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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에 천재가 가면-4화 (4/93)

〈 4화 〉 4화 새싹 모험가

* * *

“안녕하세요.”

“아, 네. 아, 안녕하세요.”

문지기들도 함락시켰던 미소와 함께 인사하자 접수원은 눈에 띄게 당황하면서 인사를 받았다.

표정을 되돌리긴 했지만, 이미 늦었다구.

나는 접수원이 경계심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또박또박 말했다. 이럴 때는 솔직한 게 제일이지.

“모험가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길드는 처음이신가요?”

접수원은 의아하다는 눈초리였다. 눈길이 내 체격으로 향하는 걸 보면, 이 정도의 육체를 가진 사람이 길드가입방법조차 모르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당연히 이에 대한 답은 이미 생각해뒀다.

“고향을 떠나고 길드가 있는 도시는 처음이거든요.”

“동방에서 오셨다면 오는 길에 도시를 몇 개는 거치셨을 텐데요?”

역시 이 도시는 동방과 꽤 떨어진 곳이다. 세계지도를 먼저 볼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돈도 없고 신분도 명확하지 않은 내가 지도를 얻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리고 이 정도는 언변으로 가볍게 넘어갈 수 있다.

“제가 걸어온 길은 그쪽이 아니거든요. 전통에 따라 수행을 위해 일부러 다른 길을 택했죠.”

“전통이요?”

처음 듣는 얘기인지 접수원이 놀라워하며 눈을 깜빡였다.

그렇겠지. 나도 처음 듣는 얘기인 걸? 한민족에게 그런 전통은 없다. 그래도 내 혀는 매끄럽게 움직였다.

“자세하게 말씀 드릴 수는 없지만, 일종의 시험이에요. 먼 곳으로 떠나서 힘과 지식을 얻어 오는…. 그래서 시작부터 편한 길로는 올 수 없었어요.”

“…아, 확실히 그런 식의 얘기는 들어본 적 있네요.”

꽤 대중화 되어있는 길드의 접수원답게 그녀는 이것저것 들은 얘기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원했던 반응이다.

나는 짧은 시간, 하지만 접수원이 인식하기엔 충분한 시간 동안 쓴웃음을 지었다가 재빨리 지우고 태연하게 말했다.

“아마, 우리 민족과는 다른 곳일 거예요. 이쪽으로 온 건 제가 처음일 테니….”

“…그렇군요.”

접수원은 내 사정을 이해했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이쪽으로 왔다고 생각하겠지. 그게 내가 의도한 거고.

자아, 그럼 여기가 분기점이군.

접수원이 개인의 호기심이나 확실한 신원확인을 중시한다면 이 화제를 계속 물테고, 아니라면 모험가 등록 쪽으로 노선을 바꾸겠지. 그래서 어느 쪽이냐?

“그런데 우리말을 굉장히 잘하시네요?”

전자구나.

이정도로는 쉽게 넘어갈 수 없군. 뭐, 예상범위다. 그래. 먼 곳에서 왔는데 이쪽 말이 능숙한 건 역시 이상하지.

말을 어설프게 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긴 시간동안 일부러 어설프게 말하는 건 피곤한 일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상황을 빠져나갈 말도 준비되어있다.

나는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했다.

“그렇죠? 완벽하지 않나요?”

“…네. 굉장히 발음이 좋으세요. 현지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완벽하세요.”

이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접수원은 눈에 띄게 동요했다. 나름대로 날카로운 한 수라고 생각했겠지만, 이미 간파당한지 오래라고.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시는 걸 보니, 제가 제대로 배우기는 했네요. …사실, 고향에 이 나라의 말을 가르쳐주신 분이 계시거든요. …덕분에 저는 이곳을 선택할 수 있었죠.”

조심스럽게, 비밀 얘기를 하듯이, 애틋한 감정을 조금 담아 말하자 접수원의 얼굴이 약간 빨개졌다. 복합적으로 부끄러운 거겠지. 의심한 것도, 자신에게만 비밀스러운 얘기를 해주는 것도.

끝났군.

“…알겠습니다.”

잠시 뒤에 감정을 추린 접수원은 그리 말하고선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이 신청서를 정확하게 작성해주시면 모험가가 되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대한 상세하게 적을게요.”

웃으면서 신청서를 받고 접수대에 준비되어 있는 깃펜을 잡았다.

깃펜이라. 아직 만년필이 보급이 안 됐나? 그렇다면 돈벌이로 생각해봐도 되겠군. 아무래도 판타지 세계이다 보니 지구의 중세, 근세와는 기술의 발전정도나 방향성, 사회제도 등이 비슷한 부분은 있어도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뭐, 마법이나 기공 같은 판타지 기술이 존재하는 시점에서 당연한 얘기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신청서를 꼼꼼히 살피는 척을 했다.

거창하게 말한 것과는 달리 한 장짜리 신청서에 기재해야 되는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름 :

나이 :

성별 :

종족 :

출신 :

특기 :

목적 :

이 정도로 신원확인이 되는 걸까? 싶었지만, 이 세계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그건 차차 알아보면 된다. 지금은 의심받지 않게 모험가가 되어서 이 세계를 상세하게 알아볼 시간을 가져야한다.

흐음. 그런데 이름이라.

지구에서의 이름은 쓸 수 없겠지. 주변에서 들리는 인명人名은 서양식에 가깝다. 유럽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형식이다.

그건 동방인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보고 동방인 친구를 언급한 자들의 입에서 나온 이름들도 서양식에 가까웠다.

마침 생각해둔 이름이 있다. 제법 좋아하는 단어이기도 하고. 이거라면 이세계에서 사용할 이름으로 충분하지.

나는 신청서를 거침없이 적어나갔다.

이름 : 시그

나이 : 25

성별 : 남자

종족 : 인간

출신 : 코리아

특기 : 무술, 사무, 회계

목적 : 무명을 떨치고 재력을 늘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이름은 Sieg(승리)를 영어식으로 읽은 거다.

굳이 독일어를 영어식으로 읽을 필요가 있냐면, 내가 그런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 본명이랑 비슷한 발음인 것도 있고.

중2병은 영원불멸의 불치병!

나이는… 10살이나 낮추는 건 너무 심하니깐 9살 낮췄다.

괜찮아. 안 들켜. 지구에서도 동안으로 통한 얼굴이야. 이세계라면 더더욱 통하지.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잃어버린 20대를 되찾겠어!

성별과 종족은 굳이 속일 것도 없고.

출신은 좀 그럴 듯한 단어를 써볼까 하다가, 괜히 어설프게 아는 척이 더 위험할 것 같아서 특별한 뜻이 없는 단어를 썼다. 번역 치트로 확인한 결과 코리아에는 별다른 뜻이 없었으니까. 번역 치트는 이런 것도 가능하다.

어쨌든, 이걸로 난 코리아 민족의 시그다. 나이는 25살!

그런 걸로 하자.

“여기, 다 썼어요.”

“빠르시네요. …글자도 완벽하시군요.”

신청서를 꼼꼼히 살펴본 접수원은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 내 필체가 완벽하기는 하지. 어렸을 때는 개판이었는데, 좋은 필체의 필요성을 느낀 뒤로 연습해서 완성했다.

그나저나 역시 쓰는데도 번역 치트가 제대로 작동하는군. 의식하지는 않고 글을 써봤는데, 역시나 자동으로 이세계 문자로 변환되었다. 내 필체까지 적절하게 적용되어서.

번역 치트 갱장해여!!!

어쨌든 이쪽도 집중하면 흐릿하게 이세계의 문자와 한글이 겹쳐 보여서, 이 세계의 언어를 마스터하는 건 생각보다 빠를 것 같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좋은 치트다. 씨발.

“감사합니다. 스…그분에게도 칭찬을 받았었죠.”

“그러시군요. 음. 특기가…… 좋습니다. 딱히 문제는 없어 보이네요.”

접수원은 신청서를 서류봉투에 담고 서랍장에 넣은 뒤에 그곳에서 초록색의 가죽 팔찌를 꺼냈다.

저게 모험가의 자격증이다.

다른 모험가들도 다들 저런 식의 팔찌를 차고 있었다.

다만, 접수원이 꺼낸 초록색은 거의 없고 연갈색과 연회색이 대다수에 가끔 적갈색이 보이는 정도였다. 거기다가 색상별로 형태나 재질도 달랐는데, 그 이유가 뭐겠는가?

등급이지.

이건 약간의 관찰력과 주변 모험가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건 내가 받을 저 초록색 팔찌의 등급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는 거다.

짓궂음을 숨길 생각이 없는 환한 웃음 뒤에 나올 말을 생각하니 제아무리 나라고 해도 머리가 아파왔다.

“축하드립니다. 시그 님. 오늘부로 [새싹] 모험가세요.”

새싹.

지랄.

알고 있었는데도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다.

이 나이에 새싹이라니. 새싹 모험가라니!

이 무슨 파멸적인 작명센스냐!

유치원생이냐!

아니, 진짜. 번역이 잘못된 것도 아니라는 게 더욱 암담하다. 접수원의 미소나 실실 웃고 있는 주변 모험가들의 반응만 봐도 그렇다.

이거 100% 이런 반응을 노리고 만든 등급이다.

…대충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작명센스를 발휘한 건지 짐작 가는 게 몇 가지 있지만, 어쨌든 이거 통과시킨 새끼는 제정신은 아닌 듯.

하아. 이 나이에 새싹 소리 듣는 게 손발이 오그라들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여기선 이들이 원하는 반응을 보여주자.

진짜로 한숨을 쉬고 싶은 기분이기도 하고.

“…아니. 새싹 소리 들을 나이는 지났는데요.”

내가 감정을 절반 정도 드러내면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자 접수원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틀림없이 이런 반응을 보는 것이 취미겠지) 답했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모험가가 되면 반드시 새싹부터 시작하니까요.”

“…반발은 없나요?”

“그런 분은 모험가를 하지 말아야죠.”

솔직한 질문에 솔직한 대답이 날아왔다.

그래. 그런 이유도 있을 거라 생각했어. 일종의 거름망. 새싹 소리 듣는 것조차 참을 수 없는 인성의 소유자라면 모험가는 하지 말라는 거지.

나를 보고 웃는 모험가 놈들에게서 일종의 보상심리가 느껴지는 것도 본인들도 이런 쪽팔린 시간을 지나왔기 때문이겠지.

어휴.

…이거 안 되겠다.

원래는 조금 천천히 달려볼까 했는데, 새싹 소리를 3일만 더 들었다가는 손발이 촉수가 되어서 바다로 뛰어들지도 모르겠어. 이아이아크툴루파탄.

“그렇군요. …어쨌든 저도 이제 정식 모험가인거죠?”

“네. 시그 님. 자랑스러운 새싹 모험가세요.”

자랑은 지랄. 다 큰 시커먼 남정네 놀려 먹으면 재밌냐? 재밌겠지. 나도 내가 당사자가 아니었으면 재미있게 봤을 거다. 니조랄.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벗어나려면 모험가답게 실적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겠지.

좋아. 초고속으로 승급해주마. 그 전에 확인할 게 있다.

“그런데 승급은 어떻게 하나요?”

“벌써 승급을 생각하시나요? 후후후. 그런 점은 다른 모험가분들과 다르지 않네요.”

그야 정상적인 감성을 가지고 있으면 이 나이에 새싹소리 들으면 진절머리를 내겠지.

접수원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옥석??까지는 접수원의 판단에 따라 승급하실 수 있어요. 아, 모험가 등급이 어떻게 되는지 아시나요?”

“전부는 아니지만, 하위등급은 알아요.”

귀동냥으로 얻은 정보에 따르면 옥석은 밑에서 세 번째다.

순서는 새싹, 목본??, 옥석??, 청동?순이다.

비교적 흔한 물질로 등급을 정한 것 같은데, 역시 판타지 세계여도 이런 점은 크게 다르지 않군.

“새싹, 목본, 옥석이군요. 딱 접수원 재량으로 올려줄 수 있는 등급이네요. 참고삼아 말씀드리자면 그 위로는 청동, 강철??, 순은??의 중위등급과 순금?, 백금白, 진은?의 상위등급에 성철??의 특별등급이 있어요.”

“정상이 굉장히 머네요.”

총 10등급인가. 그런데 진은은 당연히 미스릴일 테고, 성철? 일부러 번역에서 영어를 제외시켰는데… 10등급이 되면 레콘이 되는 거야? 계명성 연습이라도 해야 되나.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접수원은 여전히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후후후. 시그 님이라면 꽤 높은 곳 까지 올라가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힘내세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의뢰는 저기 게시판에서 가져오면 되는 건가요?”

“네. 제일 우측이 새싹 모험가들이 할 수 있는 의뢰니까요. 첫 의뢰이니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무리라. 글쎄? 게시판에 있는 의뢰는 이미 웬만큼 확인했다. 다른 사람이 가리고 있어서 상세히 보지 못한 것을 제외하면 등급 관계없이 꼼꼼히 확인했다. 내 동체시력과 순간기억능력이 합쳐지면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다.

다만 게시판에 걸려 있는 의뢰서 등급은 청동이 끝이었다. 그 위인 강철부터는 2층에 걸어놨거나 접수원들에게 직접 받아야하는 거겠지. 뭐, 어차피 무슨 수를 써도 지금은 받지 못할 의뢰이니 당장은 상관없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이미 찜해 둔 의뢰서를 자연스럽게 가지고 가는 거다.

다짜고짜 의뢰를 골라 가면 임팩트는 있겠지만 기껏 만든 이미지가 손상되겠지. 아직 세상물정 잘 모르는 순박한 동양인 청년의 이미지는 쓸모가 있다.

“네. 고마워요. 그럼 의뢰 골라 가지고 올게요.”

“네. 천천히, 신중하게 고르세요.”

접수원의 격려를 받으면서 게시판 앞에 섰다. 아직 의뢰를 고르지 못한 목본이나 옥석의 모험가들은 나를 힐끔 봤다가 다시 게시판으로 시선을 향했다.

나는 그들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진지한 눈으로 게시판을 살피는 척을 했다.

자세히 볼 필요도 없다. 대다수의 의뢰가 잡일이거나 심부름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애완동물을 찾아달라거나 다른 마을에 안부 인사나 전해달라는 의뢰까지 있었다. 하수구 청소나 쓰레기 수거에선 한숨도 안 나왔다.

음. 익숙한 일본게임의 냄새가 나는군. 그래. 좆밥은 원래 이런 잡일부터하면서 돈과 실력과 신뢰를 쌓아가는 법이지.

하지만 나하곤 상관없는 법칙이다.

나는 좆밥이 아니고 이런 잡일로 실력을 쌓을 필요도 없다. 돈과 신뢰? 그건 능력만 되면 곧바로 쌓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이 좆밥 의뢰 중에서 내가 선택할 만한 의뢰는 딱 두 개뿐이었다.

몬스터 토벌.

고블린과 코볼트.

…그래. 이것 때문에 조금 당황했지. 번역 치트의 메커니즘이 내가 생각하는 게 맞는다면, 이 고블린과 코볼트는 내가 생각하는 그놈들이 맞을 거다.

뭐, 어느 정도 정형화 되어 있지만, 등장하는 작품마다 차이점이 조금 씩 있으니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적어도 번역 치트가 그렇게 인식할 정도는 된다는 거지.

그래. 판타지 세계니까 그런 전형적인 몬스터가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 그렇게 넘어가려면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냥 넘어가기 힘들었다.

나는 판타지 소설이나 만화, 게임에서 자주 나오는 몬스터보다는 완전히 새로운 몬스터들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정말 많은 것을 시사했다.

……이건 결국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지.

당장 해결될 수 있는 의문이 아니다.

그래. 지금은 빨리 등급을 올리고 돈을 벌고 사회적인 위치를 다진 뒤에 마법을 배워야한다.

지금은 그것만 바라보자.

나는 게시판에 걸려 있던 고블린 토벌 의뢰서를 때어냈다.

그것만으로도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저 비웃는 시선이 오늘이 지나기 전에 경악으로 물드는 당연한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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