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19화 흑막 암시
* * *
흑막??.
이 어찌나 가슴 떨리는 울림이란 말인가.
지구에서도 흑막이라 불릴만한 인간이나 세력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만화나 소설처럼 뭔가 거창한 목적으로 움직이는 세력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흑막으로 움직였던 이유는 두 가지뿐이다.
돈과 권력.
숭고한 이상? 뭐? 세계를 올바른 길로 바르게 이끌어?
그런 사상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인간도 단 하나도 없었다. 뭐, 지지자들이 듣기 좋으라고 말로만 숭고한 이상을 내세우는 놈들은 적잖게 있었지만, 겉만 번드르르하지 속내는 돈과 권력을 탐할 놈들뿐이었다.
그렇다고 사상범이 아예 제로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상범이라 부를 만한 놈들은 세계를 위태롭게 만드는 흑막이 되지 못했다.
본래 세계를 위태롭게 만드는 건 사상의 여부가 아니라 실제로 세계를 위태롭게 만드는 힘이 있느냐에 달렸다.
물론, 사상 또한 그런 힘이 될 수 있지만, 지구에선 사상으로 세상을 위태롭게 만들 힘을 가진 흑막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 사상을 중점으로 세계를 불태웠던 인간들은 최종 보스나 마왕 같은 거지 흑막이 아니다.
애초에 사상범들은 99.9%가 관심병자들이라서 미디어에 노출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장막 뒤에서 세계를 뒤흔드는 흑막이 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이 ‘잊힌 신들의 추종자’라는 종자들은 지구에서 볼 수 없었던 사상범들이다.
물론, 이세계는 지구와는 달리 진짜로 신이 존재하고 심지어 화신化? 같은 걸 심심치 않게 내려보내는 세계이니만큼 신과 연관된 부분은 지구와 다를 수밖에 없긴 하다. 그래도 그것을 포함해도 색다른 유형인 건 사실이다.
일단, ‘잊힌 신들’만 봐도 이놈들의 목표가 옛적에 뒈진 신들을 부활시키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놈들이 일반적인 지식으론 알 수 없는 놈들이라는 건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놈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행동한다는 거요, 다른 하나는 권력층에서 이놈들의 존재를 철저히 감추고 있다는 점이다.
은밀하게 행동하는 이유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권력층이 일부러 이놈들을 감추고 있고, 그게 제법 잘 먹히고 있다는 건 꽤 여러 가지를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이놈들이 유명해지지 않으려는 이유와 유명해지면 안 되는 이유다.
거기까지 짐작은 했지만, 그걸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다.
낭중지추. 굳이 스스로 드러내지 않아도 내가 잘난 놈인 건 모두가 알게 될 거다.
“가지가지도 저질렀네요. 거기다가 절반가량이 저랑 연관이 있네요? 그래서 길드 마스터가 저를 그렇게나 의심했군요?”
“…나는 그대가 놈들이 전략을 바꾸면서 투입 시킨 첩자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처구니없는 오해였어.”
“이미 사과받은 일에 매달릴 필요는 없죠. 오해가 풀렸으면 그걸로 됐습니다.”
“고맙군.”
훨씬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유리 베르실은 놈들에 대해서 담담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보였던 강렬한 감정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 가라앉힌 뒤였다.
“놈들이 전략을 바꿀 리가 없었지. 지금 하는 짓만 봐도 그렇다. 굳이 눈에 띄는 사람을 투입 시킬 필요 없이 피해가 커지게 놔두는 편이 놈들에게 좋았을 테지.”
“음. 이건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그 잊힌 신들이라는 게 피와 살육을 탐하는 신이라도 되는 겁니까?”
잊힌 신들의 추종자라는 놈들이 설치는 이유는 뒈진 신들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놈들이 설치는 방법은 신들을 부활시키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런 방법을 쓰는 이유는 그것이 뒈진 신들의 본질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는 건 당연한 이치다. 단순한 삼단논법.
죽은 신이 아닌 잊힌 신이라고 표현한 시점에서, 신들의 존재 방식이 신앙과 크게 관련이 있다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예상대로 유리 베르실은 내 말에 동의했다.
“그렇다. …이름은 말할 수 없지만, 대다수가 피와 생명을 탐하던 신들이지.”
“죽어 마땅한 신들이었군요. 잊혀져서 다행이네요.”
방긋 웃으면서 한 말에 유리 베르실이 멍한 얼굴이 되었다. 자아. 어떤 반응을 보여주려나.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가. 동방인들의 감성은 알다가도 모르겠군.”
아니, 여기서 인종차별을?
뭐, 그런 건 아니겠지만.
흠. 그나저나 이 반응을 보면 역시 동방은 신들과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닌가 보네. 책에서도 그런 뉘앙스를 느꼈지.
“저도 이쪽 지역 사람들 감성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뭐, 그런 문화차이는 지금은 넘어가죠.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지. 지금 중요한 건 그놈들이 이 근처에서 수작질을 벌이고 있다는 거다.”
“이번 조사단도 단순히 재앙급 마수를 조사하기 위한 게 아니겠군요. 그런데 조사단 전원이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한두 사람만?”
“역시 상황파악이 빠르군.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건 좋지만…. 아니,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지.”
유리 베르실은 머리가 아픈지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고선 말을 이었다.
“조사단 중에 상세한 사정을 아는 건 단장뿐이다. 다른 모험가들은 특수한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것밖에 모르지. 현장에 가면 알 수밖에 없겠지만. 그 문제는 단장이 해결할 거다.”
“그렇군요. 그럼 저는 그들을 따라가서 제가 보고 겪은 걸 그대로 설명만 하면 되는 겁니까?”
“…호위도 있지.”
뽀삐나 그놈을 여기까지 부른 놈들을 만날 가능성을 고려하는 거구나? 그렇다면 조사단의 무력은 전부 합쳐도 나보다 밑이겠군. 길드가 내 수준을 어느 정도로 파악하고 있는지 조금 궁금하네.
“호위라니. 다들 등급이 어떤데요?”
“순은 하나. 강철 둘. 청동 셋. 그리고 그대를 포함해 옥석이 둘이다.”
“순은이 최고…. 흠. 그런데 저 말고도 옥석이 따라오는군요. 무슨 특기라도 있습니까?”
설마 나 말고도 옥석이 따라올 줄은 몰랐다. 이 임무는 언뜻 보면 간단해 보여도 사실은 굉장히 위험한 임무다. 내가 호위 역할도 해야 하는 것만 봐도 그렇지. 그런데 거기에 굳이 다른 옥석을 넣는다? 분명 나처럼 특별한 능력이 있을 거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유리 베르실은 긍정했다. 그러면서 약간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또 뭘 꾸미시나.
“사실 그쪽이 핵심이다. 그대가 오기 전까지는 그 아이가 우리 길드에서 가장 촉망받는 신입이었지. 옥석이 되는데 한 달 밖에 안 걸렸으니까. 지금은 모험가 경력 두 달째다.”
“오. 제 선배님이시네요.”
“현재 우리 길드 모험가 중에 그대보다 후배는 없어.”
“하하하. 그렇겠죠. 이제 겨우 나흘이니 말이죠.”
“정말, 고향에서 뭘 하다 왔는지 궁금하군. 알려주겠나?”
“그건 좀 더 친밀한 사이가 된 뒤에도 심사숙고해볼 문제죠.”
“그렇게까지 꽁꽁 감출 필요가 있는가?”
“민감한 개인사는 최대한 숨기는 게 민족 전통이라서요.”
“전통이면 어쩔 수 없지.”
유리 베르실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책에서 봤던 대로 알브는 전통과 예의를 중시했다. 종족 자체가 좋게 말하면 진중하다고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틀딱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죠. 옥석 모험가가 핵심이라니. 조사에 도움이 되는 특기가 있나 보죠?”
“그렇지. 그 아이가 있다면 토론토라의 재앙의 흔적을 확인하고 그놈들의 개입 증거까지 확보할 수 있을 거다. 정황상 확실하지만 물질적인 증거까지 있으면 상부를 움직이기 더욱 쉬워지겠지.”
“그렇겠죠. 그래서 그 아이 특기가 뭔데요?”
“나는 아이라고 부르지만, 그 아이의 나이는 25살로 그대와 동갑이다.”
“자기 나이가 많다고 굳이 어필 안 하셔도 잘 알고 있어요.”
“…끄응. 의외로 성격이 급하구나? 그 아이의 특기가 무엇인지는 직접 만나서 확인해라.”
“그 말은 아직 제가 보지 못한 사람이라는 거군요.”
“한동안 장기 의뢰를 처리하고 있었거든. 어제 막 도착했지. 고맙게도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조사단 의뢰를 받아줬다.”
“그야 길드 마스터가 강권하면 옥석 모험가는 분루를 삼키면서 의뢰를 맡을 수밖에 없겠죠.”
“…강권도 아니었고 그 아이는 이런 걸로 원한을 가질 성격도 아니야.”
“그야 그렇겠죠. 길드 마스터님의 안에서는.”
“…후우. 밉살맞은 녀석.”
어느 정도 친해진 사이끼리 할 수 있는 가벼운 농담을 나눈 뒤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저는 조사단과 동행해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습격을 대비하면서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면 된다는 거죠?”
“그렇지. 이번 일만 무사히 마치면 공적에 상당한 가산치가 들어갈 거다.”
“재앙을 쫓아 내고 드래곤을 잡은 시점에서 승급에 필요한 공적은 충분하지 않을 까요?”
“…모험가는 단순히 강한 몬스터를 잡았다고 승급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물론, 그대의 능력을 생각하면 계속 옥석에 붙들고 있는 것도 불합리한 일이겠지. 하지만 성실하지 못한 모험가는 제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승급을 시켜주지 않아. 승급엔 인성도 상당부분 평가가 들어가니 말이다.”
“그 부분은 걱정 없어요. 제 인성은 언제나 만점이니까요.”
“…그런 말을 당당하게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점은 높게 평가할만 하군.”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유리 베르실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지? 자기보다 뛰어난 인성을 가진 사람을 질투하는 건가? 그렇다면 여기선 대협이 되어서 이 정도 질투는 넘어가줘야겠군.
“어쨌든 조사단에서 제가 할 일은 그것 말고는 없죠? 만약 추가 근무가 있으면 보상을 요구할 겁니다.”
“그건 당연하지.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호위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을 테니까.”
“아, 그러고 보니 호위 임무는 따로 보상을 받아야 되죠?”
“가산점.”
“다음 달에는 청동이 되겠군요. 다다음 달에는 강철이고.”
“…그대라면 진짜로 그렇게 될 것 같아서 무섭군. 길드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가 될 거야.”
“최초가 아닌가요? 그건 의외네요.”
“자신감이 넘치는군. 하지만 세상엔 언제나 예외라는 게 있지. …대부분은 이미 명성 있고 실력 있는 사람들이 모험가가 되었을 때 아래 등급에 오래 두지 않기 위해서 빠르게 올려준 경우가 대다수지만 말이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극소수지만 저 같은 경우도 있군요?”
“지금 한 손에 꼽히는 모험가들의 절반이 그렇지.”
그렇게 말하면 유리 베르실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인 중에 그런 사람이 있는 건가? 제법 장렬한 백스토리가 있을 것 같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아니다. 나중에 듣고 싶기는 하지만 말이야. 내가 이런 건 또 사족을 못 쓰거든.
“저도 조만간 그런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하겠죠.”
“정말 자신감은 대단하단 말이야.”
“실력과 인성도.”
“…그래. 그렇다고 해두지.”
“그럼 이제 슬슬 조사단 분들을 만나게 해주시죠?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은 건 아니겠죠?”
“그대가 생각보다 빨리 와서 대화 시간이 났을 뿐이지. 그들은 잔뼈가 굵은 모험가들이야. 약속 시간을 어기는 머저리들과는 거리가 멀지.”
유리 베르실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이번에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접수원이 꾸벅 인사를 하고 들어왔다. 마법으로 신호를 보낸 건가? 그나저나 이 방 방음은 잘 되어 있겠지?
“히리에. 옥석 모험가 시그를 조사단에게 안내해주도록.”
“알겠습니다. 길드 마스터님.”
공손하게 인사한 접수원은 내게 눈짓을 보냈고 나도 눈치껏 그녀를 따라서 방을 나섰다. 다만 나가기 전에 유리 베르실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걸 잊지 않았다.
유리 베르실은 내 돌발 행동에 한 대 맞은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싫은 건 아니겠지. 앞으로 되도록 친하게 지내자고요. 당신과의 대화는 제법 즐거우니.
방을 나서자 접수원은 나를 보고 눈웃음을 짓더니 조용하게 말을 걸어왔다.
“길드 마스터님께 설명은 들으셨죠?”
“이것저것 들었죠.”
“좋아요. 그럼 곧바로 가죠.”
“그전에 대충 어떤 사람들인지 설명 좀.”
내 말에 접수원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담담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다들 모난 성격은 아니세요. 옥석 한 분을 제외하면 다들 경력이 제법 되시거든요. 경력이 길으신 분들일수록 쓸데없는 마찰은 피하시는 편이죠. 그중 이번 조사단장인 순은 모험가 리에나 씨는 공명정대함으로 유명하신 분이에요. 시그 님이 먼저 무례하게 굴지 않는 이상 시비를 걸지 않으시겠죠.”
“마치 내가 먼저 무례하게 굴 것처럼 말하시네요!”
“어머,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에요? 그런 오해를 하시다니. 슬프네요.”
“좀 더 슬퍼해도 되는데. 울어도 되는데.”
“저를 울리시려면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세요. 아. 그렇다고 자기 숙소로 부르시는 건 조금…, 아니, 많이.”
“성희롱 금지! 남자한테도 적용되거든?!”
“성희롱? 꽤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동방에서 쓰는 표현인가요? 그리고 모험가가 고작 이 정도 농담에 정색하시다니. …귀여우셔라.”
“캬악! 이 화제는 그만. 나는 그런 거 싫어하니까. 본론으로 갑시다. 본론으로.”
“후후후. 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리에나 씨는 시그 님도 안면이 있으신 분이니 제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 거예요.”
“아. 그 붉은 머리 모험가분?”
“역시, 바로 아시네요. 그분을 대하는 것만 조심하시면 별 문제는 없을 거예요.”
“어. 한 사람 빠진 것 같은데.”
나와 같은 옥석 모험가에 대한 얘기가 없다. 유리 베르실의 말을 생각하면 접수원이 언급을 안 할 리가 없을 텐데? 나 이전에 가장 빠르게 승급하고 있던 모험가 아닌가?
그러자 접수원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분은 직접 만나보시면 되요. 제 생각이지만 시그 님과 꽤 잘 맞을 것 같군요.”
“길드 마스터도 접수원 씨도 사람 기대감을 부풀리는 솜씨가 제법이네요. 좋아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본인들 입으론 말하지 않는지 두고 봅시다.”
“네에. 기대하고 봐주세요. 자아. 여기가 조사단분들이 모여계신 곳입니다. 모두 준비는 끝나셨으니 인사만 마치고 바로 출발하셔도 돼요. 저는 아래에서 해결해야 되는 일들이 있어서 먼저 내려가볼게요.”
“수고하세요.”
“시그 님이야 말로요.”
그 말만 남기고 접수원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이내 작게 한숨을 쉬고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 옥석 모험가가 너무 신경이 쓰인다. 두 사람이 의미심장하게 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등허리가 간질거리는 무시할 수 없는 직감이 들었다.
나에게 아주 큰 해를 끼칠 것 같은 직감이….
이제까지 적중률 87.3%를 자랑하는 직감이니, 그 옥석 모험가에게 뭐가 있긴 있다. 다만, 12.7%의 실패를 생각하면 내게 해가 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 정도로 내 직감이 반응하는 걸 보면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뭐, 부딪쳐 보면 알겠지.
마음의 준비를 하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얼어붙었다.
“아. 드디어 왔군. 길드 마스터와의 면담이 제법 길더군. 꽤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나 봐?”
왜인지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붉은 머리의 여성 때문은 아니다.
그 뒤에서 나를 평가하듯이 살피고 있는 땀내 나는 남자 넷에 바바리안 같은 여성 한 명 때문도 아니다.
그 뒤에.
홀로 서서 있는 여성.
나를 보고 잠깐 놀란 듯이 아름다운 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봄바람에 녹아내리는 눈 같은 표정의… 순백의 여성.
그녀 때문이었다.
깨달았다.
조금 전의 내 직감이 정확히 뭐였는지.
나는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사랑에 빠졌다.
〈 19화 〉 19화 흑막 암시
* * *
흑막??.
이 어찌나 가슴 떨리는 울림이란 말인가.
지구에서도 흑막이라 불릴만한 인간이나 세력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만화나 소설처럼 뭔가 거창한 목적으로 움직이는 세력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흑막으로 움직였던 이유는 두 가지뿐이다.
돈과 권력.
숭고한 이상? 뭐? 세계를 올바른 길로 바르게 이끌어?
그런 사상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인간도 단 하나도 없었다. 뭐, 지지자들이 듣기 좋으라고 말로만 숭고한 이상을 내세우는 놈들은 적잖게 있었지만, 겉만 번드르르하지 속내는 돈과 권력을 탐할 놈들뿐이었다.
그렇다고 사상범이 아예 제로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상범이라 부를 만한 놈들은 세계를 위태롭게 만드는 흑막이 되지 못했다.
본래 세계를 위태롭게 만드는 건 사상의 여부가 아니라 실제로 세계를 위태롭게 만드는 힘이 있느냐에 달렸다.
물론, 사상 또한 그런 힘이 될 수 있지만, 지구에선 사상으로 세상을 위태롭게 만들 힘을 가진 흑막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 사상을 중점으로 세계를 불태웠던 인간들은 최종 보스나 마왕 같은 거지 흑막이 아니다.
애초에 사상범들은 99.9%가 관심병자들이라서 미디어에 노출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장막 뒤에서 세계를 뒤흔드는 흑막이 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이 ‘잊힌 신들의 추종자’라는 종자들은 지구에서 볼 수 없었던 사상범들이다.
물론, 이세계는 지구와는 달리 진짜로 신이 존재하고 심지어 화신化? 같은 걸 심심치 않게 내려보내는 세계이니만큼 신과 연관된 부분은 지구와 다를 수밖에 없긴 하다. 그래도 그것을 포함해도 색다른 유형인 건 사실이다.
일단, ‘잊힌 신들’만 봐도 이놈들의 목표가 옛적에 뒈진 신들을 부활시키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놈들이 일반적인 지식으론 알 수 없는 놈들이라는 건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놈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행동한다는 거요, 다른 하나는 권력층에서 이놈들의 존재를 철저히 감추고 있다는 점이다.
은밀하게 행동하는 이유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권력층이 일부러 이놈들을 감추고 있고, 그게 제법 잘 먹히고 있다는 건 꽤 여러 가지를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이놈들이 유명해지지 않으려는 이유와 유명해지면 안 되는 이유다.
거기까지 짐작은 했지만, 그걸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다.
낭중지추. 굳이 스스로 드러내지 않아도 내가 잘난 놈인 건 모두가 알게 될 거다.
“가지가지도 저질렀네요. 거기다가 절반가량이 저랑 연관이 있네요? 그래서 길드 마스터가 저를 그렇게나 의심했군요?”
“…나는 그대가 놈들이 전략을 바꾸면서 투입 시킨 첩자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처구니없는 오해였어.”
“이미 사과받은 일에 매달릴 필요는 없죠. 오해가 풀렸으면 그걸로 됐습니다.”
“고맙군.”
훨씬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유리 베르실은 놈들에 대해서 담담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보였던 강렬한 감정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 가라앉힌 뒤였다.
“놈들이 전략을 바꿀 리가 없었지. 지금 하는 짓만 봐도 그렇다. 굳이 눈에 띄는 사람을 투입 시킬 필요 없이 피해가 커지게 놔두는 편이 놈들에게 좋았을 테지.”
“음. 이건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그 잊힌 신들이라는 게 피와 살육을 탐하는 신이라도 되는 겁니까?”
잊힌 신들의 추종자라는 놈들이 설치는 이유는 뒈진 신들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놈들이 설치는 방법은 신들을 부활시키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런 방법을 쓰는 이유는 그것이 뒈진 신들의 본질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는 건 당연한 이치다. 단순한 삼단논법.
죽은 신이 아닌 잊힌 신이라고 표현한 시점에서, 신들의 존재 방식이 신앙과 크게 관련이 있다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예상대로 유리 베르실은 내 말에 동의했다.
“그렇다. …이름은 말할 수 없지만, 대다수가 피와 생명을 탐하던 신들이지.”
“죽어 마땅한 신들이었군요. 잊혀져서 다행이네요.”
방긋 웃으면서 한 말에 유리 베르실이 멍한 얼굴이 되었다. 자아. 어떤 반응을 보여주려나.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가. 동방인들의 감성은 알다가도 모르겠군.”
아니, 여기서 인종차별을?
뭐, 그런 건 아니겠지만.
흠. 그나저나 이 반응을 보면 역시 동방은 신들과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닌가 보네. 책에서도 그런 뉘앙스를 느꼈지.
“저도 이쪽 지역 사람들 감성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뭐, 그런 문화차이는 지금은 넘어가죠.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지. 지금 중요한 건 그놈들이 이 근처에서 수작질을 벌이고 있다는 거다.”
“이번 조사단도 단순히 재앙급 마수를 조사하기 위한 게 아니겠군요. 그런데 조사단 전원이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한두 사람만?”
“역시 상황파악이 빠르군.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건 좋지만…. 아니,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지.”
유리 베르실은 머리가 아픈지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고선 말을 이었다.
“조사단 중에 상세한 사정을 아는 건 단장뿐이다. 다른 모험가들은 특수한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것밖에 모르지. 현장에 가면 알 수밖에 없겠지만. 그 문제는 단장이 해결할 거다.”
“그렇군요. 그럼 저는 그들을 따라가서 제가 보고 겪은 걸 그대로 설명만 하면 되는 겁니까?”
“…호위도 있지.”
뽀삐나 그놈을 여기까지 부른 놈들을 만날 가능성을 고려하는 거구나? 그렇다면 조사단의 무력은 전부 합쳐도 나보다 밑이겠군. 길드가 내 수준을 어느 정도로 파악하고 있는지 조금 궁금하네.
“호위라니. 다들 등급이 어떤데요?”
“순은 하나. 강철 둘. 청동 셋. 그리고 그대를 포함해 옥석이 둘이다.”
“순은이 최고…. 흠. 그런데 저 말고도 옥석이 따라오는군요. 무슨 특기라도 있습니까?”
설마 나 말고도 옥석이 따라올 줄은 몰랐다. 이 임무는 언뜻 보면 간단해 보여도 사실은 굉장히 위험한 임무다. 내가 호위 역할도 해야 하는 것만 봐도 그렇지. 그런데 거기에 굳이 다른 옥석을 넣는다? 분명 나처럼 특별한 능력이 있을 거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유리 베르실은 긍정했다. 그러면서 약간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또 뭘 꾸미시나.
“사실 그쪽이 핵심이다. 그대가 오기 전까지는 그 아이가 우리 길드에서 가장 촉망받는 신입이었지. 옥석이 되는데 한 달 밖에 안 걸렸으니까. 지금은 모험가 경력 두 달째다.”
“오. 제 선배님이시네요.”
“현재 우리 길드 모험가 중에 그대보다 후배는 없어.”
“하하하. 그렇겠죠. 이제 겨우 나흘이니 말이죠.”
“정말, 고향에서 뭘 하다 왔는지 궁금하군. 알려주겠나?”
“그건 좀 더 친밀한 사이가 된 뒤에도 심사숙고해볼 문제죠.”
“그렇게까지 꽁꽁 감출 필요가 있는가?”
“민감한 개인사는 최대한 숨기는 게 민족 전통이라서요.”
“전통이면 어쩔 수 없지.”
유리 베르실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책에서 봤던 대로 알브는 전통과 예의를 중시했다. 종족 자체가 좋게 말하면 진중하다고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틀딱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죠. 옥석 모험가가 핵심이라니. 조사에 도움이 되는 특기가 있나 보죠?”
“그렇지. 그 아이가 있다면 토론토라의 재앙의 흔적을 확인하고 그놈들의 개입 증거까지 확보할 수 있을 거다. 정황상 확실하지만 물질적인 증거까지 있으면 상부를 움직이기 더욱 쉬워지겠지.”
“그렇겠죠. 그래서 그 아이 특기가 뭔데요?”
“나는 아이라고 부르지만, 그 아이의 나이는 25살로 그대와 동갑이다.”
“자기 나이가 많다고 굳이 어필 안 하셔도 잘 알고 있어요.”
“…끄응. 의외로 성격이 급하구나? 그 아이의 특기가 무엇인지는 직접 만나서 확인해라.”
“그 말은 아직 제가 보지 못한 사람이라는 거군요.”
“한동안 장기 의뢰를 처리하고 있었거든. 어제 막 도착했지. 고맙게도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조사단 의뢰를 받아줬다.”
“그야 길드 마스터가 강권하면 옥석 모험가는 분루를 삼키면서 의뢰를 맡을 수밖에 없겠죠.”
“…강권도 아니었고 그 아이는 이런 걸로 원한을 가질 성격도 아니야.”
“그야 그렇겠죠. 길드 마스터님의 안에서는.”
“…후우. 밉살맞은 녀석.”
어느 정도 친해진 사이끼리 할 수 있는 가벼운 농담을 나눈 뒤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저는 조사단과 동행해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습격을 대비하면서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면 된다는 거죠?”
“그렇지. 이번 일만 무사히 마치면 공적에 상당한 가산치가 들어갈 거다.”
“재앙을 쫓아 내고 드래곤을 잡은 시점에서 승급에 필요한 공적은 충분하지 않을 까요?”
“…모험가는 단순히 강한 몬스터를 잡았다고 승급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물론, 그대의 능력을 생각하면 계속 옥석에 붙들고 있는 것도 불합리한 일이겠지. 하지만 성실하지 못한 모험가는 제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승급을 시켜주지 않아. 승급엔 인성도 상당부분 평가가 들어가니 말이다.”
“그 부분은 걱정 없어요. 제 인성은 언제나 만점이니까요.”
“…그런 말을 당당하게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점은 높게 평가할만 하군.”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유리 베르실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지? 자기보다 뛰어난 인성을 가진 사람을 질투하는 건가? 그렇다면 여기선 대협이 되어서 이 정도 질투는 넘어가줘야겠군.
“어쨌든 조사단에서 제가 할 일은 그것 말고는 없죠? 만약 추가 근무가 있으면 보상을 요구할 겁니다.”
“그건 당연하지.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호위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을 테니까.”
“아, 그러고 보니 호위 임무는 따로 보상을 받아야 되죠?”
“가산점.”
“다음 달에는 청동이 되겠군요. 다다음 달에는 강철이고.”
“…그대라면 진짜로 그렇게 될 것 같아서 무섭군. 길드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가 될 거야.”
“최초가 아닌가요? 그건 의외네요.”
“자신감이 넘치는군. 하지만 세상엔 언제나 예외라는 게 있지. …대부분은 이미 명성 있고 실력 있는 사람들이 모험가가 되었을 때 아래 등급에 오래 두지 않기 위해서 빠르게 올려준 경우가 대다수지만 말이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극소수지만 저 같은 경우도 있군요?”
“지금 한 손에 꼽히는 모험가들의 절반이 그렇지.”
그렇게 말하면 유리 베르실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인 중에 그런 사람이 있는 건가? 제법 장렬한 백스토리가 있을 것 같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아니다. 나중에 듣고 싶기는 하지만 말이야. 내가 이런 건 또 사족을 못 쓰거든.
“저도 조만간 그런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하겠죠.”
“정말 자신감은 대단하단 말이야.”
“실력과 인성도.”
“…그래. 그렇다고 해두지.”
“그럼 이제 슬슬 조사단 분들을 만나게 해주시죠?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은 건 아니겠죠?”
“그대가 생각보다 빨리 와서 대화 시간이 났을 뿐이지. 그들은 잔뼈가 굵은 모험가들이야. 약속 시간을 어기는 머저리들과는 거리가 멀지.”
유리 베르실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이번에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접수원이 꾸벅 인사를 하고 들어왔다. 마법으로 신호를 보낸 건가? 그나저나 이 방 방음은 잘 되어 있겠지?
“히리에. 옥석 모험가 시그를 조사단에게 안내해주도록.”
“알겠습니다. 길드 마스터님.”
공손하게 인사한 접수원은 내게 눈짓을 보냈고 나도 눈치껏 그녀를 따라서 방을 나섰다. 다만 나가기 전에 유리 베르실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걸 잊지 않았다.
유리 베르실은 내 돌발 행동에 한 대 맞은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싫은 건 아니겠지. 앞으로 되도록 친하게 지내자고요. 당신과의 대화는 제법 즐거우니.
방을 나서자 접수원은 나를 보고 눈웃음을 짓더니 조용하게 말을 걸어왔다.
“길드 마스터님께 설명은 들으셨죠?”
“이것저것 들었죠.”
“좋아요. 그럼 곧바로 가죠.”
“그전에 대충 어떤 사람들인지 설명 좀.”
내 말에 접수원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담담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다들 모난 성격은 아니세요. 옥석 한 분을 제외하면 다들 경력이 제법 되시거든요. 경력이 길으신 분들일수록 쓸데없는 마찰은 피하시는 편이죠. 그중 이번 조사단장인 순은 모험가 리에나 씨는 공명정대함으로 유명하신 분이에요. 시그 님이 먼저 무례하게 굴지 않는 이상 시비를 걸지 않으시겠죠.”
“마치 내가 먼저 무례하게 굴 것처럼 말하시네요!”
“어머,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에요? 그런 오해를 하시다니. 슬프네요.”
“좀 더 슬퍼해도 되는데. 울어도 되는데.”
“저를 울리시려면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세요. 아. 그렇다고 자기 숙소로 부르시는 건 조금…, 아니, 많이.”
“성희롱 금지! 남자한테도 적용되거든?!”
“성희롱? 꽤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동방에서 쓰는 표현인가요? 그리고 모험가가 고작 이 정도 농담에 정색하시다니. …귀여우셔라.”
“캬악! 이 화제는 그만. 나는 그런 거 싫어하니까. 본론으로 갑시다. 본론으로.”
“후후후. 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리에나 씨는 시그 님도 안면이 있으신 분이니 제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 거예요.”
“아. 그 붉은 머리 모험가분?”
“역시, 바로 아시네요. 그분을 대하는 것만 조심하시면 별 문제는 없을 거예요.”
“어. 한 사람 빠진 것 같은데.”
나와 같은 옥석 모험가에 대한 얘기가 없다. 유리 베르실의 말을 생각하면 접수원이 언급을 안 할 리가 없을 텐데? 나 이전에 가장 빠르게 승급하고 있던 모험가 아닌가?
그러자 접수원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분은 직접 만나보시면 되요. 제 생각이지만 시그 님과 꽤 잘 맞을 것 같군요.”
“길드 마스터도 접수원 씨도 사람 기대감을 부풀리는 솜씨가 제법이네요. 좋아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본인들 입으론 말하지 않는지 두고 봅시다.”
“네에. 기대하고 봐주세요. 자아. 여기가 조사단분들이 모여계신 곳입니다. 모두 준비는 끝나셨으니 인사만 마치고 바로 출발하셔도 돼요. 저는 아래에서 해결해야 되는 일들이 있어서 먼저 내려가볼게요.”
“수고하세요.”
“시그 님이야 말로요.”
그 말만 남기고 접수원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이내 작게 한숨을 쉬고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 옥석 모험가가 너무 신경이 쓰인다. 두 사람이 의미심장하게 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등허리가 간질거리는 무시할 수 없는 직감이 들었다.
나에게 아주 큰 해를 끼칠 것 같은 직감이….
이제까지 적중률 87.3%를 자랑하는 직감이니, 그 옥석 모험가에게 뭐가 있긴 있다. 다만, 12.7%의 실패를 생각하면 내게 해가 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 정도로 내 직감이 반응하는 걸 보면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뭐, 부딪쳐 보면 알겠지.
마음의 준비를 하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얼어붙었다.
“아. 드디어 왔군. 길드 마스터와의 면담이 제법 길더군. 꽤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나 봐?”
왜인지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붉은 머리의 여성 때문은 아니다.
그 뒤에서 나를 평가하듯이 살피고 있는 땀내 나는 남자 넷에 바바리안 같은 여성 한 명 때문도 아니다.
그 뒤에.
홀로 서서 있는 여성.
나를 보고 잠깐 놀란 듯이 아름다운 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봄바람에 녹아내리는 눈 같은 표정의… 순백의 여성.
그녀 때문이었다.
깨달았다.
조금 전의 내 직감이 정확히 뭐였는지.
나는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사랑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