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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에 천재가 가면-26화 (26/93)

〈 26화 〉 26화 악신의 추종자

* * *

내 외침에 적도 아군도 당황하고 있을 때, 나는 곧바로 다음 행동에 들어갔다. 이 시간을 허무하게 날릴 수는 없지!

“시르! 다른 사람들을 부탁해!”

“…! 네, 네!”

어쩔 줄 몰라 하던 ­존나 귀엽다­ 시르는 내 외침에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를 보조하기 위한 게 아닌 처음의 공격을 회피한 후 계속 바닥에 엎어져 있던 모험가들을 위한 거였다.

놈의 저주는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걸린 것이다. 거기에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나와 시르뿐. 다른 모험가들은 바닥에 엎어져서 숨을 헐떡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놈과의 거리를 절반 정도 줄였을 때 시르의 주문이 완성되고 그녀를 중심으로 녹색 반구가 펼쳐졌다. 그러자 저주에 걸렸던 모험가들이 한결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네놈!”

자신에게 똑바로 달려가면서도 뒤를 확인할 정도의 여유를 보여준 내게 후드 놈은 분노의 외침을 터트리면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놈의 손에서 시커먼 촉수 같은 게 일렁이더니 쏜살같이 나를 습격했다.

하지만 그 속도는 고작 134km/h. 머쉬 드래곤의 촉수보다도 한참 느린 속도다. MLB 투수의 직구보다도 못하다고!

거기다가 수도 적고, 궤적도 모범생 마냥 정직해서 하품하면서 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시시하네.”

“………!!”

실제로 하품을 하면서 모든 공격을 피하고 도발하자, 무슨 마법이라도 걸어놨는지 이 거리에서도 어둠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놈의 빡친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반응도 알기 쉬웠다.

“캬악!”

듣기만 해도 사악함이 느껴지는 기합성과 함께 놈의 발 주변에 어둠이 퍼지더니 그 안에서 수십 개의 검은색 촉수가 올라왔다.

정확히 72개! 큿! 속도도 조금이지만 빨라졌다.

그래도 부족해!

내가 회피 훈련할 때 사용한 야구공의 속도가 기본 200km/h에 1초에 날아드는 숫자가 88개였다. 그 훈련에 비하면 이 정도 공격은 어린애 장난이나 다름없다!

아니, 그런데 이 자식 왜 이렇게 촉수를 좋아하지? 생각해 보니 처음에 했던 공격도 레이저 빔이 아니라 촉수를 길게 날렸던 것 같다.

마치 능욕계에나 나올 법한 음습한 마법!

그리고 마침 우리 파티에는 여성이 셋이나 있었다.

당연히 시르도 있고!

순간 내 뇌리에 검은색 촉수에 희롱당하는 시르의 모습이 번갯불처럼 치고 지나갔다.

이 개새끼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죽어어어!”

“으아아앗!”

개변태 마법을 분노의 질주로 피하고 일부는 손으로 잡아끊으면서 녀석에게 쇄도했다.

녀석은 내가 자신의 마법을 거침없이 돌파하자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에 깔린 어둠을 끌어 올려서 몸 주위를 구체형태로 감쌌다.

방어마법이냐?

그럼 방어마법 채로 박살을 내주마!

진괘?? 뇌격雪?

이세계에 와서 성명절기나 다름없어진 일격이 검은색 구체에 작렬하자 구체를 구성하던 어둠이 한꺼번에 뒤로 날아갔다.

그 안에는 여전히 어둠으로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얼굴에 떠올린 표정을 짐작할 수 있는 쓰레기 변태 새끼가 있었다.

칫! 생각보다 방어마법이 강한데? 한꺼번에 박살 내주려고 했는데!

뭐, 그렇다고 놈의 운명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나는 놈이 정신을 차리고 대응을 하기 전에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제압 방법을 택했다.

퍽! 콰직.

“…………!!!!”

무참한 소리와 함께 놈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어둠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 안에는 눈을 뒤집고 있는 재수 없는 콧수염이 자란, 상상대로 음습하고 더러운 개변태 중년남성의 얼굴이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콧수염과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이 꿈틀거리는 목울대, 마지막으로 입에서 보글보글 올라오는 게거품이 놈의 변태성을 완성 시켰다.

혐오스러운 변태의 완성을 보면서 나는 놈의 가랑이 사이로 파고들었던 다리를 재빨리 빼냈다. 안 묻었겠지?

또, 더러운 것을 박살내고 말았군. 신발에 묻진 않았겠지?

풍덩.

이세계에 와서 더욱 민감해진 위생을 확인하는 동안 이제는 남성성을 뽐낼 수 없게 된 음습한 고자가 뒤로 넘어져서 연못에 빠졌다.

쯧. 귀찮게 시리.

나는 혀를 차고 놈의 발끝을 휙 잡아당겼다. 놈은 침팬지가 집어 던진 너구리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한참을 날아가 부드러운 흙바닥을 굴렀다.

뭐, 저 정도로 죽지는 않았겠지. 그리고 몸에 이상한 저주나 반격 마법 같은 건 걸어놓지 않은 것 같다.

다시 한번 몸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면서 놈에게 다가갔을 때 시르가 달려왔다.

“시그 님!”

“아. 시르. 무사해? 어디 다친 곳은 없지? 다른 사람들은?”

“무사합니다! 모두 무사합니다! 시그 님이야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시르는 기쁨 반 걱정 반의 얼굴이었다. 크으. 내가 놈을 박살 내는 걸 봤으면서도 일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걱정하다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씨란 말이야!

“나는 완전 멀쩡해. 그보다 그 녀석을 구속할 수 있는 마법 같은 건 없어? 마법이라는 게 단순히 입을 막는다고 못 쓰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바닥에 쓰러진 놈을 툭툭 차면서 묻자 시르는 무엇이 그리 놀라운지 입을 반쯤 벌렸다가 이내 환희에 가득찬 얼굴로 외쳤다.

“굉장하십니다! 시그 님은 마법사가 아니신데도 마법에 대한 이해가 하해와 같으십니다! 그 끝없는 지식에는 경탄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현자이십니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반짝거리는 황금을 보니 부끄러움 반, 자랑스러움 반의 감정이 벅차올랐다. 음. 시르는 다 좋은데 칭찬이 너무 과장되었어. 그게 싫은 건 아니지만!

“칭찬 고마워. 시르의 칭찬은 언제나 내 마음을 복받쳐 오르게 해주네. 그런데 마법을 봉인하는 건 가능한 거야?”

“그렇습니다. 시그 님의 예측처럼 일부 마법은 입을 봉해도 발동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남자 같은 흑마법사는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합니다. 조금 전의 흑편??도 영창이 필요하지 않은 마법이었습니다.”

“흑마법사라.”

“사악한 마법사들입니다. 이런 자들의 마법을 봉하기 위해선 영혼에 직접 제약을 걸어야 합니다.”

“영혼에 직접?”

“그렇게 대단한 제약은 아닙니다. 영창 없이 마법을 발현하지 못하게 막는 정도입니다. 다만, 상대와의 역량 차이가 크면 효과가 없습니다.”

“그렇겠지. 영혼에 제약을 거는 건데. 자기보다 수준이 높은 상대에게도 잘 먹히면 그쪽이 더 이상해. 그래서 이놈과 시르의 역량 차이는 어느 정도야?”

“조금 전의 전투로 봐선, 마법적인 역량은 저보다 근소하게 우위로 보입니다. 거기다가 시그 님에게 당한 부상이 심해서 제가 걸은 제약은 풀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좋아. 이 녀석의 입과 영혼을 봉해 버리고 빨리 길드로 돌아가자. 여기 더 있다가 증원이라도 오면 곤란해.”

나는 곧바로 손에서 녹색 빛을 내면서 음습한 고자의 등에 손을 대는–신체접촉이 매우 불쾌했지만, 어쩔 수 없다­ 시르에게서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그렇죠? 리에나 대장님.”

“………허어.”

이제는 디폴트 표정이 된 멍한 얼굴로 그런 한탄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를 토해낸 리에나는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지. 확인할 수 있는 건 전부 확인했고, 흑막의 단선도 손에 넣은 데다가, 아예 악신의 추종자까지 붙잡았으니까. 과연, 이게 이틀 만에 드래곤을 잡은 모험가인가….”

“우리와는 종자가 달라. 종자가.”

어딘가 해탈한 듯이 중얼거리는 리에나의 어깨를 잡으면서 잔쥬루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뒤에 있는 다른 모험가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쪽은 나보단 조금 전에 당한 저주가 좀 더 충격적이었던 것 같았다.

“…이게 저주구만. 말로만 듣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네.”

“마치 심장을 잡아 뜯기는 느낌이었어. 흑마법사하고는 절대로 싸우지 말라는 선배님들의 조언을 다시금 새기게 되네.”

“앞으론 부적이라도 가지고 다녀야 하나? 아니면 성물? 어느 쪽이 더 저주에 효과적이지?”

“…………추태로군.”

청동 셋은 두려워하면서도 앞으로의 대책을 논했고 강철의 여인은 분한 얼굴로 입술을 곱씹었다.

하긴, 저런 피지컬을 가지고 있는데 아무런 활약도 못 했으니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만도 하다. 그래도 그 짜증이 내게 조금도 향하지 않는 점에서 인성점수는 높게 평가해줄 만하다.

그때 봉인작업을 마친 시르가 햇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끝났습니다. 시그 님.”

“오. 수고했어. 시르.”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오히려 고생하신 건 시그 님이십니다.”

방긋방긋 웃는 얼굴이 실로 보기 좋았다. 그 어떤 고가의 미술품도 내게 지금과 같은 충족감을 주지 못했다. 인간의 영역으로 도달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극치다.

…어이쿠. 나도 남 말할 처지가 아니네. 입 밖으로 내지만 않았을 뿐이지, 시르를 칭찬하는 온갖 어휘가 떠오르니 말이야. 그런데 이런 어휘로도 내가 지금 느끼는 감동을 전부 표현할 수 없단 말이지.

대문호들을 빙의시켜서 글을 써봐야 하나? 아니, 그건 그냥 표절이지. 작가가 아니라 엮은이가 되어버려!

“그럼 둘 다 고생한 거로 하자.”

나는 그리 말하고 리에나를 빤히 봤다. 잔쥬루와 함께 애수가 가득한 얼굴이었던 리에나는 내 시선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화들짝 놀라더니, 헛기침을 하고 조금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흠! 흠! 좋아. 시그 군과 시르 양의 활약으로 모두 무사히 임무를 마칠 수 있었다. …모두를 대표해서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정말 고맙다.”

그리고 갑자기 인사를 하더니 허리를 숙이는 게 아닌가?

설마, 여기서 90도 인사가 나올 줄은 몰랐기에 나는 제법 당황했다. 굳이 연기할 필요 없이 어리숙한 청년의 모습이 튀어나올 정도로.

“어, 음.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저도 죽지 않으려면 적을 쓰러트릴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것도 임무의 일환이고.”

“그렇다 해도 도움을 받은 건 엄연한 사실이지. 부디 감사 인사를 받아줬으면 하는군.”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받지 않는 건 상대를 모욕하는 짓이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쓸데없는 모욕을 싫어한다.

“알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고개를 들어주세요.”

“…고맙다.”

허리를 든 리에나의 얼굴엔 작은 만족감이 서려 있었다. 그건 어째서일까? 자신을 아득한 추월한 후배들을 보고도 사람으로서 제 의무를 다한 자신에 대한 만족감일까?

…지금 중요한 건 아니다. 앞으로 중요한 것도 아니고.

오늘 함께한 모험가들을 좋은 사람들이었다는 정도의 감상만 품기로 했다.

짧은 인연일 테니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물론.

“시그 님. 돌아가면 시그 님의 숙소로 찾아뵈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기대감에 가득찬 눈으로 날 올려보는 이 사랑스러운 아가씨와의 인연은 절대로 짧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아니, 짧게 만들지 않을 거다.

아주 잠깐이지만, 나를 이곳으로 보낸 존재를 조금이지만 용서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정도의 인연이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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