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에 천재가 가면-34화 (34/93)

〈 34화 〉 34화 늑대와 춤을

* * *

의식이 떠지자 따사로운 아침 햇살과 향기로운 냄새와 품 안의 따뜻한 온기가 반겨왔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은하수 같은 머리카락이었다. 그 뒤로 여전히 잠에 빠져 있는 아름다운 요정의 얼굴이 보였다. 내 품에 꽉 안겨 있는 그녀는 작은 숨소리를 내며 여전히 꿈나라에 있었다. 호흡에 맞춰 솟아오르고 내리는 가슴을 보자 절로 미소가 나왔다.

또다시 어제의 반복을 할까? 그런 유혹이 순간적으로 들었지만, 떨쳐냈다. 아무리 그래도 이틀 연속으로 여관에서 섹스만 하는 건 심하다.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생길 행동이다.

그렇게 해도 시르는 나를 기쁘게 받아줄 거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연인의 그런 상냥함에 지나치게 기대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나에게나 시르에게나.

그러니 오늘은 시르가 일어난 뒤에 그녀의 몸 상태만 좋다면 길드로 향할 생각이었다. 하루를 빼먹었다고 대단한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틀 연속으로 빠지면 이상한 소문이 돌 수도 있으니까. 특히 유리는 우리의 관계를 알고 있으니 망측한 상상을 할 수도 있다.

뭐, 그 망상은 100% 사실이지만!

…애초에 아리아에게 고백 장면을 들킨 순간 소문이 퍼지는 건 이미 확정이다. 거기다가 이 여관에서 소문이 나는 것도 100% 확실하겠지. 나는 이 도시에서 제법 유명인이고 시르도 눈에 띄는 외모이니 화젯거리로는 최상급이겠지.

어휴. 앞으로 받을 시선을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아프네.

…이 시선들을 무시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내가 관심병자이기는 하지만, 이런 거로 관심을 받는 건 조금… 그렇단 말이지.

내가 언론에 노출되는 걸 꺼리다니. 지구였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아니다. 지구에서도 지금처럼 연애하게 되었다면 미디어 노출을 꺼렸겠어. 내가 관심종자가 되는 부분은 ‘내가 이렇게 대단한 인간이다!’라는 걸 자랑할 때뿐이니까. 그 외의 부분에선 눈에 띄는 걸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지.

하아. 이렇게 침대에서 고민해 봐야 답이 나오는 문제도 아니다. 일단, 각오는 해두고 대응은 실제로 닥친 뒤에 하면 되겠지. 시르는… 괜찮겠지. 부끄러움이 많아 보여도, 실제론 그런 부분에서 아주 강한 게 시르다.

그건 지난 이틀간 몸을 섞으면서 아주 잘 알게 되었다.

그런저런 플레이도 처음에는 부끄러워해도 결국 허락해주고, 조금만 지나도 오히려 즐기게 되었지. 그래도 아직은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해보지는 못했다. 심리적인 저항감도 있고, 준비할 게 많은 플레이도 있으니.

…어휴. 또 딱딱해지네. 어허. 벌써 이러면 안 돼. 참아라?

그나저나 마법은 역시 굉장하네. 탈수에 탈취까지 가능하다니. 덕분에 어제 하루 동안 온갖 체액을 흘렸음에도 방 안이 상쾌하고 오히려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섹스할 때는 축축한 거나 냄새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밥 먹을 때나 잘 때는 역시 신경 쓰였으니까.

“으음, 으응.”

그렇게 자신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 시르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아직 잠이 덜 깬 황금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 시르.”

“……아. 조, 좋은 아침입니다. 시그 님.”

시르는 쑥스러워하면서 인사를 받아주었다. 어제보다는 부끄러움의 정도가 덜한 걸 보니 슬슬 익숙해지는 것 같다. …뭐, 이 경우엔 이틀 전까지 동정이었는데도 태연하게 구는 내가 이상한 거겠지.

“그래. 정말 좋은 아침이야. 이렇게 시르랑 같이 있고.”

“네. 정말 좋은 아침입니다.”

방긋 웃으면서 말하자 마찬가지로 방긋 웃으며 대답해준다. 그게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그녀를 꽉 껴안고 말았다.

“시, 시그 님?”

“아, 미안. 놀라게 했네. 갑자기 확 껴안고 싶어지지 뭐야.”

“…그,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하며 시르도 내 몸을 꽉 껴안았다. 그녀의 살결이 피부에 더욱 밀착된다. 그걸 통해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에 충족감을 느끼며 나는 시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생 이대로 있고 싶은데.”

“그건… 조금 곤란하지만… 시그 님께서 원하신다면.”

아쉬움에 한 소리인데 시르의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오우. 이거 말조심해야겠네.

시르는 헌신적인 성격이라서 내가 원하는 건 되도록 들어주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는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성격이지만, 거기에 푹 빠지면 몹쓸 인간이 된다. 시르의 상냥함에 의지한 쓰레기 같은 남자가 되고 싶진 않다. 나는 연하의 마망을 바라는 가면 쓴 변태가 아니다.

“농담이야. 뭐, 시르가 괜찮다면 나중에 시간을 내서 일주일 내내 껴안고 있어 볼까?”

“그, 그건…… 우우. 아, 알겠습니다. 시그 님이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따르겠습니다.”

귀까지 빨개진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장난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에. 그렇게 말하면 싫은 걸 억지로 시키는 거잖아. 그럼 안 할게.”

“아닙니다! 이, 이건 그러니까… 조, 조금 부끄러워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지… 저도 시그 님의 말처럼 하고 싶습니다. …진심입니다. …꺄악?!”

새빨간 얼굴로 촉촉한 눈망울로 올려보며 말하는 연인을 보고 참을 수 있으면 그건 인간이 아니다.

아침 인사로 시르를 다섯 번이나 가게 만들고 나도 두 번이나 사정을 한 뒤에야 우리는 점심을 먹고 길드로 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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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로 향하는 중, 주민들이 우리를 보고 화들짝 놀라거나 흥미로운 시선으로 보거나 했지만, 나는 걱정과는 달리 그 시선을 처음부터 완전히 무시할 수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거리를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걷을 때 오는 만족감이 주변의 시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반면에 시르는 주변의 시선이 조금 부끄러운지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그래도 옆에서 웃으면서 걷고 있는 나를 보고 용기를 얻었는지 그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나저나 소문 한번 제대로 퍼졌네. 거리의 사람 중 60% 정도는 우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아리야 자식. 대체 신문을 얼마나 많이 판 거야? 판매량이 평소의 몇 배는 나왔을 것 같은데? 나중에 취재비를 요구해야겠군. 여기는 아직 그런 개념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내가 선구자가 되어줘야겠다.

“……사람들의 시선이 꽤 강합니다.”

“그러게. 거참. 다들 남의 일에 왜 그리 관심이 많은지.”

부끄러워하는 시르에게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면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시르는 화들짝 놀랐다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깍지를 꼈다.

스스로 깍지를 끼는 행동에 만족감을 느끼면서 나는 보란 듯이 손을 앞뒤로 흔들면서 우리의 관계를 과시했다. 몇몇 시선들이 뜨거워지고 몇몇 시선들은 부끄러워졌는지 사라지고 몇몇 시선들은 질투심에 불타올랐다. 그걸 느낀 건 나만이 아니어서 시르는 작게 웃었다.

“후후. 역시 시그 님은 짓궂으십니다.”

“짓궂을 것까지야. 애초에 남의 연애는 빤히 바라보는 게 아니야.”

“확실히 그건 예의가 아닙니다.”

“그렇지. 예의를 중시하는 동방인으로서 한 마디 해주고 싶지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들 관심이야. 굳이 지금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겠지.”

“과연, 역시 시그 님이십니다. 생각이 깊으십니다!”

시르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나를 올려보았다. 크윽…! 이래서 다들 이세계 물에 빠지는구나? 역시그!

그래도 이런 칭찬에 너무 빠지면 정신건강에 안 좋으니 기분 좋은 선에서 끝내야지.

그런데 너무 순수하고 솔직한 거 아니야? 나처럼 더럽혀진 어른은 보고만 있어도 눈이 부실 정도다. 하긴, 그러니까 내가 한눈에 반했지. 그녀가 내뿜는 광채가 너무나도 강렬해서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그래도 선 넘는 녀석이 나오면 가만둘 수는 없지. 너한테 무례하게 구는 녀석이 있으면 말만 해. 아주 아작을 내겠어.”

“후후후. 감사합니다. 다만, 그런 자들은 저도 싫어하니, 시그 님의 손을 빌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 그렇지. 시르는 강하니까.”

“시그 님에 비하면 많이 부족합니다.”

“금방 성장할 거야. 아, 실례가 아니라면 시르의 창술이나 체술을 내가 좀 봐줘도 될까?”

무술을 가르쳐 준다는 건 꽤 조심해야 하는 얘기다. 시르도 그동안 익힌 기술들이 있고, 본인의 능력에 나름대로 자부심도 있을 텐데 대뜸 너 부족하니까 가르쳐 줄게. 라고 말하는 건 배려가 없는 말이지.

하지만 언젠가는 한번 해야 하는 얘기다. 시르의 움직임은 제대로 배우긴 했지만, 내가 봤을 땐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어차피 모험가 일을 계속해야 한다면 강해지는 건 손해가 아니다. 가르치면서 나도 배우는 게 있을 테고.

다행히도 시르의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아니, 긍정을 넘어서 눈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정말입니까!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시그 님에게 무술을 배울 수 있다니! 이 무슨 영광입니까!”

“그, 그렇게까지 기뻐해 주니까 나도 기쁘네. 뭐, 얼마든지 가르쳐 줄게.”

“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환하게 웃으며 고개까지 숙이니 오히려 내가 할 말이 없어졌다. 아니, 이게 이렇게까지 기뻐할 일인가? …뭐, 싫어하는 것보다야 100배는 낫지. 그렇게 시르의 반응을 넘기고 우리는 길드로 향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방에서도 한 얘기를 다시 한 것도 있었지만,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풍경이나 맛있는 음식점, 질 좋은 상점 등을 직접 보고 얘기를 나누는 건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데이트 코스도 짰다. 시르가 추천해 준 가게는 전부 다 가봐야지.

그렇게 길드에 도착하자 몇 안 되는 모험가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그거야 길거리와 다를 바 없었지만, 일부 시선엔 질투와 원망의 감정이 짙게 느껴졌다. 반쯤 장난이었던 거리의 반응과는 사뭇 다른, 진심인 감정이다.

그런 시선을 보내는 모험가의 대다수는 남자였고, 그 시선이 향하는 것도 나였다. 여성 모험가 중에선 시르에게 그런 시선을 보내는 자들이 극소수지만 있긴 있었다.

흐음. 내가 그렇게나 우량주였나? 시르는 비교 대상으로 삼기엔 너무 격이 높아서 평소엔 질투심을 품기도 힘들었을 텐데. 나까지 가진 걸 보고선 질투를 참기 힘들었나?

아니, 뭐 내가 초우량주이긴 하지.

사내새끼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오르지 못할 나무라고 여겼던 절벽 위의 꽃을 꺾은 남자를 질투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까.

그래. 부러워해라! 인간으로서, 남자로서, 수컷으로서의 격의 차이를 깨달아라! 이것이 너희들과 나의 눈높이다.

그들의 시선에서 막대한 우월감을 느끼며 나는 시르의 손을 놓지 않고 길드 안으로 들어갔다.

시르는 주변의 시선을 느끼고 조금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지만, 손을 빼려거나 하진 않았다. 거리와는 다르게 길드는 아는 사람들도 많으니 조금 부끄러울 뿐이지, 숨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렇게 말하는 나도 길드에서도 애정행각을 하려니 조금 꺼리는 마음이 들긴 하다만. 이런 건 처음이 중요하니까. 모든 사람에게 우리 관계를 확실하게 각인시켜 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 나중에 귀찮은 문제가 생기지 않을 테니까.

“어서 오세요. 시그 님. 시르 님. 두 분의 사이좋은 모습을 보니 저까지 기분이 좋아지네요.”

그런 우리를 반긴 것은 이젠 내 전속인 접수원이었다. 그녀는 멋들어지게 반짝거리는 만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반겼다. 업무용 미소도 저 정도면 예술의 영역이다.

“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해가 중천에 뜬지 오래지만, 시그 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시그 님 속에서는.”

가벼운 인사에 가벼운 대답. 나는 혹시나 해서 시르의 안색을 살폈지만, 불편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하긴, 본인은 질투심이 강하다고 말했지만, 그때 시르의 반응은 질투보다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거였다. 그 불안감의 원인인 내가 자신의 것이 되었으니 이런 대화 정도에 불편할 일은 이제 없을 거다.

“뭐, 그럼 그건 그런 거로 하고. 다짜고짜 시비를 거는 걸 보니, 꽤 좋은 일이 있나 봐요? 그럼 간 보지 말고 빨랑빨랑 얘기합시다. 어제 하루 빼먹어서 만회해야 하니까.”

“그 빼먹은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묻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얘기도 있지만… 네, 뭐, 지금 중요한 건 아니죠. 여기서 할 얘기도 아닌 것 같고. 그렇죠? 시르 님?”

“네엣?! 아… 그, 그렇습니다.”

갑자기 자신에게 날아온 유탄에 화들짝 놀란 시르는 접수원의 말뜻을 알아듣고는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 귀여운 반응에 나는 흐뭇한 아빠 미소를 지었고 접수원은 업무용 미소가 아닌 진심으로 짓는 미소가 떠올랐다.

한순간의 시선 교환.

서로의 생각을 알아차린 우리는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서로에게 치켜세웠다.

[귀여운 시르를 즐겁게 괴롭히는 동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남들에겐, 특히 시르에겐 알릴 수 없는 비밀 동맹의 탄생을 뒤로하고 우리는 곧바로 업무 얘기로 넘어갔다.

그러자 접수원은 조금 전까지의 분위기를 완전히 지우고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오셔서 다행이네요. 조금만 늦게 오셨어도 숙소에 사람을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무슨 일이기에?”

“길드에서 두 분에게 긴급 의뢰를 발령했습니다.”

“긴급 의뢰?”

“길드에서 직접…? 지명 의뢰입니까?”

이건 뜻밖이다.

지금 상황에서 우리를 지명해서 올 만한 긴급 의뢰라면 그쪽 관련밖에 없다.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물렀나?

“네. 지명 의뢰입니다. 지명자는 타라스트 지부의 길드 마스터, 유리 베르실 님입니다.”

“길드 마스터 님이 직접이라…. 혹시 거절하면 어떻게 되죠?”

“거절하셔도 딱히 패널티는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원칙적으로는 말이죠.”

공식적으로는 패널티는 없지만, 지명 의뢰를 내린 사람에게 밉보일 수는 있다는 거군. 내가 일부러 조금 불쾌한 표정을 드러내자 접수원은 보충하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나치게 불합리한 지명 의뢰라고 생각되시면 상부에 심의를 요청하실 수 있습니다. 심의 결과에 따라서 지명 의뢰를 내린 쪽이 오히려 패널티를 받을 수 있죠.”

“크으. 길드 마스터를 상부에 꼰지르면 앞으로 모험가 생활이 참 즐겁겠네.”

“…하하하.”

일부러 빈정거렸는데 접수원은 메마른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뭐, 여기서 접수원을 괴롭혀도 의미가 없지. 일단, 의뢰 내용을 확인하기 전에 먼저 확인할 게 있다.

“그래서 그 길드 마스터 님은 어디 계시죠? 지금 길드에는 없는 거죠?”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정곡을 찔렸는지 접수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간단한 추론을 얘기했다.

“길드 마스터는 우리가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 굳이 긴급 의뢰를 지명해서 발령할 정도로 배려심이나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죠. 그런데 굳이 이런 방식을 썼다는 건 어지간히 급한 일로 자리를 비워서 이런 식으로만 전달할 수 있었다는 거겠죠.”

“…네. 맞아요. 시그 님은 언제나 상황파악이 빠르시네요.”

접수원은 감탄하고 있었다.

솔직히 너무 간단한 추론이라서 이런 반응을 받는 건 주인공스게~를 직접 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기는 무슨. 존나 좋았다. 무엇보다 옆에 있는 시르의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특히나 좋았다. 이 정도는 그리 부담이 안 가는 칭찬이지.

접수원은 작게 한숨을 쉬고 진지하게 말했다.

“길드 마스터는 현재 쿠르시카 도적단 토벌대에 급히 합류하셨습니다.”

“쿠르시카 도적단….”

“…그런.”

들은 적 있는 이름이다. 어찌보면 내가 이세계에 온 첫 날부터 엮인 놈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재 타라스트의 남쪽에서 날뛰고 있다는 도적단. 그게 쿠르시카 도적단이다. 토벌단을 보낸다는 얘기를 들었었는데, 아무래도 그쪽에서 문제가 생긴 것 같군. 인근 도시의 모험가 길드 마스터가 급히 출동할 정도의 일이라….

“토벌대가 대패했나 보군요. 거기다가 꽤 고위층 인사가 인질로 잡혔고.”

“…그렇게 곧바로 정답을 내는 건 정말 부럽네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 접수원과 더더욱 눈을 빛내는 시르의 반응이 상반되어서 꽤 재미있었다. 그나저나 일부러 최악에 가까운 상황을 얘기했는데 바로 적중이냐.

그나저나 토벌대를 패퇴시키는 도적단이라.

토벌대란 곧 군대다. 그러니 군대의 지휘관이 어지간히 무능하지 않은 이상에야 보통 도적단 놈들이 아니겠지.

하긴, 유리는 쿠르시카 도적단이 ‘잊힌 신들의 추종자’와 ‘악신의 추종자’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봤었다. 배후에 그런 흑막 놈들이 있다면 군대를 패퇴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그런데 다른 도시의 모험가 길드 마스터를 급히 부를 정도라니. 영주 아들이라도 잡혔대요?”

“이쯤 되면 무섭네요. 정확히는 아들이 아니라 따님이세요.”

“무서울 것까지야. 그런데 영애라면… 모험가 길드의 마스터를 부르는 게 이해가 되는군요.”

“어째서입니까?”

내 말에 접수원보다 시르가 빠르게 물어왔다. 시르의 두 눈은 여전히 반짝거리고 있었는데, 내 추론의 답을 한시라도 빨리 듣고 싶어하는 눈초리였다. …이건 조금 부담스럽네.

“길드 마스터님이 잠입 및 구출의 전문가일 테니까. 아마, 이 근처에선 최고로 꼽히는 실력자일 거야.”

“…그렇습니다만, 시그 님은 대체 언제 그런 걸 조사하셨데요?”

접수원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면서 대답했다.

“딱히 조사할 것도 없죠. 딱 보고 이 사람은 이쪽 방면의 달인이겠구나~ 라고 견적이 나왔는데.”

“그게 보면 견적이 나오는 건가요….”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 그런 얘기.”

“…그렇게 자신감 넘치는 태도도 부럽네요. 뭐, 실력이 있으니 내비칠 수 있는 자신감이겠지만요.”

“역시 시그 님은 대단하십니다.”

시르의 말버릇을 끝으로 상황파악은 끝냈다.

자아, 이제 문제는 유리가 급히 긴급하게 우리에게 지명한 의뢰로군. 다른 사람에게는 맡기지 못하는 문제라서 우리에게 맡긴 거겠지? 도적단에게 영애가 잡혀가지만 않았어도 직접 처리하거나 직접 부탁했을 정도의 의뢰라는 소리다.

그렇다면 이쪽도 잊힌 신들의 추종자나 악신의 추종자와 관련된 일이겠지. 그리고 내 예상으로는….

“시르. 아무래도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으니, 이 긴급 의뢰는 받아야 할 것 같아. 괜찮겠어?”

“네. 괜찮습니다. 시그 님이 함께하시니 두려울 게 없습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 고마웠다.

“좋아. 그럼 접수원씨. 그 긴급 의뢰라는 거 좀 들어봅시다.”

“……후우. 두 분 모두 동의하셨으니, 의뢰 내용을 전달하겠습니다. 참고로 의뢰 내용을 보면 이후에 거절하실 수 없으니까요. 번복하시지 말아주세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이거 실망이네.”

“안 그래 보이니까 걱정마세요. 어디까지나 규정상 반드시 해야되는 말이라 했을 뿐이니까요.”

접수원은 그리 말하곤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접힌 종이를 접수대 위에 올리곤 우리 쪽으로 밀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면 안 된다는 제스처였기에 나는 종이를 품에 챙겼다.

“좋아. 그럼 가볼까. 아. 그리고 돌아오면 우리도 토벌대가 있는 쪽으로 가볼 건데. 이것도 의외를 따로 받아야 되나요?”

“어, 가보시게요?”

화들짝 놀라는 접수원에게 나는 방긋 웃어줬다.

“네. 조금 빡쳐서.”

“…네?”

“어쨌든 따로 조건이 필요한 건 아니죠?”

“…아, 네. …다만, 단독으로 도적단과 싸우는 건 허용되지 않습니다. 토벌대의 담당자나 지휘관을 만나서 허락을 받아주세요.”

“그건 당연하죠. 하지만 놈들이 나를 먼저 습격해 온다면 반격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죠?”

“……부디, 사고는 치지 말아주세요.”

접수원은 내 미소에서 뭔가를 읽었는지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피식 웃고는 시르와 함께 길드를 나섰다. 여전히 우리에게 꽂히는 시선들을 무시하고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공원까지 온 뒤에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의뢰서를 꺼냈다.

“자아, 우리 길드 마스터가 긴급하게 내린 의뢰를 봐볼까.”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르가 걱정하는 건 우리가 그걸 해결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이 일로 생겼거나 생기고 있는 피해가 크지 않기를 바라는 거다. 마음씨가 비단결이여.

흐뭇한 마음으로 의뢰서를 펼치고 그 안의 내용을 봤다.

긴 급

북쪽 산맥에 전사급 늑대인간 출현. 시급히 토벌 필요.

커다란 크기에 비해 의뢰서의 내용은 딱 한줄이었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했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 서적을 읽으면서 이세계의 상식과 문화, 몬스터에 대해서 파악했다.

그 중에는 늑대인간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늑대인간은 종족의 구분이 아닌, 일종의 질병이다.

말 그대로 인간이 늑대처럼 변하는 질병인데, 그때 가지는 특성은 지구에서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강함의 경우엔 지구는 매체마다 다르니 특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이 세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상급 몬스터로 분류되는 괴물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질병이니만큼 전염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고대의 어떤 도시는 이 병으로 시민 대다수가 감염당해 늑대인간의 도시가 되어 토벌당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지금은 특효약이나, 성법 등으로 치료가 가능해서 그 정도로 심각한 수준까지는 가지 않는다고 하지만… 감염이 심하게 되어 육체가 변이된 수준이 되면 그 어떤 방법으로도 치료 불가능한 무서운 질병이다.

그리고 이 질병을 최초로 퍼트린 근원은 어떤 몬스터 종족이다.

야천랑???

토론토라의 재앙인 그 개새끼의 종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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