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3화 새싹 모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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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에서도 보고 입구에서도 보기는 했지만, 성벽을 지나고 확 트인 곳에서 본 도시의 광경은 감회가 남달랐다.
우선, 위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깨끗한 도시였다.
대다수의 구조물들이 지구인인 나에게도 제법 세련되게 느껴지는 디자인이었고, 관리를 아주 열심히 했는지 낡아 보이는 건물도 그리 많지 않았다.
배수로도 아주 잘 갖춰 있었고, 곳곳에 심어져 있는 나무들은 도시의 경관과 아주 잘 아울렸다.
도시 곳곳을 흐르는 개천에 이르러서는 조금 감동할 정도였다. 도시 뒤쪽에 강이 흐르니, 그쪽에서 끌어온 물일 텐데 이렇게 깨끗할 수가 있나? 오폐수는 대체 어떻게 처리하는 거지? 별다른 상하수도 설비는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는 건!
“역시 마법인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들은 사람은 없지만, 있었다면 조금 쪽팔렸을 거다.
무슨 도시에 처음 온 시골촌놈도 아니고, 도시 경관을 보다가 멍하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꼴이라니.
뭐, 반 정도는 맞는 말이지만.
시골촌놈이 아니라 외계촌놈지만. 촌놈인 건 부정 못 한다. 지구에서도 나고 자란 곳은 시골이었으니까.
어쨌든 이 도시는 지구인인 나도 머물기에 그리 나빠 보이진 않았다.
골목이나 딱 봐도 빈민가로 보이는 곳은 편견 섞인 중세 판타지 그 자체였지만, 지구의 도시도 지저분한 곳은 얼마든지 있으니 넘어가줄 만하다.
내가 저쪽으로 떨어질 일도 없고.
나는 이 세계에서도 존나 잘해 나갈 자신이 있었으니까.
이건 근거 없는 자신이 아니다. 소설 좀 많이 읽은 걸로 가지는 자신감도 아니다. 내가 급식도 아니고, 소설에서 본 것과 똑같지 않을 세계에서 알량한 지식으로 깝치지는 않는다.
그런 지식들이 약간의 도움은 될지 몰라도 그걸로 세상을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건 절대로 아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지구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지구에서도 잘 살아가야지.
그런데 아니잖아?
결국, 세상살이란 본신의 재능, 운, 환경, 마음가짐, 노력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그리고 나는 이 중에서 측량할 수 없는 운을 제외하면 모든 분야에서 인류최고라고 자부한다.
뭔 말이냐면.
내가 개쩌는 인간이라는 거다.
그러니 이세계에서도 개쩌는 인간일 수밖에 없지.
내가 개쩌는 건 돈이 많아서도 집안이 좋아서도, 단순히 학식이 깊어서도 아닌, 나라는 인간 자체가 존나게 잘나서니까.
그러니까 이세계 생활은 아무런 걱정도 되지 않았다.
모험가가 있다는 걸 안 것만으로도 숙식 문제는 해결된 거나 다름없으니까.
번역 치트가 없었다면 조금 곤란했겠지만, 절망적인 건 아니다.
그나저나 이 번역 치트 성능 진짜 좋은데?
자연스럽게 이세계의 언어가 지구어로 변역되어서 들리는데, 내 의지에 따라서 언어가 달라진다.
아무런 의식도 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한국어와 외래어, 외국어가 적절하게 섞인 말로 번역 되지만, 한국어를 바라면 한국어로만, 영어를 바라면 영어로만, 불어를 바라면 불어로만 번역이 된다.
거기다가 번역되는 단어도 내가 개념을 알고 있을 때에만 번역이 되고 아니면 이 세계 고유어로 들린다.
예를 들자면 15m 떨어진 곳에서 걷고 있는 연인 사이로 보이는 행인들의 대화다.
“오늘도 날씨 되게 좋다.”
“응. 매일이 오늘 같으면 좋겠어.”
“이렇게 좋은 날에는 소풍을 가야 되는데.”
“남쪽에 도적들이 날뛰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러니까. 자이레리스트님의 천벌 받을 녀석들.”
“시장님도 병사를 파견하신다니까, 조만간 작살나겠지.”
“그럼 오래간만에 처형 구경하겠네? 보러 가자.”
“그때도 오늘처럼 화창했으면 좋겠네!”
화사하게 웃으면서 나눌 만한 대화가 아닌 것 같은데…. 이게 이 세계의 상식…? 살벌하구만.
어쨌든 지금 대화는 별다른 의식을 하지 않고 들은 대화다. 그래서 나에게 익숙한 단어와 문장으로 변역되었다. 하지만 자이레리스트라는 내가 모르는 단어는 이세계 발음 그대로다.
이 세계의 사람들이 믿는 신이나 그에 준하는 존재인 것 같은데…….
신이라.
지구에서 나는 무종교인이었다. 하지만 신의 존재자체를 부정하진 않았다.
다만, 내가 긍정하는 신은 전지전능한 유일신이 아니라, 그리스 신화, 북구 신화, 인도 신화 등에서 나오는 인격신들이다.
이 드넓은 우주 어디엔 인간의 힘을 아득히 뛰어넘는 신적인 존재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다.
기독교적인 종교관에선 그런 존재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겠지만,(애초에 이쪽은 네문자 말고는 신이 없다는 쪽이고) 내 기준으론 인간보다 존나 쌔고 권능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힘을 다룬다면 그건 신으로 불러도 된다고 생각한다.
뭐, 그렇다고 내가 그 신을 찬양하거나 숭배하는 건 절대로 아니지만.
도교와 유교를 믿고 불교에 우호적인 내게 신앙심이란 소설을 쓸데나 다루는 개념이다.
……내가 이 세계에 오게 된 경위를 생각하면 이쪽 세계의 신에 대해선 신경 쓸 수밖에 없지만.
야이, 싯팔.
생각할수록 꼴받네.
마음속에서 또다시 태양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 감정을 해소할 대상을 당장은 만날 수 없으니, 다시 무저갱 속에 처박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도시 구경을 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생각은 길었지만, 내가 정지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내 머리색과 키와 옷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은 제법 있었다.
확실히 주변과 비교하면 이색적이긴 하다.
제법 큰 도시다 보니 통행이 제한된 입구 근처인데도 상당히 많은 행인들이 있었다. 얼핏 봐도 약 800명이 내 시야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들의 머리색은 애니메이션 머리색이었다.
그러니까 존나게 다채로웠다는 거다.
금발이 가장 흔했고, 그 뒤로 갈색, 파랑, 빨강, 보라, 핑크, 회색, 은색, 검은색 순이었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대분류로 나눠본 거고 염색장인들 기준으로 보면 수백 개는 되겠지. 지구였다면 뭔 코스프레 쑈냐고 생각했겠지만… 판타지는 역시 판타지로군.
저딴 머리색이 어울려. 위화감이 없어.
…그런데 평균 외모레벨이 상당히 높네? 소위 말하는 연예인 급 외모를 가진 것들이 수십은 되어 보인다.
생각해보니 문지기들도 평균은 넘는 외모였지.
뭐야. 창조자가 디자인에 공들인 세계라도 되는 거냐?
……어쨌든 다양각색의 머리색 중에서도 검은색의 비율은 압도적으로 낮았다.
지금까지 눈에 들어온 987명 중에 검은색은 나를 포함해서 단 두 명이었으니까.
비율로 따지면 약 0.2%.
유럽의 그 어떤 국가도 이렇지는 않다. 하지만 어떤 의미론 전형적인 머리색 비율이다.
과거에 유행했던 판타지 소설의 대다수는 검은색 머리가 매우 희귀한 색에 속했지. 하지만 현실 지구의 유럽에서 검은색은 꽤 흔하게 볼 수 있는 색이다. 애초에 전 세계에서 가장 비율이 높은 게 흑발이고.
그래. 판타지라 이거지.
그래도 차별적인 시선은 느껴지지 않는 게 다행이군.
레이시스트들이 넘치는 세계였다면 나도 좆될 수 있으니까.
인종차별을 그냥 참고 넘어가는 성격도 아니고, 사회가 그런 분위기가 팽배하다면 그런 사회에 눌려 죽느니 아예 뒤집어 엎어버리려는 게 나란 인간이다. 그리고 좆도 모르는 판타지 세계에서 그 지랄 떨다간 뒈지기 쉽겠지.
내가 아무리 잘난 놈이어도 그 잘남을 뽐낼 수 있는 기반이 갖춰지지 않고서 세계와 맞짱 뜨는 건 만용이다.
진짜 잘난 놈은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힘을 키워서 작살을 내놓는 법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세계와 자폭하지 않아도 되는 문화는 천만다행이다.
그나저나 복장들이 제법 화려하군?
마치, JRPG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사이비 중세 배경의 판타지 복장이었다.
테일즈 시리즈와 궤적 시리즈를 적절하게 짬뽕시킨 느낌?
이거, 나중에 아카데미 같은 곳에서 만화에서 나올법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보게 될 지도 모르겠다.
간간이 가죽바지에 벨트를 찬… 유럽에서 간간히 보이는 스타일의 사람들도 보이고, 그리 이상한 시선이 향하지 않는 걸로 봐선 패션 감각은 지구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으니.
…그런데 왜 내 옷은 이상하게 보는 거냐.
이게 뭐 어때서?
그나저나 이종족은 안 보이는 군?
엘프가 진짜로 있다면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아무리 봐도 인간으로 분류되는 사람들 밖에 없었다. 설마 이종족 같은 건 없는 걸까? 그러면 조금 많이 아쉬울 것 같은데.
그렇게 사색과 정보 수집을 하면서 도시를 거닐었다.
정처 없어 보일 수 있겠지만, 명확한 목표는 있다.
이세계 물의 국룰. 전이자라면 반드시 찾아야 되는 장소!
모험가 길드!
나는 이미 언덕에서 이 모험가 길드로 보이는 것을 확인했다.
그때야 모험가가 확실히 있는지 몰랐었지만, 이제는 그곳이 모험가 길드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야, 무장한 다양각색의 사람들이 출입하는 곳이 모험가 길드 정도 밖에 더 있겠냐고.
언덕에서는 각도 때문에 간판의 글자가 보이지 않아서 확인 못했는데…. 그러고 보니 길가에 글자가 잘 안 보이네?
보통 음식점이나 여관으로 보이는 곳도 문자가 아닌 그림이나 상징물로 표시하고 있었다. 대화가 멀쩡히 번역되는 걸로 봐선 문자도 그럴 가능성이 높긴 한데…. 뭐, 이건 확인해보면 되는 문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자번역도 확인할 수 있었다.
웅성웅성웅성.
입구에 들어가기 전부터 사람들이 꽤나 북적이는 곳.
모험가 길드의 간판에는 멋들어진 필체로 [모험가 길드]라고 떡하니 적혀 있었다.
정말 각도상 안 보이는 거였군.
그리고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읽는 것도 내 의식에 따라서 달라졌다. 약간 더 집중을 하니 이세계의 언어와 한글을 겹쳐서 보이는 게 가능할 정도였다.
역시 성능 좋아. 이 번역 치트. 누가 준건지만 알면 더 좋을 텐데 말이지. 마음속 깊숙이 새겨두게 말이야. 내 안의 태양 옆에 고이 모셔두고 싶은데.
“저 머리색에 복장…동방인인가?”
“그렇겠지. 그런데 특이한 복장이군. 동방인이 원래 저렇게 입던가?”
“아니.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은 안 저래.”
“동방의 북쪽 민족들의 전통복장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
“뭐야. 너 거기까지 가본 적 있는 거냐?”
“책에서 봤어.”
“키가 굉장히 크군. 동방인들이 원래 큰 편이지만, 압도적이야.”
“무기가 없는 걸 보면, 맨손무술을 전문적으로 익힌 건가? 체격을 보면 맹탕은 아닌 것 같은데.”
“동방의 무술은 유명하니까. 틀림없이 수준 높은 기공을 익혔겠지.”
모험가 길드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 십중팔구는 모험가일 자들은 나를 보고 수근수근 떠들었다.
지들 딴에는 조용히 말한 거겠지만, 나한테는 다 들린다.
뭐, 이건 20m이상 떨어진 곳의 대화도 귀신같이 잡아내는 내 슈퍼청각 때문이지만.
그래도 그들의 대화로 몇 가지 정보는 알아냈다.
가장 쓸 만한 건 내 복장이 동방인 중에 북방민족과 유사하다는 거다. 출신지를 물어보면 대충 그쪽의 한적한 시골이라고 둘러대야겠군.
가장 흥미로운 정보는 기공이다. 이게 번역이 제대로 된 게 맞는다면, 내가 아는 그 기공??이 맞겠지.
…역시 있구만.
기공이 있으니, 마법도 확실히 있겠지. 성법이나 신성력이라 불리는 것도 확실히 있을 거다.
그도 그럴 게 암만 봐도 복장부터 마법사나 성직자인 게 티가 나는 인간들이 제법 보이거든.
가슴이 웅장해지는 군.
그렇게 모험가들의 대화와 복장, 행동 등으로 정보를 수집하면서 얕보이지 않게 당당한 태도로 길드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부터 느꼈지만, 안쪽도 제법 시끄러웠다.
모험가는 제법 융성하고 있는 직업인지, 이런 대낮부터 수십 명의 사람들이 길드 안에서 의뢰서를 살피고 밖에서는 파티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이거 참. 흥미롭네. 보통 모험가는 무법자나 다름없어서 밑바닥 인생이나 이거 외에는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직종으로 설정되는 경우가 많은데 말이야.
어떤 히스토리가 있는 걸까.
참을 수 없는 탐구심이 샘솟는군!
…뭐, 일단 그건 나중에 차차 알아보고, 지금은 모험가가 되는 게 우선이지.
1층 로비 중앙에는 네 명의 여성 접수원이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여성 접수원인가. 이것도 국룰이라면 국룰이군. 거기다가 다들 외모레벨이 높아.
화장기술이 현대수준으로 발달된 곳도 아닌데, 저 정도라면 이건 그냥 유전자부터가 사기다. 이세계인들의 평균외모레벨이 높은 이유도 나중에 탐구해봐야겠다.
어쨌든 나는 그 중에서 가장 인상이 상냥해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마침 접수원은 한가해보였다.
접수원은 나를 보고 잠시 놀라는 눈이 되었다가 이내 조금 전과 같이 화사하게 웃는 얼굴이 되었다. 과연, 이 분야에선 프로라는 거군.
그렇다면 나 또한 그에 어울리는 행동을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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