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에 천재가 가면-6화 (6/93)

〈 6화 〉 6화 첫 보스전

* * *

도시로 들어올 때 문지기가 보자기의 내용물과 내 팔찌를 보고 조금 놀랐던 것 말고는 별다른 트러블 없이 길드에 도착했다.

귀가 담긴 포대를 들고 길드에 들어가자마자 시선이 쏠렸다. 나를 상대해줬던 접수원은 다른 모험가를 상대하고 있었는데 그쪽도 잠시 작업을 멈추고 나를 봤다.

그리고 크게 떠지는 눈들.

아아. 정말 기분 좋아지는 시선이야.

더욱 만끽하고 싶었지만, 이런 거에 집착하는 건 절대로 좋지 않다. 강철 같은 의지력으로 욕망을 끊어내고 접수대로 다가갔다. 마침, 마무리 단계였는지 접수원이 상대하던 모험가도 옆으로 비켜갔다. 시선이 여러모로 인상적이군.

접수원은 웃는 얼굴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하고 있었지만, 그 안의 당황을 눈치 못 챌 내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반응을 즐기면서 놀릴 시간도 없다. 빨리 의뢰비를 받고 점심 먹고 다음 의뢰를 해결해야한다.

시간은 금이라구! 친구!

같은 고블린이어도 한쪽은 하나의 종족이고 이쪽은 단순한 몬스터로군. 종족의 다양성 면에선 서양 판타지 설정이 좀 더 매력적이긴 해. 이 세계는 한국이나 일본식 판타지와 비슷한 느낌이 든단 말이지.

뭐, 사색은 여기까지다.

나는 만면에 미소를 짓고서 보자기를 내밀었다.

“고블린 토벌 완료했습니다.”

“…빠르시네요.”

접수원은 그리 말하면서 보자기를 받아들고 안을 열어보았다. 잠깐 커졌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숫자를 새는 거겠지. 접수원이니 증거품의 수를 빠르게 새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잠시 뒤, 접수원은 당황을 넘어서 황당해하는 눈이 되었다.

“스물네 마리나 되었나요?”

한쪽만 잘라 와도 되는 거였군.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두 개 쪽이 확실해서 둘 다 잘라온 거였는데. 여기서 공적을 부풀려봐야 좋을 게 없었다. 정직이 최고다.

“예? 아, 그렇구나. 하나만 잘라 와도 되는 거였군요?”

“휴우. 깜짝 놀랐네요.”

능청을 떨며 말하자 접수원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래도 굉장하시네요. 열두 마리의 고블린을 이렇게 빠르게 토벌하다니. 왕복하는 시간만 해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거리였는데 말이죠.”

놀라운 사실 하나.

이 세계도 24시간 60분 60초를 쓰고 있다. 심지어 1년 365일에 12개월로 날짜 단위도 같다. 월화수목금토일의 표기는 아무리 그래도 지구와는 달랐지만, 이세계에서 가장 숭배받는 칠대신의 이름에서 따왔다. 모험가들의 대화와 몇몇 건물 안에 있는 시계와 달력을 통해 이걸 알고 여러 생각이 들었지.

뭐, 지금 중요한 건 아니지. 이것도 나중에 풀 문제다.

“제가 다리가 조금 빠르거든요.”

“단순히 빠른 수준이…. 네. 새싹 모험가 시그 님의 고블린 토벌을 확인했습니다. 의뢰비는 여기 있습니다.”

접수원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우수한 사람답게 공과 사를 착각하지 않았다. 보관하고 있던 의뢰서(내가 가지고 간 건 복사본이고 원본은 접수원이 보관)에 도장을 찍고 서랍에서 대동화 세 개와 소동화 여섯 개를 능숙한 손놀림으로 골라내서 접수대 위에 가지런하게 올렸다. 은행원의 손놀림 같군. 뭐, 그쪽 일도 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직업이지.

그나저나 360링인가. 분명 의뢰비는 240링이었는데. 짐작 가는 이유가 있지만, 접수원에게 듣는 게 확실하겠지.

아. 이 나라뿐인지, 세계전체가 그런지 몰라도 통화명칭은 링을 쓰고 화폐는 소동화, 대동화, 소은화, 대은화, 소금화, 대금화를 쓰고 있었다. 지폐도 있는 것 같지만, 화폐가치를 생각하면 수표 용도로만 쓰이겠지.

화폐가치는 소동화 한 개가 10링이고 대동화는 그 열 배인 100링. 소은화도 그 열배인 1,000링. 이런 식으로 대금화에 이르러서는 1,000,000링이 된다. 이것도 다 길드와 도시를 오가면서 알게 된 것들이다.

이렇게 가치가 딱딱 10배씩 떨어지는 화폐가 융통되다니. 최소한 이 나라의 행정력은 지구의 근대 국가 수준인 게 틀림없겠지. 그게 아니라면 판타지스러운 이유가 있거나.

접수원은 동전 아홉 개를 자연스럽게 내밀면서 웃었다.

“기본 의뢰비 240링에 보상금 120링입니다. 확인해주세요.”

역시 보상금이었네. 뭔지 알겠지만, 확실하게 하자.

“네.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보상금이라뇨?”

“예상보다 수가 많았으니까요. 그에 대한 보상이에요.”

“그런 제도가 있었군요? 그래도 의뢰비의 절반이라니… 혹시 의뢰서에 적힌 수보다 많은 비율만큼 보상금도 같은 비율로 늘어나는 건가요?”

“잘 보셨네요. 네. 그 비율만큼 보상금의 비율도 의뢰비 대비 증가해요.”

“한도는 없나요?”

“과거에는 있었는데, 그걸 이용해서 일부러 수를 낮게 의뢰하는 경우가 빈번해져서 결국 폐지되었어요. 사실, 지금도 일부러 수를 낮게 부르는 경우가 가끔 있죠.”

“그러고는 자기네는 몰랐다고, 의뢰비 이상은 줄 수 없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나 보군요?”

“잘 아시네요. 사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가끔 나와요. 의뢰내용을 의도적으로 속이는 경우엔 엄벌이 내려지는데도 말이죠.”

“어리석네요.”

“어리석죠. 하지만 그게 통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아서…. 시그 님도 조심하세요. 모험가를 속이려는 사람들은 제법 많답니다.”

접수원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겠지. 아무리 엄벌해도 이득만 있다면 얼마든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게 인간이라는 족속이다. 이 세계도 그런 면에선 지구와 다를 게 없다. 이것도 수렴진화인가? 다윈 선생 당신은 도덕책.

참고로 내가 받은 고블린 토벌은 길드가 직접 낸 의뢰이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다. 길드가 대놓고 모험가를 엿 먹이는 일은 어지간하면 없겠지. 지금까지만 봐도 꽤 건전한 조직인 것 같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하루에 받을 수 있는 의뢰의 수에 제한이 있나요?”

“아뇨. 한 번에 여러 개를 받는 건 불가능하지만, 하루에 받을 수 있는 수는 별다른 규정이 없어요. …혹시?”

접수원은 내 의도를 알았는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나는 대답대신 웃어주고 여전히 붙어 있는 코볼트 토벌 의뢰서를 가지고 돌아와서 내밀었다.

“그런 규정이 없다면 다행이네요. 코볼트 토벌 의뢰도 수행하겠습니다.”

“괜찮겠어요? 코볼트의 발견 장소는 고블린보다 멀고 수도 스무 마리가 넘는데요?”

접수원은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지만, 강하게 말리는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눈동자에선 어떤 열망이 느껴졌다.

정확히는 출세욕. 역시, 그 토벌 의뢰들은 그런 용도구만.

뭐, 이런 윈윈하는 관계는 나도 환영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해가 지기 전까지는 돌아올 테니까요. 아, 길드는 언제까지 문 여나요?”

“저녁 9시까지는 열어요. 하지만 성문의 폐문은 8시이니 그전에는 도시로 들어오셔야 해요.”

“못 들어오면요?”

“야영이죠.”

“반드시 제시간 안에 돌아오죠.”

야영이라. 못할 것도 없지만, 첫날부터 야영은 싫다. 뭐, 여기 여관이라고 해봤자 어지간히 비싼 곳이 아닌 이상 고향 집만도 못하겠지만, 모르는 벌레와 짐승이 돌아다니는 땅바닥보다는 낫다.

아무래도 점심은 느긋이 즐기지 못할 것 같군.

의뢰서를 받아든 나는 접수원에게 인사하고 길드를 나섰다. 오전보다 더욱 강렬해진 눈빛이 등에 쏟아졌다. 이러면 내일쯤이면 소문이 쫙 퍼지겠군.

자아. 누가 낚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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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에서 나온 나는 미리 봐뒀던 빵집으로 향했다. 아까 고블린 잡으러 갈 때 눈여겨 봐뒀던 집 중 하나다. 냄새와 땟갈이 다른 빵집보다 좋았기 때문이다. 점원도 미인이고.

점원의 환대를 받으며 안에 들어가자 빵의 종류가 생각보다 많았다. 하지만 시간도 시간이고 사치를 부릴 수는 없어서 딱 100링만 쓰기로 했다.

1분 만에 고른 것은 개당 10링인 조금 딱딱한 빵 두 개에 각각 30링인 과일을 넣은 빵과 생크림을 넣은 빵에, 20링인 소와 닮은 생물(번역도 소로 되었다)의 우유였다. 종이 곽에 담아줬는데 250ml정도였다. 비싸.

“다 합쳐서 100링입니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대동화 한 개로 값을 치르고 빵 네 개와 우유곽이 들어있는 봉투를 받았다. 거친 재질의 종이를 돈도 안 받는 포장지로 쓸 정도로 이 세계는 종이가 흔한 것 같다. 제지 치트는 못 쓰겠군.

걸어가면서 먹는 취향도 아니고, 빵을 먹어치울 시간은 있어서 공원의 적당한 바위에 앉아 점심을 때우기로 하고 봉투를 열었다.

자아, 지금부터 이세계 빵 시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조금 딱딱한 빵은 모양이 제각각이었는데, 눈대중으로 부피와 무게가 가장 무거운 것들만 골라온 것들이었다. 딱 봐도 맛이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소설에 자주 나오는 완전 딱딱한 빵보다는 낫겠지.

한입 베어 무니 외형답게 진짜 맛이 없었다. 설탕이 안 들어간 밀가루 빵은 이런 맛인 법이지. 역시 10링이다. 이런 것만 먹고 살다간 내 혀가 맛이 갈 거라는 것 말고는 품평할 것도 없다.

빠르게 해치우고 이번에는 과일빵을 입에 물었다.

…제법이잖아?

향긋한 냄새부터 처참한 맛은 아니라고 예상했는데, 이건 상상 이상이다. 빵도 훨씬 부드럽고 단맛이 난다. 안에 들어있는 과일에 이르러서는 조금이지만 감동할 정도였다.

이건 딸기군. 딸기에 가까운 맛이다. 색도 빨간색이고 모양도 딸기와 비슷하니 이 과일의 이름은 앞으로 딸기이다. 설마, 이세계에 와서 먹은 빵에서 벌써 그리워지는 고향의 맛을 느끼게 될 줄이야….

훌륭하다. 넌 앞으로 내 주식이다. 30링이면 충분히 감당할 만하다. 10링짜리와 비교하면 30링이 아니라 50링을 줘도 충분한 맛이다.

유일하게 아쉬운 건 크기가 10링짜리의 절반이라는 거다. 칼로리는 더 높을지 몰라도 포만감에선 제법 차이가 난다. 뭐, 그만큼 돈을 벌어서 많이 먹으면 된다. 맛있는 빵일수록 크기가 작은 것은 지구나 이세계나 같구나.

천천히 맛을 음미하면서 먹어 치우고 이번에는 생크림 빵을 들었다. 과일 빵은 상상이상이었다. 생크림 어떨까?

한입으로 생크림이 들어있는 부분까지 베어 물었다.

하마터면 뱉을 뻔했다.

……시발, 똥 밟았다.

“좆같은 맛이네.”

어렸을 때 먹었던 존나 맛없는 생크림 케이크가 떠올랐다.

먹던 음식을 뱉을 뻔했던 건 그때가 생전 처음이었지. 내 몫을 남긴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고.

그때의 트라우마로 나는 꽤 오랫동안 생크림 빵이나 케이크를 입에 대지 않게 되었다. 나중에 제대로 된 생크림 케이크를 먹고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었지만, 어렸을 때 느꼈던 그 역겨움은 아직도 잊지 못했다.

그런데 그 엿 같은 맛을 이세계에 와서 느끼게 될 줄이야!

이딴 그리움은 필요 없어!

이게 내게 감동을 준 과일빵과 같은 가격이라는 게 절망스럽다! 내 30링! 빌어먹을! 편의점 생크림 빵이 다섯 배는 더 맛있을 정도다! 이건 사기야! 제빵사 나오라 그래!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내가 먹던 음식에 심각한 하자(상했거나 벌레가 들어있거나)가 없는 이상 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인상을 팍팍 쓰면서 생크림 빵을 입에 구겨 넣었다. 이 세계의 생크림은 먹을 게 못 된다. 좋은 걸 배웠다. 시발.

그렇게 빵 네 개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우유를 꺼냈다. 조금 전 생크림에 당한 탓인지 불안했지만, 안 마실 수는 없었다. 후우. 뿜을 정도의 맛만 아니길 빌었다.

꿀꺽. 꿀꺽.

…아. 이거 꽤 괜찮은데?

그냥 종이에 넣은 것 치고는 맛도 신선도도 나쁘지 않다. 갓 짜낸 우유 특유의 고소한 맛도 있다. 까놓고 말해서 우리나라에서 팔던 우유보다 먹을 만하다. 두유 느낌도 조금 나는군.

적어도 조금 전의 생크림에 당했던 끔찍한 경험을 잊기엔 충분했다. 그래. 사람은 맛있는 걸 먹어야 돼. 먹는데 돈을 지나치게 아끼면 안 된다. 인생을 팍팍하게 만든다. 지나치게 아끼지 않으면 지갑이 팍팍해지겠지만.

그렇게 이 세계의 첫 점심 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북문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지금 시간은 오후 1시 10분. 의뢰서에 따르면 코볼트가 출몰한 광산은 도보로 3시간은 걸린다고 한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야영이 당연해지는 시간이지만, 나는 침대에서 잘 거야.

그래서 결국 본래 느긋하게 할 예정이었던(식당도 미리 알아봤는데!) 점심을 빵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던 거지. 코볼트 토벌 의뢰비는 500링이니 저녁은 식당에서 먹고 여관에서 자기에도 충분할 거다.

그나저나 코볼트라.

어원을 생각하면 고블린이라는 단어가 독일로 건너가면서 변화된 쪽이 가장 신빙성이 높은데 말이야. 물론, 이세계의 말이 내 의식에 따라 번역되는 거라서 여기의 발음은 코볼트가 아니다.

아마, 고블린과 마찬가지로 내가 가지고 있는 인식에 가장 가까운 몬스터의 이름으로 번역이 된 거겠지.

그렇다면 고블린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유형 중 하나일 거다.

개처럼 생긴 파충류이거나, 코가 존나 큰 요정이거나.

의뢰서에는 외형 얘기는 없고 그 수가 스물다섯에 광산을 반쯤 점거해서 작업이 지연되고 있다는 얘기밖에 없었다.

숫자도 피해 규모도 새싹 모험가가 할 만한 의뢰가 아니다. 애초에 목본 등급에 있던 대다수의 의뢰보다도 난이도가 높다. 옥석에서야 비슷한 의뢰가 보였지. 그런데 이런 의뢰를 새싹에 걸어 놨다?

아무리 파티를 맺고 간다고 해도 어두운 광산에서 스물다섯 마리의 몬스터와 싸우라? 초보자끼리?

자살지원자를 모집하는 게 아닌 이상에야, 의도는 하나뿐이지. 주기적으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어쩌다 내가 온 날에 걸려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말이지.

뭐, 나한테도 좋은 얘기다. 지나친 관심은 몸에 해롭다고 하지만, 나한테는 해당 없는 얘기고.

자아. 그러면 빨리 코볼트 놈들을 처리하고 이세계의 제대로 된 식사를 해볼까?

빵도 나쁘지 않지만, 고기를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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