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화 〉 23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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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준은 조금은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풀어주면서, VVIP 전용 패스트트랙으로 가 입국 절차를 마쳤다.
양손에 승무원들이 챙겨준 요깃거리를 한가득 든 채 공항 밖으로 나가자, 바로 앞에 익숙한 리무진 한대가 멈춰 서 있었다. 미국에 처음 들렀을 때 애용했던 그 리무진이었다.
민준은 리무진에 몸을 실은 채, 우선 올리비아를 만나러 갔다. 그다음에는 아리아나를 만났고, 그 뒤로는 쥬얼리들과 만나 거하게 회포를 풀었다.
회포만 풀었는데도 어느새 저녁. 민준은 메이어 저택에 들러 제레미와 저녁 식사를 했다.
더 정확히는 친목 모임이나 간담회에 가까웠는데, 그 자리에는 제레미의 청으로 참석한 미국과 남미의 정·재계 최고위급 인사들이 함께했다.
명목은 최근 미국이 펼치고 있는 강력한 마약 소탕 작전으로 소원해진 미국과 남미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보겠다는 것이었는데, 사실 명목은 말 그대로 명목일 뿐이었다. 미국을 쥐고 흔드는 영향력을 지닌 슈퍼 휴먼 제레미가 부르는데 감히 오지 않을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여하튼 민준은 천연 잔디 위에 깔린 음식들로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하며, 제레미에게 했던 대로 저녁 식사에 참석한 모두에게 환술을 걸어버렸다.
환술은 무척이나 비싼 기술이었지만, 저들의 가치가 워낙 높은 데다, 이제는 거의 백만을 바라보고 있는 열렬한 신도들 덕분에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민준이 작업을 마치고 레이너에게 연락을 하자, 레이너를 비롯해 국경 부근에서 미리 주둔하던 베테랑 용병대원들이 즉시 베네수엘라를 향해 은밀히 진군했다.
카라카스나 마르코가 숨어있는 은신처로 향하는 건 아니었고, 그들이 향하는 곳은 카라카스에서 약간은 떨어진, 카리브해에 위치한 외딴 섬이었다.
민준은 레이너에게 실시간으로 작전 상황을 보고 받으며, 식사 중에도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비단, 레이너의 보고 때문은 아니었다.
민준은 행정적인 문제만 아니라면 베네수엘라 전체를 혼돈에 빠트리는 것도 쉽게 가능하다는 레이너의 말을 신용하고 있었다. 값비싼 환술을 미친 듯이 써가며 행정적인 문제를 해결해줬으니, 앞으로는 레이너가 알아서 잘하겠지.
띠리리링. 띠리리링.
민준은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열심히 작성하다 말고, 느닷없이 전화를 걸었다.
하염없이 연결음만 계속 울릴 뿐이었지만 민준은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자동응답 단계로 넘어가기 바로 직전에,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연결됐다.
…………
“여보세요? 루시……맞아?”
…………
“루시…… 음, 이 번호가 아닌가……”
맞, 맞아. 나 루, 루시 맞아…… 안, 안녕 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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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세계 최고이자 최악의 카르텔을 이끄는 SSS 급 범죄자라는 걸, 언제 깨달았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다만, 아주 어렸을 때였다는 것과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탕. 탕탕.
느닷없이 울린 총소리가 미친 듯이 무서워서, 루시는 살기 위해 침대 밑으로 들어가 숨었다.
루시는 끔찍하기 그지없는 총소리를 듣기 싫어서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소리가 새어 나올까 봐 숨까지 꾹꾹 참아가며 침대 밑에서 버티고 또 버텼다.
아마 아주 오랫동안. 실제로 얼마나 버텼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그 순간에는, 일 초가 한 시간처럼 느껴졌으니까.
루시, 내 딸. 어디 있느냐? 아빠야, 아빠가 왔다!
아빠구나! 아빠가 날 구하러 와주신 거야!
루시는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귀를 틀어막고 있던 손으로 바닥을 기어서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장 아빠에게 달려가려던 루시는, 온몸이 피범벅이 된 채 총을 들고 있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는 우뚝 멈춰 섰다.
아니, 그깟 피 칠갑보다 훨씬 더 무서운 건, 은은한 달빛을 받아 흉흉하게 빛나고 있는 악마 같은 아빠의 눈빛이었다. 끔찍하고, 무서웠다. 평소의 아빠랑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총격전을 벌인 뒤 곧장 딸의 방으로 달려온 터라 마르코는 살기를 가라앉힐 새가 없었고, 지독한 살기를 뿌려대는 마르코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루시는 그대로 기절했다.
루시! 루시!!
희미해져 가는 정신 속에서 루시는 마르코가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평소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아빠의 목소리를 들으면 언제나 가슴이 뭉클하고 따듯했는데, 그 순간에는 한없이 불길할 뿐이었다. 어릴 때였지만, 루시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 내가 아는 아빠의 모습이, 아빠의 전부는 아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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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음, 이 번호가 아닌가……
“맞, 맞아. 나 루, 루시 맞아…… 안, 안녕 민준……”
방구석에 누워 민준과 채팅을 하며 실실거리던 루시는, 갑자기 걸려 온 전화에 몹시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해서 고민 끝에 알려줬는데, 이렇게 곧바로 전화를 걸어버릴 줄이야.
더군다나 미성에 가까우면서도 너무 얇지 않은 민준의 목소리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감미로웠다.
채팅으로만 대화할 때도 충분히 과도하게 설렜는데, 목소리를 직접 들으니까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본인도 아직 잘 몰랐지만, 루시는 완벽하게 사랑에 빠져있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첫사랑에.
아, 루시! 혹시 내가 너무 뜬금없이 전화 걸어서 불편했어?
“응? 아, 아니야! 불, 불편한 게 아니라…………음…………그, 그러니까…………”
미안. 그래도 루시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싶었거든. 그리고 들으니까 너무 좋다. 응, 역시 전화 걸기를 잘한 것 같아. 루시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아름다워.
“아, 아…………”
루시는 민준의 목소리도 대단히 좋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잠금장치가 걸려있기라도 한 것인지 입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금붕어처럼 뻐끔댈 뿐이었다.
심장이 레이스를 하는 것처럼 날뛰고,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머리가 핑핑 돌았다.
“아, 아으. 그…………미, 미국 여행은 즐거워? 불, 불편한 건 없고?”
루시는 말을 뱉어놓고도 자기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엄마도 아니고, 내가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분명, 목소리가 좋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응, 걱정하지 마. 너무 재밌어. 사실…………루시랑 채팅하는 것 때문에 어딜 둘러봤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긴 하지만. 하하.
“아, 아, 그렇구나…………그, 그래도 여행 온건에…………관, 관광은 중요하니까……”
그럼. 근데 어쩌지 루시. 나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오네. 그래서 그냥, 널 보러 가려고.
“뭐…… 뭐, 뭐…?”
어차피 미국이랑 베네수엘라랑 가깝잖아. 이미 카라카스행 티켓도 끊어놨어.
“아, 아니……언, 언젠데? 언제 오는 건데?!”
내일. 내일 만나러 갈게. 아……감사합니다. 미안, 루시 나 지금 저녁 먹고 있어서. 있다가 다시 전화 걸게.
“응? 아? 어……”
뚝.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민준의 전화는 끊겨있었다.
루시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방구석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아악!!! 어, 어떻게!!!”
“무슨 일이십니까!!”
루시가 소리를 지르자마자,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영화에 나오는 특수 부대처럼 완벽히 무장한 경호팀이 우르르 루시의 방으로 들어왔다.
루시는 그 모습을 보며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안색을 가다듬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작은 벌, 벌레를 본 것 같아서…………”
“예? 벌레요? 아가씨도 아시겠지만, 이 건물에 벌레 같은 게 있을 리가…………”
“아, 아. 그, 그게…………본 것 같은데……아마 헛것을 봤나 봐요. 미안해요.”
“음……”
마르코가 가장 아끼는 부하 중 한 명이자, 경호팀의 팀장인 남자가 루시를 보며 안색을 굳혔다.
굳을 표정으로 루시를 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팀장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가씨.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지나치게 방에만 계셔서 병세가 조금 악화된 것 같습니다. 저희가 루트를 확보해 볼 테니, 내일은 건물 밖으로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보시는 건…………”
“아, 아니에요! 정, 정말 괜찮으니까……”
루시는 손사래를 쳤다. 어렸을 때부터 삼엄한 경비 속에서 살아온 루시는, 자신이 산책 한번 하기 위해서 저들이 얼마나 고생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방에 틀어박혀 온라인 채팅만 하며 살게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루시는 자신 때문에 경호팀들이 고생하는 게 너무나 싫었지만, 그렇다고 경호팀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폭탄 테러라든지 인질극 따위가, 루시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그러니 루시는,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더더욱 새장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카라카스뿐 아니라 남미에서 가장 높은, 마르코 빌딩의 최상층.
지면에 진동하고 있는 마르코 카르텔의 악명과는 완전히 단절된, 세상에서 가장 넓고 높은 새장이, 루시가 가진 세상의 전부였다.
“괜히 저 때문에 여러분들이 고생하는 건, 제가 싫다고…………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절대 고생이 아닙니다! 아가씨를 지키는 게 저희 임무이자 사명이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저도 몇 번이나 말씀드렸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보스께서도 아가씨가 방에만 머물지 말고 종종 산책을 하거나, 또래 여자들처럼 남자친구를 사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그, 그만! 어쨌든 산책은 필요 없으니까…………”
루시는 팀장에게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잔소리를 퍼붓는 팀장의 말을 끊고 산책은 필요 없다고 말하려는데, 팀장이 말한 ‘남자친구’라는 단어가 루시의 가슴에 툭. 하고 걸렸다.
아, 맞아. 민준. 민준이 내일 카라카스로 오기로 했는데.
“음,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저, 저 팀장님…………그럼 혹, 혹시 내일 나가서 친구 딱 한 명만 만나도 될까요?”
“네? 친구요? 외람되지만, 아가씨께는 친구가 한 명도…………”
“……온라인 채팅으로 만났어요. 평소에 제가 뭐 하는지 잘 아시잖아요.”
“……죄송하지만, 채팅을 통한 만남은 허락해 드릴 수 없습니다. 저희가 최소한의 신원을 확인할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그, 그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 아니에요! 한, 한국인이고 미국 여행 준비하려고 채팅 어플을 깔았다가 우연히 저랑 매칭돼서 친해진 건데…… 랜덤으로 매칭되는 시스템인데 저를 의도적으로 노렸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도 안 됩니다. 아가씨. 채팅만 아니라면, 카라카스의 거주하는 그 누구도 괜찮습니다. 부디 생각을 바꿔주세요.”
“으, 아으, 진짜 이, 이익……!”
루시는 무척이나 분하다는 눈으로 팀장을 째려봤다. 마음 같아서는 좀팽이라던가 앞뒤 꽉꽉 막힌 과보호 중독자라고 말해버리고 싶었지만, 평소 팀장이 자신을 위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고 있는 루시는 차마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민준을 만나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어, 어떻게든 한 번만…………딱 5분이라도 좋으니까…………”
“안 됩니다. 아가씨 경호에 대한 전권은 온전히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설령 보스께서 허락하신다고 해도, 제가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이미 티켓까지 끊었다고 그랬는데 어, 어떻게…………”
“…………”
루시는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렸지만, 팀장의 태도는 단호했다.
빨개진 눈시울로 팀장을 째려보던 루시는, 팀장의 단호한 기세에 점점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다 문득, 루시는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마치 벼락처럼, 기가 막힌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그럼, 여기로 오라고 하는 것도 안 돼요?! 마르코 빌딩에서 만나서 노는 건 괜찮잖아요!”
“…………음.”
“몸수색만 제대로 하면 아무 일도 없을 거 아니에요! 무슨 일 있으면 어차피 팀장님이 곧바로 달려와서 지켜주실 테고!”
“확실히…………밖에서 만나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하겠군요.”
“아빠한테는 제가 허락받을게요. 네? 안될까요? 네, 네?”
“보스의 허락만 있다면…………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빌딩 안에서 혼자 뭘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어…… 된다는 거죠? 다니엘 아저씨, 나중에 말 바꾸면 안 돼요?! 절대, 절대 안 돼요?!”
“크흠. 알겠습니다. 아가씨.”
다니엘은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다니엘 아저씨’라는 루시의 말에 조금 당황해 헛기침을 하면서, 루시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다니엘은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최근 한국에서 작전을 펼치던 조직원들에게서 연락이 끊겼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마침 루시를 만나러 오는 채팅남의 국적이 한국이라니.
영 마음이 불안했지만, 그래도 다니엘은 이런 사소한 이유로 저렇게 신나 하는 루시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정확히는 루시가 다섯 살 때 적대 세력이 마르코의 집을 습격한 그 날부터, 루시는 정신과 약을 달고 살았다.
특히 마르코 카르텔의 악행이 뉴스에 보도되는 날이면 증세가 더 심해졌고, 혹여 총소리라도 들리면 루시는 곧바로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가 벌벌 떨어댔다.
결국, 마르코는 피눈물을 머금은 채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루시를 비교적 치안이 괜찮은 카라카스로 보낼 수밖에 없었고, 루시는 그날부터 조금씩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직 우울증과 트라우마를 완전히 이겨내지 못해서 약을 복용하고 있지만, 해골 같던 몸에 살도 제법 올라서 이제는 어엿한 숙녀로 보일 정도였다.
이렇게 상태가 호전되고 있을 때, 이성 친구와 만나 좋은 경험을 하는 것도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우울한 마음을 치유하는데 사랑만큼 좋은 약은 없으니까.
물론, 그 기억이 좋은 쪽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남는다면 최악이겠지만, 다니엘은 그렇게 놔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겁도 없이 루시를 찾아오고 있다는 그 한국 놈을 납치해 철저히 정신교육을 시켜서라도, 루시에게 좋은 기억만을 남기게 할 생각이었다.
“응! 아빠, 나야! 응, 나도 보고 싶어. 근데 아빠, 사실 있잖아……”
“…………”
다니엘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신이 나서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재잘대고 있는 루시를 지켜봤다.
하지만 다니엘의 머릿속에서는, 루시가 알면 절대 안 되는 끔찍한 상상들이, 1초에도 수십 번씩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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