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화 〉 25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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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치료센터지 사실상 초호화 럭셔리 호텔이나 다를 게 없는 곳에서 리아는 온갖 정밀검사를 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리아 한 명에게 붙는 의사와 간호사가 한둘이 아니라 부담스럽기 그지없었지만, 지루한 정밀검사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하자 점차 아무런 생각도 없어졌다. 그저 민준이 보고 싶었다.
위이이잉.
리아는 오늘 예정되어 있던 마지막 검사까지 마치고, 최신형 전동 카트를 타고 VIP 병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전동 카트라서 끌어줄 사람이 전혀 필요 없었지만, 리아의 뒤에는 전담 간호사가 붙어서 아주 조심스럽게 카트를 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여기 있는 사람들은 왜 다 여자일까…게다가 다들 예쁘게 생겼네…’
리아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전부 여자였다. 뭔가 이상해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곳에 와서 본 사람들 대부분이 여자였다.
남자들도 있긴 했지만 거의 환자거나 간호사였다. 의사 가운을 입고 있거나 관리자처럼 보이는 높은 사람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여자였다.
‘신기하네…전부 민준 님 얼굴을 보려고 이직한 사람들인가…?’
리아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마치 머리에 주술이라도 걸린 것처럼, 모든 생각이 민준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정작 떡 줄 사람은 마음도 없는데.
‘하아. 그래도 저녁에 또 오신다고 하셨으니까…조금 있으면 민준 님 얼굴을 볼 수 있겠지.’
스르릉.
카트가 다가가자 병실 문이 알아서 열렸다. 간호사는 리아를 력셔리한 침대 위에 눕히고,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정액환과 물컵을 리아에게 건넸다.
이미 아침, 점심에도 먹었던 약이라 리아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간호사가 건네는 약을 물과 함께 삼켰다.
“흐우…감사합니다.”
“흐훗, 아니에요. 이게 제 일인 걸요. 아, 리아 님. 잠시만요.”
감사 인사와 함께 다 마신 물컵을 건네는 리아를 보며 흐뭇하게 웃던 간호사가 리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요란하게 울려대는 내선 전화를 받았다.
“아, 네. 실장님. 아,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네.”
금방 전화를 마친 간호사가 수화기를 내려두고 다시 리아를 보며 말했다.
“리아 님. 죄송한데 리아 님께서 주문하신 스타일의 의상이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네요. 해외에서 오는 거라 빨라도 일주일 정도는 걸릴 것 같다고…”
“괜, 괜찮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리아가 고개 숙여 사죄하는 간호사에게 손사래를 쳤다.
정밀검사를 받기 전에 리아는 병원 측에 요구로, 필요한 생필품 리스트를 작성해 전달했다.
어떤 걸 적든 구해준다고 했지만 민준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기 싫었던 리아는 아주 간소하게 속옷과 중동 전통 의상 몇 벌만 주문했다.
하지만 리아 역시 중동 전통 의상이 금방 구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환, 환자복만 있으면 충분해요. 천천히 구해주셔도 괜찮아요!”
“아, 그러면 혹시 그동안 생활하실 때 필요한 물품을 넣어드려도 될까요? 저희 쪽에서 준비한 것들이 있는데…”
“네? 아, 아니요…! 딱, 딱히 필요한 건 없는데…이미 충분해요.”
리아는 이미 이 치료센터, 그중에서도 VIP 병동의 씀씀이가 장난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알아서 필요한 것들은 채워주겠다는 간호사의 말이 좀 무서웠다.
이미 이 병실 안에 준비된 것만 해도 5성급 호텔보다 더 뛰어났는데, 대체 뭘 더 주겠다는 건지.
“아, 그러시군요. 그럼 리아 님을 위해 준비한 물건들은 전부 폐기처분 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리아 님을 위해 준비한 것들이라, 다른 분들에게는 맞지 않아서요. 애초에 VIP 손님을 위해 구매한 물품을 재활용하지 않는 게 저희 원칙이고요. 리아 님께서 받지 않겠다고 하시면 폐기처분 하는 수밖에는…”
“그렇다고 그냥 버리는 건 너, 너무 아깝잖아요…!”
“그럼 수령하시는 걸로 할까요?”
“아, 아으…네, 네. 갖다주세요…”
리아의 말에 담당 간호사가 히죽 웃고는 다시 전화를 걸어 준비한 물품들을 가져와 달라고 말했다.
사실 중동 전통 의상 정도야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민준은 리아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 감싸고 있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 즉시 리아가 보낸 리스트를 쓰레기통에 처넣어버리고, 자신이 리아에게 입히고 싶은 옷들을 골라 리스트를 만들어 병원으로 보냈다.
스르르륵.
병실 문이 열리더니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박스를 들고 우르를 몰려 들어왔다.
리아는 흔들리는 눈으로 뭔가를 끊임없이 가져와서 옷장과 서랍 속에 집어넣고 있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저, 저건 대체…”
“아, 이번에 빅토리아 스페셜과 아르메스에서 콜라보한 신상품 속옷 세트입니다.”
“아, 아으…”
간호사의 대답에 리아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테이블 위에는 아직 서랍 속에 들어가지 못한 잘 개켜진 속옷들이 쌓여있었는데, 아무리 속옷이라고 해도 좀 너무할 정도로 얇고 가늘었다. 중요 부위를 제대로 가릴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고, 어떤 건 아예 유두 쪽이나 성기 쪽을 훤히 보이도록 파놓은 것들도 있었다.
‘요, 요즘엔 저런 속옷이 유행인가…?’
하지만 너무나 담담하게 답하는 간호사 때문에 리아는 차마 속옷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엄청난 명품이라니까 더 할 말이 없었다.
실상은 그저 민준의 취향이 잔뜩 반영된 스타일일 뿐이었지만.
“하아…”
리아는 우르르 몰려왔던 사람들이 병실에서 빠져나갈 때까지 숨을 죽인 채 조용히 있다가, 그들이 전부 빠져나간 뒤에야 조금 편하게 숨을 내쉬었다.
“리아 님. 여기에 물품 리스트가 있는데 한번 보시겠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그래도 뭐가 있는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리아는 간호사가 건넨 리스트를 받아든 채 하나씩 읽어내렸다.
그런데 상품명이 너무 어려워서 당최 뭐가 뭔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죄송한데 이, 이건 뭐 하는 물건인가요?”
“아, 화장품이네요. 저기 저쪽 테이블 맨 왼쪽에 올려져 있는 립스틱입니다.”
“저, 저는 화장을 안 하는데…”
“어머, 정말요? 그런데 어쩜 이렇게 피부가 고우세요?”
“네? 아, 아, 그게…햇, 햇볕을 많이 쫴서 그런가…채, 채식 위주…”
갑자기 훅 들어온 피부 칭찬에 리아가 당황한 채 횡설수설했다.
간호사는 이때가 타이밍이다 싶어서 미리 받은 지령대로 리아를 요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리아 님은 이목구비가 너무 뚜렷하셔서 화장도 완전 잘 먹히실 것 같은데…화장은 종교적인 이유로 안 하시는 거에요?”
“네? 꼭 그런 건 아닌데…어차피 해봤자 보여줄 수가 없어서…보여줄 사람도 없고…”
“어머, 그렇구나. 그런데 리아 님. 앞으로 한국에서 거주하시려면 기본적으로 화장 정도는 하실 줄 알아야 하거든요. 여기서는 중요한 자리에 민낯으로 나가면 조금 예의 없게 보는 경향도 있어서…”
“아…어, 어떤 느낌인지 알겠어요.”
“게다가 리아 님이 좋아하는 분이 생겼을 때, 화장이란 게 중요한 무기가 되어 줄 수도 있거든요. 조금 속물 같지만, 이성을 꼬시기 위해선 매력적인 외모만큼 중요한 게 없으니까요”
“으음.”
리아는 홀린 듯이 간호사의 언변에 빨려 들어갔다. 특히 이성을 꼬시기 위해서는 매력적인 외모가 필요하다는 말은 리아의 가슴을 움찔거리게 만들었다.
만약 화장을 해서 더 매력적인 외모를 갖게 된다면, 민준에게 조금 더 호감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발칙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에게 그런 생각을 품으면 안 되는 거지만, 리아는 자꾸만 커져가는 마음속의 욕망을 걷잡을 수 없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간호사에게 화장 수업을 빙자한 실전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다.
“리아 님은 이목구비가 뚜렷하니까, 이렇게 진하게 화장을 해줘도 전혀 촌스럽지 않거든요.”
“그, 그렇구나. 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어유~ 정말 너무 예쁘다. 무슨 인형 같아요. 리아 님.”
“정, 정말요?”
“그럼요. 리아 님도 한번 거울 좀 봐보세요. 어떤 것 같아요? 훨씬 예쁘지 않나요?”
“아…”
메이크업 테이블에 앉아있던 리아는 간호사의 말에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속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앉아있었다.
속눈썹이 마치 공작의 깃털처럼 곱게 뻗어 올라 있었고 눈썹의 색깔도 한층 진해져서, 원래도 크고 아름다웠던 리아의 눈동자가 한층 더 부각되어 있었다.
게다가 입술에는 강렬한 빨간 립스틱이 짙게 발라져 있어서 리아의 인상은 화장하기 전보다 훨씬 더 그윽하고 고혹적이었다.
상당히 자극적이고 강렬해서 잘못 소화하면 싸구려 포르노 배우처럼 보일만 한 화장이었지만, 리아의 뛰어난 본판이 외설적인 분위기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예쁘긴 한데 너, 너무 진한 건 아닐까요? 뭔, 뭔가 어색한 거 같아요.”
“아뇨. 화장은 완벽해요. 리아 님한테 딱이에요. 그런데 아무래도 리아 님이 환자복을 입고 있으셔서…강렬한 메이크업이랑은 매치가 좀…”
“아…”
“이참에 스타일링도 좀 해드릴까요?”
“네? 아뇨…! 너, 너무 민폐를 끼치긴 싫은데…”
“민폐는요! 리아 님은 가만히 계세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말릴 새도 없이 옷들을 가져온 간호사가 순식간에 리아의 옷을 벗기고 갈아입혔다.
칙칙한 무채색 환자복을 벗고 간호사가 가져다준 배꼽은 물론 갈비뼈까지 다 드러나는 짧은 크롭티에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미니스커트를 입자, 공부 잘할 것 같던 수수한 모범생 스타일이었던 리아가 아이돌 못지않은 화려함을 뽐냈다.
“아, 아무리 그래도 이,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너, 너무 살이 많이 보여요…!”
“그래요? 제 눈에는 예쁘기만 한데. 제가 남자였으면 리아 님한테 완전 반했을 것 같아요. 허리랑 다리는 이렇게 얇은데 가슴이랑 골반은 툭 튀어나온 이 환상적인 핏과 라인을 보고 어떻게 반하지 않겠어요. 완전 콜라병인데.”
“아, 아, 아니…칭, 칭찬은 너무 감사하지만…그, 그래도 이건 너무 노출이 심해서…조금 더 단정한 옷으로…”
“알겠어요. 리아 님. 그런데 잠시만 저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당, 당연히 다녀오셔야죠! 어서 다녀오세요.”
“감사합니다. 리아 님.”
병실에는 대리석 욕조까지 딸린 화장실이 있었지만 간호사가 쓸 수는 없었기에, 간호사는 리아를 두고 병실을 빠져나갔다.
간호사가 빠져나가자 뭔가 긴장이 풀려서 한숨을 푹 내쉰 리아는, 정면에 있는 거울을 힐끗힐끗 보면서 간호사가 만들어주고 간 예술작품을 구경했다.
확실히 예쁜 걸로만 따지면 중동 전통 의상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외설적이었다.
이러고 중동 지역을 돌아다니다가 극단적인 율법주의자들에게 걸리면 그 자리에서 총을 맞을지도 몰랐다.
절대 그들을 옹호하는 건 아니었지만, 상당히 개방적인 편인 리아에게조차 이 정도 노출은 거의 금기에 가까웠다.
“그래. 이건 내가 봐도…너무 음, 음란해…남, 남자들을 대놓고 유혹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리아는 화려한 자신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자꾸만 거울을 쳐다봤다.
똑똑.
리아 씨, 저 왔는데 들어가도 될까요?
“읏…!”
하필 간호사가 자리를 비운 이때, 갑자기 들려온 민준의 목소리에 리아의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뒤집혔다.
또, 민준의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몸이 삽시간에 후끈 달아올라서 더욱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패닉에 빠져버린 리아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을 꾹 닫고 있자, 밖에서 민준의 염려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아 씨, 혹시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아, 아…”
리아 씨! 리아 씨! 안 되겠다. 저 들어갈게요?
“아, 아…잠, 잠깐만…”
리아가 뭐라 대답하려 했지만, 그전에 이미 문이 스르륵 열렸다.
“어? 리아 씨. 안에 계셨네요? 그런데 왜 대답을…”
“아, 그게…그, 그러니까…읏, 안, 안 돼요…!”
민준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자, 리아는 아예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입고 있는 옷도 그렇고 화장도 그렇고, 이런 모습을 들킨다면 민준에게 아무런 남자나 홀리고 다니는 천하고 천박한 여자로 찍혀버릴 것 같았다. 너무 무서웠다.
“어? 리아 씨 옷이…”
“아, 아으…보, 보지 마세요…제발요…”
“옷이 엄청 예쁘네요? 와, 완전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요.”
“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민준의 반응에 리아가 멍하니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화장도 하셨네요? 원래 이렇게 화장을 잘하세요?”
“아, 아니요. 간, 간호사 언니가…잘, 잘 어울려요? 화장을 해본 건 처음이라서…”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 반대로, 긍정적이기 그지없는 민준의 반응에 리아가 어렵사리 민준에게 물었다. 민준은 당연한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사람 정말 간호사 맞아요? 화장 전문가 아니고? 화장이 완전 예술인데…물론, 리아 씨가 원래도 워낙 아름다우시니까 소화를 잘하시는 거겠지만…”
“하, 하우…”
민준의 말에 흥분한 리아가 옅고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민준에게 아름답다는 칭찬을 들으니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기분이 끝내줬다.
“음. 일단 침대로 갈까요? 마침 치마를 입고 있으셔서 치료해드리기도 편할 것 같은데. 그나저나 정말 예쁘네요. 리아 씨.”
“아, 아으! 어, 어서 치료 부, 부탁드릴게요. 민준 님.”
“그럼 잠시만 실례할게요.”
민준이 메이크업 테이블을 향해 있던 카트를 끌어서 침대 앞에 댄 뒤, 리아를 번쩍 들어서 침대 위에 반듯이 눕혔다.
“사실 다리를 가리는 것보다 제가 눈으로 보면서 만져드리는 게 훨씬 더 좋거든요.”
“아…”
“몸에 힘을 풀고 편안하게 계세요. 리아 씨. 꼼꼼하게 만져드릴 거라, 꽤 오래 걸릴 수도 있거든요.”
“아, 하아…네, 네…부디…부탁드릴게요…민준 님.”
“그럼 시작할게요. 아프면 말씀하세요. 살살 해드릴 테니까.”
“아, 아으…네, 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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