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화 〉 254화
* * *
“끄으윽.”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연주까지 기절시킨 민준이 홀가분하다는 듯이 기지개를 쫙 켰다.
거의 쉬지 않고 섹스하며 밤을 새워서 그런지 머리가 몽롱했다. 야한 걸 하도 많이 하다 보니까 머리까지 음탕하게 녹아버린 것 같았다.
촤아아악.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며 몽롱하게 잠겨있는 뇌를 깨운 민준은, 옷을 입으며 현주에게 전화를 걸어 임시 난민보호소에 리아 아즈람이라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현주는 하던 일을 전부 다 제쳐놓고 임시 난민보호소를 관리하는 외교부 장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장관은 바짝 긴장하며 현주의 전화를 받고 나서, 곧바로 리아 아즈람의 소재를 찾아오라고 직원들에게 지시한 뒤, 보고가 올라오자마자 다시 현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의원님. 임시 보호소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긴 했는데…미국 외교부에서 리아 아즈람이라는 여자는 자기들이 데리고 갈 테니 신경 쓰지 말라는 식으로 말을 해서…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의원님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또 언제든지 연락해주세요.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외교부 장관과의 통화를 마친 현주는 곧바로 민준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들었던 내용을 그대로 민준에게 알려줬다.
“뭐? 미국 외교부요?”
네, 주인님. 미 외교부에서 왜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리아 아즈람이라는 여자, 아마 평범한 여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일단 알겠으니까, 미국 애들이 그 여자 데려가지 못하게 잠시만 막고 계세요. 제가 해결할 테니까.”
네, 주인님.
대한민국 외교부에서는 인천 국제공항 근처에 있는 호텔을 통째로 빌려서 임시 난민보호소로 쓰고 있었다.
민준은 차를 타고 보호소를 향해 달리면서 제레미에게 전화를 걸었고, 현주는 민준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외교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리아 아즈람을 절대로 미국 외교부에 넘기지 말라고 전했다.
“아니…씨발,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고…”
현주와의 전화를 끊고 장관은 난감하다는 듯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한쪽은 미 외교부였고, 한쪽은 당선이 거의 확실한 사실상 대한민국의 차기 대통령이었다.
딱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형세였지만, 장관은 이렇게 된 이상 이번 기회를 통해 제대로 현주의 라인을 타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장관직이야 부서에서 조금만 시끄러운 사건이 터지면 모든 책임을 지고 내려놓아야 하는 아쉬운 자리였다. 외교부 장관은 다른 부서에 비해 그나마 괜찮았지만, 어쨌든 명예직에 가까운 장관직을 걸고 권력의 심층부에 다가갈 수 있다면 나쁜 교환은 아니었다.
“왓 더…지금 뭐라고?”
“그게…한국 외교부 쪽에서…리아 아즈람이 한국에 있고 싶다고 요청했다는 걸 근거로 그녀의 신병을 넘기는 걸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 새끼들이 지금 뭐라는 거야? 미친 거 아니야?”
주한 미국 대사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대사관 직원이 침을 꼴깍 삼켰다.
원래 미국 대사관 쪽에서 뭘 하든 협조적으로 나오곤 했는데, 이번에는 단체로 마약이라도 빨았는지 한국 외교부의 태도가 너무 완강했다. 절대로 리아 아즈람을 내놓지 않겠다고 엄포를 내린 상태였다.
이렇게 되면 한국의 임시 난민보호소를 거쳐, 평범한 난민 신분으로 리아 아즈람을 미국으로 데려오려고 했던 CIA의 원래 계획은 물거품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국에서 리아를 빼돌린 게 아니라, 여러 난민 중 한 명이 리아였을 뿐이라는 명분을 쌓기 위한 일이었고, 나중에 리아를 외교적 기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번 작전이 꽤나 중요했다. 실패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설마 한국 정부에서 리아 아즈람의 정체를 알아낸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 정부는 중동 정세에 그렇게까지 깊게 관여하고 있지 않아서…그리고 안다고 해도 그녀를 이용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낼 능력이 한국에는 없습니다.”
“그럼 왜 이러는 건데?”
“그게…거기까진 저도 잘…”
“하아. 퍽킹…당장 외교부 장관한테 전화 걸어서 나한테 연결해. 그리고 당장 임시 보호소에 파견 나간 직원들을 동원해서 강제로라도 리아를 확보해와. 뒷감당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예! 대사님!”
위이이잉.
직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걸음을 재촉하며 방에서 나가자마자, 대사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에 떠오른 번호를 확인한 대사는 눈을 크게 뜨며, 급히 전화를 받았다.
“예! 전화 받았습니다!”
통화가 계속될수록 대사의 눈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위에서 떨어진 명령이 너무나 믿기지 않아서였다.
“정말로 그렇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예? 아, 죄송합니다. 당장 시정하겠습니다. 예, 예.”
한편, 미국과 한국 외교부가 힘 싸움을 벌이게 만든 주범인 민준은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루나의 1집 타이틀곡을 따라 부르며 여유롭게 차를 몰아 난민보호소로 향했다.
“흥, 흥흥~. 캬, 누구 노랜지 아주 기가 막히네. 아, 주차장이 여기구나.”
끼이익.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와 호텔 입구로 가 이름을 대니, 외교부 직원들에게 극진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외교부 직원과 함께 리아가 머물고 호텔 방으로 향하는데, 싸움이라도 벌어진 건지 리아의 방 앞이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웠다.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 없이 협조만 해달라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리아 아즈람 씨는 한국에 머무르길 원하십니다. 미국으로 가고 싶다는 본인의 의사가 확인되면 그때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국제법에도 맞는 방식 아니겠습니까?”
“퍽!! 누군 법 몰라서 이러는 줄 알아?! 당신 상관 누구야! 어?!”
한국에서만 ‘당신 상관 누구야!’가 통하는 줄 알았더니, 미국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러나 얼굴이 시뻘게져서 갑질을 해대는 미국 대사관 직원들 앞에서도, 한국 외교부 직원들의 표정은 더없이 심드렁할 뿐이었다.
‘캬, 저게 옳게 된 철밥통이지. 우리나라 공무원은 말이 통하지 않는 게 기본 패시브거든!’
비록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이었지만, 이렇든 저렇든 싸움 구경은 언제나 재밌었다.
민준은 흥미롭게 두 집단의 설전을 지켜보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응? 당신은 또 뭡니까?”
뚜벅뚜벅하는 구두 소리를 들은 미국 대사관 직원들이 뒤를 돌아서 민준을 쳐다봤다.
가운데에 서 있는 상급자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콧김을 씩씩 내뱉으면서 민준에게 띠껍게 말을 걸었다.
민준은 기분 나쁜 반응에 눈살을 조금 찌푸리고는 대답했다.
“왜 죽음을 재촉하지?”
“뭐? 지금 당신 뭐라고…”
“열심히 일하는 건 좋지만, 자기 목숨부터 챙겨야지. 안 그래?”
“이게 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개소리를…! 꺼흑…!!”
민준은 이제 막 발광하려는 미 대사관 직원의 목을 오오라로 가격했다.
오오라에 가격당한 이의 목이 기형적으로 꺾이더니, 눈알을 뒤집은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꺼헉!”
“끄흣!”
민준은 폭행죄니 뭐니, 옆에서 꼴값 떠는 것도 보기 싫어서, 남아있는 미국인들의 목까지 미리미리 쳐버렸다.
가장 먼저 가격당한 이는 워낙 세게 맞아서 운이 나쁘면 약간의 장애가 남을지도 몰랐지만, 다른 이들은 그저 깔끔하게 기절만 시켜줬다.
“아, 아니…이게 대체…”
“…허억.”
기절한 미국 대사관 직원들 때문에 장내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민준은 그러거나 말거나 걸음을 옮겨서 리아의 방으로 다가갔다.
“여기 맞죠?”
“예? 예, 예. 맞, 맞긴 맞는데…”
“리아 씨랑 깊이 할 얘기가 있으니, 자리 좀 비켜주세요. 바닥에 뻗어있는 놈들도 좀 치워주시고요.”
“아, 예. 예. 물론입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민준은 자신을 에스코트해준 직원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고 리아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문을 두드리고 잠시 기다리니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조심스레 열었다.
“누, 누구세요?”
휠체어에 앉은 채 방문을 살짝 열고 말을 하는 리아의 목소리는 두려움으로 인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리아는 바깥에서 벌어졌던 소동이 대충 어떤 내용인지 인지하고 있었다.
마치 물건처럼 자신을 걸고 넘긴다 만다 싸우고 있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너무나 무섭고 소름 끼쳤다.
그래도 노크 소리에 순순히 문을 열었던 건,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내 몸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빙의된 것처럼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이런 적이 처음은 아니었다. 종종 신의 뜻이 발현되는 순간에는, 이런 식으로 몸이 저절로 움직이곤 했다.
“김민준이라고 합니다. 리아 씨를 보러왔는데,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네. 괜, 괜찮아요.”
리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일면식도 없는 낯선 남자를 방안으로 들였다.
민준이 들어와서 덜컥. 하고 문을 닫자, 리아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
남자와 단둘이 있는 건, 아버지를 제외하면 이번이 처음이었다.
“차,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시는 건…”
“네, 좋습니다.”
리아는 민준과 눈을 도저히 마주칠 수 없어서 필사적으로 민준의 시선을 무시하며 땅만 보고 휠체어를 움직였다.
휠체어를 끌어서 테이블에 도착한 리아는 찻잔에다 호텔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차 티백을 넣고, 마침 끓여져 있던 뜨거운 물을 부었다.
민준은 새색시처럼 쑥스러워하면서도 야무지게 차를 준비하는 리아의 모습을 뻔히 쳐다보고 있었지만, 리아는 차가 다 끓을 때까지도 단 한 번도 민준을 쳐다보지 않았다.
‘어이구야. 생긴 건 섹시 여배우처럼 생겨서…성격은 완전 연주과네.’
휠체어에 타고 있어서 정확하진 않았지만, 리아의 키는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휴지 두 칸 정도면 넉넉하게 가려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소두인데다가 다리도 무척 길어서 모델을 해도 될 정도로 비율이 끝내줬다.
또, 그 작은 얼굴에 중동 사람들 특유의 진하디진한 이목구비가 장착되어 있었다.
진한 마스카라를 바른 것처럼 길고 굵은 갈매기 눈썹에 500원짜리 동전보다 더 큰 아름다운 진갈색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콧대는 어찌나 높고 날카로운지 종이를 떨어트리면 슈르륵하고 베일 것만 같았고, 할리우드 섹시 스타처럼 두툼한 진홍빛 입술을 갖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연하고 여리여리하게 생긴 민준의 여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생김새. 하지만 외모의 결이 다를 뿐 미의 수준은 절대 꿀리지 않았다.
“이, 이제 다 우러나온 것 같은데…”
“아, 예.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리아 씨.”
“아, 아니에요. 별것도 아닌데요.”
두 사람이 동시에 후루룩하고 차를 조금씩 들이켜고는 찻잔을 내려놨다.
입안을 감싸는 씁쓸하면서도 상쾌한 차의 향을 맛보며, 민준은 시선을 리아에게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리아 씨가 한국에 머물 수 있도록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근데 그전에, 어째서 리아 씨가 한국에 머무르길 원하시는지 여쭤보고 싶군요.”
“아, 그, 그게……”
꾸욱.
민준이 갑자기 핵심을 찔러와서 리아는 긴장되는 마음에 손을 꽉 쥐었다.
우물쭈물하며 고민하던 리아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민준에게 출생부터 시작해 자신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해서 털어놨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쉽게 털어놓을 만한 얘기는 아니었지만, 리아는 자신의 신이 민준을 이곳으로 인도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방안에 외간 남자와 단둘이 같이 있다는 게 도무지 적응이 안 돼서 말을 좀 버벅댈 뿐이었다.
“음. 엄청나게 큰 병원 같은 곳이라…혹시 그 병원, 여기 아닙니까?”
“아, 맞, 맞아요…! 바로 이곳이었어요!”
민준이 핸드폰을 꺼내서 MJ 의료센터 사진을 보여주자, 리아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민준은 이번 시나리오가 어떤 식으로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핸드폰에서도 메시지가 쏟아졌다.
——
[시나리오 흡수 합병]
오오라를 불어넣거나, 정액을 통해 리아의 다리를 고칠 수 있습니다.
리아의 다리를 고치고 종교 지도자의 권한을 획득하세요.
종교 지도자가 되어서 중동에 있는 신자들을 흡수하세요.
90% 이상의 신자들을 흡수할 경우, 중동 지역의 모든 종교는 무한금욕교에 합병됩니다.
——
‘이래서 흡수, 합병이었구나. 아예 중동 지역을 완전히 삼켜버리라 이거지?’
민준은 싱긋 웃으면서 핸드폰을 집어넣고, 지갑을 꺼내 명함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리아가 민준이 갑작스레 건넨 명함을 공손하게 받아들고는, 명함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MJ 의료센터…이사장…?”
“예, 제가 리아 씨가 꿈에서 여러 번 봤다는 그 병원 이사장입니다.”
“아…!”
리아가 깜짝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목소리와 피부를 보면 아무리 많아 봐야 20대 중반일 것 같은데, 그런 큰 병원의 이사장이라니. 엄청난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리아 씨의 다리를 고치라는, 신의 계시인 것 같습니다.”
“예? 제, 제 다리를요? 하지만 저는…태어날 때부터 걸을 수 없었던걸요.”
“음…일단은 가볍게 진료를 해봐야겠습니다. 잠시 저한테 몸을 좀 맡겨 주시겠습니까?”
“이, 이사장님께서 직접이요? 저, 저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
“괜찮습니다. 진료를 위해서 그런데, 혹시 제가 침대로 리아 씨를 옮겨드려도 될까요?”
“네? 아, 아, 저…저는…괜찮긴 한데…이, 이사장님께 너무 민폐가 아닐지…아, 아, 잠, 잠시만…!”
민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톰하기 그지없는 섹시한 입술로 우물거리고 있는 리아를 휠체어에서 가뿐히 들어 올렸다.
민준은 공주님 안기 자세로 침대까지 걸어가 리아를 눕혔고, 리아는 침대에 누우면서야 민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아, 아으…”
민준의 얼굴을 보자마자 어딘가 멍해지고 머리에 열이 올라서 리아는 시선을 휙 돌려버렸다.
하지만 문신이라도 새긴 것처럼, 순식간에 지나간 민준의 얼굴이 머리에 단단히 박혀서 도저히 지워지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댔다.
“이런, 혹시 불편하셨나요?”
“아, 아니에요…! 그, 그냥…아,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다행이군요. 그럼 진료를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