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10화 초고속 승급 모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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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은 길드에서 동쪽으로 크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빵집과 마찬가지로 고블린을 잡으러 갈 때 봐두었던 곳이다. 고기 냄새가 아주 좋았지. 적어도 고전 영국 요리 같이 조잡한 물건을 내오진 않을 곳이었다.
그런데 영국 요리라…. 그래. 이 세계의 종교관이 어떤지 확실히 알아두는 것도 중요하지. 지금까지는 그다지 특색이 드러나는 일이 없었지만, 일단 다신교인 건 확실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도시에 온 이후부터 계속 이랬지만, 간혹 쏟아지는 시선은 묘한 감흥을 느끼게 해준다. 지구에서도 지금 옷을 입고 다니면 묘한 시선이 쏟아졌었지. 그렇게 이상한 옷도 아닌데 말이야.
뭐, 남들의 시선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 그런 걸 신경 써서 내가 입고 싶은 옷을 벗고 싶지도 않고. 애초에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이 옷은 절대로 벗을 수 없다. 내 몸은 총탄도 튕겨내는 강철 육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의만 심하게 어기지 않는 이상 복장은 자기 좋을 대로 입는 거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걸으니 금세 식당에 도착했다. 음. 맛있는 고기 냄새. 이 세계의 고기 요리는 어떤 맛일까. 냄새만큼 괜찮은 물건이 나와줬으면 하는데 말이야.
약간의 기대를 품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아직 저녁이라기엔 빠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손님은 별로 없었다. 그 손님들의 옷이 정갈한 걸 봐선 기본은 하는 가게다.
외부도 내부도 깨끗하고 가구 배치나 천장 장식, 벽지 등에도 상당히 공을 들였다. 품행불량한 인간들이 배를 채우러 들어올 만한 가게가 아니다. 나도 그런 인간들은 싫다. 품위에 엄격하진 않지만, 예의는 최대한 지키는 게 좋다.
비어있는 자리에 가서 앉아 여성 종업원이 메뉴판을 들고 재빠르게 다가왔다. 복장이 제법 세련됐다. 이 세계는 패션만큼은 지구의 현대 기준으로도 괜찮은 수준이란 말이지.
“안녕하세요. 손님. 여기 메뉴판 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주문은 바로 해도 되죠?”
“물론입니다. 아. 혹시 처음이 아니신 건가요?”
“처음이에요. 다만, 비슷한 요리는 먹어봤죠.”
“그러시군요. 그럼 주문은….”
“리본시 스테이크 미디엄, 클레오므레, 바리랭, 파스스테를 각각 일인분씩 부탁드려요.”
“…그, 혹시 아직 안 온 일행이 계신가요?”
고기 요리 세 개에 스튜 하나를 시키자 종업원은 당황했다. 물론, 그런 반응을 예상했던 나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혼자입니다.”
“…괜찮으시겠어요? 혼자 드시기엔 조금 많지 않으신가요?”
접수원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 이면엔 낼 돈은 있는지 의심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뭐, 이 정도 돌려 말하기는 기본 중의 기본이지. 역시 가게를 잘 골랐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부족은 음식을 남기는 걸 죄악으로 여기니까요. 전부 먹을 수 있고, 그럴 돈도 충분히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길.”
“아! 아, 알겠습니다. 주문 받았습니다.”
그리 말하며 팔찌를 슬쩍 보여주자 접수원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뒤에 주방으로 천천히 달려갔다. 흠. 이곳에서 유일하게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이라 팔찌를 보여준 건데, 생각보다 영향력이 있나 본데?
하위등급 모험가 중에 가장 높은 등급이기도 하니, 일반인에겐 나름대로 신뢰할 수 있는 증표가 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요리의 냄새를 즐겁게 맡으면서 기다리고 있으니 30분 정도 뒤에 모든 요리가 나왔다. 접수원은 조금 걱정되는 표정이었지만, 내가 차분하고 예의 바르면서도 빠르게 먹기 시작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단 그녀만이 아니라 특이한 복장의 동방인을 흥미롭게 보던 몇 안 되는 정갈한 복장의 손님들도 내 식사장면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거참. 남이 밥 먹는 걸 빤히 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그나저나 이거 기대 이상이다.
하나하나 품평해보자.
리본시 스테이크는 지구에서도 자주 먹어본 평범한 스테이크다. 고유어로 번역되는 걸 보면 빵집에서 받았던 우유를 생산하는 소하고는 다른 생물이겠지.
우아하고 신속하게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입에 집어넣었다. 입에서 사르르 녹는 맛은 아니지만, 담백한 고기의 맛과 고소한 기름의 맛이 제대로 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에 적당히 익은 육즙이 혀를 간지럽혔다.
좋군. 내게 작은 감동을 줬던 과일 빵만큼은 아니지만, 고향의 맛이 조금이지만 떠올랐어.
이건 소보다는 양고기, 그것도 갈비에 가깝다. 생김새는 일반 스테이크인데 맛은 갈비라니. 그 아이러니함이 더더욱 맛을 끌어올렸다.
주방장의 솜씨를 알 수 있는 불 조절과 소금간이 합격선을 넘어간다. 번화가에서 요리실력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실력이다. 고기 본연의 맛을 아주 잘 살렸어. 역시 스테이크는 미디엄이지.
좋아. 만점이다. 200링의 가격이 이해가 간다. 여기 물가는 아직 정확히는 몰라도 점심을 생각하면 합리적인 가격이다.
천천히 맛을 음미하면서 나이프와 포크를 놀리자 스테이크는 금세 사라졌다. 양은 조금 모자르네.
다음은 클레오므레다.
클레이모르네는 순살을 튀김가루에 묻혀 기름에 튀긴 고기 요리였는데, 생김새와 크기가 닭튀김과 차이가 없었다. 심지어 찍어 먹으라고 소스도 따로 담겨온 것도 그렇고. 냄새도 닭튀김과 별로 다르지 않았는데 과연 맛은 어떨까?
여섯 개의 조각 중 하나를 포크로 찍어서 입으로 집어넣었다. 처음은 순정이지. 혀로 튀김옷을 맛보자 처음에 느낀 감상이 맞았다.
…이거 닭튀김이다. 그것도 고소하고 바삭한 게 아니라, 눅눅하고 기름진 닭튀김.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 꽝을 뽑았나? 그렇다고 생크림 빵처럼 못 먹을 건 아니라서 꼭꼭 씹어먹었다. …고기 맛도 닭튀김이랑 다를 게 없네. 스테이크가 생각 이상의 물건일 뿐이었나. 별다른 감상도 안 드는 맛이다.
솔직히 2만원 짜리 순살 치킨이 더 맛있어.
그래도 아직 이 요리를 전부 즐긴 건 아니다. 같이 나온 소스는 3종류였는데, 각각 빨강, 노랑, 연녹색의 소스였다. 우선 빨간 소스에 먼저 찍어 먹어봤다. 색만 보면 매콤한 맛일 텐데…….
조금 전 평가를 수정해야겠군.
이건… 소스에 찍어 먹어야 본연의 맛을 내는 요리다!
양념치킨 소스보다 훌륭한 맛의 소스라니!
적당히 매콤한 맛과 단맛이 눅눅하고 기름진 튀김 옷과 퍽퍽한 고기 맛에 베어드니 단점이 상쇄되고 장점이 도드라져서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이럴 수가… 내가 이런 실수!
이세계의 요리라고 너무 얕보고 있었던 걸까? 지구의 소스와 비교하면 당연히 질이 떨어진다 생각하고 고기 본연의 맛만 중시했다. 아니었다. 이 세계의 요리는 소스도 훌륭하다! 온갖 합성 조미료와 오랜 연구로 만들어진 지구의 소스에도 뒤지지 않아! 주방장 불러와! 별을 주지!
이거 다른 소스도 참을 수 없군! 곧바로 다른 소스에도 찍어서 먹었다. 역시 이쪽도 훌륭하다! 노란색 소스는 머스타드와 비슷했지만, 더 강렬한 맛을 가지고 있었고 연녹색 소스는 독특하면서도 새콤한 맛이 혀를 상큼하게 만들었다.
후. 이거 스테이크보다 만족도가 높은데? 포만감도 스테이크 이상이다. 그런데 가격은 200링? 스테이크와 같다고? 400링을 줘도 아깝지 않은 요리다. 흠. 소스의 레시피를 훔치고 싶은 생각이 들을 정도라니. 고기만 좀 더 제대로 구우면 환상적인 요리가 되겠는데.
반성과 감동, 약간의 아쉬움과 함께 전부 먹고 다음의 바리랭에 손을 뻗었다.
바리랭은 선지 소시지와 똑같은 모양이었다. 아니, 동물의 창자에 선지, 다진 고기, 채소를 집어넣은 걸 보면 피순대 쪽에 더 가깝다. 재료의 구성도 피순대와 거의 똑같군.
그럼 맛은 어떨까? 순대는 소금에 찍어 먹는 파이지만, 클레오므레와는 다르게 아무런 소스도 없었다. 소금도 없군. 순전히 이 요리 맛만을 즐기라는 건가. 과연, 그렇게 자신할 만한 실력인지 궁금하군! 훗. 그렇다고 방심하지는 않는다. 조금 전의 패배에서 배우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으니!
하나를 입에 넣었다.
…이, 이 맛은!!!
쫄깃하면서도 질기지 않은 창자! 그 안에서 서로 자기주장을 하지 않고 한 대 어우러져 있는 선지와 고기! 그들을 감싸며 잡내를 잡아내는 상큼한 채소!
훌륭해! 지구에서도 먹어 본 적 없는 피순대다!
괜히 소금이나 소스를 내지 않은 게 아니야! 주방장 자식! 자신감만큼의 실력은 있군! 인정하지. 일류 셰프에 필적할 실력이라고! 이게 고작 300링인 것도 플러스다! 600링이어도 이상하지 않은 가격이야! 여기 요리가격 너무 싼 거 아니야?!
이거 참! 하나하나 입에 사라지는 게 아쉬워지는 요리는 간만이네! 그것도 이세계에서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이야! 크으! 이 가게 오길 잘했구만! 스탠드 공격이었으면 당할 뻔했어!
그렇게 아쉬워하면서도 빠르게 바리랭을 음미하고 이제 남은 것은 파스스테를 뿐이었다.
안타깝네. 즐거운 저녁이 벌써 끝나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식도락은 삶의 즐거움 중 하나이지만 정보수집을 게을리하면 미래의 삶이 힘들어질 수 있으니까. 식도락을 즐기는 건 좀 더 생활이 안정된 뒤에 해도 늦지 않지.
자아, 그럼 마지막 요리를 즐겨볼까.
파스스테는 고기와 당근을 닮은 채소와 토마토를 닮은 채소를 넣은 스튜다. 고기는 큼지막하게 잘랐고 당근(귀찮으니 그냥 이렇게 인식하자)은 채썰기, 토마토는 한 개를 사등분 했다. 외형만 보면 블랑켓 드 보가 떠오르는군. 덜 푸짐하지만.
그럼 맛은 어떨까? 스튜는 그렇게 좋아하는 요리가 아니라서 많이 먹어보지는 못했다. 나는 국밥 취향이라서.
우선 고기와 국물을 함께 음미해볼까.
훗. 이제는 안다고. 이런 요리에서 단품만 먹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젠장. 지구에서도 미식가로 이름 높던 내가 실수하게 만든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맛없기만 해봐라. 그대로 주방장 호출이다! 진상이 뭔지 보여주마!
스푼을 입에 넣었다.
므와아아아아아아아시이이있어!
오쿠야스처럼 절규하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이번에는 국물과 당근, 토마토를 한입에 넣었다.
답이 없구만!
이번에는 세 가지를 한꺼번에다아아아아아!!!
(기절)
…후. 주방장 녀석. 이번에는 무승부로 해야겠군. 스튜. 스튜인가. 그래. 꽤 괜찮잖아? 그동안 입맛에 안 맞는다고 무시한 걸 사과해야겠어. 여기 주방장의 실력이 대단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응. 뭐, 이제 단골이니까. 상관없지.
스튜까지 모든 요리를 즐기자 30분이 지났다.
고기 요리 세 개, 스튜 하나에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썼네. 벌써 6시 가까이 됐잖아? 아직 해가 지지 않은 걸 보면 일몰도 지구랑 별반 다를 게 없군.
멍해져 있는 종업원에게 식사비로 800링을 주고 식당을 나섰다. 떠나는 내게 종업원이 다급히 다음번에도 뵙겠다는 말을 한 게 마무리 디저트로 충분했다. 단골이 될 수밖에 없지.
자아. 그럼 다음은 서점으로 가볼까.
남은 돈이 1,020링이니, 책이 지나치게 비싸지 않으면 세 권은 살 수 있겠군. 우선 이 세계의 신과 일상적인 상식을 먼저 알아볼까. 제일 중요한 거니까.
서점도 미리 봐둔 곳이 있어서 곧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주인장은 나이 지긋한 노인으로 희귀한 동방인의 방문에도 고개를 까닥하고는 곧바로 자기가 보던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 독서광이었다. 하극상 마렵네.
유교맨다운 연장자 배려와 쓸데없는 대화는 싫었기에 조용히 책을 골랐다. 음. 대부분이 얇은 책이네. 기껏해야 100페이지 정도가 대다수야. 그렇게 작은 서점이 아닌데도 말이지. 그리고 역시 인쇄기술이 발달 된 세계다. 뭐, 덕분에 생각보다 싼 가격으로 책을 살 수 있으니 이득이라면 이득이다.
…그 전에 조금 미안하지만 몇 권 정도는 눈으로 복사 좀 해가야겠네. 지구에선 서서 읽기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여기 상식을 빨리 익히지 않으면 여러모로 힘들어질 테니까. 그래도 앞으로 단골이 되어서 책도 꾸준히 사갈 테니 손해는 아니야. 응.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끝내고 이 세계의 문화와 관련된 책을 한 권 뽑아서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내용을 읽는 건 나중에 해도 된다. 지금은 페이지 한 장 한 장을 머리에 집어넣기만 하면 되니까.
이건 속독과는 전혀 다른 기술이다. 오랜 수련으로 손에 넣은 기술로, 눈에 보이는 풍경을 사진처럼 기억하는 기술이다.
안타깝게도 완전기억능력 같은 건 타고나지 못했고, 기억력이 남들보다 좋기는 하지만 세계 최고 수준은 아니었기에 만들어낸 기술이지.
이 기술을 이용하면 책을 머릿속에 온전히 저장하는 게 가능하지만, 나는 독서 자체를 즐겨서 책을 볼 때는 그다지 써먹지 않았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아예 집에 커다란 서재를 만들 정도였으니까.
지금은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많이 기억하는 건 양심에 찔리니까 다섯 권만 복사해가자. 세 권은 사고.
10분 정도 걸려서 책을 고르는 겸 복사를 완료하고 책을 들고 주인장에게 갔다. 주인장은 슬쩍 고개를 들어서 책을 확인하더니 손가락을 세 개 올렸다.
320링이군. 세 권에 320링이면 지구 기준으로도 싼 편이다.
돈을 내자, 주인장은 고개를 한 번 까닥하는 거로 축객령을 내렸다. …이 가게 꽤 큰데도 사람이 없다 싶더니, 주인장의 태도가 이래서야 사람이 없을 수밖에 없지. 보아하니 부자가 취미 삼아 운영하는 것 같은데…. 뭐, 나하고는 상관없지. 오히려 손님이 적은 편이 나한테도 좋다.
그렇게 책을 챙기고 밖으로 나와서 걷기 시작했을 때 화사한 복장의 여자애가 나를 스쳐 지나가더니 서점으로 들어갔다. 녹색 머리가 어울리는 여자애다. 역시 판타지구만.
“할아버지! 저 왔어요!”“…시끄럽구나.”“어휴! 단골에게도 접객 태도가 그러니 손님이 없죠!”“없어도 된다.”“그게 장사하는 사람이 할 소리예요?”“…조금 전에 한 명 왔어.”“흥. 보나마나 할아버지의 태도에 질려서 금방 나갔겠죠.”“…세 권 샀어.”“네? 거짓말! 말도 안 돼!”
…여기까지 다 들리네. 보아하니 친손녀는 아닌가. 후. 역시 판타지 세계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마음이 푸근해지는 광경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즐거운 소리를 뒤로 하고 여관으로 향했다. 여관도 몇 군데 점찍은 데가 있다. 전부 찾아가는 것도 귀찮으니 오늘은 가까운 곳에 가자. 마음에 안 들면 내일은 다른 곳에 가면 되고.
오래 걷지 않아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3층 석재건물로 창문을 통해 추정한 한 방의 크기는 12평 정도. 그런 방이 30개는 있는 제법 큰 여관이다. 건물도 깨끗했다.
대신 하루 숙박비가 150링이지만. 뭐, 그만한 값을 하는 곳이다. 내가 본 여관 중 가장 싼 곳이 하루 30링이었는데 정말 허름한 곳이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돈을 못 버는 것도 아닌데 그런 곳에서 잘 수는 없지.
잘 만들어진 문을 열고 들어가자 깨끗한 내부가 보였다. 인테리어도 괜찮고 퀴퀴한 냄새도 나지 않는다. 길드 건물은 워낙 많은 사람이 있고 모험가라는 직업이 그리 깨끗한 직업이 아니다 보니 다양한 냄새가 섞여서 많이 불편했지.
길드추천 숙소를 거절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모험가들이 많은 여관은 싫어.
“어서 오세요. 몇 분이시죠?”
접수대에 있던 중년 여성이 방긋 웃으며 환영했다. 여관 주인이나 부인이겠지.
“혼자입니다. 2층에 방이 있나요?”
“혼자시군요? 마침, 2층에 딱 한 자리가 남았네요. 여기 키를 가지고 가세요. 참. 저녁은 드셨나요? 식사는 한 끼에 50링이랍니다. 기본 메뉴는 빵, 우유, 스프에 추가 메뉴는 식당의 메뉴판을 참고해주세요. 추가비용은 당연히 있고요.”
“저녁은 먹었으니 괜찮아요. 아침은 부탁드리죠. 메뉴는 빵 하나만 더 추가해서. 8시에 내려올 건데, 괜찮죠?”
“물론이죠. 시간에 맞춰 준비해드리죠. 며칠 묶으실 거죠?”
“일단 오늘 하루만 부탁드리죠. 식사가 괜찮으면 앞으로도 이용할게요.”
“어머, 그렇게 말씀하시니 내일 아침에는 기합을 넣어야겠네요. 후후후. 아. 숙박비는 선불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사람 좋게 웃는 아줌마에게 150링을 주고 키를 받았다. 키에 적혀 있는 번호가 방 번호인 건 이세계나 지구나 똑같군.
2층으로 올라가서 내 방에 들어가자 깔끔한 방이 나를 맞이했다. 흠. 생각보다 괜찮네. 뭐, 지구에서도 이것보다 훨씬 심한 곳에서도 잘 잤었다. 다만, 지금은 돈도 있고 내 몸이 가장 큰 재산이니 팍팍 투자할 뿐이다.
“읏차.”
푹신.
옷도 벗지 않고 곧바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푹신하네. 스프링을 썼어. 이 정도면 이 세계도 생활과학이 꽤 발전했다고 봐야겠지. 마법 같은 기술이 있으면 순수과학은 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다.
정말 찐 중세 수준이 아닌 게 어디냐. 아예 안 오는 편이 나았겠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지.
“하.”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만감이 교차한다.
증오가 끓어오르는 한편으로 만족감과 기쁨도 느껴졌다.
…정말이지.
“한 시간만 자볼까.”
이럴 때는 무작정 자는 게 제일이지. 아직 오늘이 끝나려면 한참 시간이 남았다. 잠깐만 자고 일어나서 오늘 얻은 정보를 정리하고 책을 읽어야지.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이 세계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원수를 죽이기 위해서.
야이, 싯팔새끼야 목 씻고 기다려라.
나는 눈을 감았다.
아. 가족들 보고 싶다.
그렇게 이세계 첫날이 끝났다.
……그냥 자버렸잖아. 등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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