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화 〉 23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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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하면 무조건 태양이 작열할 것만 같은 무더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카라카스의 날씨는 생각보다 훨씬 더 선선했다.
여행객 컨셉에 맞게 청바지에 가벼운 반팔만 입은 채, 등에 백팩을 하나 맨 민준은 볼리바르 공항에서 내려 마르코 빌딩으로 향했다.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니 너무 시선이 쏠려서 선글라스를 하나 낄까 하다가, 쓰나 마나 똑같을 것 같아서 민준은 신경을 꺼버렸다.
‘……이게 케이팝의 힘인가? 뭐, 마르코 조직원 놈들만 노났군.’
아마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감시자가 여럿 붙었을 테지만, 사람들이 죄다 쳐다보니 누가 조직원이고 누가 일반 시민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아직 딱히 해야 할 건 없었다. 굳이 꼽자면, 조직원들의 의심을 풀어주기 위해 루시와 통화하면서 약간은 멍청하게 헤헤 웃는 정도.
그렇게 사랑에 빠진 순진한 청년을 연기하다 보니, 어느새 마르코 빌딩 앞이었다.
“……와, 루시가 정말 여기에……”
마르코 그룹의 본사이자 남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더니, 가까이서는 꼭대기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사실 미국이나 서울에도 이 정도 높이의 건물이 꽤 있어서 그렇게까지 신기하지는 않았지만, 민준은 연기에 심취해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정문으로 들어갔다.
루시가 말한 대로 안내 데스크에 가장 위층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고 말하니, 엄격한 몸수색 절차가 이어졌다.
엑스레이에 금속탐지기는 기본이었고, 시큐리티 직원들이 직접 다가와 수상한 걸 챙겨온 건 아닌지 몸의 이곳저곳을 만져댔다.
그래도 생각보다 강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고, 과정 자체도 5분 안에 빠르게 끝이 났다.
뭐, 저 정도 장비와 인력으로, 사람 하나 수색하는 데 그 이상 걸리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여하튼 그렇게 몸수색 과정을 끝낸 민준은 길 안내를 해주는 시큐리티 직원들을 따라 최상층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물론 엘리베이터를 단번에 최상층으로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최상층으로 가는 방법은 생각보다 더 복잡했다.
일부러 돌아서 간다기보다는, 애초의 건물 설계 자체가 빙빙 돌아야만 위로 올라갈 수 있게끔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갈아타기 위해서는 나선형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야 했는데, 만약 계단 위쪽에서 마음먹고 총을 쏴대면 어떤 좋은 장비를 지닌 군대라도 버텨낼 재간이 없어 보였다.
또, 만약 몇 층을 어찌어찌 돌파하며 올라간다고 해도 내려올 때 역시 빙빙 돌아서 내려와야 했다. 그렇게 느릿느릿 내려오면 아래층에는 이미 마르코 카르텔의 정예 병력들이 깔려 있겠지.
‘……폭격기로 건물 자체를 날려버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겠는데?’
건물의 설계만 봤을 뿐인데도 민준은 마르코가 루시를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설계에 이 정도로 진심인 걸 보면, 아마 비상 상태가 발생했을 때 침입자를 막기 위한 방탄 차폐문이나 무시무시한 트랩 같은 것도 수십 개씩 설치되어 있겠지.
물론, 이러나저러나, 루시의 손님으로 온 지금은 프리패스였지만.
똑똑.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어, 응! 잠, 잠시만요!
올라오는 내내 건물이 신기하면서도 어색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민준은, 안에서 들려온 루시의 목소리에 가볍게 미소 지었다.
루시의 목소리에서, 첫 만남을 앞두고 잔뜩 긴장하고 있는 루시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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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급하게 미용사를 불러서 머리를 자르고, 옷을 고르느라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민준과 채팅치고 통화하면서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니까 금세 하루가 지나 있었고, 어느새 민준이 도착해 집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어, 응! 잠, 잠시만요!”
후다닥 문을 열기 위해 뛰쳐나가면서 루시는 문득, 경호팀과 아빠를 제외하면 민준이 이 방에 들어오는 첫 남자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자 아침부터 명상까지 해가며 겨우 진정시켜놓은 루시의 심장이 또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문고리를 쥐어 잡긴 했는데, 막상 열기가 두려웠다.
뭔가 잔뜩 꾸미기는 했는데, 직전까지 보고 있던 거울 속 루시는 평소와 그리 다를 게 없었다.
누구나 인정하는 얼굴과 몸매를 가진 엄마에 비하면 아직은 턱없이 부족한 외모.
특히, 엄마에 비하면 가슴과 골반이 빈약했다. 살이 찌면 좀 더 괜찮으련만……
저……아가씨?
“아, 네. 그……네. 잠, 잠시만요!”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멍하니 망상에 빠져버리다니.
아, 대체 민준을 얼마나 기다리게 한 거지.
“……으읏!”
더는 민준을 기다리게 할 수 없었던 루시는 눈을 꼭 감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돌려서 문을 열었다.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뒤로는, 정적이었다. 루시는 너무 떨려서 그대로 눈을 꼭 감고 있었고, 민준은 미소를 지으며 그런 루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미안! 민준,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돼서……”
“괜찮아. 편할 때 눈 떠. 나는 가만히 서서, 루시만 보고 있어도 재밌거든.”
“아, 아……그, 그래도 미, 미안해! 사, 사실은 이, 이렇게 놀러 온 친구가 처음이라……인사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엄청나게 고민했는데, 아, 아무 말도 생각이 안 나. 그, 그러니까…………”
“…………”
눈을 감은 채 말을 빠르게 뱉어내던 루시가 말을 멈추고, 바닥에 박아놨던 고개를 천천히 들면서 조심스럽게 덮여있던 눈꺼풀을 올려 들었다.
하얀색인데도 깔끔하게 관리된 운동화가 보이더니, 그 위로 바지가 한참 동안 이어지다 마침내 민준의 상체가 루시의 시야에 비쳤다.
꿀꺽.
모델 뺨치는 환상적인 기럭지도 충격이었지만, 진짜는 상체였다. 반팔이 아니라 겨울 코트로도 제대로 숨길 수 없을 것 같은 민준의 성난 상체 근육들과 광활하게 떡 벌어져 있는 어깨를 보자, 루시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동영상을 찍어 보내준 적이 있어서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보니 동영상 같은 거로는 민준의 비주얼을 담아낼 수 없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
“……푸흐.”
그리고 마침내 시원하게 웃고 있는 민준과 시선을 맞추자, 루시는 숨이 막혀와서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루시는 얼굴을 잔뜩 붉힌 채 동공 지진을 일으켰고, 민준은 그런 루시의 모습이 재밌다는 듯이 아예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민준의 웃음에 한층 더 당황한 루시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물과 기름처럼 몸과 마음이 따로 분리된 것만 같았고, 어떻게 통제할 새도 없이 루시의 입에서 뻔하디뻔한 인사가 나와버렸다.
빨리 민준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몸을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 아. 안녕……”
“응. 안녕. 루시, 만나서 반가워. 그리고 집으로 초대해줘서 고마워.”
“아, 아니야…… 나, 나도 민준이 와줘서 기뻐!”
“그래? 근데 루시 너 혹시……엄청난 기업의 상속녀야?”
“응……”
“아니. 건물이 아무리 봐도 신기해서. 이런 데서 살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아, 응. 비, 비슷한 거야……아빠가 돈이 좀 많으셔서……”
“역시. 그렇구나. 그럼, 여기가 전부 네 방이야? 구경해도 될까?”
“응? 당, 당연하지! 아, 짐부터 내려놓을래?”
매일 전 세계 사람들과 채팅만 하며 지낸 효과가 있는지, 한번 말을 트니까 루시는 민준과 꽤나 정상적으로 대화할 수 있었다.
루시는 운동장처럼 넓디넓은 거실 한편에다 민준의 가방을 내려놓게 하고, 방과 여러 시설을 돌면서 민준에게 집을 소개해줬다.
카라카스가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수영장은 물론, 헬스장에 소형 극장까지 있는 루시의 집은, 이미 집이라는 개념을 훌쩍 뛰어넘어 있었다.
비록, 루시가 침대와 컴퓨터가 있는 안방에만 틀어박혀 살아서 시설 대부분은 아무런 쓸모도 없었지만.
“음……여기는 책을 볼 수 있는 서재……같은 곳인데…………저, 민준……”
“응. 듣고 있어.”
“구, 구경시켜 달라고 했으면서……제, 제대로 구경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아……”
“구경하고 있잖아. 제대로.”
“아, 아니……나, 나 말고 집, 집을 구경해야지……”
“집도 구경하고 있어. 정말 엄청나다. 물론, 루시만큼은 절대 아니지만.”
“아, 아……아니……그, 그러니까……여기는……서, 서재……책을 볼 수 있는…………커, 커피 머신도 있고……”
루시의 얼굴은 거의 케첩이었다. 빨갛게 달아올라서 식을 줄을 몰랐고, 입으로는 무척이나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물론, 민준은 루시의 옆에 딱 붙어서서, 실실 웃으며 그런 루시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고.
꾸욱.
방해가 되지 않도록 여유롭게 간격을 두고 조용히 루시와 민준을 따라다니던 다니엘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분명 루시가 연애하는 것에 찬성하는 입장이었고, 굳이 연애가 아니라도 친구를 직접 만나 보는 경험이 히키코모리인 루시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다니엘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는 있지만, 도저히 참아내기가 힘들었다. 연애가 싸움이라고 치면 루시는 민준에게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고 있었다.
대충 날린 가벼운 잽에 몸이 날아가고, 어쩌다 조금 힘을 실어서 치면 그대로 K.O였다.
“다, 다음 방으로 갈까? 여, 여기는 다 본 것 같은데…………”
“아니, 좀 더 보고 싶어. 루시가 너무 예쁘네.”
“아, 아, 아하. 그, 그렇구나…… 하하하, 하하. 방, 방이 참 예쁘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빙글빙글빙글.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다니엘은 지금 루시의 눈이 빠르게 돌아가는 돌림판처럼 스핀하고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워낙 체급 차이가 커서 민준의 저런 쓰레기 같은 멘트에도 루시는 언제나 케이오였고, 다니엘은 무자비하게 맞고 있는 루시를 보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저놈의 요망한 혓바닥을 냅다 뽑아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루시에게 평생 원수로 찍힐 테니 지금은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약 루시의 마음을 저렇게 대놓고 흔들어놓고도 루시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직접 저놈을 찢어 죽이리라. 하고 다니엘은 굳게 맹세했다.
“여기가 루시가 평소에 지내는 방이야?”
“아, 응. 내 방인데……그 여기서는……”
루시가 뒤를 돌아서 다니엘에게 슬쩍 눈치를 줬고, 다니엘은 즉시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문 뒤에서 대기하겠습니다.”
감사의 뜻으로 다니엘에게 고개를 마주 숙인 루시가 민준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다니엘이 이렇게 쉽게 자리를 비켜준 것은 루시의 방에도 감시 카메라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루시는 자신의 방만큼은 카메라가 없다고 알고 있었지만,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가장 중요한 루시의 방에 카메라가 없다는 건 말이 되질 않았다.
그래도 평소에는 루시의 사생활을 위해 거의 들여다보지 않지만, 이런 경우에는 예외였다.
다니엘은 눈이 빠져라 감시 카메라의 화면을 보고 있을 부하들을 믿고, 조용히 문 뒤에서 섰다.
혹여라도 방 안에서 민준이 루시에게 키스라도 시도하는 순간, 곧바로 박차고 들어갈 수 있도록.
벌컥.
“……뭐지?”
그렇게 민준을 오체분시하는 상상을 하며 불편한 심기를 가라앉히고 있던 다니엘은,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느닷없이 민준 방안에서 튀어나오자 깜짝 놀라서 경계심을 곤두세웠다.
다니엘은 허리춤에 걸려 있는 권총 손을 갖다 댄 채, 민준을 향해 물었다.
최신식 소음 탄과 소음기가 장착되어 있긴 하지만, 루시가 근처에 있는데 어지간하면 총을 쏠 수는 없었다.
만약, 민준이 품에서 총을 꺼내는 순간에는 망설임 없이 격발해야겠지만.
“……화장실이라도 찾는 겁니까?”
“…………”
“…………대체 지금 뭐 하는 거지? 잠깐! 이봐!! 이런 미친 새끼!!”
다다다다.
민준은 다니엘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멀뚱히 서 있다가, 갑자기 맹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민준이 이런 정신 나간 짓을 할지 몰랐던 다니엘은 곧장 팀원들에게 무전을 하며 민준의 뒤를 쫓아 달렸다.
“지금 저 미친 새끼 하는 짓 봤어? 방 안에 있는 아가씨는 무사한 거야?”
네, 아가씨는 무사하십니다.
“씨발, 그나마 다행이군. 아가씨가 총소리를 싫어하시니, 다들 테이저건하고 곤봉만 챙겨서 따라와. 혹시 양동작전일지 모르니, 외부 경비 더 강화하고.
네, 팀장님.
칙, 치직.
무전을 마친 채 민준의 뒤를 따라 달리면서도, 다니엘은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민준이 대체 왜 이런 미친 짓을 벌이는 건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었다.
하물며 아가씨를 인질로 잡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방 안에서 뛰쳐나와 도망을 치다니.
‘설마 아가씨가 보스의 딸이라는 걸 눈치챘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도망가는 건 좀……’
현재로서 해볼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추측이라고 해봤자, 이 정도였다.
다니엘은 머리를 비우고 더욱 속도를 높여 달렸다. 민준의 다리는 성인 남성치고도 빠른 편이었지만, 루시를 지키기 위해 지옥 같은 트레이닝을 거쳐온 다니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육상선수처럼 재빠르게 달려간 다니엘은 권총 대신 테이저건을 꺼낸 뒤, 망설임 없이 민준의 등을 향해 격발했다.
푸슉.
“윽……”
맞추기 쉬운 장비는 아니었지만, 다니엘의 솜씨는 완벽했다. 고압 전류가 흐르는 테이저건에 맞은 민준은 그 자리에 쓰러졌고, 다니엘은 지니고 있던 케이블 타이로 쓰러져 있는 민준을 포박했다.
그리고 팀원들에게 무전을 치기 위해 무전기를 꺼내 드는데, 느닷없이 다니엘의 머리에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콰직!!
“커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