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화 〉 240화
* * *
마르코와 그의 부하들 십여 명을 태운 선박 한 척이, 카리브해를 가로질러 외딴 섬으로 향하고 있었다.
협박 메일에 적혀있는 장소로 향하는 중이었고, 마르코의 배와 적당히 간격을 둔 채 수많은 조직원들 역시 섬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화기를 가득 실은 헬기 몇 대와 보트 수십 척은 물론, 원래는 마약 운반용으로 쓰이던 잠수함까지 모조리 모여들고 있었지만, 마르코의 가슴은 진정되질 않았다. 초조하고 불안했다. 자꾸 어디선가, 루시의 비명이 들려오는 듯했다.
섬에 도착해 정박하자마자, 마르코는 돈 가방을 들고 있는 몇몇 부하들과 함께 모래사장에 내렸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돈 가방을 들고 있는 이들은 마르코가 가장 믿는 부하들이었다. 경험이 풍부해 어떤 상황에도 대응할 수 있는 이들이었고, 겉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옷 속에는 크기가 작은 기관단총과 권총 한 자루씩이 각각 들어있었다.
마르코는 이미, 기회가 보이면 언제든지 납치범을 사살하라고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저벅저벅.
마르코는 모래사장을 천천히 걸어서, 정박할 때부터 눈에 띄었던 나무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모래와 조개껍데기뿐인 모래사장에 떡하니 놓여있는 나무 테이블 위에는, 무전기 하나가 놓여있었다.
마르코는 익숙하다는 듯이 무전기를 잡아 들고, 무전을 보냈다.
칙, 치익.
“네놈 말대로 제시간에 도착했으니, 협상을 시작하지.”
……루시가 소중하긴 하나 보지? 천하의 마르코가 약속 시간을 지키다니 말이야. 대통령하고 만날 때도 지각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헛소리만 할 건가? 어디에 있지? 딸의 상태는? 혹시 생채기 하나라도 냈다면……”
워워. 일단은 진정하자고. 그리고 그렇게 큰 소리 떵떵 칠 상황이 아닐 텐데? 난 분명 혼자 오라고 했는데 말이야……
“…………”
마르코가 잠시 무전을 멈추고 정면을 바라봤다. 납치범은 모래사장에서 이어지는 무성한 수풀들 사이에 숨어, 자신들의 일행을 지켜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마르코는 납치범의 위치를 찾기 위해서 조용히 눈알을 굴리다가, 눈에 띄는 것이 없자 다시 무전기를 입에 가져다 댔다.
“5천억이 애들 장난인 줄 아나? 그 많은 돈을 나 혼자 운반할 순 없어. 운반을 도와줄 최소한의 인원들만 데려온 거다.”
아니, 걔들 말고…………주변 섬에 몰래 정박해 있는 선박들과 헬기들을 말하는 거야. 마르코. 너희 조직원들이 아니면, 한적한 무인도에 갑자기 이렇게 사람이 몰려올 리가 없잖아?
“……루시만 풀어준다면 조용히 돌아갈 수 있을 거다. 약속하지.”
섬 주변을 병력으로 둘러쌓아 놓고 나를 얌전히 놓아주겠다고?
“네가 정한 이 섬마저 믿을 수 없다면, 안전한 곳까지 다시 이동해서 루시와 돈을 맞바꾸는 조건도 받아들일 의향이 있어. 물론, 루시가 멀쩡하다는 조건하에 말이야……잘 생각해라, 납치범. 마지막 기회니까.”
납치범을 역으로 협박하다니. 역시 마약왕 마르코야. 근데 마르코 혹시 연락받은 거 없어?
“……무슨 소리지?”
오늘 12시부터, 베네수엘라 정부는 ‘마약과의 전쟁’을 공표할 거야. 미군과 정부군이 협동해서 뿌리 깊은 사회악인 마약밀매 조직을 일망타진한다는 작전이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약왕 마르코는 사살될 거야. 적어도 언론에는 그렇게 발표될 예정이지.
“대체……무슨 개소리를…………”
콰아아앙!! 쾅쾅쾅쾅쾅!!!
느닷없이 엄청난 규모의 폭발음이 들려왔다. 깜짝 놀라서 몸이 그대로 굳어버린 마르코는 이를 앙다물고 강제로 몸에 힘을 줘서 뒤를 돌아봤다.
이 섬과 적당히 떨어져 있는 섬의 뒤편에서부터 매캐한 검은 연기와 시뻘건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마르코의 병력들이 정박해있는 자리였다.
그리고 폭격당해 불타오르고 있는 건 다른 섬들도 마찬가지였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모든 섬이 똑같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과연 눈에 보이는 섬들만 이런 상황일까. 아마 육안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2중대 병력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끔찍한 생각이 마르코의 머리를 스쳤다. 마르코의 얼굴이 순식간에 거무죽죽하게 죽어갔다.
“무, 무슨……!”
마르코는 매년 수십조를 벌어들였고, 그중의 10% 정도는 로비자금으로 쓰고 있었다.
남미를 비롯해 미국에까지 마르코의 로비 라인이 거미줄처럼 쫙 퍼져있었으며,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했다.
마르코의 소식통에 걸리지 않고, 카라카스에 마르코보다 더 많은 병력을 모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건 베네수엘라 대통령도 불가능했다.
마르코가 서슴없이 전 병력을 끌고 와서 납치범을 힘으로 찍어누르려 한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어차피 병력으로는 밀어붙이면 결국에는 마르코 카르텔이 이길 테니까. 마르코 카르텔에 대항할만한 병력이 베네수엘라에 들어와 있다는 소식은 전혀 들은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납치범이 부른 장소로 와보니, 모든 예상과 믿음이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마법이라도 부린 것 같았다.
폭격은 계속 이어졌고, 마르코는 아예 넋을 놓고 섬이 화려하게 불타오르는 광경을 지켜봤다.
치, 치지직.
너무 상심하지 마. 마르코. 네가 뿌린 돈들은 의미 없지 않았어. 나는 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써서 고위층들을 구워삶아야 했거든. 물론, 너처럼 진짜 현금으로 챙겨준 거 아니었지만.
비아냥대는 듯한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흘러나왔지만, 마르코는 지금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동안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타오르고 있었다. 마르코가 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있던 것도 결국에는 강대한 무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무력이 사라져 버리면, 아무것도 지킬 수 없었다.
돈, 명예와 악명, 그리고 소중한 가족들까지도.
부인은 잠수함에 타 있는 건가? 부디 그렇다고 말해줘, 마르코. 그런 미인을 폭격으로 죽게 하는 건 너무 아깝잖아.
“이익…… 이, 이…… 이……이 개새끼가아아!!!”
콰직!!
마르코가 분노에 못 이겨 무전기를 모래사장에 던지고 마구 밟아댔다.
푹, 푹, 피융!
모래에 삼켜지도록 무전기를 푹푹 밟아대고 있었는데, 도저히 모래가 튀어 오르는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잔뜩 억눌린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마르코는 자주 듣던 고성능 소음기 소리에 경악하며 부하들에게 당장 피하라고 소리 지르려 했다.
하지만 마르코가 소리를 지르는 속도보다, 수풀에 숨어있던 저격수들이 마르코와 함께 있던 부하들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피융! 피융! 피융!
“커헉!”
“큭, 케헥!”
“…………”
마르코는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오더니, 부하들이 거의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모래사장에 쓰러졌다.
부하들의 피가 마르코의 몸을 잔뜩 적셨고, 마르코는 피 칠갑을 한 채 가만히, 멍하니 모래사장에 서 있었다.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악몽, 악몽일 거야. 이건 악몽일 거야.
뚜벅뚜벅.
“…………이런 벌써 좌절하면 안 되지. 마르코.”
“…………”
그때, 멀찍이 숨어있다가 저격팀에게 사살 명령을 내린 뒤 느긋하게 걸어서 수풀을 빠져나온 민준이, 모래사장을 터벅터벅 가로질러 마르코에게 다가갔다.
민준은 아무런 방비도 없이 마르코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 마르코와 시선을 맞췄다.
비록 영혼이 거의 빠져나간 상태이긴 하지만, 민준은 마르코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혹여나 소피아도 납치당할까 봐, 아예 잠수함에 태워서 데리고 온 건 좋은 생각이었어. 마르코. 솔직히 내가 아니었다면 너를 잡았더라도 소피아는 놓쳤을 거야.”
“……소피아……소피아는 살아있나?”
“그래. 우리 측 잠수함에서 위협용 어뢰 몇 발 쏴주니까 금세 항복했다더군. 소피아도 이리로 오고 있으니 금방 만날 수 있을 거야.”
“………대체 정체가 뭐지……”
“잘 생각해봐. 마르코. 가족들이 전부 납치당해서 정신없는 건 알지만, 그래도 네가 암살하려고 했던 남자 얼굴 정도는 알아야지. 아니면, 내 여자친구들한테 빠져서 내 얼굴은 기억도 못 하는 건가?”
“설, 설마……”
마르코는 경악을 내질렀다. 사건의 퍼즐이 마르코의 머릿속에서 점점 맞춰지고 있었다.
한국에서 저지르려 했던 암살 및 납치사건의 실패와 느닷없이 채팅에서 만난 한국 남자와 데이트를 하겠다며 허락을 구하던 루시.
당시에는 조금도 의심 못 했던 사건의 연결고리들이 하나둘씩 이어졌다.
하지만 그 사이에 있었던 간격이라고 해봤자 일주일 남짓.
그 시간 동안 루시에게 작업을 치고 이만한 병력을 준비해서 섬 근처에 매복시킨다는 게 정말로 말이 되질 않았다.
어찌어찌 말이 된다고 해도, 그 모든 걸 매년 몇조씩 퍼부어가며 유지해온 정보 라인에 걸리지 않게 준비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네? 그래도 어쩌겠어, 마르코. 하늘 위에는 또 다른 하늘이 있는 법인데. 나는 오늘 너한테 또 다른 하늘을 보여준 거야. 수업료는 좀 비싸게 받아 가겠지만…………아, 마침 오는군.”
민준이 조금 멀리서 모래사장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고 있는 모터보트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마르코는 멍하니 민준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마르코는 보트 위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죄인처럼 앉아있는 소피아를 볼 수 있었다.
아직 조직이 완성되기 전 몇 번이고 죽을 위기를 함께 헤쳐왔던, 인생의 동반자이자 마르코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였다.
“소, 소피아!! 소피아아아!!”
“걱정하지 마. 아직은 상처 하나 없다고 하더군. 뭐, 내가 좀 격하게 노는 편이라, 나랑 놀다 보면 조금 다칠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큭.”
“이익……”
탕!
루시에 이어 소피아까지 잡혀버린 걸 보고 꼭지가 완전히 돌아버린 마르코가 허리춤에 숨겨놨던 권총을 벼락처럼 뽑아 들고, 지체 없이 뒤를 돌아서 민준을 향해 격발했다.
마르코가 총을 꺼내 들고 뒤를 돌아 총을 쏘는 데까지 채 1초가 걸리지 않았다.
마르코의 총 솜씨는 마치 서부극에 나오는 총잡이들처럼 훌륭했지만, 마르코에게 다가설 때부터 이미 오오라로 몸을 방어하고 있던 민준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이, 이런 미친!! 이 악마 같은 새끼야!!!”
총알이 민준의 몸에 맞고 튕겨 나오는 걸 본 마르코는 발작하듯이 권총을 민준에게 갈겼다.
틱. 틱.
하지만 총알이 다 떨어지도록 오오라는 뚫리지 않았고, 비현실적인 광경에 마르코는 더는 총을 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허억. 허억, 허억. 악, 악마…… 악마 같은 새끼……”
“누가 누구보고 악마래. 씨발, 진짜………사람탈을 쓴 악마 새끼한테 이런 소리 들으니까 기분 상당히 좆같네?”
“아으, 다, 다가오지 마! 이 악마 새끼야……”
“악마라고 하지 말라고. 미친 악마 새끼야.”
“으, 으아…… 큭, 커헉.”
턱.
민준은 마르코의 뒷목을 노려 오오라를 휘둘렀고, 마르코는 그대로 기절했다.
민준은 쓰러져있는 마르코와 채 모래사장에 정박하기도 전에 보트에서 내려 기절한 마르코에게 필사적으로 뛰어오는 소피아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제야 퍼즐이 전부 모였네. 게다가 커다란 보너스까지.”
소피아까지 챙길 수 있을지는 몰랐는데, 예상치 못한 노다지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민준은 주변 공간을 오롯이 독점적으로 점유한 채 물리학에 따라 격하게 출렁거리는 소피아의 거유를 바라봤다.
꿀꺽.
압도적인 크기에 민준의 목울대가 긴장감 있게 천천히 움직였다.
“어쩌면 미현 누나보다 크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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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된 세뇌와 가스라이팅으로 루시는 이미 마르코와 소피아를 극혐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르코와 소피아에게 지금껏 저질러온 나쁜 짓에 상응하는 고통을 주는 것만이, 자기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민준은 이미 정신 개조가 완료된 루시와 아직은 터치하지 않은 소피아를 가지고 어떻게 마르코에게 고통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그리고 답은 빠르게 나왔다.
‘내가 당하면 가장 좆같을 만한 상황……그런 상황을 만들어 내야지.’
민준은 가족을 극도로 아끼는 마르코의 성향은 아끼는 여자들을 완전히 소유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망과 닮아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하는 게 닮았으니 싫어하는 것도 같을 수밖에 없었다.
민준은 루시와 미리 입을 맞추고, 방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방구석에 기절한 채 구속 의자에 구속되어 꼼짝도 못 하도록 단단히 구속된 마르코를 앉혀놓고, 딜도와 채찍을 포함한 다양한 도구들도 비치했다.
준비가 끝나자 마침 마르코의 정신이 약간씩 돌아오고 있었다. 민준은 다른 방에 가둬두었던 루시와 소피아를 끌고 와서 거칠게 방에 집어넣고, 방문을 잠갔다.
철컥.
“엄, 엄마.”
“루시, 루시! 이, 이리 온…… 괜찮아, 괜찮다. 내 딸아. 엄마가, 엄마가 있잖아. 흐윽, 그러니까 괜찮아. 괜찮아, 진정해. 내 딸.”
모녀가 바닥에 주저앉아 서로를 껴안은 채 온몸을 벌벌 떨어댔다.
민준은 모녀들을 무시한 채 마르코에게 걸어가, 우선 마르코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
“으, 으으…………”
“일어나, 마르코. 충분히 잤잖아? 이제 현실과 마주해야지.”
“읏, 으읏…… 으으으으……”
덜커덩.
구속 의자에 단단히 묶인 채 정신을 차린 마르코가, 민준을 보고 미친 듯이 발광했다.
하지만 온몸이 벨트로 칭칭 감겨있는 데다, 입마개마저 채워져 있어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봤자 마르코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르코를 깨운 민준은 무심히 돌아서서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아 서로를 껴안고 있는 모녀에게 다가갔다.
먹음직스럽기 그지없는 모녀를 바라보는 민준의 눈에서는 어두운 욕망이 이글거리고 있었고, 민준이 다가갈수록 모녀의 떨림도 더욱 심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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