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화 〉 224화
* * *
현주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 어린 새끼가 대체 무슨 망발을 내뱉은 거지. 이게 정말 현실 이긴 한걸까.
아무리 곱씹어봐도 잘못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민준은 특별할 것 없는 단조로운 어투로, 아주 정중하게 국회의원을 협박하고 있었다.
이쯤 되니, 현주는 무서워졌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미친 사람이었다. 아마도 민준이 그런 사람인 것 같았다.
현경에게서 하루빨리 민준을 떼어내야 했다. 저런 미친놈하고 상종하는 것 자체가 현경에게 마이너스였다.
“……후우. 민준 군. 알겠으니까 앞으로는 현경이에게서 떨어지세요. 돈은 제 보좌관이 불렀던 그 두 배로 드리죠. 대신, 앞으로 한 번만 더 현경이 근처에서 알짱댔다가는……”
“짖어봐요. 현주 씨. 그 고운 목소리로, 왈왈 짖는 거 한번 들어보고 싶네요.”
“……너 진짜 쥐도 새도 모르게 묻히고 싶어서 환장했니…? 나한테 너 하나쯤 묻어버릴 힘이 없을 것 같아?”
“선거 한번 할 때마다 황석대한테만 30억씩 긁어가는 양반인데, 뭐 그 정도 힘이야 있겠죠.”
“……”
민준을 향해 진노를 뿜어내던 현주의 움직임이 뚝. 하고 멈췄다. 마치 현주의 주변 공간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러다가 삼선 할 때부터는 손을 싹 터셨더라고요. 현경이 아버지, 그러니까 재벌가 장남에게 시집간 뒤부터는 그런 더러운 돈에 손댈 필요가 없어서겠죠.”
“……”
“제가 기사 좀 찾아보다 왔거든요? 만 25살에 최연소 국회의원 달고 나서는, 여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순위에서 쭉 상위권을 하시더라고요. 이제는 거의 1등을 놓치지 않고 있고……깨끗하고 이지적이고 일도 잘한다고 칭찬이 자자하대요? 아주 뭐, 이미지 관리를 수준급으로 잘해놓으셔서 깜짝 놀랐어요. 심지어 몇몇 기사에서는 대통령감이다 그러던데……사람들이 현주 씨가 존나게 더러운 돈으로 정치계에서 날뛰고 다녔다는 걸 알게 되면, 꽤나 곤란하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쌓아놓은 이미지가 있는데.”
“……”
쓰읍.
현주는 대답을 잠깐 미룬 채, 앞에 놓여 있던 최고급 녹차를 한입 들이켰다.
씁쓸한 향이 혀에 착 감겨서 목젖을 타고 천천히 넘어왔다. 그제야 민준에게 한방 크게 얻어맞아서 얼얼해진 정신이 조금 괜찮아졌다.
아마 어렸을 때라면 어쩔 줄 모르고 어버버 거렸겠지만, 지금의 유현주는 이미 너무 많은 걸 경험하고, 너무 많이 타락한 뒤였다.
현주는 일부러 조금 오랫동안 차의 맛을 음미하면서 민준에게서 뺏겼던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온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민준과 당당히 시선을 마주한 채, 조금도 버벅거리지 않는 매끄럽고 정확한 어투로.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날조야. 감히 그런 거짓 정보로 국회의원을 협박하다니, 너 정말 정신이 나간 놈이구나. 그리고 설령 네가 말한 게 진실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절대로 너의 말을 믿지 않을 거야. 아니, 그 전에 기사로 내보내지도 못하고 어디 야산에 묻혀버릴지도 모르지. 황석대, 그놈은 확실히 더러운 놈이거든. 손해 보는 걸 죽도록 싫어해서, 사람 죽여서 입막음하는 것 따위야 밥 먹듯이 하는 위인이라고……응, 그런 소문을 들었었지 아마?”
“녹음 따위 안 하니까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그리고 제 안부는 걱정하지 마세요. 석대는 이미 제가 잘 관리하고 있거든요.”
“……뭐라고?”
“석대는 제가 잘 관리하고 있다고요. 제가 이런 고급 정보를 어디에서 얻었겠어요. 그리고 현주 씨 말고도 전부 다 알고 있어요. 석대가 지가 똥꼬 닦아준 사람들 이름 하나는 확실하게 기억하더라고요. 말씀하신 대로 손해 보는 걸 싫어해서 그런가.”
“……뭐, 좋아. 믿기 힘들지만 다 사실이라고 치자. 근데, 그래서? 네가 그런 걸 알고 있다고 뭐라도 할 수 있을까? 그게 목줄이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만, 그것도 목줄을 쥘만한 힘이 있는 사람한테나 해당하는 말이지. 너 같은 게 목줄을 손에 쥐었다고 설쳐대봤자, 사나운 개들한테 물려서 금방 죽을 거야. 그러니까 소리소문없이 인생 마감하고 싶으면, 알아서 해. 언론사에 뿌리든, 인터넷에 뿌리든.”
“워워. 너무 그렇게 공격적으로 나오지 마세요. 무서워지려고 하잖아요.”
“나는 현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야. 대한민국에 같이 산다고 해서, 감히 네가 건드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야. 나를 포함해서 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말이지. 그랬다면 그 모든 걸 알고 있는 황석대가 진즉에 너같이 설치고 다녔겠지. 뭐, 황석대는 너랑은 다르게 알아서 잘 엎드리니까 그렇게 오랫동안 목이 붙어있었던 거고.”
“그러면 여기서 퀴즈. 의원님, 제 신상 몰래 캐보셨죠? 그래서 그런데, 의원님은 제가 어떤 사람 같아요? 아니, 어디에 앉아있는 사람 같아요?
“……”
쓰읍.
조금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현주는 여지없이 여유로운 동작으로 녹차를 들이켰다. 잔을 들어 녹차의 맛을 느끼고, 다시 테이블에 잔을 올려놓을 때까지는 온전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확실히, 이 부분이 자꾸 마음에 걸려.’
너무나 평범한 20살 청년. 그게 민준의 신상을 캐왔던 보좌관의 보고였다.
파파라치를 붙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국민 개개인의 정보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탄탄한 대한민국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앉아서도 그 사람의 삶의 발자취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알아낸 민준에 대한 정보와 지금 현주의 눈앞에 있는 실제 김민준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존재했다.
애초에 평범한 청년이 황석대에 대해서 알 리도 없었고, 석대의 로비 내역에 대해서 알 리는 더더욱 없었다. 설령 어찌어찌 알게 됐다고 해도, 그걸로 현역 국회의원을 협박한다는 건 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민준을 평범한 청년이라고 칭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즉, 민준에 대한 사전 정보는 완전히 엉터리였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두 가지.
보좌관이 일을 병신같이 했거나, 정보가 조작되었거나.
하지만 현주는 자신의 보좌관을 무척이나 신뢰했다. 그는 매우 유능한 사람이었다. 애초에 부려먹을 수 있는 사람 중에 가장 유능했기에 그를 보좌관으로 써먹고 있었다. 그러니까, 보좌관이 실수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그러니, 정보가 조작됐다라……일개 20대 청년이 그런 게 가능한가? 절대 아니지.’
어떤 병원에서 태어나, 어떤 년도에 어디에 거주했으며, 학교에 다닐 땐 어떤 성격이었고 어떤 과목에 우수했으며,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며, 어떤 장래 희망을 품고 있었는지. 전과는 있는지 없는지, 회사에 다니는지 안 다니는지.
데이터베이스만 뒤져보면 민준 대한 이런 시시콜콜한 것 하나까지 전부 다 알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시시콜콜한 것까지 전부 적어서 기록되는 시스템을 조작하고 속인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웠다. 웬만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절대 아니었다.
‘뒷배가 있거나……아니면 정말로 자신이 있거나.’
결론을 내린 현주가 찻잔을 내려놨다. 생각의 과정은 길었지만, 실제로 지나간 시간은 5초 남짓이었다.
현주는 민준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지만, 그렇기에 민준을 더 업신여기고, 무시할 생각이었다.
실제로 만나본 민준은 거만하고 혈기가 왕성한 타입. 이런 성격일수록, 조금만 신경 쓰면 대화를 통해 정보를 캐내기가 쉬웠다.
“뭐. 믿는 구석이야 있겠지. 그걸 부정하지 않아. 근데, 그래서? 우리나라에 내 목줄을 안전하게 쥘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 것 같은데? 네가 그 안에 들어갈 확률은 극히 낮아. 그러니까 그만 까불고……”
“글쎄요. 궁금하긴 하네요. 일성 정도면 의원님의 목줄을 쥘 수 있을까요?”
“……일성을 거들먹거린다고, 일성을 움직일 힘이 생기는 건 아니란다. 애송아.”
“음……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아, 제가 신기한 거 하나 보여드릴까요?”
민준이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조용히 핸드폰에 고개를 박고 무언가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아, 찾았다. 이거, 한 번 보세요. 누군지 아시겠어요?”
민준이 현주 쪽으로 액정을 돌린 다음,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아응, 아앙! 조아, 조아아앗! 아읏, 끄윽!! 하읏, 그, 그만!! 주, 주인니임!!
스피커에서 듣고만 있어도 볼이 빨개진 말한 색정적인 정사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소리에 걸맞게 액정에서는 살 색만이 가득했다.
현주는 눈살을 크게 찌푸렸지만 일단은 영상에 집중했고, 곧 현주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이 커다래졌다.
민준에게 깔려서 창녀처럼 천박한 신음을 내뱉고 있는 게, 일성의 금지옥엽 이세아라니. 설마, 말도 안 돼.
거짓말. 이건 거짓말이야. 무조건 거짓말이어야 해.
“……장난도 정도가 있어. 내가 이런 애들 장난 같은 걸 믿을 것 같아?”
“아니, 뭐. 안 믿으면 어쩔 수 없고요. 제발 믿어달라고 빌어야 하는 처지도 아닌데, 안 믿는다는 사람 계속 설득할 생각도 없고요.”
“……”
“그런데요, 의원님. 우리 가정을 한번 해봅시다. 만약 제가 일성을 움직이면, 앉아계신 그 높은 자리에서 의원님을 추락시키는 건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하, 웃기는 새끼. 아무리 일성이라도, 내가 그렇게 쉽게 무너질 것 같아?”
“오, 자신감 좋네요. 그럼 이건 어때요? 내년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죠? 일성을 통해서 의원님 지역구를 노리는 상대 후보를 강력히 지지해주고, 석대가 써놓은 장부까지 넘겨주면 어떨까요? 의원님은 그런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과연 4선을 하실 수 있을까요?”
“……절대 네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그전에 내가 널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릴 테니까.”
마침내 완전히 살벌해진 현주의 눈동자가 민준의 온몸을 찢어발겼다. 예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의 유현주는 야망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대한민국의 정상이 목표였고, 그 길을 향해 필요한 모든 걸 차근차근 쌓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길을 막는 것들은, 어떤 수를 써서든 가차 없이 제거하고 있었다. 민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의원님은 아무것도 모른다니까요? 제가 당신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데, 어떻게 당신이 저를 묻을 수 있겠어요. 꿈이 큰 건 좋긴 한데, 너무 깝치는 건 좋지 않아요. 수그릴 땐 수그릴 줄 알아야지.”
“내가 너 같은 놈한테 수그려야 한다는……설마 그런 개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그래야죠. 대한민국 대통령이 꿈이라고, 인터뷰에서 매번 말씀하시잖아요. 어쩌면 그 꿈, 제가 이뤄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민준은 말을 끝내고 곧장 휴대폰 꺼내 들어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들어와.”
마치 노예에게 명령하는 듯한 거만한 말투였고, 민준이 말을 마치자마자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가 없어서 현주는 일단 상황을 지켜봤다. 하지만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도 이제는 한계였다.
“………대표님?”
현주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도 그럴 게, 민준에게 전화를 받고 들어온 사람이 바로 지금 제1야당의 당 대표였다. 즉, 현주가 소속된 당의 우두머리이자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거인 중 한 명이었다.
현주가 놀라거나 말거나 민준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너무 깜짝 놀라서 완전히 얼어버린 현주를 본 채 말했다.
“……인사해요. 서로 구면일 텐데.”
“……지금 이게……무슨……”
“내가 목줄을 꽉 잡고 있는 개새끼 중 한 명인데, 현주 씨랑은 다르게 말을 참 잘 들어요. 한번 보여줄까요?”
민준이 현주에게서 시선을 돌려 당 대표를 바라봤다. 그러자 당 대표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벌벌 떨렸다.
“앉아. 일어서. 앉아. 일어서.”
민준이 당 대표를 보며 말했고, 당 대표는 민준이 시키는 대로 앉았다가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구제 불능 약쟁이 아들은 둔 데다가 워낙 더러운 짓거리를 많이 한 놈이라 사람 취급도 아까웠다. 석대의 접대 노트에 접힌 바에 의하면, 이놈 때문에 자살한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접대하러 나온 여자들을 죽기 진전까지 폭행하고 약에 취하게 만들어서 따먹는 게 취미였는데, 심지어 미성년자를 선호해서 중학생까지 건들고 다니는 진퉁 또라이였다. 심지어 그 더러운 황석대가 껄끄러워했을 정도니 말은 다 한 셈이었다.
그래서 민준은 단 한 줌의 동정심도 없이 당 대표를 완전한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민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거나, 반항하려는 생각을 품는 순간 당 대표는 죽는 것보다 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게 되는 세뇌에 걸린 상태였다.
그러니 필사적으로 민준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미, 미친. 대, 대표님. 이게 대체……”
“현주 씨, 이제 제 위치를 좀 알겠어요?”
“……대체, 저한테……원하시는 게 뭐죠……?”
한순간에 말투부터 아예 달라진 현주를 보며 민준은 피식 웃고는, 현주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민준은 무척이나 여유로웠지만, 현주는 그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오그라드는 긴장감을 느꼈다.
권력을 쥐고 나서는 완전히 잊고 살았던, 다른 이에게 잡아 먹힐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등골을 타고 온몸을 지배했다.
민준이 찻잔을 내려놓은 채, 굳어 있는 현주를 보며 입을 열었다.
“……술은 좀 마셔요? 아나운서였으면 회식 같은 것도 많이 하고 그랬을 텐데.”
“……못 마시는 편은 아닙니다.”
“그럼 제가 아는 곳으로 가죠. 술 한잔하면서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해서 진한 얘기를 좀 나눠 보자고요. 어때요?”
“………”
현주가 대답 없이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민준은 현주가 무슨 짓을 하려나 가만히 지켜보다가, 조금 짙은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이 정도 눈치와 판단력이 있으니까, 3선 국회의원이 될 수 있던 거겠지.
“오늘 일정 전부 캔슬시켜. 이유는 적당히 둘러대고, 오늘 하루는 너도 연락도 하지 마. 아주……아주 중요한 분과……술자리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