아니,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하하. 농담이야. 농담.”

젠장. 놀림거리가 되니 기분이 아주 좋군! …후. 뭐, 좋아. 이 정도로 분위기 회복이 된다면 나쁘지 않다.

그때 아래층에서 약간 소란이 일어나는 게 들렸다. 소란의 규모, 그리고 작게나마 들리는 날갯소리에 누가 일으킨 건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두 사람도 같은걸 느꼈는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음식을 시킨 게 왔나 보네요. 그럼 저는 이만 밥 좀 먹으러 가겠습니다.”

“아, 그래. 급하게 먹지 말고, 천천히 먹어. …정말, 오늘 하루 고생이 많았어. 네 덕분에 수많은 사람이 살 수 있었어. 후배님.”

“음. 그대의 활약 덕분에 이 도시는 무사할 수 있었다. 후배님. 뒷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부디 편히 쉬시게.”

두 사람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모습을 보니 자는 동안 큰 문제는 없겠지.

시청에서 나를 찾아도 알아서 차단해 줄 테고.

정치인들은 본인들의 명성을 위해서라면 영웅을 귀찮게 하는 거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족속들이니까. 천인들은 내게 받은 은혜가 있으니, 지구의 기레기들처럼 행동하진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만약을 생각해야지.

그래도 쉬러 가기 전에 이 말은 해야지

“네. 고마워요. 그럼 저는 앞으로 다섯 시간을 쉬다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길드 마스터에게 연락이 오지 않으면 남쪽에 좀 갔다 와야 할 테니 혹여라도 약속 같은 건 잡지 말아 주세요.”

“……뭐?”

“……지금 무슨.”

“…시그 님.”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두 사람과는 다르게 시르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는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시르. 이건 어디까지나 실리적인 이유지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 하지만 시르에게 이런 시선을 받는 것도 즐거웠기에 나는 웃으면서 일어났다.

시르도 그런 나를 따라서 일어났고, 우리는 잠시 말을 잃은 두 사람의 시선을 받으면서 태연하게 길드 마스터의 방을 나왔다. 물론, 나오기 전에 방을 안내해 줘야 하는 접수원도 같이 끌고 나왔다.

뒤이어서 두 사람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릇이 다른 데.”

“이게 영웅인가….”

야잇. 싯팔. 손발이 다 오그라드네.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자 시르가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시르도 조금 전 말을 들었을 텐데… 아무런 반응이 없군. 아니, 오히려 뿌듯해하는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우리 시르가 기분이 좋다면 그걸로 됐어.

그렇게 자포자기하면서 복도 저편으로 외쳤다.

“아리야! 2층으로 올라와!”

“……네, 네에엣!!”

기운찬 대답과 함께 아리야가 순식간에 계단을 지나 2층으로 올라왔다. 그녀는 커다란 상자를 양손에 들고 있었는데, 멀리서도 요리 냄새가 물씬 느껴졌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난리 통이라 좀 더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했는데.

“오. 수고했어. 거스름돈이 남았다면 수고비로 줄게. 아니, 진짜 고생했어. 잘도 이만큼 모아왔네.”

“헤헤헷. 노력했죠. 다행히 근처에 장사하는 음식점이 조금 있더라고요. 한곳에서만 사면 양이 부족할 거 같아서 여러 군데에서 사 왔습니다!!!”

힘차게 말하며 아리야는 요리가 가득 담긴 상자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힘이 장사구만.

“다들 대범하구나. 덕분에 밥을 먹을 수 있으니 다행이지만. 자, 그럼 밥 좀 먹자. 샤리스 님의 방은 어디예요?”

“……이쪽이예요. 그런데 저거 다 드실 수 있겠어요? 시르 님도 같이 먹어도 너무 많은데.”

내가 끌고 나온 뒤부터 조용히 있던 접수원은 상자를 보고 질린 표정이 되었다. 시르도 조금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말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과식은….”

“괜찮아. 괜찮아. 저 정도는 가뿐하다고. 뭐, 남으면 먹고 싶은 사람들에게 좀 나눠 주지. 자. 다 같이 들어가서 먹읍시다. 밥도 먹으면서 살아야지.”

접수원을 재촉해서 샤리스의 방으로 향했다. 복도 끝 부분에 있는 샤리스의 방은 길드 마스터의 방보다 약간 작았지만, 그녀의 말처럼 널따란 침대와 테이블이 있었다. 그 외에는 별다른 장식도 없는 깨끗한 방이었다. 삭막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네. 뭐, 업무용 방이니 그리 꾸밀 필요는 없겠지.

테이블에 요리들을 주르륵 배치하니 고기 냄새가 진동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곧바로 포크와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썰면서 식사를 시작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자, 잘 먹을게요.”

“잘 먹겠습니다!!!”

와구와구우걱우걱와작와작

“……………….”

“……………….”

“……………….”

식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은 입을 반쯤 벌리고 나를 봤다. 나는 그야말로 흡입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속도로 고기를 해치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기본적인 예절을 잊지 않는 것은 다년의 노력으로 쌓아 올린 기술이었다.

음. 그래도 너무 빨리 먹으니 조금 예의가 없긴 하네. 하지만 신간은 금이라고. 후딱 먹고 자야지 나중에 문제가 없다.

다행히 세 사람은 빠르게 줄어드는 음식을 보고 위기감을 느꼈는지 식사를 재개했다. 나보다야 훨씬 느렸지만, 그녀들이 먹는 속도도 느리지는 않았다. 다들 배고팠구나.

산더미처럼 많던 요리를 전부 해치우는 데 30분이면 충분했다.

식사를 마치고 식기를 치우면서 아리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와. 이게 되는군요? 시그 님의 위장엔 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걸까요?”

“남들보다 소화흡수기능이 뛰어날 뿐이야. 아. 잘 먹었다.”

“후후후. 시그 님의 식사 장면은 보고 있기만 해도 배가 부를 정도입니다.”

“시르가 그렇게 말해주니 앞으로도 잘 먹어야겠네.”

“저도 잘 먹었어요. 감사해요. 시그 님.”

“해가 진 뒤에도 일해야 될 테니, 미리 많이 먹어둬야지.”

“……정말 고마운 배려네요.”

정리를 끝내고 아리야와 접수원은 눈치껏 물러났다.

아리야에게는 이제 돌아가서 쉬어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당분간은 길드에 머물면서 일을 도와주겠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나중에 내가 일어난 뒤에도 시킬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시키라고 의욕 있게 말하는 모습을 보고 어떤 꿍꿍이인지 짐작이 갔지만 딱히 손해는 없어서 그러라고 했다.

접수원은… 딱히 의로도 필요 없었다. 길드 마스터인 유리에게 신임받고 샤리스와 데르카도 접수원을 높게 평가하고 있으니 한동안은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빠질 거다.

뭐, 좋게 생각해. 그렇게나 원하던 출세하게 된 거잖아? 나를 픽업한 이후엔 당연히 예정된 결과였지.

네가 선택한 출셋길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터랴.

그렇게 남은 것은 시르 뿐이었다.

시르는 침대에 앉아서 잠잘 준비를 하는 나를 보며 고민하고 있었다. 무슨 고민인지 짐작이 갔지만, 그녀가 스스로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시르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

“시그 님. …저는 좀 더 다른 분들을 도와주고자 합니다.”

“응. 너무 무리하지는 마.”

그녀의 각오가 무색하게 나는 웃으면서 태연하게 대답했다. 시르가 눈을 조금 크게 뜨자 나는 피식 웃었다.

“왜 그렇게 놀라? 설마, 내가 나 좋자고 시르의 행동을 제한할 거로 생각했어? 그럴 리가 없잖아. 뭐, 그야 시르를 껴안고 자면 기분이야 좋겠지만, 결과적으로 누구에게도 좋은 일이 되지 못하겠지.”

“…시그 님.”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해. 말했지? 각자 할 수 있는 일하면 된다고.”

나는 겉옷을 벋고 내의만 입은 채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나는 지금은 쉬는 게 해야 할 일이고, 샤리스와 데르카는 뒤처리가 해야 할 일이지. 아리야는 업무보조와 대기, 접수원은 밀린 업무 처리. 그럼 시르는? 하고 싶은 일하면 돼.”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시그 님.”

시르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문을 열고 조용히 나갔다. 그걸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아직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오밤중에 일어난 뒤에도 해야 할 일이 많다. 새벽까지 잠도 못 자고 열심히 달리고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딱히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그래. 이게 이세계지. 이세계 소환이지.

……그래도 6일 만에 이러는 건 너무 심하지 않아?

잠에 빠르게 빠지는 건 훌륭한 소양이다. 나는 그 소양을 한껏 발휘해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정확히 5시간 후 눈을 떴다.

아직 연락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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