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25화 악신의 추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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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까지 가는 길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조금 전에 튀어나온 그 시커먼 것도 그렇고 동굴 입구에 그려진 그림도 그렇고, 반드시 함정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없자 되려 허무해졌다.
함정은 그 시커먼 게 유일했던 걸까? 제법 재빠르긴 했지만 그렇게 강한 놈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한 방에 터졌고. 아. 그러고 보니 그게 뭔지 물어보는 걸 깜빡했네.
“내가 조금 전에 박살난 그 시커먼 게 뭔지 알아?”
“저도 자세히 보진 못해서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하급 악마의 일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악마였다고?”
“네. 그때 느껴졌던 기운과 어렴풋하게 보인 생김새. 그리고 죽을 때 일어난 현상이 악마와 똑같았습니다.”
악마라. 지구에서는 여러 의미로 쓰이는 말이지만, 이 세계에서 악마란 악신??이 만들어낸 종족을 일컫는다.
세세하게 분류하면 수백 개의 종족이 있지만, 대부분이 지옥에서 살고 있기에 지상에 올라온 악마들은 그냥 하급 중급 상급 정도로만 나뉘어서 불리고 있었다.
애초에 악마들이 지상에 올라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서 생물학적인 분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음. 이렇게 보니 내가 본 책의 저자는 학구열이 굉장했네. 흔하지 않은 악마들의 종족을 분류해보려는 시도를 했을 정도로 자료를 모았다는 거잖아?
어쨌든 흔히 보기 힘든 종족이니만큼, 비록 하급에 불과해도 보통 사안이 아니다.
“악신을 추종하는 무리라도 있는 거려나.”
“그 벽화를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시르는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생각보다 문제가 커지고 있는데? 어쨌든 잊힌 신들의 추종자들과 악신의 추종자들에 어떤 식으로든 교집합이 있다는 거군.
악신은 이름도 버젓이 남아있고 지금도 지옥을 지배하고 있으니 잊힌 신에 포함되지 않으니 말이야.
뭐, 어느 쪽이든 간에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게 주목적인 놈들일 테니 보이는 족족 때려잡아야 하는 것들이다. 그나저나 악신의 추종자들도 흑막 같은 거려나. 조금 두근거리네.
“너희는 정말 발걸음이 빠르구나.”
“참나. 선배인 우리가 앞장서야 하는데. 선배 체면이 말이 아니구만.”
이제야 우리를 따라잡은 리에나와 잔쥬루가 불평아닌 불평을 했다. 그들이 발이 빨라져서가 아니라 우리가 먼저 목적지에 도달했기에 뒤 따라 잡은 거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따라온 점을 나는 높게 사기로 했다.
그들은 베테랑 모험가들이다.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누가 벌이고 있는지 추론하지 못할 바보들이 아니다. 즉, 그들은 여기에 악신의 추종자들이 얽혀 있을 것을 알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온 것이다. 도망쳐도 누가 뭐라고 할 상황도 아닌데 말이다.
길드로 돌아가서 여기서 일어난 일들을 보고하면 비판 받을 것도 없다. 오히려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칭찬 받겠지.
모험가는 말이 모험가지 위험한 모험을 되도록 하지 않는 걸 현명한 신조로 삼는 집단이니 말이지.
모순적이지만, 개인이 모험가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조직으로, 직업으로 존재하는 시점에서 당연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 어색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으면서 말했다.
“그럼 돌아갈 때는 다시 저희가 뒤를 따르죠.”
“야야. 농담으로 한 말에 진담으로 대답하지마. 후. 너희가 앞장서서 우리도 뒤따라올 생각을 가지게 된 거니까.”
잔쥬루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곤 절벽에 난 커다란 상흔을 보더니 신음을 흘렸다.
“…이게 재앙급 몬스터가 낸 상흔이가. 무시무시하구만.”
“이거 얼마나 파고 들어간 거야? 발톱이 얼마나 긴 거지?”
“거기 만이 아니라 여기 바닥에도 상흔이…. 위험해.”
제각기 전투의 흔적을 보고 감상을 내뱉고 있을 때 복잡미묘한 표정의 리에나가 시르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르 양. 이 장소를 기록할 수 있겠어?”
“네. 이미 하고 있습니다.”
시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등에는 녹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문양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문양을 형성하는 녹색 빛 안에 하얀색 구슬이 빠른 속도로 빛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전기 회로 같은데? 마법은 이런 느낌이구나.
눈앞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본 마법을 보고 내가 감격을 느끼고 있을 때 리에나는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 장소에 따라서 기록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잔존 마력이 지나치게 많거나, [기록 불능 마법] 등이 걸려 있으면 곧바로 기록은 못 합니다. 추가적인 조치가 있으면 가능하지만…, 그런 걸 준비한 자들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지금 걱정한 것도 그 부분이다. 조금 전의 그거… 악마였지?”
역시 리에나도 그 시커먼 게 뭔지 알고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노파심이었나.
“장담할 수는 없지만… 하급 악마의 일종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봤다. 너와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틀림없겠지. 그렇다면… 역시 악신의 추종자들인가. 골치 아프군.”
리에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나저나 이게 골치 아픈 문제로 끝날 얘기인가? 악신의 추종자나 잊힌 신들의 추종자 같은 게 얽힌 문제면 이 지역의 운명을 걱정해야 하는 문제 아니야?
“…이건 고작 순은인 내가 고민할 문제가 아니지. 머리 아프게 고민해야 하는 건 마스터를 포함한 상층부 사람들이다. 안 그런가? 잔쥬루?”
“그렇지. 당연한 말씀. 우리야 보고한 뒤에 당분간 몸만 사리면 되지. 특히 외진 곳에는 가지 말자. 진짜.”
최고참 두 사람은 그리 말하면서 피식 웃었다.
…이걸 낙천적이라고 봐야 하나, 멘탈이 강하다고 봐야 하나. 두 사람 다 이게 단순히 보고하는 거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까놓고 말해서 살아서 도시로 돌아갈 수 있을지를 걱정해야 하는 판국이다. 조금 전의 악마도 그렇고, 그놈들은 여기에 일정 시간 동안 사람이 없기를 바라고 있었다.
길드 마스터는 보고가 들어온 당일에 이곳에 와서 흔적을 한번 확인했었다. 하지만 본인이 보고를 올리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공식적으로 조사단을 파견해서 기록을 남기고 확실한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귀찮은 일이지만, 동시에 일정 수준 이상의 행정력을 갖춘 조직에선 필요한 일이다. 지구에서도 쓸데없어 보이는 조사나 보고서도 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어떤 일을 벌이는데 정치권 등 권력자들을 설득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차를 거친 보고서 만큼 쓸만한 게 드물었다. 말빨과 즉석 프레젠테이션으로 구두 약속을 잡아도 명확한 증거를 남기는 편이 나중에 잡음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가 나중에 귀찮아지지 않기 위해서 현재의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고서나 계획서를 쓰는 편이 더 효율적으로 일처리를 할 수 있고.
그러니 유리 베르실이 이놈들과 한패인 건 아니다.
그랬다면 애초에 나를 호위라는 명목으로 같이 보내지도 않았다. 뭐, 나도 같이 제거하려고 그랬다고 하면 말이 아예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너무 조잡하다. 왜냐면 나 정도로 유명해진 사람을 이렇게 얼렁뚱땅 처리하는 건 미래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연못에서 솟아오르듯이 갑자기 나타난 검은색 후드를 입은 놈은 유리 베르실이 준비한 놈은 아니다.
당연히 놈이 우리를 향해 발사한 검은색 레이저 빔도 환영 인사는 아니겠지!
“모두 엎드려!”
“………!!”
내 외침에 잔뼈가 굵은 모험가들은 곧바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그들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던 레이저 빔은 허무하게 허공을 갈라 절벽을 파고 들었다.
퍼버버버버벅!
상당한 관통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절벽을 57cm나 파고 들어갔다. 지름은 13cm. 이거 사람이 맞으면 도넛처럼 되겠는데? 조금 유머를 섞으면 에이스 당하게 될 거다.
아, 나는 가볍게 몸을 옆으로 움직여서 피했다. 시르는 짧게 말을 내뱉더니 자기 앞에 생성된 녹색 배리어로 튕겨냈다.
시르 굉장해! 그런데 주문은 마법을 못 쓰는 사람은 못 듣는 걸까? 분명 짧게 뭐라고 말을 하긴 했는데, 내 청력으로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번역도 안 되는 걸 봐서는… 말 그대로 의미가 없는 단어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마법어 같은 거엔 번역 치트도 안 먹히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지금 고찰할 문제는 아니다. 지금 고민해야 하는 문제는 갑자기 나타나서 인사조차 하지 않고 다짜고짜 선빵을 날린 싹바가지 없는 놈이다.
아이사츠도 하지 않고 공격을 하다니! 뭐, 앰부쉬는 1회 허용되니 아직은 허용 범위인가! 고우랑가!
“……전부 피했는가.”
그때 놈이 작게 중얼거렸다. 워낙 작은 중얼거림이라 나도 희미하게 들렸을 정도였다. 거리도 제법 있고 말이야. 일단, 놈의 목소리만 보면 중년 남성으로 보였다.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써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체격이나 겉으로 드러난 피부를 보면 거의 확실하다.
…어느 쪽일까?
물어볼까?
정중하게 물어보자.
“어디서 온 견공자재분이지?”
내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면서 외치자 여전히 배리어를 전개하고 있던 시르가 화들짝 놀라며 말렸다.
“위험합니다! 시그 님!”
그 순간 어떤 스산한 기운이 내 몸을 파고들었다.
전혀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던 공격이어서 당황한 순간 그 기운은 내 심장 쪽으로 파고들더니 심장을 옥죄어 왔다.
오옷! 이, 이건 설마 저주?!
다짜고짜 이런 걸 날리다니! 진짜 매너 없는 녀석이네!
“시그 님!”
내 상태를 아는지 시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아.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 표정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두렵다. 물론,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게 좋은 건 아니다. 그저, 나를 저렇게나 걱정해준다는 사실이 기꺼울 뿐이다. 저 시선을 조금 더… 받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역시 이 이상 걱정 끼칠 수는 없지.
나는 양팔을 좌우로 펼치고 숨을 크게 들어 쉬고 그 모든 걸 뱉어내면서 기합성을 질렀다.
“하아아아아압!!!!!!!!”
펑!
심장을 옥죄던 저주는 용공식 기합 한방에 사라졌다.
“………?!?!?!?”
“………?!?!?!?”
저주를 건 당사자의 당황과 그 저주가 어떤 건지 알고 있는 시르의 복잡하고 다양한 표정을 즐기면서 나는 오른손으로 목을 주무르면서 말했다.
“고작 그 정도 저주로 날 어찌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그 열 배는 가지고 와라.”
그렇다고 진짜로 가지고 오진 말고.
허세는 부릴 수 있을 때만 부릴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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