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20화 시르 플레인
* * *
세상엔 스스로 빛을 내는 사람이 있다.
당연히 물리적인 빛을 말하는 게 아니다. 대머리조차도 빛을 반사할 뿐이지 스스로 빛을 내는 건 아니니까.
빛나는 외모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외형이 아름다운 것은 분명 그것만으로도 큰 가치를 가지지만, 내실이 외모에 따라오지 못하면 빛이 흐리다.
스스로 빛을 내는 사람은 쌓아 올리고 단련한 자다.
능력을. 업적을. 명성을. 인품을.
그런 사람들은 빛을 낸다. 강렬한 빛을.
그 사람이 걸어오고 쌓아 올린 궤적의 빛을.
살아오면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스스로 빛을 내는 사람들은 세상에 많이 있었다.
비율로는 적어도 객관적인 수는 적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투자했다. 지원했다. 고용했다. 교육했다.
그들은 나의 손발이 되어서 회사를 지탱했다. 확장했다.
그들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어느새 내 주변엔 스스로 빛나는 사람들만 있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내가 그들을 모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스스로 빛나는 사람을 나는 어떻게 알아본 걸까?
내가 선택한 사람은 반드시 그 능력을 증명했고 성공했다.
사람들은 나를 황금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칭송했다.
내가 사람을 보는 눈을 의심하는 사람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혜안을 칭찬하고 아부하는 자들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나 또한 스스로 빛을 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도 강렬한 빛을.
그런데 오늘.
나는 지구가 아닌, 이세계에서 처음으로 나 못지않게 빛나는 사람을 만났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무심코 눈을 감고 싶게 만드는 광휘 때문만이 아니다. 마치 성인을 묘사한 그림에서 볼 법한 광휘가 내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도 그녀의 용모는 또렷하게 보였다.
순식간에 내 뇌리에 수천 장의 사진이 저장된다. 한순간도 놓치기 싫다는 듯이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사진으로 저장했다. 그 사진 중에 같은 장면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하나하나가 전부다 새롭다.
그녀의 귀는 뾰족했다.
하지만 알브와 같은 형태는 아니다. 엘프의 귀도 아니다. 평범한 사람의 귀가 약간 뾰족한 수준이다. 귀를 살짝 덮은 하늘을 수놓는 은하수 같은 은발 때문에 관찰력이 부족한 사람은 알아보지 못할 수준의 특징이었다.
곡선이 아름답다는 증거인 은실을 짜서 자아낸 비단결 같은 은발은 어깨를 살짝 덮고 있었다. 가녀리지만 연약하지는 않은 새하얀 피부 위에 올려진 예술품은 순간 호흡을 잊게 했다.
인간은 어째서 황금을 아름답게 여기게 되었을까?
수많은 이론이 있고 그 중엔 정론이라 부를 만한 것도 있었지만, 이 순간 그 이론들은 전부 쓰레기가 되었다.
그녀의 눈에 황금이 있기 때문에 황금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그 외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녹색과 하얀색이 섞인 원피스 형태의 드레스도, 어깨에 걸친 투명한 가디건도, 등에 메고 있는 그녀에게 어울리는 황금색 창도. 그저 단순한 배경이 지나지 않았다.
내게 보이는 것은 그녀가 발하는 빛뿐이다.
“재미있는 얘기는 아니고…, 뭐, 이것저것 얘기를 듣긴 했죠.”
“하긴, 우리 길드 마스터는 재미있는 얘기를 할 줄 모르니. 신입을 괴롭히기만 한 게 아닌지 모르겠어.”
소리는 들리지만, 뇌에 남지 않는다.
입은 움직이지만, 마음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시선은 움직이지만, 의식은 오로지 한 곳으로 향한다.
이제까지 머리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으론 이해하지 못했던 수많은 말들과 상황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아, 그 사람들이 이런 심정이었구나! 나는 어리석었다! 어째서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괴롭힘… 확실히 비슷한 걸 당한 것 같기는 한데….”
“오, 정말 그랬다면 길드 마스터가 그대에게 관심이 많다는 소리군. 보통은 사무적인 반응만 보이는 사람이니까.”
“별로 달갑지 않은 관심이네요.”
“후후. 지금이야 그래도 나중엔 도움이 많이 될걸? 모험가에게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인맥이야.”
“인맥이 중요하지 않은 직업이 오히려 적겠지만…. 그럼 이것도 인맥이군요? 리에나 선배님.”
입은 계속 움직인다. 여전히 내 모든 신경은 그녀에게 쏠려있다. 그런데도 육체는 상황에 맞춰서 움직인다. 나는 지금 내 의식의 신세계를 열었다. 그녀 덕분이다.
……아니, 그건 아니지.
정신 똑바로 차려! 얼빠지게 이게 무슨 짓이냐! 몸이 제멋대로 움직여서 망정이지…! 이제까지 쌓은 이미지가 한순간에 망가질 뻔했잖아?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은 거야? …아니, 젠장. 왜 여기서 잘 보이려는 생각이 떠오르는데! 병신아! 등신이냐고! 바보냐! 씨발! …근데 바보처럼 보이는 편이 좀 더 호감을 얻기 좋지 않을까… 아오, 씨발.
안 되겠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 다행히 입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지만, 이대로 가다간 내가 정신병에 걸리겠다. 아니. 이미 걸린 건가.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건 정신병이다. 지구에선 걸린 적 없으니 이세계의 풍토병이겠지.
…하아. 시발 이게 대체 무슨 소용이냐.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게 감정 아닌가? 분명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에 솔직하게 살기로 다짐하지 않았나? 물론, 감정 표현은 상황을 보고 예의를 지키는 법이지만… 감정 자체를 부정하는 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짓이다.
인정하자. 받아들이자.
대신 앞으로 나아가자. 한심하더라도, 바보 같더라도, 부딪쳐 봐야지. …젠장. 이건 전혀 상정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혼란스러움 속에서 정신을 부여잡고 의식을 내게 말을 걸고 있는 사람들에게 돌렸다. 붉은 머리의 여성. 리에나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도 분명 미인이지만, 그녀와 비교하면 그 빛이…… 아오, 씨발.
“오. 나를 알고 있나?”
“며칠 있다 보면 이 도시의 길드에서 유명한 분들의 이름을 못 들을 리가 없죠. 특징적인 인상착의도.”
“그것도 그렇군. 그래도 그대 같은 대형 신인이 먼저 아는 척을 해주다니. 나도 아직 퇴물은 아닌가 봐.”
“핫. 여전히 우리 길드의 에이스가 무슨 엄살이냐. 잔말 말고 우리 대형 신인에게 우리 소개 좀 해주지? 대장.”
“나는 농담도 못 하나? 시그 군. 저기 시건방진 덩치는 강철 등급의 잔쥬루다. 그 옆의 실실 웃고 있는 놈과 반대편에 있는 얼빠진 두 명은 청동 등급의 비리우, 라일리오, 바틸레노. 그리고 저기 혼자 앉아있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강철 등급의 아틸리아다. 모두 인사하도록.”
“소개가 너무 한 거 아닙니까? 아. 반가워요. 시그 군. 곧 따라잡히겠지만, 아직은 선배인 비리우입니다.”
“누님이 냉혹한 거야 다들 알던 사실이지 않수? 뭐, 반갑수다. 대형 신인 양반. 라일리오이외다.”
“하하하. 반가워. 바틸레노야. 레노라고 불러줘도 돼.”
“나는 아틸리아다. 반갑군.”
이걸로 조사단의 소개는 끝났다. 나도 인사를 하고 조사할 곳으로 가면 된다.
…아니, 한 명 남았어.
후. 각오했는데도 이런 생각을 하다니…. 처음 겪는 일에 정신을 못 차리겠네. 아아. 돌발상황에 실수를 저지른 분들을 비웃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네. 모두 반가워요. 시그입니다. 그런데… 아직 소개 안 하신 분이 계시는데요?”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 사람에게 향한다.
홀로 서 있는 그녀. 다른 모든 색채를 지워버리고 자신의 색만으로 세상을 물들이고 있는 그녀. 모든 소리를 지우고 자신의 정적으로 세상을 채운 그녀.
보는 순간 수십만 개의 미사여구가 떠오른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언어를 구사하여 그녀를 묘사하고 싶다. 내 마음에 탑을 세우고 그 안과 밖을 전부 그녀로 채우고 싶다.
나도 몰랐다.
내가 사랑에 빠지면 이렇게나 머저리가 될 줄은.
그리고 그것을 기뻐할 줄은.
내 착각일까? 그녀는 내가 들어온 순간부터 내게서 단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 내 망상으로 인한 현실 왜곡이라면 정말 심각한 상황이지만, 내 모든 감각이 그녀의 모든 감각이 조금 전부터 오로지 내게 향하고 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이건 착각이 아니라고. 그녀 또한 너에게 관심이 있다고.
그렇다면 어떤 관심일까?
단순히 자기보다 빠르게 옥석에 도달한 동갑내기 모험가를 보는 시선인가? 그렇다면… 실망이다.
이것도 처음이다. 누군가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기대하고 제멋대로 실망하는 건.
끝나지 않을 고민이 끝난 것은 그녀의 입이 열린 뒤였다.
그녀는 나를 보고 눈웃음을 지으면서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시그 님. 제 이름은 시르 플레인. 시그 님과 같은 옥석 모험가입니다.”
누가 천상의 성가대를 지상으로 모셔왔지?
…맙소사. 아니야. 이건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는… 아름답지만, 손발이 오그라드는 미사여구를 붙일 정도는 아니다.
그래. 외모도 그래. 내가 이제까지 본 사람 중에 당연코 가장 아름답지만, 비교가 안 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그래. 단점을 뽑자면 얼마든지 뽑을 수 있지. 키도 151cm로 작은 편이고 가슴도 그렇게 크지 않다. 내 명치 정도밖에 오지 않는다. 껴안기 딱 좋은 사이즈네. …아오 시발.
그런데 이름이 시르인가… 지금 내가 쓰는 이름과 비슷하군. 이건 운명인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사람끼리 끌어당기는 건가. 스탠드 술사인가. …아니, 시발 왜 자꾸 이러냐. 돌아버리겠네.
“아, 네. 반가워요. 같은 옥석 모험가인 시그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시그 님처럼 훌륭한 분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생긋 웃으면서 말하는 모습에 눈물이 나올 뻔했다. 함께… 기쁘다고? 역시, 나한테 관심이… 아아아아아아!!!!
그러니까! 행동 하나하나에 감격하지 말라고!
여기에 아무도 없었다면 대가리를 수십 번은 후려쳤을 거다! 냉정해져라! 쿨해져라! 여기서 추태를 보이면 어쩌자는 거야! 그녀가 보고 있잖아! …아오, 시발. 진짜 돌아버리겠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나는 천재가 아닌 천치라는 걸.
사랑에 빠진 천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