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에 천재가 가면-17화 (17/93)

〈 17화 〉 17화 흑막 암시

* * *

그렇다고 진짜 죽일 수는 없다. 나는 사람이 짜증 난다고 죽이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그랬다면 지구에서 유례없는 학살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 거다. 진짜 참을 수 없을 때도 있었지만, 견뎌냈었지.

뭐, 살인이 좋은 일은 아니지. 굳이 할 필요도 없고. 그건 지구나 이 세계나 마찬가지다. 살인은 되도록 지양할 거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닌 이상에야 반드시.

이것은 스스로 부여한 시련이다.

“무시하지 말아 주세요오오오! 시그 니이이임!”

야이, 싯팔.

진지한 생각 중인데 좆같은 사운드가 귀를 어지럽혔다. 이런 라노벨스러운 말투를 현실에서 들어줘야 해? 시발. 이게 진심이 아니라 연기인 점이 더 좆같다. 어떻게 해야 상대방이 좆같아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을 사운드다.

그렇다고 계속 무시하고 갈 수는 없다. 이 녀석을 데리고 길드로 가면 그건 그거대로 피곤한 일들이 생길 테니까. 이 기레기는 조사단을 눈치채고 신문에 실어버리고도 남을 년이다.

그러면 재앙급 몬스터의 등장을 숨기려는 길드도 엿 먹게 된다. 거기엔 길드까지 이 년을 데리고 간 내 책임도 있을 테고. 최근의 유명세로 질투도 많이 받는데 이런 실수까지 저지르면 평판이 수직하락한다.

제아무리 내가 남의 평판을 그리 신경 쓰지 않는 인간이어도 괜한 실수로 불이익을 당할 이유도 없다. 뭐가 됐든 이 기레기는 외형만 좋지 모든 면에서 내게 불이익만 되는 존재다.

노출하지 않으면서도 야하게 보이는 복장은 나름의 전략이겠지만, 나한테는 안 통한다. 이 년아.

나는 혐오감을 숨기지 않으면서 이마를 쓸어올리고는 씹어 뱉듯이 말했다.

“그 좃같은 메아리만 그만두면 취재에 응해 줄 수 있어.”

“그러면 저쪽의 카페에 갈까요? 커피는 제가 살게요!”

이 시발년이 태세전환 보소.

생긋 웃는 면상에 주먹을 날려주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았다. 그래. 어쩌겠어.

설마, 이세계에서도 기레기에게 시달릴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만, 이세계의 문명 수준을 얕본 내 잘못도 있다.

“와! 드디어 인터뷰를 땃네요! 선배들도 못 딴 인터뷰를! 제가! 드래곤 슬레이어 시그 님에게!”

“…시끄러우니까 입 좀 다물어라.”

“넵!”

진짜로 입을 다물고 양팔을 직각으로 흔들면서 앞서가는 기레기를 보니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아름다운 외모와 목소리를 생각하면 저런 장난스러운 행동은 오히려 호감의 요소겠지만, 장난스럽게 흔들리는 날개를 보는 내 심정은 지랄이 짜다는 것뿐이었다. 오히려 책으로 먼저 접했던 이 종족에게 편견이 생길 것 같았다.

천인?人

번역명처럼 [하늘의 인간]이라는 뜻으로 통용되는 종족이다. 날개가 달리고 조류처럼 뼈가 비어서 무게가 가볍고 평균적으로 인간보다 강력한 마력과 인간의 세 배에 달하는 수명을 가지는 것을 제외하면 인간과 다를 게 없는 종족이다. 존나 다르네.

어쨌든 여러모로 인간보다 평균적으로 우수한 종족이다. 이건 이전에 만났던 알브도 마찬가지인데, 천인은 활동영역이 인간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 알브보다 좀 더 자주 엮이고 인간과 비교도 많이 당하는 종족이다.

그리고 그 비교 결과는 애초에 이들에게 천인?人이라는 거창한 종족명을 붙여준 것에서 알다시피 천인의 승리였다.

뼈가 비어서 신체 강도가 평균적으로 떨어지는 것을 제외하면 근력 자체는 인간과 별 차이가 없었고, 오히려 강력한 마력과 타고난 비행능력, 긴 수명으로 과거에는 인간들을 노예처럼 지배한 역사가 있을 정도의 강력한 종족이다.

지금은 쇠락해서 인간을 지배하긴커녕 인간에게 빌붙어 사는 종족이 되어버렸지만… 평균적으로 아름다운 외형과 마치 천사 같은 날개 때문에, 여전히 경외하는 감정을 가지는 인간들이 많은 종족이다.

내가 읽은 책에서도 외형과 천품을 찬양하는 내용이 많았는데… 그래서 나는 직접 실물을 보기 전까진, 판타지 세계이니 천사 같은 종족도 있구나~ 라고 낙천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결과, 행동은 기레기 그 자체에 천품은 오만하기 짝이 없는 천인의 실체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얼얼해졌지만.

참고로 천인이 쇠락한 이유는 그 지랄 같은 천품과 낮은 출생률이(현대 한국보다 못한 수준의 출생률을 자랑했다) 인간들의 발전과 시너지를 일으켜서, 천인 왕국이 무너진 뒤에 소수종족으로 몰락했기 때문이다.

뭐, 그래도 부자가 망해도 삼대는 간다고 그 외형과 강력한 능력을 주축으로 인간사회에서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요즘 천인들이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가 바로 기레기… 아니, 언론이다. 역시, 머리가 좋은 종족이라서 그런지 앞으로 뭐가 중요한지 알고 있다. 소수로 다수를 입맛대로 조종하는 것은 언론장악이 최고지.

뭐, 지금은 천인의 추악한 본색이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그 천인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부류로 보이는 녀석의 타겟이 됐다는 거지.

선배가 어쩌고 저째? 지랄하고 있네. 네가 이 도시 천인들의 공주님이나 다름없는 건 이미 알고 있거든? 젊은 애들은 잘 모르던 것 같던데, 나이 좀 있는 사람들은 네가 귀한 신분인 거 다들 아시더라.

그런 녀석이 가증스러운 말투로 달려드니 혐오감이 안 들레야 안 들 수가 없다.

접수원이야 나를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그건 나에게도 이득이 되는 행동이었다. 상부상조였지. 하지만 이 년은 아니다. 나에겐 이득 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저년만 본인의 취미생활을 마음껏 즐기면서 이득을 얻는다. 시발년이. 누굴 호구로 보나?

하지만 그렇다고 권력자의 딸과 대놓고 척지는 것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다. 그렇다고 굽신거리는 건 말도 안 되어서 선택한 방법이 솔직하게 거칠게 말하면서도 접근 자체를 차단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취미생활로 기자 노릇을 하는 년답게 내가 만든 캐릭터에 꽂혔는지 귀찮게는 굴어도 그 이상의 선을 넘지는 않았다. 내가 빌미를 주지 않은 것도 있지만, 이런 관계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욕먹는 걸 즐기다니. 마조냐고.

“여기 커피 두 잔이요~!”

“네. 주문 받았습니다.”

“자, 자! 여기 앉죠. 시그 님.”

기레기는 자연스럽게 주문을 하더니 적당한 자리를 점거했다. 한적한 시간대라 쏠리는 시선은 적었지만, 일부러 관심받으려고 한 행동이란 걸 알기에 기분이 더럽다.

오늘 오후쯤에는 내가 천인 아가씨랑 카페에서 밀회를 가졌다는 소문이 도시 전체에 쫙 퍼지겠지. 어휴. 귀찮아.

“호들갑 좀 그만 떨지? 나이가 몇인데 그러고 앉았냐. 부모님이 뭐라 안 하시든?”

“오히려 좋아하시는데요? 언제나 명랑한 게 제 장점이니까요. 이건 가족들과 동료들도 전부 인정하는 사실!”

“지랄하네.”

“아앗! 또, 또 나쁜 말 하신다! 입이 험한 남자는 여자에게 인기 없어요!”

“필요 없어.”

“제 호감도도 떨어지는데요?”

“더더욱 필요 없어. 아니, 그냥 시궁창에 처박아서 바다까지 떠내려갔으면 좋겠는데.”

“너무해!”

“너무한 건 네 머리고요.”

평범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커피가 나왔다. 커피를 배달한 점원은 웃는 얼굴로 커피를 놓고는 빠른 속도로 물러났다. 그래. 나 같아도 이런 테이블에 오래 있고 싶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왜 내가 당사자지? 더러운 권력 같으니! 닝기미.

“그래. 성능이 지나치게 떨어져서 장식물 수준으로 하락한 어깨 위의 구조물을 수리할 방법을 알려달라는 부탁이었지?”

“금시초문인데요! 대체 어떻게 해야 그런 모욕적인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할 수 있는 건가요?!”

“역겨운 말을 웃는 얼굴로 할 수 있는 너보다는 나아. 그리고 일단, 대답을 해주자면. 아무리 나라도 작살 날대로 작살 나버린 뇌를 수리하는 방법은 몰라. 가장 좋은 방법은 자른 다음에 새거로 갈아 끼우는 거지.”

“그럼 죽잖아요! 아니, 애초에 그런 목적이 아니거든요!”

살살 놀려주니 슬슬 가면이 벗겨졌다. 더 이상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 못 하는 녀석을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면서 피식 웃자, 놈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랐다가 이내 체념한 표정을 짓고선 테이블에 엎드렸다.

…가슴이 아름답게 눌리네. 와이셔츠의 틈으로 보이는 골짜기가 실로 아름답다. 저 안에는 어떤 생물이 살고 있을까? 분명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음란한 생물이 살고 있겠지.

…하아. 불쌍한 생물! 남자여!

그 문장으로 번뇌를 털어내고 기레기의 반응을 기다렸다. 한 30초 정도 음란하지 않지만 음란한 자세로 칭얼거리던 녀석은 이내 뾰로통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목덜미가 예쁘네. 이래서 천인이 지금도 대접을 받는구나? 내면은 쓰레기들인데 말이야.

“시그 님은 저한테 너무 차가우세요. 왜 그러시는 거예요?”

“네가 싫어서.”

“진짜 너무해!”

“진짜 너무한 거는 이런 말을 듣고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는 너고요.”

“헤헤. 제가 인내심이 조금 강하거든요! 시그 님 같은 분을 상대하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죠!”

이 년이 웃는 낯짝으로 엿을 먹이려고 하네?

“그러냐. 그런데 나는 그런 인내심이 없어서 너를 상대하기 싫어. 애초에 나를 상대하려는 인내심의 세 배는 필요하고.”

“뭔가요? 그 비교는! 제가 시그 님보다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건가요?!”

“당연하지. 일단, 외모부터 생각을 해봐라.”

“……네?”

뜻밖의 말이었는지 기레기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접수원 때부터 느꼈지만, 미인은 멍청한 표정도 그림이 된다. 후우. 이게 외모의 격차사회다. 나도 나름 얼굴수재는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 세계에선 평균보다 조금 아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건 키뿐이고.

뭐, 지금 중요한 건 기레기가 필요 이상으로 기분이 상하지 않게 하면서 쓸데없는 행동을 하지 않게 만드는 거지. 다른 화제로 정신을 쏠리게 만들어서 조사단 쪽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게 만드는 거다.

나는 바로 말하는 대신 커피를 홀짝 마셨다. 설탕을 제법 탔는지 단맛이 강한 이 세계의 커피는 지구에서 마셔본 에스프레소와 큰 차이가 없었다. 나는 꽤 섬세한 미각을 가지고 있지만, 커피에는 관심이 없어서 어떤 원두가 어떤 맛을 내는지 모르기에 정확한 비교는 못 한다. 그래도 요리와 마찬가지로 커피도 괜찮은 수준이었다.

그렇게 짧게 침묵을 넣어서 기레기를 좀 더 안절부절못하게 만든 뒤에 입을 열었다.

“나야 키가 큰 것 말고는 평범한 얼굴이지만, 너는 아니잖아? 백이면 백. 미인이라고 부를 얼굴이지. 얼굴만이냐? 옷 밖으로 드러나는 몸매도 뭇 남성들의 가슴엔 불을 지피고 뭇 여성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몸매지.”

“그, 그, 저, 저기…?”

“옷도 그래.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만, 노출은 거의 없으면서도 몸매는 확연하게 부각 되지. 거기다가 치마를 입고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치마 안쪽은 마법 같은 거로 못 보게 막아 놨잖아? 뭐, 날아다니는 것 자체를 뭐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무의식적으로 안쪽을 봤다가 시커먼 어둠만 본 사람들은 너한테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끼겠지.”

“………으, 아.”

“그러니까, 너를 상대하는 건 나를 상대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밖에 없어. 외모부터 행동까지 남자들에겐 긴장감을 주고 여자들에겐 적개심을 주잖아? 뭐, 나처럼 그걸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그러지 못하겠지.”

“………….”

얼굴이 완전히 빨개진 기레기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귀까지 빨개졌네. 남자가 대놓고 이런 말을 했으니 수치스럽겠지. 지구였다면 성희롱으로 고소당해도 할 말이 없는 발언이다. 당연히 나도 다른 여성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은 없다. 오히려 이것보다 약한 수위의 말을 하는 인간도 쓰레기 보듯이 봤었다.

그런 내가 이런 손발이 오그라드는 말을 한 것은 그저 이 녀석에게 필요 이상으로 미움받지 않으면서도 필요 이상으로 관심을 받고 싶지 않아서다. 이세계는 성희롱이 범죄가 아니니까. 사람들의 보편적인 인식도 지구보다 훨씬 느슨해서 대놓고 천박하게 얘기하지 않는 이상, 이 정도로는 생사결전을 벌일 정도의 모욕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녀석은 기레기지만 똑똑하니까. 내가 지금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했는지 이해하겠지.

예상대로 녀석은 1분 정도 수치스러워하다가 이내 내 의도를 깨달았는지 여전히 붉은 얼굴로 고개를 살짝 들고선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짓궂어요. 시그 님. 그렇게 대놓고 말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이 정도로 말하지 않으면 네가 통하지도 않은 남사스러운 짓을 그만두지 않을 테니까. 까놓고 말해서 불편하기만 하거든? 의도를 알고 있으니 더더욱.”

내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기레기는 볼을 한껏 부풀리더니(역겨운 행동이지만 미인이 하니 봐줄 만했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아. 이제까지 제 행동을 싫어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는데.”

“겉으로 티만 안 냈을 뿐이지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겁나 많았을 걸?”

“특히나 남성분들은 제 가슴과 엉덩이에서 추잡한 시선을 때지 못했거든요.”

“불쌍한 생물이야. 남자는. 그런데 너도 그런 시선 즐겼잖아.”

“아니거든요?! 제가 변태도 아니고 그런 시선을 왜 즐겨요?! 애초에 제가 이런 옷을 입고 장막 마법으로 치마 안쪽을 가린 것도, 그런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예요! 시그 님의 말은 완전 틀렸다고요!”

“그게 사실이라면 너는 자신의 복장이 남들에게 어떻게 비칠지도 모르면서 야하게 입고 다니는 무의식적인 변태라는 소리밖에 안 되는데?”

“어째서 그게 그렇게 되나요?!”

“그쪽이 아니라면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네 어깨 위에 있는 구조물이 성능이 심각하게 떨어지는 장식물에 불과했다는 소리고.”

“……하아. 내가 말을 말아야지.”

힘이 완전히 쭉 빠진 기레기는 다시 테이블에 엎드렸다. 몇 번을 봐도 좋은 가슴이야. 하지만 내가 이렇게 은근히 시선을 보내는 걸 이 녀석은 깨닫지 못했다. 천인의 감각마저 속이는 완벽한 시선 처리! …아, 시발. 이런 능력을 가슴 엿보는 데나 쓰다니. 나도 남자란 생물이란 말인가.

잠시 엎어져 있던 기레기는 이내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몸을 일으키더니 손등으로 턱을 바치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 맞아요. 저도 알면서 이용한 거였어요. 그편이 좋은 대답을 얻어낼 수 있었으니까요.”

“처음부터 그렇게 인정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큭. 하, 하지만 그런 시선을 즐긴 건 절대로 아니거든요! 오히려 무지무지 기분 나빴다고요! 그래도 이게 제 일이니까! 제가 하려는 일이니까! 꾹 참고 견뎌냈던 거예요!”

열성적인 항변의 절반 정도는 사실이겠지. 나머지 절반은 거짓이겠고. 하지만 굳이 그것까지 건들 필요는 없다. 그 정도는 대충 넘어가주자.

“응. 알았어. 믿어줄게. 믿어줄 테니까, 목소리 좀 낮춰줄레?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윽! …그, 그게 누구 때문인데요?”

평소에는 시선을 즐기지만, 역시 이런 상황에서 시선이 쏠리는 건 싫은지 기레기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면서도 남 탓을 하는 걸 보면 기레기란 족속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녀석은 자신이 노려보는 시선에도 내가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자 꼴받았는지 울컥 하더니, 이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시그 님은 그런 말을 해놓고선 제 몸을 본 적이 없군요? 언제나 제 얼굴에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죠.”

“당연하지. 남의 몸을 함부로 보는 건 예의가 아니야.”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요?”

“내가 직접 행하지 않는 것과 남들이 어떻게 보는지는 별개의 문제니까. 이건 예의 이전의 얘기지.”

“…정말 말은 잘하시는군요. 흥. 하지만 그래도 너무 관심이 없는 거 아닌가요?”

“자의식 과잉이네. 병원에 가봐.”

“큭! …그, 그게 아니죠. 그, 그래요. 시그 님은 사실 여성에게 관심이 없는 거죠? 저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동방에는 동성애야 말로 진정한 사랑의 형태라는….”

“그 개소리 한 마디라도 더 꺼냈다간 내가 어떻게 드래곤 슬레이어가 됐는지 네 몸으로 알게 될 거다.”

“…………죄송합니다.”

더이상 참아 줄 수 없는 개드립에 가볍게 노려보면서 살기를 쏘아주자, 마치 뱀 앞의 개구리 같은 얼굴이 되었던 기레기는 이내 울먹이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아니, 울먹이는 게 아니라 진짜 우네?

얘 왜 이래? 사람 당황스럽게.

〈 17화 〉 17화 흑막 암시

* * *

그렇다고 진짜 죽일 수는 없다. 나는 사람이 짜증 난다고 죽이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그랬다면 지구에서 유례없는 학살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 거다. 진짜 참을 수 없을 때도 있었지만, 견뎌냈었지.

뭐, 살인이 좋은 일은 아니지. 굳이 할 필요도 없고. 그건 지구나 이 세계나 마찬가지다. 살인은 되도록 지양할 거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닌 이상에야 반드시.

이것은 스스로 부여한 시련이다.

“무시하지 말아 주세요오오오! 시그 니이이임!”

야이, 싯팔.

진지한 생각 중인데 좆같은 사운드가 귀를 어지럽혔다. 이런 라노벨스러운 말투를 현실에서 들어줘야 해? 시발. 이게 진심이 아니라 연기인 점이 더 좆같다. 어떻게 해야 상대방이 좆같아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을 사운드다.

그렇다고 계속 무시하고 갈 수는 없다. 이 녀석을 데리고 길드로 가면 그건 그거대로 피곤한 일들이 생길 테니까. 이 기레기는 조사단을 눈치채고 신문에 실어버리고도 남을 년이다.

그러면 재앙급 몬스터의 등장을 숨기려는 길드도 엿 먹게 된다. 거기엔 길드까지 이 년을 데리고 간 내 책임도 있을 테고. 최근의 유명세로 질투도 많이 받는데 이런 실수까지 저지르면 평판이 수직하락한다.

제아무리 내가 남의 평판을 그리 신경 쓰지 않는 인간이어도 괜한 실수로 불이익을 당할 이유도 없다. 뭐가 됐든 이 기레기는 외형만 좋지 모든 면에서 내게 불이익만 되는 존재다.

노출하지 않으면서도 야하게 보이는 복장은 나름의 전략이겠지만, 나한테는 안 통한다. 이 년아.

나는 혐오감을 숨기지 않으면서 이마를 쓸어올리고는 씹어 뱉듯이 말했다.

“그 좃같은 메아리만 그만두면 취재에 응해 줄 수 있어.”

“그러면 저쪽의 카페에 갈까요? 커피는 제가 살게요!”

이 시발년이 태세전환 보소.

생긋 웃는 면상에 주먹을 날려주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았다. 그래. 어쩌겠어.

설마, 이세계에서도 기레기에게 시달릴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만, 이세계의 문명 수준을 얕본 내 잘못도 있다.

“와! 드디어 인터뷰를 땃네요! 선배들도 못 딴 인터뷰를! 제가! 드래곤 슬레이어 시그 님에게!”

“…시끄러우니까 입 좀 다물어라.”

“넵!”

진짜로 입을 다물고 양팔을 직각으로 흔들면서 앞서가는 기레기를 보니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아름다운 외모와 목소리를 생각하면 저런 장난스러운 행동은 오히려 호감의 요소겠지만, 장난스럽게 흔들리는 날개를 보는 내 심정은 지랄이 짜다는 것뿐이었다. 오히려 책으로 먼저 접했던 이 종족에게 편견이 생길 것 같았다.

천인?人

번역명처럼 [하늘의 인간]이라는 뜻으로 통용되는 종족이다. 날개가 달리고 조류처럼 뼈가 비어서 무게가 가볍고 평균적으로 인간보다 강력한 마력과 인간의 세 배에 달하는 수명을 가지는 것을 제외하면 인간과 다를 게 없는 종족이다. 존나 다르네.

어쨌든 여러모로 인간보다 평균적으로 우수한 종족이다. 이건 이전에 만났던 알브도 마찬가지인데, 천인은 활동영역이 인간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 알브보다 좀 더 자주 엮이고 인간과 비교도 많이 당하는 종족이다.

그리고 그 비교 결과는 애초에 이들에게 천인?人이라는 거창한 종족명을 붙여준 것에서 알다시피 천인의 승리였다.

뼈가 비어서 신체 강도가 평균적으로 떨어지는 것을 제외하면 근력 자체는 인간과 별 차이가 없었고, 오히려 강력한 마력과 타고난 비행능력, 긴 수명으로 과거에는 인간들을 노예처럼 지배한 역사가 있을 정도의 강력한 종족이다.

지금은 쇠락해서 인간을 지배하긴커녕 인간에게 빌붙어 사는 종족이 되어버렸지만… 평균적으로 아름다운 외형과 마치 천사 같은 날개 때문에, 여전히 경외하는 감정을 가지는 인간들이 많은 종족이다.

내가 읽은 책에서도 외형과 천품을 찬양하는 내용이 많았는데… 그래서 나는 직접 실물을 보기 전까진, 판타지 세계이니 천사 같은 종족도 있구나~ 라고 낙천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결과, 행동은 기레기 그 자체에 천품은 오만하기 짝이 없는 천인의 실체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얼얼해졌지만.

참고로 천인이 쇠락한 이유는 그 지랄 같은 천품과 낮은 출생률이(현대 한국보다 못한 수준의 출생률을 자랑했다) 인간들의 발전과 시너지를 일으켜서, 천인 왕국이 무너진 뒤에 소수종족으로 몰락했기 때문이다.

뭐, 그래도 부자가 망해도 삼대는 간다고 그 외형과 강력한 능력을 주축으로 인간사회에서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요즘 천인들이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가 바로 기레기… 아니, 언론이다. 역시, 머리가 좋은 종족이라서 그런지 앞으로 뭐가 중요한지 알고 있다. 소수로 다수를 입맛대로 조종하는 것은 언론장악이 최고지.

뭐, 지금은 천인의 추악한 본색이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그 천인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부류로 보이는 녀석의 타겟이 됐다는 거지.

선배가 어쩌고 저째? 지랄하고 있네. 네가 이 도시 천인들의 공주님이나 다름없는 건 이미 알고 있거든? 젊은 애들은 잘 모르던 것 같던데, 나이 좀 있는 사람들은 네가 귀한 신분인 거 다들 아시더라.

그런 녀석이 가증스러운 말투로 달려드니 혐오감이 안 들레야 안 들 수가 없다.

접수원이야 나를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그건 나에게도 이득이 되는 행동이었다. 상부상조였지. 하지만 이 년은 아니다. 나에겐 이득 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저년만 본인의 취미생활을 마음껏 즐기면서 이득을 얻는다. 시발년이. 누굴 호구로 보나?

하지만 그렇다고 권력자의 딸과 대놓고 척지는 것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다. 그렇다고 굽신거리는 건 말도 안 되어서 선택한 방법이 솔직하게 거칠게 말하면서도 접근 자체를 차단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취미생활로 기자 노릇을 하는 년답게 내가 만든 캐릭터에 꽂혔는지 귀찮게는 굴어도 그 이상의 선을 넘지는 않았다. 내가 빌미를 주지 않은 것도 있지만, 이런 관계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욕먹는 걸 즐기다니. 마조냐고.

“여기 커피 두 잔이요~!”

“네. 주문 받았습니다.”

“자, 자! 여기 앉죠. 시그 님.”

기레기는 자연스럽게 주문을 하더니 적당한 자리를 점거했다. 한적한 시간대라 쏠리는 시선은 적었지만, 일부러 관심받으려고 한 행동이란 걸 알기에 기분이 더럽다.

오늘 오후쯤에는 내가 천인 아가씨랑 카페에서 밀회를 가졌다는 소문이 도시 전체에 쫙 퍼지겠지. 어휴. 귀찮아.

“호들갑 좀 그만 떨지? 나이가 몇인데 그러고 앉았냐. 부모님이 뭐라 안 하시든?”

“오히려 좋아하시는데요? 언제나 명랑한 게 제 장점이니까요. 이건 가족들과 동료들도 전부 인정하는 사실!”

“지랄하네.”

“아앗! 또, 또 나쁜 말 하신다! 입이 험한 남자는 여자에게 인기 없어요!”

“필요 없어.”

“제 호감도도 떨어지는데요?”

“더더욱 필요 없어. 아니, 그냥 시궁창에 처박아서 바다까지 떠내려갔으면 좋겠는데.”

“너무해!”

“너무한 건 네 머리고요.”

평범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커피가 나왔다. 커피를 배달한 점원은 웃는 얼굴로 커피를 놓고는 빠른 속도로 물러났다. 그래. 나 같아도 이런 테이블에 오래 있고 싶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왜 내가 당사자지? 더러운 권력 같으니! 닝기미.

“그래. 성능이 지나치게 떨어져서 장식물 수준으로 하락한 어깨 위의 구조물을 수리할 방법을 알려달라는 부탁이었지?”

“금시초문인데요! 대체 어떻게 해야 그런 모욕적인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할 수 있는 건가요?!”

“역겨운 말을 웃는 얼굴로 할 수 있는 너보다는 나아. 그리고 일단, 대답을 해주자면. 아무리 나라도 작살 날대로 작살 나버린 뇌를 수리하는 방법은 몰라. 가장 좋은 방법은 자른 다음에 새거로 갈아 끼우는 거지.”

“그럼 죽잖아요! 아니, 애초에 그런 목적이 아니거든요!”

살살 놀려주니 슬슬 가면이 벗겨졌다. 더 이상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 못 하는 녀석을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면서 피식 웃자, 놈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랐다가 이내 체념한 표정을 짓고선 테이블에 엎드렸다.

…가슴이 아름답게 눌리네. 와이셔츠의 틈으로 보이는 골짜기가 실로 아름답다. 저 안에는 어떤 생물이 살고 있을까? 분명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음란한 생물이 살고 있겠지.

…하아. 불쌍한 생물! 남자여!

그 문장으로 번뇌를 털어내고 기레기의 반응을 기다렸다. 한 30초 정도 음란하지 않지만 음란한 자세로 칭얼거리던 녀석은 이내 뾰로통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목덜미가 예쁘네. 이래서 천인이 지금도 대접을 받는구나? 내면은 쓰레기들인데 말이야.

“시그 님은 저한테 너무 차가우세요. 왜 그러시는 거예요?”

“네가 싫어서.”

“진짜 너무해!”

“진짜 너무한 거는 이런 말을 듣고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는 너고요.”

“헤헤. 제가 인내심이 조금 강하거든요! 시그 님 같은 분을 상대하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죠!”

이 년이 웃는 낯짝으로 엿을 먹이려고 하네?

“그러냐. 그런데 나는 그런 인내심이 없어서 너를 상대하기 싫어. 애초에 나를 상대하려는 인내심의 세 배는 필요하고.”

“뭔가요? 그 비교는! 제가 시그 님보다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건가요?!”

“당연하지. 일단, 외모부터 생각을 해봐라.”

“……네?”

뜻밖의 말이었는지 기레기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접수원 때부터 느꼈지만, 미인은 멍청한 표정도 그림이 된다. 후우. 이게 외모의 격차사회다. 나도 나름 얼굴수재는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 세계에선 평균보다 조금 아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건 키뿐이고.

뭐, 지금 중요한 건 기레기가 필요 이상으로 기분이 상하지 않게 하면서 쓸데없는 행동을 하지 않게 만드는 거지. 다른 화제로 정신을 쏠리게 만들어서 조사단 쪽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게 만드는 거다.

나는 바로 말하는 대신 커피를 홀짝 마셨다. 설탕을 제법 탔는지 단맛이 강한 이 세계의 커피는 지구에서 마셔본 에스프레소와 큰 차이가 없었다. 나는 꽤 섬세한 미각을 가지고 있지만, 커피에는 관심이 없어서 어떤 원두가 어떤 맛을 내는지 모르기에 정확한 비교는 못 한다. 그래도 요리와 마찬가지로 커피도 괜찮은 수준이었다.

그렇게 짧게 침묵을 넣어서 기레기를 좀 더 안절부절못하게 만든 뒤에 입을 열었다.

“나야 키가 큰 것 말고는 평범한 얼굴이지만, 너는 아니잖아? 백이면 백. 미인이라고 부를 얼굴이지. 얼굴만이냐? 옷 밖으로 드러나는 몸매도 뭇 남성들의 가슴엔 불을 지피고 뭇 여성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몸매지.”

“그, 그, 저, 저기…?”

“옷도 그래.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만, 노출은 거의 없으면서도 몸매는 확연하게 부각 되지. 거기다가 치마를 입고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치마 안쪽은 마법 같은 거로 못 보게 막아 놨잖아? 뭐, 날아다니는 것 자체를 뭐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무의식적으로 안쪽을 봤다가 시커먼 어둠만 본 사람들은 너한테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끼겠지.”

“………으, 아.”

“그러니까, 너를 상대하는 건 나를 상대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밖에 없어. 외모부터 행동까지 남자들에겐 긴장감을 주고 여자들에겐 적개심을 주잖아? 뭐, 나처럼 그걸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그러지 못하겠지.”

“………….”

얼굴이 완전히 빨개진 기레기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귀까지 빨개졌네. 남자가 대놓고 이런 말을 했으니 수치스럽겠지. 지구였다면 성희롱으로 고소당해도 할 말이 없는 발언이다. 당연히 나도 다른 여성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은 없다. 오히려 이것보다 약한 수위의 말을 하는 인간도 쓰레기 보듯이 봤었다.

그런 내가 이런 손발이 오그라드는 말을 한 것은 그저 이 녀석에게 필요 이상으로 미움받지 않으면서도 필요 이상으로 관심을 받고 싶지 않아서다. 이세계는 성희롱이 범죄가 아니니까. 사람들의 보편적인 인식도 지구보다 훨씬 느슨해서 대놓고 천박하게 얘기하지 않는 이상, 이 정도로는 생사결전을 벌일 정도의 모욕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녀석은 기레기지만 똑똑하니까. 내가 지금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했는지 이해하겠지.

예상대로 녀석은 1분 정도 수치스러워하다가 이내 내 의도를 깨달았는지 여전히 붉은 얼굴로 고개를 살짝 들고선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짓궂어요. 시그 님. 그렇게 대놓고 말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이 정도로 말하지 않으면 네가 통하지도 않은 남사스러운 짓을 그만두지 않을 테니까. 까놓고 말해서 불편하기만 하거든? 의도를 알고 있으니 더더욱.”

내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기레기는 볼을 한껏 부풀리더니(역겨운 행동이지만 미인이 하니 봐줄 만했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아. 이제까지 제 행동을 싫어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는데.”

“겉으로 티만 안 냈을 뿐이지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겁나 많았을 걸?”

“특히나 남성분들은 제 가슴과 엉덩이에서 추잡한 시선을 때지 못했거든요.”

“불쌍한 생물이야. 남자는. 그런데 너도 그런 시선 즐겼잖아.”

“아니거든요?! 제가 변태도 아니고 그런 시선을 왜 즐겨요?! 애초에 제가 이런 옷을 입고 장막 마법으로 치마 안쪽을 가린 것도, 그런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예요! 시그 님의 말은 완전 틀렸다고요!”

“그게 사실이라면 너는 자신의 복장이 남들에게 어떻게 비칠지도 모르면서 야하게 입고 다니는 무의식적인 변태라는 소리밖에 안 되는데?”

“어째서 그게 그렇게 되나요?!”

“그쪽이 아니라면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네 어깨 위에 있는 구조물이 성능이 심각하게 떨어지는 장식물에 불과했다는 소리고.”

“……하아. 내가 말을 말아야지.”

힘이 완전히 쭉 빠진 기레기는 다시 테이블에 엎드렸다. 몇 번을 봐도 좋은 가슴이야. 하지만 내가 이렇게 은근히 시선을 보내는 걸 이 녀석은 깨닫지 못했다. 천인의 감각마저 속이는 완벽한 시선 처리! …아, 시발. 이런 능력을 가슴 엿보는 데나 쓰다니. 나도 남자란 생물이란 말인가.

잠시 엎어져 있던 기레기는 이내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몸을 일으키더니 손등으로 턱을 바치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 맞아요. 저도 알면서 이용한 거였어요. 그편이 좋은 대답을 얻어낼 수 있었으니까요.”

“처음부터 그렇게 인정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큭. 하, 하지만 그런 시선을 즐긴 건 절대로 아니거든요! 오히려 무지무지 기분 나빴다고요! 그래도 이게 제 일이니까! 제가 하려는 일이니까! 꾹 참고 견뎌냈던 거예요!”

열성적인 항변의 절반 정도는 사실이겠지. 나머지 절반은 거짓이겠고. 하지만 굳이 그것까지 건들 필요는 없다. 그 정도는 대충 넘어가주자.

“응. 알았어. 믿어줄게. 믿어줄 테니까, 목소리 좀 낮춰줄레?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윽! …그, 그게 누구 때문인데요?”

평소에는 시선을 즐기지만, 역시 이런 상황에서 시선이 쏠리는 건 싫은지 기레기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면서도 남 탓을 하는 걸 보면 기레기란 족속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녀석은 자신이 노려보는 시선에도 내가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자 꼴받았는지 울컥 하더니, 이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시그 님은 그런 말을 해놓고선 제 몸을 본 적이 없군요? 언제나 제 얼굴에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죠.”

“당연하지. 남의 몸을 함부로 보는 건 예의가 아니야.”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요?”

“내가 직접 행하지 않는 것과 남들이 어떻게 보는지는 별개의 문제니까. 이건 예의 이전의 얘기지.”

“…정말 말은 잘하시는군요. 흥. 하지만 그래도 너무 관심이 없는 거 아닌가요?”

“자의식 과잉이네. 병원에 가봐.”

“큭! …그, 그게 아니죠. 그, 그래요. 시그 님은 사실 여성에게 관심이 없는 거죠? 저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동방에는 동성애야 말로 진정한 사랑의 형태라는….”

“그 개소리 한 마디라도 더 꺼냈다간 내가 어떻게 드래곤 슬레이어가 됐는지 네 몸으로 알게 될 거다.”

“…………죄송합니다.”

더이상 참아 줄 수 없는 개드립에 가볍게 노려보면서 살기를 쏘아주자, 마치 뱀 앞의 개구리 같은 얼굴이 되었던 기레기는 이내 울먹이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아니, 울먹이는 게 아니라 진짜 우네?

얘 왜 이래? 사람 당황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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