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16화 드래곤 슬레이어
* * *
산에 둘러싸인 내 고향은 필연적으로 벌레가 많았다. 어렸을 때야 그런 것들을 멋모르고 만지고 짓이기며 가지고 놀았었다. 나이를 먹은 뒤에야 그 행동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짓인지 알게 되었는데, 생각해보면 단순히 어렸을 때보다 겁이 많아져서 그러지 않았나 싶다.
공포란 타고나는 것도 있지만, 학습되는 법이다. 성장하면서 많은 것을 익히고 경험하면서 무서워하는 게 늘어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공포 자체를 부정하고 그것을 극복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공포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는 정신적인 하자이다. 적당한 공포심은 성장동력원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 성장한 뒤에는 그 공포를 이겨내야하는 법이다.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공포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무섭다고 고개를 돌리고 있다고 공포의 근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타조나 할 법한 짓을 숨 쉬듯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렇게 말하는 나또한 그랬던 적이 있었다.
이제는 과거의 얘기이고,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겠지만, 그랬던 것은 사실이다. 즉, 그러고 있는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는 건 제 얼굴에 침 뱉기이자, 현자의 흉내를 내는 멍청이일 뿐이다. 그리고 당연히 나는 그런 멍청이가 아니다.
그러니 내가 느끼고 있는 공포를 부정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에 먹히지도 않는다.
이겨낼 뿐이다.
“하, 시발.”
욕설과 함께 상쾌한 아침이 시작되었다. 아오. 요즘 점점 욕만 늘어나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고작 외국에서 오래 있어도 고향 생각이 나던 향수병이 강한 놈이니까. 외국도 아닌 아예 별세계라면 그 증세가 더 강할 수밖에.
그래도 어쩌겠는가?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이상 마음속 깊숙한 곳에 묻어두는 수밖에 없다. 니조랄.
향수병에 몸부림치고 있을 시간도 아까워서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 옷을 입었다. 벌써 4일이나 빨지 않은 옷에서 퀴퀴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지만… 어쩔 수 없다. 아직은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무장을 몸에서 오래 떼어 놀 수 없다.
나는 겁쟁이거든.
“…오전은 제낄까.”
어차피 오늘은 조사단이 파견되는 날이라서 의뢰를 할 만한 시간이 안 난다. 그렇다고 길드에서 죽치고 있자니, 지루할 뿐이다. 지난 이틀 동안 받은 시선은 내 관심병을 충족시켜주었지만, 그런 것도 계속 받다 보면 질리기 마련이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신기한 건 당연하겠지만, 너무 획일적이고 노골적인 시선들이란 말이지.
그래. 드래곤 슬레이어.
3일 전에 쌍각멧돼지를 잡으러 갔다가 잡게 된 머쉬 드래곤.
단어 뜻 그대로 습지Marsh에 사는 드래곤이다. 습지 드래곤은 너무 없어 보여서 머쉬 드래곤 쪽으로 번역을 고정했지만.
예상대로 놈은 이쪽 지역에선 굉장히 희귀한 몬스터였다. 책방에서 책을 한참 뒤지고 나서야 관련 서적을 찾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 사냥꾼이 이름을 알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길드 사람들은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근처에서 나오진 않더라도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위험한 몬스터는 기본적으로 알아둬야 했기 때문이라고 접수원이 설명해줬다.
그래. 접수원. 이거 또 재미있었지.
머쉬 드래곤의 시체를 끌고 도시에 도착하자 문지기부터 아주 난리가 났었다. 그야 그렇게 거대한 몬스터의 시체를 들고 왔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하지. 그래서 곧바로 통과도 못 하고 좀 더 높은 사람이 올 때까지 문 앞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오가는 시민들이나 상인들에게 나는 아주 훌륭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개중에는 내게 시체를 팔라고 거래를 걸어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정확한 시세도 모르는데 눈탱이 맞을 일이 있나, 당연히 전부 거절하고 쫓아냈다.
드래곤을 잡아 온 사람의 심기를 심하게 거슬릴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없었는지 필요 이상으로 귀찮게 구는 사람은 없었기에 통과 허락이 나올 때까지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병사들의 경외 반 두려움 반의 시선을 받으면서 도시로 들어가서 곧바로 길드로 향했다.
그런 내가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는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많은 시선을 받으면서 길드에 도착하자, 거기에는 접수원만이 아니라 길드 마스터까지 나를 환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그 얼빠진 표정만큼 최고의 환영인사도 없었지!
내가 이 맛에 산다!
그 뒤에는 뭐, 당연히 해야 하는 뒤처리뿐이었다.
우선 쌍각멧돼지 토벌을 완료하고 의뢰비와 보상금을 받고 가죽과 뼈, 고기는 길드에 판매했는데, 그것만으로도 벌이가 무려 2만 5천 링이나 되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받았는데, 보통 개체보다 크고 가죽의 상태가 멀쩡하고 고기와 뼈의 신선도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워낙 큰 몬스터다보니 보통은 운반하는데도 시간이 걸리고, 모험가 중에 내 수준의 도축능력을 가진 사람도 적어서 평소에 공급되는 것보다 훌륭한 퀄리티였던 것이다.
심지어 혹시나 하고 가져왔던 뼈칼도 상당한 가격에 팔렸다. 쌍각멧돼지의 뿔은 워낙 단단하고 날카로워서 검이나 창날로 쓰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데, 내가 만든 뼈칼도 훌륭한 퀄리티여서 비싸게 팔린 것이다.
정말 돈이 되는 놈이다. 앞으로도 자주 의뢰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물론, 이것도 머쉬 드래곤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그놈은 길드에서 매입을 아예 거절했을 정도였으니까.
왜냐고?
길드가 당장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드래곤 중에 약한 편이라지만, 드래곤은 드래곤. 가죽, 뼈, 근육, 피 등. 비싸지 않은 부위가 하나도 없었다.
특히 마석(예상대로 번역도 마석이라고 됐다)은 부르는 게 값이어서 길드에 있는 몇 안 되는 마법사들의 눈이 무서울 정도로 불타올랐을 정도였다. 머쉬 드래곤의 마석조차도 평범한 마법사는 손도 대지 못할 정도의 최고급 마법 재료라고 하니, 이놈이 얼마나 비싼 생물인지는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길드도 당장 돈이 없어서 매입을 포기했는데, 나는 길드에 판매대행을 맡기기로 했다. 당연히 수수료도 제법 내는 형태로.
당연히 길드는 충격과 환희에 빠졌다.
그때 내 제안에 접수원과 길드 마스터가 지은 표정은 두고두고 떠올리고 즐거울 정도로 환상적이었지. 둘 다 평소에는 이지적인 분위기여서 그 갭을 더욱 즐길 수 있었다.
뭐, 단순히 두 사람의 멍청한 표정을 보고 싶어서 한 제안은 아니다. 애초에 그놈이 비쌀 거라는 건 예상했고 길드가 매입 못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렇다고 내가 직접 팔지 못하는 물건인 것도 아니다.
드래곤을 직접 잡았고 하루 만에 옥석 모험가가 될 정도로 길드의 신뢰도 어느 정도 받고 있으니 거래처를 얻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특히 이 도시의 마탑이라면 웃돈을 얹어서라도 전부 매입하려 할 테니 물건을 못 팔 걱정은 없다. 그쪽이 개인적인 이익은 훨씬 크고.
그런데도 굳이 길드에 판매대행을 맡긴 것은… 당연히 신뢰 때문이었다.
나는 외계인이다.
일단은 동방에서 온 사람으로 신분을 속이고는 있지만, 길드에서 굳이 깊게 파지 않을 뿐이지 내 신분을 의심하는 사람은 제법 있을 거다.
길드 마스터는 말할 것도 없고 접수원조차도 내가 말한 신분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지 않을 것이다.
여기가 내가 좆대로 살아도 후폭풍을 전부 감당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의심하든 말든 상관 안 하고 좆대로 행동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좃대로 행동했다간 좃될 수가 있는 세계다.
그러니 가장 쉽게, 가장 확실하게, 가장 강하게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세력에게 잘 보이려는 것은 당연한 행동이다.
그저 길드를 믿고 있기에 큰돈이 오가는 거래를 전면적으로 맡긴다는 행동은 제아무리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어도 ‘이런 행동까지 하는 사람을 계속 의심해도 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기 마련이다.
실제로 접수원은 내가 신분을 속이고 있든, 뭔가 비밀이 있든 간에 완전히 뻑가서 찬양하기 일보 직전인 지경이었고, 길드 마스터조차도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못했을 뿐, 머쉬 드래곤 판매대행으로 받을 수수료를 생각하고 저도 모르게 표정이 풀리는 게 보였다.
어쨌든 그런 파격에 파격을 더하는 행보 덕분에 나는 단 4일 만에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자 모험가 길드, 마탑, 시청에게 사랑 받는 모험가가 되었다.
모험가 길드는 그렇다 쳐도 마탑과 시청은 뭔 소리냐고?
그야, 마탑은 머쉬 드래곤 같이 귀한 재료를 선뜻 팔아준 것 때문이고 시청은 그런 위험한 생물을 큰 피해가 생기기 전에 잡아 준 것과 막대한 세금을 걷게 해준 것 때문이지.
뭐, 그래서 지금 나는 어딜 가도 아는 척하는 사람들이 잔뜩인 상황이다. 당연히 순수한 마음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지만 딱 봐도 시커먼 의도로 접근하는 인간들도 적지 않다. 그런 인간들은 비율로 보면 적은데 절대적인 수는 적지 않단 말이지.
그런 것들을 골라내지 못했다면 지구에서도 성공할 수 없었다. 당연히 깨끗하게 잘라 내버렸다. 그리고 막대한 돈을 벌었음에도 지난 이틀 동안 꾸준히 모험가 길드에 얼굴을 내밀고 하루에 하나씩 의뢰를 해결했다.
아무리 그래도 쌍각멧돼지 같은 의뢰는 없었지만, 전부 처음 보는 몬스터 토벌 의뢰였지. 고블린이나 코볼트보다는 강했지만, 쌍각멧돼지 수준도 못됐었다. 별로 특기할 일도 없었고.
하지만 내 그런 행동은 길드와 다른 모험가들에게 굉장히 인상 깊게 다가왔을 거다.
홀로 드래곤을 때려잡을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막대한 돈을 벌었음에도(아직 대금이 들어온 게 아니라 예정이지만) 꾸준히 길드에 나오며, 토벌 의뢰를 해결하는 걸 인상 깊게 보지 못하는 쪽이 이상하겠지.
덕분에 길드 직원뿐만 아니라 모험가들 사이에서도 호의적인 시선이 적지 않다. 질투심이 담긴 시선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소수파. 대다수는 경외심이 담긴 시선을 보내고 있다.
즉, 현재 내 이미지는 제법 시골 쪽인 도시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슈퍼스타라고 할 수 있다. 이게 고작 4일 만에 이룩한 성과. 내가 생각해도 나는 개쩌는 놈이야. 진짜.
어쨌든 그런 상황이다 보니, 일도 못 하는데 길드에 가봤자 질리게 받은 시선만 계속 받을 뿐이다. 이제 시비를 걸어오는 인간은 아예 포기했다. 뭐, 이제야 시비를 걸어와봤자 처음 만큼의 극적인 효과도 없지만 말이야.
“…그래도 유종의 미를 위해선 일찍 갈 필요가 있겠지.”
계속 성실하게 아침 일찍 오던 녀석이 갑자기 빼먹으면 그동안의 이미지에 흠집이 생긴다. 그런 거에 쫓기는 성격은 아니지만, 아직 이미지 생성 초기 단계이니 굳이 불리한 일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
접수원이랑 노가리나 까면서 시간이나 보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방을 나서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내려가자마자 식당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확 쏠렸다. 거금이 생겼지만, 굳이 여관을 바꿀 필요성을 못 느껴서 다들 아는 얼굴들이었다. 그 중 한 명인 여관 주인아주머니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반겼다.
“일어나셨어요? 드래곤 슬레이어.”
“…그냥 시그로 불러 달라니까요?”
“후후. 왜요? 좋은 별명이잖아요?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칭호가 아닌가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평소처럼 농담을 건네는 아주머니를 보고 나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 때문에 귀찮은 손님들이 오게 되었는데도 “오히려 돈 벌 수 있어서 좋아요.”라고 말하는 좋은 사람이다. 아침에 나누는 이런 대화도 내 기분을 흥겹게 만들었다. 이게 사람 사는 맛이지.
“뭐, 그렇더라고요. 고향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말이 남자의 가슴을 울리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내 가슴도 울리는 단어지만.
“남자들은 그런 명성에 매달리는 면모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시그 씨는 아닌가 봐요?”
“저도 그런 면모가 없는 건 아닌데… 솔직히 아직 실감이 잘 안 나서요. 그 머쉬 드래곤이라는 게 드래곤 중에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싶단 말이죠.”
“어머, 나왔다. 시그 씨의 특기인 겸손한 척하면서 오만하게 말하기!”
“제가 워낙 잘난 놈이라서 그런지 사실을 말해도 오만하게 보이더라고요.”
“오늘도 낯가죽이 두껍네요. 그런 낯가죽을 가져야 드래곤도 잡을 수 있는 거려나~”
평소처럼 아주머니와 노가리를 까고 간단하게 아침을 먹은 뒤에 여관을 나섰다. 여관에 있던 사람들은 대다수가 내게 거절당한 사람들이라 귀찮게 굴지 않아서 좋았다. 물론, 평범하게 말을 거는 사람들은 나도 평범하게 대했다. 그게 인지상정이라는 거다.
문제는 거리에 나온 뒤다. 예상대로 나오자마자 시선이 확 쏠렸다.
그중에는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의 시선도 있었다.
이 도시, 타라스트는 그동안 최근에 남쪽 마을에 나타났다는 도적단 말고는 큰일이 없었던 도시답게 이슈에 민감했다.
즉, 나 같은 슈퍼스타는 좀처럼 없어서 온갖 이목이 쏠리는 것이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지구에서도 나를 끈덕지게 귀찮게 만들었던 기자라는 종족이다.
그래. 종족이다. 기자는 인간이 아니다. 같은 종족으로 볼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계도 마찬가지다.
아니, 이쪽은 오히려 지구보다 합당한 이유가 있다.
왜냐면 내가 이세계에 오고 두 번째로 본 이종족이 기자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아아아! 반갑습니다아아아아! 시그 니이이이이임!!!!!”
온갖 오버를 떨면서 녹색 머리카락을 가진 눈에 띄는 미녀가 ‘하늘을 날면서’ 내게 다가왔다.
갈색 코트 아래의 하얀색 와이셔츠로도 감출 수 없는 폭력적인 가슴과 손을 흔들면서 날아오는 미녀.
짧은 갈색 치마 밑에 검은색 스타킹이라는 이세계 기준으로 파격적인 복장으로 날아오는 그녀.
마법이라도 썼는지 치마 안쪽이 완전히 새카매서 내 시력으로도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볼 수 없는 그녀. 그래서 수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불쌍한 남정네들이 일말의 희망을 품고 하늘을 올려다보게 만드는 그녀. 그걸 연인에게 들키게 만들고 연인이 없는 사람들에겐 음습한 망상을 선사하는 그녀.
마치, 천사처럼 보이는 날개를 등에서 퍼덕거리고 있지만, 그 본질은 기자답게 악마나 요괴나 다름없는 그녀.
그녀의 이름은 아리야.
내 이름을 열성적으로 부르면서, 이 도시에서 나 못지않게 눈에 띄는 외모를 자랑하며 날아오는 그녀에게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중지를 치켜들었다.
“꺼져.”
“아아아앗! 너무해요오오오오!”
귀여운 척을 하면서 짓는 울상이 가증스럽다.
히전죽 마렵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