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화 〉 237화
* * *
두개골이 쪼개질 것 같은 끔찍한 고통이 엄습했다. 눈앞이 핑 돌고 머리가 징징 울렸다.
하지만 다니엘은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아내고, 앞으로 넘어지는 힘을 이용해 바닥을 재빨리 구른 다음, 지니고 있던 권총을 꺼내든 채 격발했다.
퓨슉! 퓨숙, 퓨숙!
소음 억제에 최대한 신경 써서 커스텀 한 권총이라 소리는 거의 없는 수준이었지만, 그만큼 다른 총기에 비해 살상 능력은 떨어졌다. 다니엘은 자신의 뒤통수를 내려친 괴한이 있는 쪽을 향해 권총 세 발을 내리쏘고는, 괴한의 신음까지 확인한 후에야, 머리를 털어내며 시야와 균형감각을 되찾았다.
몸에 밴 습관대로 동작들이 나왔을 뿐, 아직도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어지러웠고 시야가 흐릿했다.
타다다다닥.
“……이런 미친!”
겨우 시야가 선명해져서 괴한의 정체를 확인하려는데, 복도 끝 쪽에서 복면을 뒤집어쓴 괴한들이 매섭게 달려왔다.
경비 팀원들이 거주하는 관제실 쪽에서 괴한들이 뛰쳐나온 걸 보면, 이미 경비팀은 제압당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고, 저들은 누구인지 미칠 듯이 궁금했지만, 다니엘은 솟구치는 의문들을 찍어누르고 오로지 어떻게 하면 루시를 지킬 수 있을지 생각했다. 지금 당장은 그게 최우선이었다.
‘젠장…! 내가 유인해야 해!’
곧바로 결단은 내린 다니엘은 망설이지 않고 뒤를 돌아 냅다 뛰었다. 그래도 침입자들이 루시의 방으로 곧장 쳐들어가지 않고 자신을 따라와서 천만다행이었다.
경비팀이 뚫렸으니, 루시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미끼가 되어 침입자들을 유인해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 뻥 뚫려있는 복도에서는 엄폐할 수 없어서 일대 다수의 싸움을 하기에 좋지 않았다. 불리한 상황을 뒤집으려면 지형지물을 최대한 활용해 저들의 병력을 갉아먹는 수밖에 없었다.
타다다닥.
구불구불 이어져 있는 복도를 돌고 돌아 무기가 잔뜩 쌓여있는 무기고에 들어온 다니엘은, 평소 자신이 애용하던 병기들을 순식간에 챙긴 뒤 철제 테이블 밑에 숨었다.
곧 침입자들이 다니엘 쫓아 들어왔고, 다니엘은 숨을 죽이고 기다리다가 테이블 밑단에 뻥 뚫린 공간에 대고 총을 격발했다.
탕. 탕탕.
“아악!!”
“끄윽!!”
다니엘은 침착하고 신속한 단발 사격으로 침입자들의 발목을 벌집으로 만들었고, 침입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넘어졌다.
넘어진 이들을 향해 차분히 확인 사살까지 하긴 했지만, 다니엘은 더는 같은 테이블에 숨어 있을 수 없었다.
침입자들은 실력이 꽤 좋은지 한껏 당황해서 소리를 질러대면서도 재빠르게 다니엘이 숨어 있는 테이블을 향해 대응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딸깍. 또르르.
다니엘은 다시 몸을 완전히 숨긴 뒤, 옆 테이블의 위치를 확인하며 챙겨놨던 연막탄 두 개의 안전핀을 동시에 뽑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굴렸다.
볼링핀처럼 바닥을 유려하게 굴러간 연막탄이 푸쉬쉬. 하는 소리를 내면서 연막을 뿌렸고, 다니엘은 테이블 위로 총기만 내밀어서 연발 사격을 하다가, 연막이 짙어졌을 때 옆 테이블을 향해 잽싸게 몸을 던졌다.
“……윽!”
몸을 던지며 눈먼 총알에 맞았는지 왼쪽 옆구리가 인두에 지져지는 것처럼 화끈했다.
하지만 다니엘은 이를 꼭 깨물며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참아냈다.
연막이 잦아들자 원래 다니엘이 있던 테이블을 향해 총기를 겨눈 침입자들이 조심스레 접근해왔다.
다니엘은 조용히 눈을 감고 침입자들의 걸음 소리를 들으며 몇 놈이 접근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접근하고 건 5명 정도……나머지는 엄호하고 있는 건가…………까다롭군.’
아까 발목을 공략해 죽였던 침입자들을 모두 8명이었다. 다니엘이 파악했던 침입자들의 숫자는 대략 20명.
접근하고 있는 5명을 깔끔하게 처리한다고 해도, 살아나갈 가능성은 매우 희미해 보였다.
하지만 다니엘은 죽음이 무섭지 않았다. 친딸보다 더 딸 같은 루시를 지키지 못하는 것이 훨씬 더 두려웠다.
설령 지금 죽더라도 침입자들을 전부 같이 데려가야, 루시를 지킬 수 있었다.
‘전부…………이놈들을 전부 길동무로 데려간다.……’
죽음을 각오한 다니엘의 눈빛이, 차분하고도 날카로운 안광을 뿌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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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게 대체………무, 무슨 소리지……”
“그, 그게……음, 아마도 총소리……였던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지만……”
“그, 그럴 리가……그럴 리가 없는데……”
“여기 있어 루시. 내가 잠깐 상황을 보고 올게.”
민준이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총소리와 비슷하긴 한데,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소리가 매우 먹먹하고 작았다.
아직 소리의 정체가 확실하지 않아서 트라우마가 완전히 도지진 않았지만, 급격하게 불안해진 루시는 자신을 방에 두고 나가려고 하는 민준의 손목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민, 민준…… 나, 나랑 있자……”
“응? 아냐, 경호팀도 있는데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을 거야. 루시,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금방 상황을 파악해서……”
“아, 아니…… 너, 너무 무서워. 제발…… 제발, 민준. 나, 나…………너무 무서워……흐윽, 가, 가지 마. 혼자 있기 싫어. 제발……흑, 흐윽.”
루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민준의 손목을 잡고선 방바닥에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총소리가 그렇게 무서워 루시?”
“어, 어릴 때………나, 나쁜 기억이 있어서………흐윽, 너무……너무 무서워서……”
“알겠어. 어디 안 갈게. 그러니까 괜찮아. 진정해, 루시.”
툭툭.
민준은 서럽게 울고 있는 루시를 부드럽게 껴안고, 등을 살살 두드리며 오오라를 조금씩 불어넣어 주었다.
발작이라도 하듯이 몸을 격하게 벌벌 떨어대던 루시는, 민준에게서 전해지는 따스한 기운에 깜짝 놀라면서도 본능적으로 민준의 허리를 더욱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조금이라도 더 이 따듯한 기운을 받고 싶었다.
“……이제 조금 진정이 됐어?”
“……아, 응, 응.”
루시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정신과 약을 먹어도 몇 날 며칠 동안 계속되는 지독한 불안감과 트라우마가, 민준을 껴안고 있으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루시는 이런 게 바로 운명이고, 필연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민준과 우연히 연락하게 된 그 순간부터 조금씩 천천히 익어가던 풋사랑이, 순식간에 완숙해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오랫동안 고통받아 구멍이 뻥뻥 뚫려버린 마음이, 온 진심으로 민준을 원하고 있었다.
아아. 이 사람이 내 사랑이고, 내 살길이구나.
“…………민, 민준.”
“응, 루시. 갑자기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그, 그냥.”
민준을 바라보고 있는 루시의 눈빛은 언제나 태양을 향해있는 해바라기와도 같았다.
물론, 민준은 여자의 저런 눈빛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루시의 애타는 마음을 받아줄 듯 말듯 딴청을 피워댔다.
흑요석같이 새까매서 빠져들 것만 같은 루시의 눈동자에 담겨있는 가냘플 정도로 순종적이고 순애로운 감정이, 오롯이 자신을 향해있는 이 순간이 참을 수 없이 짜릿했다.
“…………”
“…………”
루시는 바로 앞에 민준이 있는데도, 이걸로는 하염없이 부족하다는 듯이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점점 더 가빠지는 루시의 숨소리와 뜨겁게 녹아버린 끈적한 눈빛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민준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알 듯 말 듯 한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래서 루시는 확신할 수 없었다.
루시가 민준을 원하는 만큼, 민준 역시 열렬하게 루시를 원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답답하고 어지러운데, 그래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쪽.
루시는 몸을 꼼지락거리다가, 순식간에 민준의 입술을 훔쳤다. 뽀뽀를 받고 민준의 눈동자가 살짝 커지는 걸 보면서 루시는 당황해 곧바로 사과를 건넸다.
“미, 미안…… 이, 이건 그러니까……읍, 흐읍……”
하지만 민준은 루시가 말을 다 잇도록 놔두지 않았다. 뱀처럼 능숙하게 허리를 감싸온 민준의 단단한 팔에 루시가 깜짝 놀라기도 전에, 민준의 혀가 눈 깜짝할 사이에 루시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읍, 흐아, 흡…… 아, 아으……쯥, 츄읍. 으, 하읏, 민, 민주운. 아, 으읍, 읍……”
부드럽다던가, 촉촉하다던가. 그런 단어들 따위로 설명할 수 있는 느낌이 아니었다.
열렬히 자신의 입술을 갈구하는 민준을 보며, 루시는 너무 황홀해서 눈물이 삐죽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혼자만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민준 역시 루시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루시를 미친 듯이 흥분시켰다.
인생에서 이런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진하디진한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와 마음을 가득 적셨다.
루시는 어색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민준의 키스에 응답했다. 이런 감정을 선물해준 민준에게는, 뭐든지 다 해주고 싶었다.
정말 무엇이든지, 가장 소중한 것까지.
“읍, 하응, 으음. 하읏, 앙, 츄읍. 흐아, 으, 아응. 으응……”
“쓰읍. 츕, 쓰으읍…………흐아.”
민준이 키스를 마치고 입술을 떼어내자, 루시와 민준이 나눴던 진득한 사랑의 증거들이 두 사람의 입술 사이에서 끈적하게 늘어졌다.
“하아, 흣…………아, 아으…………”
루시는 민준을 올려다본 채 연신 뜨겁고 달콤한 숨을 내뱉어댔다. 환상적인 첫 키스가 만들어낸 열감에, 이미 루시의 몸과 마음은 중탕기에 들어간 초콜릿처럼 끈적하고 달콤하게 녹아있었다.
하지만 경험이 없는 루시는 달아오른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몰랐고, 그저 애타는 눈빛으로 민준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민준은 피식 웃으며, 그런 루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마트에서 물건을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를 타이르는듯한 민준의 행동에, 루시는 순식간에 울상이 되어버렸다.
“아직 안 돼. 루시. 아직은……아직은 아니야.”
“흐응, 어, 어째서…………나, 나는 이미…………민, 민준이라면 나는 뭐든지……”
“여기선 안 돼. 나는 보여주는 취미는 없거든. 그러니까…………조금만 기다려. 루시.”
“민준.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루시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민준에게 되물었다. 민준은 그런 루시를 보면서 세뇌를 걸어 재워버렸고, 스르륵 무너지는 루시의 몸을 가볍게 받아들었다.
“미안, 루시. 그래도 첫 키스는 달콤하게 해주고 싶었어.”
민준은 루시를 안아 든 채 루시의 집에서 빠져나와, 복도를 느긋하게 걸어 다녔다.
넓디넓은 건물을 쭉쭉 걸어가다 보니, 슬슬 핏자국과 함께 화약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불길한 기운을 따라 무기고로 들어가 보니, 그 안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바닥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미지근한 피가 잔뜩 고여있었고, 총상을 입거나 단검으로 심장이 찔려 사망한 시체들이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영화 속 특수부대처럼 무장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시신이 되어버린 이들은 모두, 루시의 경비를 맡고 있는 경호팀 사람들이었다.
민준은 조금 전, 루시에게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한 뒤, 루시의 방에서 나와 다니엘에게 환술을 걸었다.
다니엘은 민준의 환술에 걸려 팀원들을 침입자로 착각했고, 모두 사살한 뒤 그 자신마저 장렬히 전사했다.
민준은 잠시 무릎을 굽혀 아직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다니엘의 눈꺼풀을 덮어주었다.
끔찍한 흉악 범죄를 숨 쉬듯이 저지르는 카르텔 조직원들에게 연민이 남아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환술에 조종당해 화려하게 산화한 자에게 마지막 배려 정도는 해주고 싶었다.
띡, 띡.
민준은 관제실에 들러 남아있는 경호팀이 있는지 꼼꼼히 확인하고는, 레이너에게 전화를 걸어 옥상으로 헬기를 불렀다.
“음. 강제로는 못 열겠네.”
루시를 안아 든 채 계단을 올라가다 나온 옥상 문에는 보안 시스템이 적용되어 있었다.
지문과 홍채인식, 그리고 키패드를 입력해야 열 수 있었는데, 강제로 열려고 하다간 어떤 트랩이 작동할지 알 수 없었다.
만약 경보가 울려서 아래층에 있는 조직원들이 올라오면 귀찮아지므로, 민준은 문을 여는 대신 손가락에 오오라를 불어넣어서 그 옆에 있는 벽면을 두부처럼 서겅서겅 잘라버렸다.
정사각형으로 반듯하게 잘라서 공간을 만들어내다 보니 금방 사람이 지나갈 만한 통로가 생겼다.
민준은 그 통로를 통해 가뿐히 옥상으로 향할 수 있었고, 주변에서는 벌써 공기를 찢어대는 헬리콥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민준은, 루시를 납치해 헬리콥터를 탄 채 유유히 마르코 빌딩에서 멀어졌다.
빌딩에는 아직 많은 병력들이 남아있었지만, 그들이 최상층에서 엄청난 사달이 났다는 걸 깨달은 것은 민준이 떠나고도 몇 시간이 꼬박 지난 후였다.
루시의 경호와 빌딩 경비에 대해서 전권을 가진 컨트롤 타워인 다니엘이 죽어버린 탓이었고, 또 소음에 민감한 루시를 위해 모든 총기에 성능 좋은 소음기와 소음탄을 사용하고, 더해서 흡음력이 뛰어난 건축 소재를 사용한 것이 엄청난 패착이었다.
총소리가 아래층까지 들리지 않은 데다가 경보도 울리지 않아서, 언제나처럼 여유롭게 건물을 돌던 조직원들은 최상층에서 벌어진 참상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비어있는 루시의 방을 보고 자신들의 죽음을 직감했고, 그럼에도 곧장 상부에 연락을 넣었다. 가족이라도 살리려면 이제라도 보고를 해야 했고, 그렇게 루시의 납치 소식이 마르코의 귀에 들어갔다.
소식을 들은 마르코는 몹시 격노하며, 즉시 마르코 카르텔의 모든 병력을 카라카스로 집결시킨 채,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게끔 도시를 봉쇄했다.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미확인 탱크가 버젓이 길가를 돌아다니고, 헬기가 줄지어 하늘을 날아다녔다.
마르코 카르텔의 병력이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시민들은 겁에 질려 곧장 집으로 들어갔고, 경찰과 군대는 애써 마르코의 횡포를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다.
아무리 시민들을 지켜야 한다고는 하지만, 그들도 목숨이 소중하긴 마찬가지였다.
마르코가 한 번 눈이 돌면 얼마나 무섭고 흉악한지, 남미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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