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11화 초고속 승급 모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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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클리셰군. 아니, 여관이지. 아, 씨발. 뭐 하는 거야.
“…좆같네.”
한 시간만 잔다는 걸 여덟 시간이나 자고 말았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체내 시계로는 4시 57분인가. 아침까지 3시간 정도 남았군.
다시 자는 것도 애매한 시간이다. 아니, 애초에 지구에선 6시간밖에 안 잤다고. 완전 숙면이잖아. 마음을 풀어헤칠 이유가 없는데, 어재서 이따구로 잔거지?
……설마, 피곤했나?
“싯팔. 뭐든 간에 계획 조졌네.”
이 세계를 알아갈 시간도 부족한 판국에 쓸데없는 숙면으로 시간을 낭비하다니! 통한의 실수였다.
……뭐, 심각한 실수는 아니지. 두 시간 오버했다고 죽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니니까. 오히려 조급해하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다.
좋아. 의식을 전환하자. 평소보다 많이 잔 게 완전 불이익은 아니야. 역시 수면은 최고의 회복수단이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서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처음 이 도시를 봤을 때 궁금하게 여겼던 장대는 역시 가로등이었다. 거리에 사람들은 없었지만, 옅은 빛을 내는 가로등과 밝은 달빛에 거리는 어둠에 잠식되지 않았다.
“…역시, 달은 하나구만.”
새삼스럽지만 이 세계의 달은 하나였다. 보통 판타지는 두 개가 국룰에 심하면 세 개나 네 개까지 있는 소설도 많은데. 역시, 지구와 여러모로 비슷한 환경의 세계다.
정말 재미있단 말이야.
뭐, 이 정도 불빛이면 독서가 불편하지는 않다. 방에 촛불이 있긴 했지만, 이 새벽에 홀로 불을 밝히고 싶지는 않았다.
우선 아까 서점에서 봤던 책들을 복기하자. 아무리 사진처럼 기억한다고 해도 보존 기간엔 한계가 있는 법이라, 이렇게 복기를 해주지 않으면 금세 열화되고 만다. 인간의 뇌는 하드디스크와는 다르니까.
다섯 권의 책을 문자의 형태로 기억에 새기고 구매한 세 권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제일 작은 책이 200페이지고 가장 두꺼운 책이 400페이지였지만, 한 권을 읽는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번에도 번역 치트가 대활약!
지구의 다양한 언어로 번역하면서 책을 읽으니 즐거움이 두 배였다. 오호. 이 단어는 이렇게도 번역되는구나? 덕분에 앞으로는 내게 익숙한 단어로 더욱 자연스럽게 번역이 되겠어.
“꽤 재미있는데? 그런데 예상했던 것과 같은 부분도 있고, 아닌 부분도 있네. 일단, 신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짓은 절대로 하면 안 되겠네. 일상생활에 존나 많이 개입하잖아. 지구의 신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부지런함이구만.”
유익하고 즐거운 독서를 끝내자 7시 17분이었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으니, 간단하게 운동이나 해야겠다.
어제 실전이라는 최고의 수련을 하긴 했지만, 근육이란 쓰지 않으면 퇴화하는 성가신 기관이다. 뭐, 하루 정도 빼먹는다고 극단적인 변화는 없지만, 시간 있을 때 하는 편이 좋지.
다만, 이런 방에서 본격적인 운동은 불가능하니 맨몸으로 할 수 있는 운동만 30분 정도만 했다. 땀도 나지 않았지만….
아, 시발. 생각해보니 어제 씻지도 못했네. 하루만 샤워를 못 해도 찝찝한 기분이 종일 가는데…. 아침 먹고 목욕탕이나 가야겠다.
책만 침대 위에 올려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층을 식당으로 쓰는 여관답게 식사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흠. 특이한 사람은 없네. 그러면 아침은 조용하게 먹으면 되겠어.
“어머, 딱 맞춰서 내려오셨네요?”
“시간약속은 철저하게 지키거든요.”
여관 아줌마는 나를 보고 반가워했다. 하. 이놈의 매력이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비어있는 자리에 앉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줌마가 식사를 들고 왔다.
“자아. 드셔보세요. 입에 맞으면 좋겠네.”
“냄새만 보면 합격이네요.”
“어머. 그럼 단골이 되어 주시겠어요?”
“그건 먹어보고 판단해야죠.”
“후후. 그럼 맛있게 드세요.”
사람답게 대화를 나눈 뒤에 빵을 한입 먹었다.
어제 먹은 10링 짜리 빵보다는 훨씬 나은데? 그 빵을 기준으로 가격을 매기면 15링은 되는 맛이다. 크기도 그 빵과 비슷한 수준이고. 좋아. 그럼 우유는 어떨까?
꿀꺽.
호오? 고소함은 떨어지지만 좀 더 달콤하네? 빵집과는 확실히 다른 짐승의 우유다. 이세계의 소는 아닐 테고, 양젖인가? 흠. 맛의 방향성이 다를 뿐이지, 전체적인 수준은 빵집의 우유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스프를 먹어보자. 흔하디 흔한 하얀색 스프다. 외형과 냄새만 보면 크림스프인데…. 어디.
……아. 이건 코맨트 하기 미묘하네. 그렇게 맛이 없지는 않지만, 특별한 맛도 아니다. 그래도 군대에서 먹었던 스프보다는 낫다. 인스턴트 스프와는… 음. 비슷비슷한가.
못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굳이 먹고 싶은 맛은 아니다.
뭐, 여관 밥에 큰 기대를 하는 것도 웃기지. 빵이 먹을 만하니, 만족하자. 다른 추가 메뉴도 있지만, 여기서 먹느니 비싸더라도 어제 그 식당을 가고 말지.
그래도 깨끗한 방과 친절한 아줌마를 생각하면 이 여관을 계속 이용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책에서 얻은 일반상식을 보면 하루 숙박비 150링에 이 정도 퀄리티는 나쁜 게 아니니까. 다른 여관을 찾아가는 것도 귀찮고.
좋아. 이 정도면 합격이다.
“잘 먹었습니다.”
“잘 드시네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당분간 잘 부탁드릴게요.”
“탁월한 선택이에요. 서비스로 이번 추가비용은 안 받죠.”
“고맙네요.”
“고마우시면 계속 이용해 주세요.”
“당분간은요!”
그렇다고 덜컥 좋다고 하면 호구 잡히는 거니 장난스럽게 마무리했다. 여관 아줌마도 그 이상 확답을 받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호호 웃으면서 나를 보내줬다. 적당한 선을 알고 있구만. 마음에 들었어.
즐거운 마음으로 여관을 나서서 도시를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길드는 오후에 가야 되니 조금 전에 다짐한 것처럼 목욕탕이나 가야겠다. 이세계의 목욕탕이 어떤 모양일지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
아니, 생각해보면 지구에서도 나는 목욕탕을 가본 적이 거의 없다. 어렸을 때 몇 번 말고는 전부 집에서 씻었으니까. 뭐, 군대의 그것도 목욕탕이라면 목욕탕이니 성인이 된 뒤에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군.
그래서 이세계의 목욕탕이 어땠냐면,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샤워기가 없는 건 불편했지만, 탕에 들어가기 전에 밖에 준비된 온수로 몸을 한 번 씻고 들어가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어서 탕이 더럽지는 않았다. 비누도 멀쩡히 있었고.
하긴, 이 정도 문명에 비누가 없는 게 더 이상하지. 애초에 도심에 흐르는 개천이 깨끗한 것부터가 이 세계의 위생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가격도 적당했다. 1회에 30링. 이 정도면 매일 와도 되겠다.
…당연히 남탕과 여탕도 따로였다. 다행이면서도 아쉬운 부분이다. 응.
그렇게 간단하게 목욕을 끝내고 다시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아침이라 그렇게 손님이 없었지만, 그 몇 안 되는 손님들은 하나 같이 내 몸을 보고 경악해서 잔뜩 움츠러들거나 멀리 도망갔다. 거 참. 겁 많은 사람들이네.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인가.
뭐, 나도 내 몸이 남들이 보기에 좀 그렇다는 건 알고 있다. 애초에 보디빌더처럼 예쁜 근육을 만들기 위해서 신체를 단련한 게 아니니까. 수련 도중에 얻은 상처도 꽤 많으니 보기엔 흉악하겠지.
무엇을 숨기랴. 내 별명 중엔 [삼엽충]과 [가재장군]이 있다. 전자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별명이고 후자는 조금 애교 섞인 별명이다. 우리는 모두 친구!
뭐, 어느 쪽이든 내가 웃통을 깐 사진을 보고 경악하면서 만들어진 별명이다. 나를 –갑이라고 부르는 사이트도 있었지.
나는 등에 귀신을 품지는 못했지만, 갑각류는 품은 남자다.
하. 지구 생각하니 또 우울해지는군. 그 우울함을 날리기 위해서 도시를 산책했다. 어제는 천천히 살려보지 못한 부분까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영 이종족이라 부를 만한 모습이 안 보이네.
이 세계에 인간을 닮은 이종족이 없는 것도 아니고, 종족차별이 심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20세기 지구를 생각하면 없는 수준이나 다름없다. 21세기와 비교해도 적은 편이다.
그런 부분은 지구보다도 확실히 선진적이다. 피부색이 다른 정도로 그 지랄을 떠는 게 인간인데 아예 종족이 다른데도 존중할 수 있다는 건 이 세계의 도덕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는 척도였다. …뭐, 종족차별이 거의 없는 이유는 단순히 도덕적인 문제만이 아니긴 했지만.
어쨌든 강한 몬스터 외에도 마음에 드는 게 하나 더 생겼다. 이 정도면 생활에 큰 불편함은 없겠지. 어떤 면에선 지구보다 편할지도 모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도시를 걷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곧바로 어제저녁을 먹고 단골이 된 식당으로 가서 200링에 점심을 때웠다. 이걸로 남은 돈은 고작 270링. 추가로 돈을 못 벌면 저녁은 꽤 빈곤하게 먹어야겠지.
당연히 그럴 일은 없다. 오늘도 배부르게 먹고 편안한 숙소에서 쉴 예정이니까.
자아, 그러면 슬슬 길드로 가볼까. 오늘은 좀 낚이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길드 근처에 도착하자 처음에는 제각기 볼일을 보던 모험가들의 시선이 내게 확 쏠렸다. 등급을 가리지 않는 관심. 하루 만에 옥석으로 승급한 효과였다.
시선에 담긴 감정들이 참 다양하구만. 뭐, 일일이 상대해줄 필요는 없다. 그래도 당장 낚이는 사람은 없네. 하긴,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겠지.
길드 내부로 들어가자 역시 같은 반응이 나왔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나를 보자마자 평소보다 더욱 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접수원에게 다가갔다. 어제보단 덜 노골적이네.
“어서 오세요. 시그 님.”
“안녕하세요.”
“마스터는 3층에 계십니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어제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말 편하게 해주세요. 왠지 거리감이 느껴져서….”
내가 쑥스러워하면서 말하자 접수원은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호감도 상승일까, 아니면 수작을 부리는 거라 생각하는 걸까? 이 아가씨도 은근히 만만치 않단 말이지.
“네. 그럴게요.”
“네에. 그럼 안내 부탁드립니다아.”
“따라오세요. 후후후.”
접수원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안내했다. 그런 우리들의 등에 여러 시선이 꽂혔지만, 지금은 무시해도 된다. 한 명만 낚여도 좋겠는데,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지.
접수원의 뒤를 따라서 2층으로 올라오자 예상대로 이곳에도 접수대와 의뢰서가 붙어진 게시판이 있었다. 몇 안 되는 모험가들도 하나 같이 강철 등급 이상의 모험가들로, 그 중엔 어제 봤던 붉은 머리 여성도 있었다. 실버는 그녀뿐이군.
그들도 나와 접수원을 보고 이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접수원은 가볍게 묵례했고, 나도 따라 했다. 중위 모험가들도 마찬가지로 묵례하고 시선을 돌렸다. 이쪽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모습. 유일하게 붉은 머리 여성만이 나를 보고 흥미롭다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 씨. 나한테 관심받고 싶으면 이름이라도 밝히라고. …그러고 보니 나 접수원 이름도 모르네. 나중에 알려달라고 해야지.
2층에는 중위 모험가 전용 접수대와 게시판 말고도 방이 여러 개 있었다. 그중에 가장 끝에 있는 방이 바로 길드 마스터의 방이었다. 햇빛이 쨍쨍하게 들어오는 장소다.
접수원은 길드 마스터의 방문 앞에서 멈춰서더니 노크를 세 번 했다.
똑똑똑.
“들어오도록.”
그에 맞춰서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여자인가. 목소리만 들어선 상당히 젊다. 20대… 잘하면 10대 수준의 목소리다. 흐음. 이거 꽤 기대되는데? 아. 아름다운 여성이라 생각해서 기대되는 건 아니다. 내가 기대하고 있는 건 전혀 다른 쪽이다.
“실례하겠습니다.”
접수원은 공손하게 말하곤 문을 열었다. 나는 활짝 열린 문을 통해서 길드 마스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감동했다.
그녀가 예상대로 아름다운 여성이어서가 아니다.
마치 스스로 별빛을 내듯 반짝이고 있는 어깨까지 오는 백금색 융단의 아름다움 때문도 아니다.
신의 영역에 도달한 장인이 평생을 걸쳐서 깎아낸 조각품 같은 외모의 빛나는 아름다움 때문도 아니다.
황금을 품은 눈동자도 우아하게 솟아오른 콧날도 루비처럼 빛나는 입술도 나에게 감동을 주진 못했다.
확실히 지구에서도 보지 못한… 정확히는 현실에서는 보지 못한 초현실적인 외모였지만, 나는 단순히 상대의 미색에 감동하는 얼빠가 아니다. 아름다운 걸 좋아하긴 하지만.
내가 감동한 부분은 그녀의 귀와 입을 열 때 살짝 보인 송곳니였다.
인간보다 두 배는 기다란 역삼각형의 뾰족한 귀.
인간보다 훨씬 날카로운 송곳니.
그녀는 지구의 인간과 거의 같은 외형을 가진 이 세계의 인간이 아니었다.
명백히 다른 종족.
오늘 새벽에 읽은 책에는 그녀와 같은 특성을 가진 종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번역 치트는 그녀의 종족을 이렇게 표현했다.
알브Alfr
“반갑군. 나는 타라스트 모험가 지부 길드 마스터인 유리 베르실이다.”
내가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본 이종족은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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