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12화 옥석 모험가
* * *
미인은 저런 차가운 얼굴도 그림이 되는 구나~ 라고 태연하게 생각하면서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제 모험가가 된 시그입니다.”
“예의가 바르군. 요즘 젊은이 같지 않아.”
유리 베르실의 차가운 얼굴에 약간의 흥미로움이 떠올랐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알브.
책에서 처음 이 번역을 봤을 때 조금 의아했다.
알브는 북구신화의 종족으로 엘프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종족이다. 내가 북구신화를 꽤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엘프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판타지 세계이니 당연히 엘프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당연히 번역도 엘프로 된다고 생각했다. 그게 나의 인식이니 번역 치트도 내 인식대로 작동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알브로 번역된 이 종족은 내가 아는 엘프와는 확연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였다.
책을 좀 더 읽어 보니 어떤 부분이 다른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내게 [엘프]라고 번역되는 종족이 따로 있다는 것도.
이 세계 알브는 외형부터 일반적인 인식의 엘프와 달랐다. 역삼각형의 귀야 엘프의 특징이지만, 엘프에겐 저런 흡혈귀 같은 송곳니는 없다. 입을 살짝 열어도 보이는 번뜩이는 송곳니는 저도 모르게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알브가 흡혈귀 같은 생물인 건 아니다. 송곳니가 뾰족한 건 어디까지나 외형적인 특징일 뿐이지, 저걸 사람이나 동물의 목에 박아 피를 빠는 건 아니다. …실제로 흡혈귀가 존재하는 세계이다 보니 이 세계에서도 그런 오해를 종종 받는다곤 하지만.
외형 말고 사회나 문화도 내가 아는 엘프하고는 확연히 다르다. ………정작 엘프라고 번역되는 종족도 일반적인 판타지 엘프하고는 다르지만 말이야. 번역이 잘못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묘사였지. 대체 뭘까. 만나는 게 두렵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처음으로 이종족을 만났다는 것과 그 이종족이 내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거다. 처음에는 단순한 시험인가 싶었지만, 지금 행동은 그 수준을 넘었다.
내 등골을 시리게 만드는 이 살기 말이다.
이 살기는 단순히 상대가 이런 살기를 느낄 수 있는 실력자인지 알아보려는 수준이 아니다. 여차하면 그대로 공격으로 전환 되는 종류. 확신할 수 있다.
길드 마스터는 나를 대놓고 의심하고 있다.
현명하구만.
자아, 그러면 어쩔까.
멋진 살기를 보내준 대가로 우선 가볍게 찔러볼까?
“저희 부족에선 연장자에겐 반드시 예의를 지키라고 교육합니다. 오랜 전통이죠.”
“좋은 전통이군. 이 땅의 사람들도 배웠으면 좋겠어.”
차갑게 웃는 그녀에게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특히 상대방이 어마어마하게 오래 산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무례한 행동을 해도 이쪽이 조금은 숙이고 들어가라는 말도 귀에 박히게 들었죠.”
내 말에 유리 베르실은 아주 잠깐 움찔하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더욱 좋군. 자네 부족은 예의범절에 통달한 모양이야.”
유교가 그쪽으론 편집증적일 정도긴 하지. 하지만 무조건 연장자를 공경하라는 사상은 아니다. 뭐, 현대의 한국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유교는 그런 경향이 강한 편이었지만. 내가 믿는 유교는 좀 더 원시적이고 멀쩡한 쪽이거든.
그걸 이 자리에서 자랑할 생각은 없다.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나이값도 못하고 이부터 드러내는 사람이 있는 곳보다야 예의범절에 통달했다고 생각합니다.”
“……….”
“뭐,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을 리 없으니, 단순한 농담에 지나지 않지만요. 하하하. 재미없는 농담이죠?”
정말 즐겁게 웃자 유리 베르실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동시에 내 등을 간질이던 살기도.
대신, 정면에서 살기가 날아왔다.
화끈하시네요! 싫어하는 타입은 아니야!
“…배짱도 있고 언변도 나쁘지 않아. 실력은 직접 보진 못했지만, 입만 산 놈은 아닌가 보군.”
조금 전과 180도 달라진 태도였다. 내가 바라던 태도이기도 하고. 그래. 서로 속내와 비수를 숨기고 벌이는 싸움판도 싫어하진 않지만, 이쪽이 더 취향이지.
“입만 살은 놈이 재앙급 몬스터를 쫓아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을까요?”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그럴 리가요. 길드 마스터님이 그런 흉악한 몬스터의 소식을 듣고 그것을 미리 확인해보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나를 여기로 안내해 준 접수원은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거기다가 길드 마스터가 대놓고 살기를 쏘고 있으니 안색이 창백해질 정도였다. 그런 그녀를 보호하듯이 앞을 막아서면서 말했다.
“우리 이러지 말죠. 괜히 이상한 시험으로 애꿎은 사람까지 휘말리게 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분은 제 유능함을 알아보고 추천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길드 마스터님도 내가 유능한 건 부정하지 않잖아요?”
“…하. 뻔뻔스러운 녀석이군.”
유리 베르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도 차가운 시선과 살기는 그대로였다. 거참. 고집불통이네. 그럼 좀 더 찔러볼까.
“뻔뻔한 건 길드 마스터님 아니신지. 설마, 들어오자마자 등골이 송연해질 살기를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우리 부족이 예의를 중시하지만, 예의란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통행인 법이죠. 상대보다 직위가 높다고, 나이가 많다고 무례하게 굴면 쌍욕 먹어요.”
은밀한 시비에는 대놓고 강하게 밀고 나가는 편이 유리하다. 상대의 의도를 뭉개면서 명분도 가지고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가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뻔뻔하게 나오면 파워가 약해지기는 하지만, 그것도 상대의 의도를 뭉갰다는 결과는 남는다.
가장 짜증 나는 건 행위를 아예 부정하면서 이쪽을 정신병자로 몰아가는 거지만,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그런 추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건 조폭이나 양아치들이나 하는 짓이다. 무엇보다 스스로 품위를 깎는 짓이니 결국 내 쪽에 손해는 없다.
길드 마스터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하, 하하하하하하하!”
잠시 멍한 눈이 되었던 그녀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호쾌한 웃음일세. 생긴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다. 봐봐. 접수원도 어색해서 온몸에서 식은땀을 흘리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잖아? 뭐, 이런 상황은 예상 못 했겠지. 운 좋게 대어가 걸려서 출세길이 열렸다고만 생각했을 거야.
어쩌겠어. 인생이란 게 원래 그런걸. 생각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법이야. 생각대로 흘러가게 하려면 그만한 각오와 노력, 무엇보다 능력이 필요하지.
나처럼.
유리 베르실이 웃음을 멈춘 건 조금 뒤였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의 차가운 표정이 거짓말인 것처럼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차가운 얼굴도 예뻤지만, 지금은 더더욱 예쁘다. 역시 미소는 사람의 매력을 빛내는 최고의 조미료다.
지구에서도 이만한 미녀는 없었지. …겉보기로는 10대 후반 정도지만 실제 나이는 내 몇 배는 될 테니 범죄도 아니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유리 베르실은 조금 전과는 180도 달라진 분위기로 말했다.
“이거, 미안하군. 무례를 저질렀어. 사과하겠네.”
그리곤 사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뒤에 있는 접수원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지만, 나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사과를 받겠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자네는 마음이 넓군.”
유리 베르실은 빙긋 웃었다. 거참. 마음에도 없는 말을 태연하게 하는 구만. 역시 오래 살면 얼굴이 두꺼워지는 건 지구나 여기나 마찬가지군.
“칭찬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이게 승급심사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실망입니다. 라는 감정을 담은 시선을 보내자 유리 베르실은 찔렸는지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이건 단순히 내 호기심이었을 뿐이네.”
“어떤 호기심이시기에 그런 살기를….”
“……그 재앙을 쫓아낸 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네.”
조금 부끄러워하면서 말하는 모양새가 참으로 귀여웠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 이런 갭이 소위 말하는 모에라는 거지. 그런데 조금 전에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라고 해놓고 서는. 이 거짓말쟁이!
“아직 확인 안 된 사실이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조사단을 파견하지 않았을 뿐이지, 흔적은 내가 이미 확인하고 왔네.”
그렇겠지. 대놓고 의심한 이유도 알고 있다. 그곳의 흔적을 봤다면 내 실력을 의심하기보단 그 정도 실력의 놈이 왜 이 도시로 왔는지를 의심할 테니까.
접수원이 내가 만든 설정을 보고했겠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건 라노벨에 나오는 대가리가 꽃밭인 인간들뿐이다. …요즘 나오던 일본판 이세계 전생물은 대다수가 그랬지만. 너무 똑같은 전개가 많아서 몇 년 전부터 보는 걸 그만뒀지. 무엇을 숨기랴. 나는 씹덕이기도 했다.
뭐, 그런 이유로 당연히 그녀의 의심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조금 전의 살기는 내가 흉악한 의도를 품고 도시에 잠입한 인간이라면 어떤 반응이든 보인다고 예상하고 한 행동이겠지. 내가 너무 태연하게 대응하니, 그건 그것대로 의심스럽지만 일단 판단을 유보한 거다.
즉, 유리 베르실의 의심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그래. 이런 사람이 당연히 있어야지.
굳이 빠르게 의심을 풀 필요는 없다. 그랬다간 되려 신세계의 신이 되려던 가수처럼 더 큰 의심을 살 테니까. 대학에서 자신의 옷 사이즈를 말하는 인간을 만나긴 싫다.
무엇보다 실제로 내가 무진장 수상한 사람인 건 맞기 때문에 의심을 풀려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외계인이 수상한 사람이 아니면 뭐냐고.
뭐, 지금 중요한 건 뽀삐와 관련된 일이지.
“아하. 그럼 확실히 승급시험으로 살기를 보낼 필요는 없겠네요. 제 실력은 증명된 거죠? 조금 전 살기는 대체 뭐였을까.”
“……두 건의 토벌 의뢰를 완벽하게 해결한 시점에서 실력은 두고 볼 것도 없었지.”
계속 살기를 언급하자 유리 베르실은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표정이 안 좋아졌지만, 엄연한 팩트이기에 불만을 내뱉지는 않았다. 염치는 있네.
“그럼 저는 이제 정식으로 옥석 등급 모험가군요?”
“서류는 이미 처리되었으니, 오늘부터 자네는 옥석이 맞다. 그에 맞는 언행을 부탁하지.”
쉽게 말해서 상사를 놀려먹는 짓은 하지 말라는 거군? 뭐, 슬슬 질려서 그만두려고 했으니까. 이 정도는 들어 줄까나. 길드 마스터와 크게 척 져서 좋을 것도 없고.
“그럼 오늘 용무는 이걸로 끝일까요?”
“아니, 본론이 남아 있지. 조금 전에 얘기 했을 텐데?”
“……아. 그랬죠. 조, 조사단은 언제 파견되나요?”
일부러 얼빠진 표정과 목소리를 내자 황당해하던 유리 베르실은 이내 피식 웃었다. 그래. 겉으로만 태연한 척하고 있을 뿐이지 실제론 긴장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라고. 얼빠진 면이 있는 놈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어.
“3일 뒤. 정오 이후다.”
“어, 꽤 늦네요? 수배서를 보니 굉장히 위험한 놈인 것 같았는데….”
“놈이 나타난 것은 내가 직접 확인하고, 이미 상부에 알렸다. 지역 길드 마스터의 보고가 갔으니, 상부도 주변 영주들에게 연락을 보냈겠지. 조사단은 상세한 보고서만 남기면 되니, 급하게 보낼 필요가 없다.”
“…그렇군요. 뭐, 서류로 남기는 일은 중요하니 졸속으로 처리할 수는 없겠죠. 그럼 저는 그때 길드에 와서 동행하면 됩니까? 아니면 따로 집합하는 곳이 있나요? 제가 따로 준비할 것은요?”
“길드로 오면 된다. 따로 준비할 건 없군. 상세한 사항은 히리에에게 듣도록.”
“…네, 네! 시, 시그 님. 조사단 얘기는 저와 하시겠어요?”
꿔다 놓은 보릿자루나 다름없던 접수원은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화들짝 놀랐다가 금세 생긋 웃는 얼굴로 그리 말했다. 뭐, 당황스럽겠지. 그나저나 이름이 히리에인가. 접수원 쪽이 부르기 더 편하니 앞으로도 접수원이라고 불러야지.
“그러죠. 그럼 더 이상 볼일은 없으신거죠?”
“그래. 이만 가봐도 좋다. 히리에는 새로운 옥석 모험가에게 등급에 맞는 언행을 알려주도록.”
“…아, 알겠습니다. 마스터.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길드 마스터의 축객령에 접수원은 내게 눈치를 보냈다. 잠깐 좀 더 곤란하게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초등학생 같은 괴롭힘은 볼품없다는 생각에 길드 마스터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유리 베르실 님.”
“……그래. 조만간 다시 만나지.”
약간의 침묵 후에 돌아온 대답엔 어떤 생각이 담겨 있을까? 적어도 그녀가 나에게 호의를 갖는 건 요원한 일이겠지. 별로 받고 싶은 생각도 없고.
길드 마스터의 방을 나서고 문까지 닫은 뒤에도 접수원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딱 10걸음 걷기 전까지.
“…하아아아아.”
싱글거리던 미소가 순식간에 무너지고 단숨에 나이를 10년은 더 먹은 것 같은 표장이 솟아올랐다. 접수원은 수많은 감정이 담긴 눈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싱긋 웃어줬다.
“고생했네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설마, 이렇게 될 줄은….”
접수원은 아예 벽에 손을 짚고 고개를 푹 숙였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어지간히도 긴장했었네. 그야 뭐, 자기가 야심 차게 추천한 인재가 길드 마스터와 신경전을 벌였으니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겠지. 뭐, 나를 이용해서 출세하려면 감수해야지.
“저도 길드 마스터가 다짜고짜 살기를 날리는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거참. 알브는 다들 저런답니까?”
천연덕스럽게 묻자 접수원은 뇌에 오류가 온 것처럼 굳더니 이내 여러 의미가 담긴 한숨을 내뱉었다.
“…저도 알브는 마스터 밖에 모르기에 확답해 드릴 수는 없지만, 마스터가 조금 과격한 경향이 있기는 하시죠. ……그리고 시그 님이야말로 그런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고개를 돌려서 나를 보는 그녀의 눈엔 약간의 원망이 담겨 있었다. 번지수 잘못 찾아서 아가씨. 뭐, 누구라도 원망하고 싶은 기분일 테니 이해는 한다. 보다듬어 줄 필요가 없을 뿐.
“어? 진짜요? 저는 제가 연기하는 거 눈치 채고 계신 줄 알았는데. 설마, 어수룩한 여행자라고 생각하셨나요?”
“……아뇨.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않았어요.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사람이라는 건 알았죠. 그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을 뿐이지. …그런데 보통 그걸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하나요?”
아예 몸을 돌려서 황당한 시선을 보내는 그녀에게 나는 천연덕스럽게 웃어줬다. 여기선 솔직하게 대답해주자.
“일가친척도 없는 타지에 왔으니 적당한 가면은 필수죠. 이상한 오해나 의심을 사기는 싫으니 날 세운 태도를 연기할 필요는 없었고요. 성격에도 안 맞고. 뭐, 지금이나 어제 모습은 제 본모습과 큰 차이가 없어요. 다만, 남들의 시선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내 행동이 어떻게 보일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했을 뿐. 이 정도는 눈치챘잖아요?”
“……필요 이상으로 예의바르다는 생각은 했죠. 딱 봐도 귀한 신분이 저자세였으니까.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데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죠. 그래서 동방에서 온 세상 물정 모르고 천연덕스러우면서도 능력 있는 도련님을 연기한다는 느낌은 받았어요. …이 정도인 줄은 몰랐을 뿐.”
솔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직접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내 연기를 알아차리고 자신도 그걸 이용하기로 했다는 실토였다. 판단을 미스한 부분은 내가 생각 이상의 거물이었다는 거다.
“사람을 분석하는 건 어려운 일이죠. 저도 여러모로 고생했어요. 이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인지, 인성은 제대로 된 사람인지 알아보는 건 꽤 힘든 일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접수원 씨의 안목은 탁월한 편이에요. 어쨌든 나를 알아보고 밀어줬잖아요? 이제 남은 건 편안하게 이자를 받아먹는 것뿐이죠.”
“……편안하게 받아먹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머리가 좋은 만큼 이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체념한 접수원에게 냉혹한 현실을 알려줬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조금 전 말이랑 정반대잖아요.”
한숨을 푹 쉰 그녀는 이내 뭐가 우스운지 피식 웃고는 내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고는 마주 잡았다. 그래. 서로 이용하는 것보다는 정식으로 동업자가 되는 편이 낫지.
“그러고 보니 자기소개도 아직 못했네요. 히리에에요. 보다시피 모험가 길드의 접수원이죠.”
“아, 예. 이거 참. 소개가 늦었군요. 시그입니다. 보다시피 옥석 등급 모험가입니다. 초고속승급 모험가죠.”
“…이런 사람인 줄 알았으면 성급하게 구는 게 아니었는데.”
회한 어린 미소였다. 그러게 약관 동의는 신중하게 해야지. 아니, 약관 동의는 아니지만. 왜 이런 생각이 떠올랐지? 뭔가 불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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