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37화 늑대와 춤을
* * *
내 분위기 변화를 감지한 걸까?
[…크르르르르.]
놈이 낮은 울음을 내며 몸을 낮췄다. 조금 전의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날뛰던 거친 광기가 날카롭게 벼려진다. 본능이 광기를 억누르고 야성이 몸을 움직인다. 피를 흘리는 눈과 광기로 번뜩이는 눈이 강적을 노려봤다.
병사들과는 달리 나는 본능레벨로 경계할 존재라는 거냐? 조종당하는 와중에도 그런 걸 느낄 수 있다니. 이성만 날아가지 않았어도 훨씬 상대하기 힘들 강적이었겠지.
지금은 아니야.
한발자국 내걷는다.
번개처럼 휘둘러진 발톱이 내 머리 위의 공간을 갈랐다.
공격이 오는 타이밍에 맞춰서 숙였던 몸을 폭발적인 다리 힘으로 전진시킨다. 낮은 자세로 날아오듯이 접근하는 나를 보는 놈의 하나뿐인 눈동자가 위험한 빛을 뿜었다.
놈이 거대한 입이 벌려지고 흉악한 이빨이 번뜩인다.
거대한 턱이 내 몸을 물어뜯기 위해 쏘아진다. 본능적이고 합당한 대응이다. 내가 그 공격을 예상하고 있지 않았었다면.
왼발로 땅을 밟는다.
콰직! 돌바닥이 박살 나면서 발이 깊게 박혔다. 그와 동시에 오른발에 모든 운동에너지를 모아 힘껏 올려 찼다. 마치 스스로 원하듯이 놈의 아래턱이 발끝에 날아온다. 예상대로의 움직임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건괘?? 승천??
쾅!
[…………?!?!?!!!!]
턱뼈에 금을 내면서 시원스럽게 올라간 아래턱이 위턱과 충돌한다. 본래 의도와는 달리 공기와 자신의 혓바닥만을 씹은 놈의 입에서 피가 폭발하듯이 터졌다. 날카로운 이빨끼리의 충돌로 몇 개가 깨어지고 파편이 입을 엉망으로 만든다. 몇 개는 턱을 깊숙이 관통했을 정도였다.
놈의 거채가 뒤로 젖혀지면서 가슴팍이 훤히 드러났다. 지난번에는 맨몸으로 날린 일격에 갈비뼈를 조금 부셨을 뿐이었지. 태을천강 전투복의 성능을 100% 끌어낸 지금의 일격이라면 어떻게 될까?
올려 찼던 오른발로 대지를 밟는다. 곧바로 남아있는 운동에너지를 온존하며 왼발을 앞으로 내디딘다. 그렇게 이어진 운동에너지를 뒤로 잡아당긴 오른손에 집중했다. 그리고 일격.
번개가 친다.
진괘?? 뇌격?
콰앙!
콰직!
[…크에에에에에에엑!!!!!!]
지난번과는 느낌이 다르다. 반응이 다르다. 일격에 충돌지점의 갈비뼈가 산산이 박살이 난다. 충격은 피부를 지나 뼈를 지나 내부의 장기를 관통하고 몸 반대쪽까지 전해졌다.
놈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뒷다리가 돌바닥을 긁으면서 쭈욱 밀려난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추격한다. 공격의 반동을 억지로 무시하고 발을 내딛고 땅을 박차고 놈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놈이 짐승 특유의 생명력을 발휘했다. 달려드는 나를 내려보는 붉은색 눈이 번뜩인다. 억제로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발톱을 휘두른다. 훤히 드러났던 가슴팍이 가려지면서 절호의 기회가 사라졌다. 하지만 아쉽지는 않다.
빨리 끝낼 수 없다면, 철저하게 파괴하면 그만이니까.
내려치는 발톱을 향해 오히려 돌진한다. 놈의 발톱이 나에게 도달하기 전에 놈의 앞발 아래에 도달한다. 몸을 스프링처럼 바닥까지 숙이고 단숨에 뛰어오르며 놈의 관절을 후려쳤다.
곤괘?? 지룡??
쾅!
제대로 카운터를 얻어맞은 앞발이 위로 날아간다. 그 충격에 놈의 몸이 다시 한번 뒤로 젖혀진다. 하지만 품 안으로 파고들기엔 지나치게 낮았다.
아쉬운 대로 다른 곳을 박살 내기로 했다. 몸을 옆으로 회전시키면서 단숨에 옆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회전력을 온전히 실은 발차기를 옆구리에 꽂아 넣었다.
손괘?? 구풍?風
뿌드득!
[……………!!!!!!!!!!!!!!!]
또다시 갈비뼈가 박살 나면서 발끝이 깊숙이 박혔다. 폐부를 제대로 찔렸는지 놈은 소리가 되지 못한 피비린내 나는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그래도 거대한 짐승의 생명력은 일반적인 생물을 아득히 초월했다.
발악하듯이 몸부림 치면서 놈이 마구잡이로 발톱을 휘두른다. 형편없는 움직임이지만, 놈의 공격력을 생각하면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발악. 불규칙한 발버둥 사이로 파고들기보단 살짝 물러나서 놈을 살폈다.
마구잡이로 바닥을 긁으면서 날뛰던 녀석은 힘겹게 뒷다리를 일으키고는 그대로 땅을 박찼다.
향하는 곳은 내가 아니다.
자신이 부수고 들어온 성문.
예상했다. 이 새끼야.
심하게 두들겨 맞은 끝에 걸려 있던 마법이 풀리기라도 했는지, 놈의 하나뿐인 눈동자엔 이성의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잔뜩 겁에 질린 눈동자.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눈동자.
놈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바로 전해졌다.
놈의 행동을 예측했기에, 놈이 달리는 순간 그 앞을 가로막은 나는 냉담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이야 조종당했든 뭐든, 원래부터 사람들을 장난삼아 죽이고 다니는 개새끼다. 동정심 같은 건 나유타 분의 1조차 들지 않았다.
피치 못한 사정으로 사람을 해치는 짐승도 살처분이 답인데, 살육을 즐기는 짐승이라니.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악이다.
[크엑! 케엑! 캬악!]
피 섞인 거친 호흡이 가까워진다. 놈은 내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지 무작정 달려오고 있었다. 다리의 근육이 부푼 모습을 보니 나를 뛰어넘어서 도망칠 생각으로 보였다.
그래. 어디 해봐라.
예상대로 놈은 내 앞에서 하늘로 뛰어올랐다. 여전히 상당한 힘이 남아있는지 놀라운 도약력이었다. 거의 3m 가까이 뛰어오른 녀석은 그대로 20m 가까이 날았다.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도약력을 가지고 있어도, 성치 않은 몸으로 점프해서 나는 것이 달리는 것보다 빠를 리가 없다. 하물며 상대가 이미 그 행동을 예상했다면, 헛된 발악에 불과하다.
놈이 점프하는 순간 몸을 돌려서 달린 나는 순식간에 놈을 따라잡았다. 그리고 놈이 착지할 지점을 예상하고,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회전.
돌개바람처럼 회전하면서 날아오른 나와 점차 바닥으로 떨어지는 놈이 가까워진다. 착지 지점을 예상하고, 최대 위력의 공격을 날릴 수 있는 거리를 노린 내 계산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놈의 부드러운 배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도망치는데 정신이 팔린 놈은 몸 아래로 파고든 사신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멍청한 놈에게 이제까지의 회전으로 모은 운동에너지를 발끝에 담아서 놈의 배에 선물했다.
건괘?? 용오름
쿵!
[………켁!]
묵직한 충격이 전달된다. 그와 동시에 놈의 몸이 크게 출렁인다. 용오름은 단순한 타격이 아니다. 놈의 몸 내부를 완전히 파괴하기 위한 일격. 지금 일격으로 장기의 90%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놈의 몸이 발끝에서 떨어진다. 날아가던 것보다 더 멀리 날아간 놈은 기어코 성벽까지 날아가 머리부터 추락했다.
휘이이잉! 쾅! 쿵!
성벽이 빨갛게 칠해진다. 붉은색 물감이 뿌려진 것처럼 흘러내린 끝에는 작게 꿈틀거리는 거대한 늑대만이 있었다. 놈은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움찔거렸지만, 박살 날대로 박살 난 몸이 마음대로 움직일 리가 없다.
아무리 강대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다가왔다.
그래. 네놈이 이제까지 죽인 사람들처럼 말이야.
터벅터벅 걸어서 놈의 머리로 다가간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망가지지 않은 눈이 위로 향하게끔 쓰러진 놈의 눈동자에는 생명의 빛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눈 안에 나를 담는다. 그러자 놈의 몸이 경련했다.
아는 구나? 내가 누구인지. 너를 죽인 게 누구인지.
그렇게 공포에 떨면서 죽어라. 개새끼야.
일부러 마무리를 날리지 않고 가만히 놈을 지켜본다. 마지막까지 공포에 떨던 놈의 눈에서 점차 생기가 사라진다. 몸의 경련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생명 활동이 정지했다. 눈에서 생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남은 건 무기질적인 유기체뿐.
단순한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짐승을 가만히 내려본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이 정도로 강한 몬스터의 정신을 나가버리게 만드는 놈들. 그리고 굳이 이놈을 폭주시켜서 이 도시를 습격하게 만들어야 했던 이유. 마지막으로 이쪽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 수상한 기운을 품고 있는 씹새끼.
나는 그쪽에 눈길조차 주지 않다가, 숨어 있던 주민들이 슬슬 밖으로 나오고 상황을 파악한 위병들이 이쪽으로 다가오면서 어수선해졌을 때 움직였다.
팟!
“컥!”
아직 100% 가동하고 있는 전투복의 성능으로 단숨에 나무 뒤에서 이쪽을 살펴보던 중년남성을 제압한다. 놈은 설마 내가 단번에 자신을 제압하러 올 줄 몰랐는지 경악으로 두 눈을 크게 떴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지 입을 벙긋거렸지만, 나는 이놈과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가차 없이 목을 조여서 기절시켰다. 그리고 목덜미를 잡고 병사들이 모이고 있는 성문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갑자기 사라지더니 웬 시민 하나를 제압해서 데리고 오는 나를 보고 당황하고 있었다.
나는 별말 없이 놈의 품에서 느껴지던 수상한 기운이 담긴 물건을 꺼냈다. 그건 검은색 엑스자가 그려진 엠블럼이었다. 내가 조금 전부터 느꼈던 이상한 기운은 거기서 나오고 있었다. 엊그제에 박살낸 흑마법사와 같은 기운이.
나는 병사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그 엠블럼을 내밀었다. 중년 병사는 내 행동에 어찌 모르다가 그 엠블럼을 보고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그건! 악신의 문양!”
“뭐?! 그, 그런!”
“위병장님! 진짜입니까?!”
예상이 맞았군. 나는 기절시킨 악신의 추종자를 병사들에게 내밀었다. 위병장은 멍청하게 서 있다가 내가 인상을 쓰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악신의 추종자를 붙잡고 포박하기 시작했다.
“밧줄! 밧줄 가져와! 마력봉인구도!”
“아, 알겠습니다!”
“오. 신이시여. 재앙에 이어 악신의 추종자라니…!”
일심 분란하게 움직이는 병사와 절망해서 기도하는 병사들이 어울려 혼잡해져 있는 와중에 나는 악신의 문양이 담긴 엠블럼을 유심히 살폈다.
…여기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기운을 내가 느낄 수 있다는 건 꽤 이상한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외계인으로 아직 이 세계에 존재하는 기나 마력, 성력 등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리가 꽤 떨어졌는데도 이 기운을 느끼다니…. 이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어쩌면 지금 태을천강 전투복의 힘을 끌어내서 감각이 예민해져서 가능한 건지도 몰랐다. 뭐, 그건 차차 확인해보지. 지금 중요한 건… 놈들의 목적을 파악하는 거다.
그때 성문으로 누군가가 달려왔다. 자신보다 덩치가 큰 여성을 업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여성은 지금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시그 님!”
“미안해. 시르. 이번에도 멋대로 행동했네.”
시르는 등에 업고 있던 소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내게 달려왔다.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시르를 반길 수밖에 없었다.
벌써 두 번이다. 같이 활동하기로 했는데, 조금 전의 늑대인간에 토론토라의 재앙까지. 나는 단독으로 행동했다. 그건 이편이 효율적인 것도 있지만, 시르가 다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건 오만한 생각이다.
시르는 내게 보호를 받아야 할 정도로 약한 사람이 아니다. 보호해달라고 말 한 적도 없다.
나는 자존심을 상당히 높은 가치로 평가하기에 상대의 자존심을 뭉개는 행동은 적이 아닌 이상에야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벌써 두 번이나 그녀의 자존심을 뭉개는 짓을 해버렸다.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 고개를 들 수 있을 정도로 뻔뻔한 놈이 아니다.
시르에게 크게 혼나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나는 내게 다가오는 시르가 화를 낼 거란 생각에 울적해졌다.
이 세계라면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 강적을 해치운 보람도 없고 연인을 화나게 만들고 씨발놈들이 설치기까지 하고 있으니 울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온 시르의 반응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럽게 올려다보는 황금색 눈동자를 보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황금 안에 비치고 있는 나는 상당히 꼴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재앙급 몬스터를 가볍게 해치운 사람이 지을 법한 표정이 아니다. 하지만 연인에게 혼날 거라 생각한 남자가 짓기엔 적절한 표정이다.
그런 나를 시르는 오로지 걱정만 담아서 보고 있었다. 탓하는 기색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녀는 한 손은 내 뺨을 만지고 반대쪽 손은 몸 곳곳을 만졌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치진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말하고 시르는 나를 껴안았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시르.”
“괜찮습니다. 시그 님. 자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그 님은 올바른 판단을 하셨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을 지켜내셨습니다. 저 재앙을 쓰러트린 시그 님은 저의 영웅입니다.”
자부심과 애정만이 느껴지는 목소리.
…아아. 나는 정말 바보새끼다. 아직도 내 연인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무시하고 행동한 나를 탓할 거라고만 생각했다.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무시당한 것보다 내가 사람들을 구한 것을 더 높게 치는 사람이다. 그렇게 상냥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걸 모르고 멋대로 오해하고 걱정하다니…. 정말 구제불능의 멍청이새끼네.
그럼 이젠 그러지 말아야지.
나는 시르의 등에 손을 올렸다.
“고마워. 시르. 그리고 미안해. 멋대로 행동해서.”
“괜찮습니다. 저는 시그 님의 판단을 믿습니다. 시그 님이 그렇게 행동하셨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정답인 선택일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에게 시그 님은 자랑스러운 영웅이시니까요.”
처음으로 제대로 말투를 바꾼 시르가 나를 올려보며 방긋 웃었다. 나도 방긋 웃어주었다.
…나 참. 쓸데없이 감상적이게 굴다니. 하지만 이렇게 호되게 혼났으니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거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 눈빛으로 애정을 교환하고 있을 때,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있던 위병장이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저, 저기… 정말 죄송합니다만…. 그, 상황파악 등에 협조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가 너무 불쌍했던 것도 있고, 참극의 현장에서 애정 과시하는 것은 지나치게 몰염치하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은 나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인사했다.
“아, 그게… 죄송합니다. 저는 옥석 모험가 시그라고 합니다.”
“아니, 그 위명 높은 드래곤 슬레이어셨군요! 역시 굉장하십니다! 저 재앙을 개새끼처럼 조패서 죽이시다니!”
다행히 위병장은 내 행동에 크게 마음이 상하진 않았는지, 오히려 내 이름을 듣자 크게 기뻐했다. 그 뒤에는 일사천리였다. 나는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뒤늦게 깨닫고 부끄러움에 귀까지 빨개진 시르를 품에서 놔줬다. 시르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위병장도 그런 시르를 배려해서 뭔가 묻거나 하는 대신 나만 보고 말했다.
“우선 북문 병사 일동을 대표해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시그 님이 아니셨다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피해가 발생했을 겁니다. …병사들만이 아니라 시민들의 피해도 컸겠죠.”
“아닙니다. 병사님들이 용감하게 싸우지 않으셨다면, 제가 오기 전에도 피해가 컸을 겁니다. 용감하게 싸워 도시를 지킨 병사님들에게 감사의 말씀과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크윽. 가,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위병장은 진심으로 감동했는지 코를 훌쩍였다.
…음.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아저씨가 이러니까 조금 간질거리네. 다행히 위병장은 울음을 터트리거나 하진 않았다. 대신 눈시울이 새빨간 게 마음이 여린 사람 같았다.
“크흠! 큼! 어, 어쨌든 시그 님 덕분에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시그 님의 용맹을 저희는 절대로 잊지 못할 겁니다. 당신은 우리 도시의 은인이자 영웅이십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진정한 영웅은 저 괴물을 상대로 끝까지 맞선 병사님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 경의를 표하며, 그분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나는 지구에서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은 반드시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행동했다. 이 도시가 사상자들을 얼마나 챙겨줄 줄은 모르지만, 내 마음이 이들을 돕고 싶어 하니 도와주면 되는 거다.
“그, 그런…!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위병장은 기어코 눈물을 흘렸다. 콧물까지 흘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감동했나 보다. 그리고 그건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선망과 존경뿐인 눈빛들을 받으니 역시 간질거리네.
…뒤에 있는데도 느껴질 정도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시르에 이르러서는 직접 보는 게 두려울 정도였다.
뭐, 이건 이거고 일처리는 확실하게 해야겠지.
“위병장님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뭐든지 말씀만 해주십시오!”
완전 상관을 대하는 태도였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저도 이곳의 뒤처리를 돕고 싶지만… 지금 급하게 해야 할 일들이 많아 위병장님에게 전적으로 맡겨야겠습니다. 그리고 도시군에 제가 말을 상세히 전달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뭐든지 말씀만 해주십시오!”
군기가 바짝 들어간 자세에 쓴웃음이 나왔지만, 지금은 이런 자세가 더 좋다. 효율적이지.
“토론토라의 재앙은 본래 저렇게 무식하게 도시를 습격하는 몬스터가 아닙니다. 지능이 아주 높은 녀석이죠. 지금 습격은 명백히 비정상적인 일입니다. 틀림없이 어떤 배후가 있겠죠. …그래. 조금 전에 제가 잡은 놈처럼.”
“……아, 악신의 추종자! 그, 그런…! …그럼 놈들이 토론토라의 재앙을 조종해서 우리 도시를 습격했다는 말씀입니까?!”
위병장은 머리가 어느 정도 돌아가는지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나는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잠복하고 있던 놈처럼, 도시 곳곳에 잠복하고 있겠죠. 그러니 위병장님은 도시군에 이런 사정을 전달하고 경계를 최고레벨로 올려주길 요청해 주세요. 저는 길드로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모험가들을 움직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소명을 달성하겠습니다!”
아니, 뭔 소명까지야…. 내가 댁의 왕도 아니고. 하지만 의욕으로 불타오르는 위병장의 눈을 보니 뭐라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른 병사들도 대동소이 했기에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그러면 이곳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재앙의 시체는 작업에 방해되지 않게 대충 아무 곳에나 치워두세요. 회수는 사태가 정리된 뒤에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재앙의 시체는 시그 님의 재산! 잡것들이 꼬이지 않게 저희가 확실하게 관리하겠습니다!”
뭐, 그래 주면 고맙겠지만… 음. 그래도 역시 너무 충성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시르. 다 좋은데 녹색 마력광 까지 뿜어낼 정도로 좋아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조금 머리가 아파 왔지만, 아무래도 이게 이 세계의 문화인 것 같았다. 감동하기 쉽고 그만큼 맹목적이기 쉬운 사람들이 많은 건지도 모른다. …뭐, 지금 나쁠 건 없으니.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시르. 가자! 지금부터 바빠질 거야!”
“알겠습니다! 시그 님!”
“조심하십시오! 시그 님! 시르 님!”
“감사합니다! 당신은 도시의 영웅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모험가 길드로 향하는 우리에게 병사들이 거듭 감사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병사들 만이 아니었다.
“와아! 재앙 사냥꾼이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재앙을 잡았어!”
“꺄악! 영웅님! 이쪽을 봐주세요!”
“감사합니다! 모험가 님!”
“그는 영웅이야! 영웅!”
사태가 끝난 것을 확인한 시민들이 문 밖으로 나오거나 창문에서 몸을 내밀어서 환호성을 보냈다. 내가 싸우는 걸 직접 본 사람들도 잔뜩 있을 테니, 이런 명성이 생기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지만…… 아니, 이거 좀… 많이 부끄러운데!
그 부끄러움에 결정타를 날리듯이 환희에 가득찬 시르가 황금색 눈을 그 어느 때보다 반짝 거리면서 말했다.
“시그 님! 시그 님은 이제 도시의 영웅이십니다!”
“…아, 그래.”
“굉장하십니다! 역시 시그 님이십니다! 저는… 저는 가슴이 벅차올라서…! 시그 님! 사랑합니다!”
“…어, 응. 나도 사랑해.”
“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
…음. 역시 이세계야. 지구와는 문화가 달라!
상기되려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감추며 길드로 가는 속도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