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화 〉 209화
* * *
화가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하도 기가 차서 어이가 없을 뿐.
오냐오냐 좀 해주니까 대드는 꼴이, 거의 미친놈 수준이었다.
다른 남자들과 조금은 다를 줄 알았건만, 결국 이 정도.
세아는 소파 위에 올려놨던 명품 클러치 백을 집어 들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론 김민준의 가치는 몸을 던져서라도 먹음직했지만, 딱 거기까지.
세아는 마음이 안내키는 일은 할 생각이 없었다. 할 필요도 없었고.
“나는 가는 여자 안 잡아. 그런데…이 전무님이 지금 그렇게 가버리면, 다시는 나랑 같은 위치에 설 일은 없을 거야. 내 밭이나 핥으면 몰라도 말이지.”
“……어이가 없네. 수준 떨어지는 새끼.”
“그쪽에서 먼저 더러운 수작 부려놓고 나한테 수준 운운하는 거, 진짜 치사한 짓인 거 알아요? 뭐, 앞으로는 나도 만만치 않게 더럽게 할 생각이니까, 사과는 됐어요.”
“하. 야, 졸부.”
우뚝.
갑판을 또각또각 걸어가던 이세아의 몸이 딱 멈췄다. 그리고 민준은 돌아본 세아가, 한겨울 남극의 기온보다 더 싸늘하게 느껴지는 살벌한 기운을 쏟아내며 민준에게 말했다.
“성공 한 번에 너무 기고만장하지 마. 역겨우니까. 당신 같은 졸부 짓밟는 거, 일성이 나서면 순식간이라는 거 몰라? 내가 적당히 놀아주니까, 많이 우스워 보였나 봐?”
“음. 여태 혼자서 날뛰다가 넘어지니까, 이제 와서 가문 찬스? 큭. 다른 재벌 꼴통들과는 조금 다른 줄 알았는데, 이 전무님도 결국은 똑같군요. 세상을 대체 어떻게 살았으면, 성인이 되어서도 그런 애새끼 같은 모습이 남아있는 걸까요. 정말 멋지네요.”
“미친놈. 멋대로 떠들어. 너야말로 곧 짓밟혀서, 내 신발 밑창이나 핥게 될 거니까.”
“아니요. 짓밟히는 건, 이 전무님이 될 거예요. 그리고 이건 그 증거.”
툭.
연미복의 안주머니를 뒤적이던 민준이, 세아의 발밑에 곱게 포장된 서류 봉투 하나를 툭 던졌다.
겨우 민준 때문에 허리를 숙이고 싶지 않았던 세아는 코웃음을 치며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이어진 민준의 말에 세아의 몸이 딱 굳어버렸다.
“저는 한물간 거로 알고 있었는데, 아직도 스위스 비밀 계좌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는 게 놀랍더군요. 천하의 이 전무님도 계좌를 뚫어내기 쉽지 않았는지, 돈도 거의 몰빵해놨던 것 같고……아무튼,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무슨……엿 같은 소리야…”
“전무님이 스위스 지부에 심어놓은, 일성 패션 스위스 부지사장.”
그 누구에게서도 언급되어서는 안 될 사람의 이름이, 민준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세아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까지 떨어졌다.
세아는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를 것만 같아서 이를 꽉 물었다. 어떤 공포영화보다도, 지금 이 상황이 훨씬 더 무서워서 온몸에 닭살이 돋아났다.
“……”
“그 사람이, 전무님 비밀 계좌 관리해주는 금고지기잖아요……이야~ 아무리 큰돈을 만진다지만, 그렇게 삼엄하게 감시하면 사람이 숨을 못 쉬어요, 숨을. 아내나 딸들도 전부 인질로 잡혀 있으니 그 꼴이 얼마나 불쌍하던지……그래서 제가 선심 좀 썼죠. 물론, 대가는 조금 컸지만.”
“……”
멈춰있는 것처럼 굳어있는 세아의 몸이, 조금씩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내 세아는 다급하게 허리를 숙여서, 바닥에 있는 서류 봉투를 주워들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저 봉투 안에 어떤 게 들어있을지 걱정돼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뒤집어보니 봉투를 밀봉하고 있는 부분에는, 세아가 알고 있는 문양이 뚜렷하게 찍혀있었다.
언뜻 엉성해 보이지만 스위스의 국기를 닮아있는 그 문양은, 세아가 비밀 계좌를 개설한 바로 그 은행을 상징하는 문양이 맞았다.
찌이이익.
문양을 확인하자마자 눈알이 돌아버린 세아는 다급하게 봉투의 윗부분을 찢어버렸다. 그리고 안에 있는 문서를 허겁지겁 꺼내 들어서 확인한 세아가, 갑판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서류를 확인하자마자 신경 다발이 모조리 투두둑 끊겨버려서 몸의 어느 부위도 똑바로 말을 듣지 않았다.
하늘이 빙글빙글 돌고, 속이 울렁거려서 금방이라도 구역질을 할 것만 같았다.
서류의 맨 밑부분, 잔고를 나타내는 그 자리에는 숫자 ‘0’이 적혀 있었다.
세아가 머리를 쥐어짜 내며 온갖 더러운 방식까지 모조리 동원해 저축해둔 비자금이자 곧 있을 상속 전쟁을 위한 귀중한 탄환들이었는데, 그게 단 한 순간에 증발해버렸다.
찌이이이익.
도화지가 쭉 찢기듯이, 세아가 그리고 있던 모든 그림이 단번에 망가져 버렸다.
“…이 전무님이 수완이 좋긴 좋아. 아무리 재벌이라지만, 그 나이에 5천억을 넘게 모으다니. 회사에서 대체 얼마나 빼돌린 거예요? 그렇게 작업 치면서 구멍 난 거 다 뒤집어씌우려고, 명성을 먹으려고 하는 거죠? 진짜 머리가 좋긴 좋다니까? 뭐, 이제는 거지지만.”
“……닥쳐. 너……내가 반드시, 반드시……무슨 수를 써서든 죽여버릴 거니까……미친 새끼……개새끼……”
“아, 죽인다고 하니까 생각난 건데, 이 전무님이 스위스에 붙여놨던 용병들을 탓하진 마세요. 아무리 항복을 권유해도 죽을 때까지 격렬하게 저항했다는데, 그 사람들을 할 만큼 한 거니까.”
살벌한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민준을 보며, 세아가 몸을 작게 떨었다.
다른 사람이 저런 말을 했다면 허풍이라고도 여겨주기도 우스웠을 텐데, 눈앞에 놓여있는 서류 하나가 민준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걸 너무나 또렷하게 증명해주고 있었다.
무려 5천억짜리 계좌였다. 지키기 위해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용병단과 이중으로 계약으로 맺고, 금고지기를 감시하며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런 보고가 없었다는 건, 민준이 말한 대로 용병들이 모두 죽었다는 뜻이었다. 아니, 용병들이 소속된 본사까지도 손을 쓴 게 아니라면 이렇게 조용할 수는 없었다.
그 짧은 시간 대체 어떤 일들을 벌인 건지. 세아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너 대체……정체가 뭐야……?”
“글쎄요, 그게 중요해요? 지금 전무님이 얼마나 엿 같은 상황에 놓였는지 고민하기도 바쁠 것 같은데……자꾸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주시네요.”
“……너 같은 새끼한테 내가 뭘 해주기를 바라는데? 하. 차라리 나도 죽여. 네 마음대로 해줄 생각은……전혀 없으니까.”
돈을 모두 잃고 희망이 무너져 내렸지만, 세아는 오히려 더 독해졌다.
어차피 그 돈이 없으면, 세아의 인생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플레이어가 아니라, 장기판 위의 기물로써 사는 인생.
적당히 쓸만한 일성의 간판이자, 적당히 쓸모있는 정략결혼의 재물.
그런 운명에 단 일 초라도 순응하며 살다간, 지루해서 죽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지금 민준의 손에 죽어도 전혀 잃을 게 없었다.
“누굴 죽이고, 그런 사람 아니에요. 저는 착하다고요. 이 모든 게 전무님이 너무 까불어서 벌어진 일이라는 거. 몇 번이나 더 알려드려야 해요?”
“……”
“그래도 빠르게 태세 전환하고, 미인계를 썼던 건 칭찬해주고 싶네요. 사실은 전무님 향기 때문에 저 미치는 줄 알았거든요. 재벌가 사람들은 체취까지 관리하는 건지 궁금할 정도로, 이 전무님 몸에서 나는 암컷 냄새가 끝내줬다고요.”
“…변태 새끼.”
“그건 맞아요. 훌륭합니다, 이 전무님. 오늘 처음으로 맞는 말씀을 하시네요. 제가 생각해도 저는 좀 변태 같아요. 그러니까……제 변태 같은 욕구를 이 전무님이 채워주시면, 이 전무님을 다시 살려드리는 것도……어렵지 않을걸요?”
딸랑딸랑.
어느새 나의 목에 단단한 목줄이 감겨 있구나. 하고 세아는 생각했다.
물리적으로 목에 감겨 있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그 어떤 목줄보다 더 단단하고 견고했다. 세아가 어떻게 발버둥을 치든, 절대로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목줄을 쥐고 있는 건 민준이었다. 민준이 목줄을 가볍게 흔들자, 목줄에 달린 방울에서는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만 잘 들으면 괴롭히지 않겠다며 이리로 오라고 악마처럼 손짓하고 있는 민준을 보며, 세아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니, 언제나 이득이 되는 길을 귀신같이 찾아냈던 비상한 머리가 멋대로 팽팽 돌아갔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은 너무나도 뻔하고, 최악이었다.
“어떻게 살려줄 건지……제대로 말해. 나는 조건이 모호한 거래 따위는 안 하니까.”
“아직도 이걸 거래로 생각하고 있으시다니, 조금 곤란하긴 하지만……그래도 협력하려는 자세는 마음에 드네요.”
“……더 바라지도 않아. 내 돈만 돌려줘……몸이라면……네가 시키는 거라면……뭐든지 따를 테니까……”
“…”
민준은 세아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방금까지도 차라리 죽이라고 하던 사람이, 갑자기 저렇게 불쌍하고 금방이라도 꺾일 것처럼 가녀려 보이다니. 말이 되질 않았다.
근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꼴려서, 민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내,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민준의 입술이 멋대로 움직였다.
모든 걸 잃고도 도도함만은 잃지 않는 저 가시 가득한 장미를, 당장이라도 꺾어버리고 싶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럼 기어 오세요……개처럼 네발로요. 기어서, 제 발밑까지 오세요.”
“……읏.”
아무리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세아라지만, 그래도 굴욕적인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든 민준의 마음의 빈틈을 만들어 보기 위해서, 불쌍한 척을 하고 있던 세아의 표정이 순간 구겨졌다.
하지만 세아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이런 건 망설이면 망설일수록, 하기 더 어려웠다.
지금은 눈을 딱 감고, 목줄을 단단히 잡고 있는 민준의 변태 같은 요구를 모두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스윽.
힘이 풀려서 이미 바닥에 넘어져 있던 세아는 몸을 느릿하게 움직여서, 민준의 요구대로 개처럼 네발로 바닥에 섰다.
살금살금.
반짝이는 명품 드레스를 멋지게 두른 채 요트 갑판 위를 비참하게 기어 오는 세아의 모습을, 민준은 넋을 놓고 지켜봤다.
슬쩍슬쩍 비추는 세아의 봉긋하고 뽀얀 젖가슴 살과 굴욕적으로 일그러진 세아의 표정에 당장에라도 사정을 할 것만 같았다.
“…이제는 뭔데? 정말…신발이라도 핥으라고 시킬 생각이야?”
세아는 소파에 앉아있는 민준의 다리 사이까지 기어 온 다음, 민준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살기 위해서는 목줄을 쥐고 있는 민준에게 바짝 엎드려야 한다는 머릿속의 생각과 누군가에게 이렇게 굴욕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더없이 불쾌한 감정이 마구 뒤섞여서, 세아는 좀처럼 자신의 마음을 컨트롤 할 수가 없었다.
혼란스럽고 답답하고 짜증 나서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은데,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처지라서 미칠 것만 같았다.
민준 때문에 5천억을 돌려받지 못하고, 더해서 명성까지 먹지 못한다면, 세아는 그대로 감옥행이었다.
다른 시기였다면 재판까지 가더라도 실제로 감옥에 들어가지 않고 집행유예로 풀려나겠지만, 명예 회장인 남희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최근 들어서는 가족들끼리의 기세 싸움이 심상치 않았다.
이런 시기에 이렇게 좋은 건수를 잡는다면 가족들은 세아를 보호해주기는커녕, 세아의 살점을 씹고 뜯으면서 파티를 열게 분명했다.
“핥으라면……핥을 수도 있어. 뭐든지 한다는 말……거짓말은 아니니까……”
“그래요? 그럼 핥아보세요. 마침 구두가 더러웠는데, 전무님의 입으로 깨끗하게 만들어주면 꽤 만족스러울 것 같군요.”
“……좋아. 얼마든지.”
말은 쉽게 했지만, 몸은 생각처럼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머뭇거리던 세아는 눈을 딱 감고는, 고개를 바닥에 박다시피 숙였다.
굴욕적이지만 여기서 멈추면 더 고통스러울 게 뻔하니, 세아는 최대한 모든 감정을 비워내기 위해 노력하며, 눈앞에 놓인 민준의 구두를 핥았다.
츕, 츄읍.
하는 소리가 민준의 귓가에 울렸고,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답답한 신음을 내뱉었다.
당연히 신발에서는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았지만, 세아의 혀가 스칠 때마다 어쩐지 발가락이 절로 꼼지락거렸다. 환상적인 기분이었다.
“음. 훌륭해요. 이제 고개 들어봐요.”
“쓰읍. 하아………”
“전무님……설마 울어요?”
“……”
뚝. 뚜욱.
대체 얼마나 독하게 눈물을 참은 건지, 고개를 들어낸 세아의 눈시울은 눈병에 걸린 것처럼 새빨갰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세아의 눈에서는 닭똥처럼 굵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아무리 감정을 죽이려고 해봐도, 모두의 위에서 군림하며 살아온 세아는 남의 발을 핥는다는 굴욕을 도저히 참아낼 수 없었다.
“울지 말아요. 전무님 그런 캐릭터 아니잖아요.”
“…나도 알아. 천하의 나쁜 놈아……”
“그러니까요. 어쩌다 천하의 나쁜 놈을 건드렸을까요. 우리 불쌍한 이 전무님.”
스윽.
민준은 그칠 줄을 모르고 뚝뚝 흘러내리는 세아의 눈물을, 희미하게 오오라를 불어넣은 엄지손가락으로 쓱쓱 닦아주었다.
죽이고 싶을 만큼 민준이 미웠지만, 세아는 이상하게도 민준의 따듯한 손이 닿자 혼란스럽기 그지없던 마음이 안정되는 걸 느꼈다. 그것도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르게.
세아는 깜짝 놀라며, 민준을 향한 마음속 칼날을 더욱더 날카롭게 세웠다. 아무리 다 망가져 버렸다고 한들, 이세아가 미친 게 아니면 이런 남자에게 빠져들 수는 없었다.
세아는 일부러 더 무미건조하고, 따분한 어조로 말했다.
“다음은…? 다음은 뭐지? 발가벗고 춤이라도 출까?”
“그것도 보고 싶긴 하지만, 제가 좀 급해서요. 이제는 신발 말고 여기를 좀 깨끗하게 해주세요.”
민준이 손가락으로 자지 때문에 불룩 솟아오른 바지 봉우리를 가리켰다.
척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크기에, 세아는 아무 말 없이 눈을 크게 치켜뜨고 민준의 봉우리를 쳐다봤다.
그러다 세아가 마침내 손을 움직여서 민준의 바지를 내리려고 하는 순간, 민준이 세아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챘다.
세아가 시키는 대로 하려는데 대체 뭐가 불만이냐는 듯, 반항스러운 눈빛으로 민준을 째려봤다.
“……뭐야?”
“손으로 말고 입으로 벗기세요. 개처럼 기어 다니는 전무님한테는, 그게 더 어울릴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