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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플쓰는 밤의 황제-208화 (208/270)

〈 208화 〉 208화

* * *

은은하게 호텔 지하를 비춰주고 있던 약한 조명들마저 모조리 꺼지고, 컴컴해진 공연장을 다시 환하게 밝히는 건 빅스를 상징하는 화려하고 거대한 천사 날개였다.

스크린이 아니라 증강현실로 구현된 거대한 날개의 중앙에는, 보석으로 된 속옷을 차려입고 있는 라라가 서 있었다.

대형 콘서트에서만 쓰이는 억대 단위 스피커에서 묵직한 비트가 둥둥 울리고 온갖 화려한 레이저가 라라를 중심으로 쏟아지기 시작하자, 라라는 바닷가의 도로처럼 시원하게 쭉 뻗은 런웨이 위로 당당하게 걷기 시작했다.

라라가 걷자 증강현실로 구현해낸 천사 날개 역시 같이 펄럭였고, 오로지 보석으로만 만들어진 속옷은 쏟아지는 레이저를 반사시켜서 더욱 현란한 빛무리를 만들어냈다.

빅스쇼에 초청된 건 세계 최정상급 디자이너, 패션 재벌 그룹의 CEO, 그 이외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밖에 없었다.

평범한 관객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고 거대한 쇼.

하지만 라라는 런웨이 위에서 관중들을 완벽히 압도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천사가 현신한 것만 같은 라라의 워킹을 지켜봤다.

속옷만 입고 있다고 해서 야한 느낌이 드는 건 절대 아니었다. 찰나 만에 눈길을 사로잡는 압도적인 아름다움과 완벽한 워킹 앞에서 관중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넋을 놓고 그녀를 숭배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라라가 세계적인 모델인 것 맞았지만, 이 정도는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민준에게서 버프를 받고 더욱더 예뻐진 것은 물론, 정자의 각성으로 인해 트렌스 상태에 들어간 라라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였다.

하지만 그런 버프를 받는 건 라라만이 아니었다. 라라에 뒤를 이어 나온 신디와 스테파니, 그리고 모든 쥬얼리들이 적어도 몇 단계씩은 더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였다.

원래는 단 한 명만이 100% 보석으로 된 특별한 속옷을 입을 수 있었지만, 돈이 썩어 넘쳐나는 민준의 지시로 모든 모델이 최소 수천만 원짜리 쥬얼리 속옷을 입은 채 1차 런웨이를 마쳤다.

빅스 전속 모델들의 이름이 왜 ‘쥬얼리’인지 증명이라도 하는 듯, 웅장한 음악과 압도적인 패션으로 모두의 시선을 강탈한 1차 런웨이와는 다르게, 2차부터는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이름만 들으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릴 만한 팝 가수들이 펑펑 터지는 수많은 폭죽과 함께 화려하게 튀어나와 쥬얼리들과 호흡을 맞췄다.

쥬얼리들이 한결 편안하게 비트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워킹하고, 가수들은 워킹하는 모델들 사이에서 환히 웃음 지으며 인생 최고의 공연을 펼쳤다.

아무리 세계적인 팝스타라고 해도 이런 여신들과 공연하는데 신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쩌다 워킹 중인 모델들과 눈 맞춤이라도 하면 텐션이 자연스럽게 올랐고, 공연을 열기는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졌다.

멈추지 않고 쏟아지는 노래와 리듬에 맞춰 이어지는 여신들의 워킹. 그리고 돈을 물처럼 써가며 준비해둔 수백 개의 조명과 특수 효과까지.

모든 것들이 하나로 합쳐져서 관중들의 심장에 강하게 울려 퍼졌다.

끊임없이 과열된 공연의 분위기가 너무 열정적이어서 자칫하다간 무대 위에 오른 퍼포머가 잡아먹힐 수준이었다.

“하아……너, 너무 떨려. 너무 떨린다고.”

덜덜덜­.

공연 분장을 마치고 백스테이지에서 대기하고 있던 채린이, 옆에 있던 유이의 손을 꽉 잡았다.

늦은 중2병이 와서 웬만하면 이런 모습을 잘 보이지 않는 채린이었지만, 지금은 너무 다급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무대 위에서 몸을 벌벌 떨다가 목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최악의 공연을 펼칠 것만 같았다.

“나, 나도 떨리니까…! 옆에서 너, 너무 떨지 말란 말이야! 바, 바까!!”

하지만 유이 역시 채린과 오십보백보였다. 애초에 갑작스럽게 이런 세계적인 무대에 서는데 떨리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래. 저렇게 이글이글하는 뜨거운 눈빛으로 공연장을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고 있는 지윤과 혜나가 비정상인 게 분명했다.

“어, 언니…!! 채, 채린이가 너무 떨리나 본데…?”

“아, 유이야.”

유이의 부름에 지윤이 뒤를 돌아봤다.

무대에 오르는 상상을 하느라 멋대로 후끈후끈해져서 멤버들의 상태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지윤은 벌을 받는 것처럼 벌벌 떨고 있는 채린과 유이에게 다가가서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흐, 흐아­. 지, 지윤 언니.”

“애들아……떨어도 괜찮아. 긴장할 수밖에 없으면 긴장해버려.”

“정, 정말 그래도 되는 거야? 지윤짱…?”

“당연하지. 우리가 연습한 게 있잖아. 나는 그걸 믿어. 아마 너희 둘 다 기절해있다가도, 노래만 나오면 몸이 알아서 반응할 걸? 무의식 상태에서도 막 춤추고 노래할 거야. 그것도 엄청 멋지게.”

평소에도 믿음직한 리더였다. 하지만 오늘은 유독 몇 배로 더 믿음직했다. 유이와 채린은 지윤의 말을 듣자 덜덜 떨리던 몸이 서서히 가라앉는 걸 느꼈다. 마치 마법 같았다.

“그래. 걱정하지 마. 우리 아기들은 얼마든지 실수해도 돼. 내가 있잖아.”

서로를 북돋아 주던 솔라의 뒤에서 뚜벅뚜벅 걸어온 아리아나가 인이어를 체크하면서, 무심하게 툭 던진 말이었다.

솔라 멤버들은 들려온 아리아나의 목소리에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여유로운 것 같은데도 모든 걸 압도하는 웅장한 기운을 뿌리고 있는 아리아나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봤다.

어찌나 기백이 대단한지, 팀 내 최단신인 유이보다도 작은 아리아나가, 고개를 아무리 들어봐도 그 형체를 다 알아볼 수 없는 거대한 거인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민준에게 같은 버프를 받았다고 한들, 공연의 열기에 영향을 받아서 텐션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던 지윤과 혜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꾸욱­.

아리아나를 보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낀 지윤은, 언젠가는 저런 아리아나와 동등한 위치에 반드시 오르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주먹을 꼭 쥐고는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아리아나. 당신 같은 사람과 함께 무대에 설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에요.”

“어유­. 지겨워. 그 말이 벌써 몇 번째인지 알아? 어차피 너희 같은 애들은 성공해. 그러니까 너무 겸손하지 마. 별은 언제나 곁에, 하지만 가장 위에서 빛나는 법이거든.”

“네. 명심할게요.”

“또 또 겸손……남자들은 그렇게 착하고 겸손하기만 한 여자는 재미없어한다? 나한테 전부 뺏기고 싶어?”

아리아나가 지윤을 은근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남자’라고 돌려 말하지만, 지윤은 아리아나가 말하고 있는 게 민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리아나의 도발에 발끈한 지윤이 아리아나를 당당히 바라보면서 크게 소리쳤다. 아리아나 앞에서 조금은 움츠러들었던 어깨도 쫙 편 채로.

“그, 그건 아니에요!! 아, 아무리 아리아나라도 절대 안 뺏길 거니까…!”

“푸흣­. 좋네. 그래. 그런 기세로 가. 그럼 문제없을 거야.”

툭툭­.

아리아나가 지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솔라 멤버들을 휑하니 지나쳐갔다.

지윤은 급하게 고개를 돌려서, 먼저 무대 위로 오르는 아리아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뭐, 뭐야! 왕 재수!”

“그, 그러니까…! 잘, 잘난 척하지 말란 말이야…! 물론 세상에서 제일 잘났지만…! 나보다 훨씬 예쁘고 노래도 잘하지만…!”

“야, 유이!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아, 아니거든? 솔직히 계급장 떼고 붙으면 우리가 더 괜찮……을지도 몰라!”

“노노. 채린. 그건 아니야. 떼고 붙어도 우리가 질 것 같아. 특히, 너나 나는……”

“이씨­! 너 대체 누구 편이야…!!”

“큭­.”

넋 놓고 아리아나의 거대한 뒷모습을 지켜보던 지윤이, 평소처럼 틱틱대는 채린과 유이의 목소리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곧 스태프들에게서 스탠바이 사인이 떨어졌고, 솔라 멤버들은 리프트 위로 올랐다.

이 리프트만 올라가면, 바로 공연장. 위에서는 벌써 공연장을 씹어먹고 있는 아리아나의 폭발적인 가창력이 들려왔다.

둥둥 울리는 비트에 맞춰서 같이 쿵쿵거리는 심장을 겨우겨우 진정시키며, 지윤은 멤버들에게 말했다.

겸손하지 말라고 말해줬던 아리아나를 꼭 후회하게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애들아……우리가 여기 씹어먹어 먹자. 대표님이 사줬던 최고급 한우처럼 맛있게, 자근자근……대표님이 우릴 얼마나 믿고 챙겨주셨는데, 적어도 밥값은 해야지.”

지윤이 일부러 민준을 언급하자, 지윤과 마찬가지로 멤버들의 눈빛 역시 화르륵 타오르기 시작했다.

숭고한 숭배의 감정과 진한 사랑의 감정이 뒤섞인, 거의 광기에 가까운 눈빛.

지금까지 실패만 했던 자신들을 믿고 전력으로 밀어준 민준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면, 단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불구덩이에 몸을 던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이깟 공연을 잘 해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이이잉­.

멤버들이 각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리프트가 움직였다.

솔라가 무대에 오르자 눈이 부실만큼 화려한 폭죽과 특수 효과가 펑펑 터져 나왔고, 그녀들은 약속한 대로 아리아나와 함께 빅스쇼를 씹어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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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편집본으로 방송되는 빅스쇼였지만, 쇼는 역시 라이브라는 민준의 말에 빅스쇼는 라이브로 CBS에 독점 생중계되었다.

폐지되었던 빅스쇼가 뜬금없이 미국이 아닌 대한민국에서 다시 열려서 불쾌해하는 사람도 많았고, 시대에 뒤떨어져서 도태된 빅스쇼를 왜 굳이 부활시키는 거냐며 페미니즘을 위해 빅스쇼가 부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극성 안티팬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미국 전역에 생중계된, 부활한 빅스쇼를 보고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이번 빅스쇼는 패션쇼의 전설로 길이길이 기록될 만큼 역대급이었다. 특히 쇼의 하이라이트에서 아리아나와 지윤이 흡사 대결하듯 서로를 뜨겁게 마주 보며 노래를 부를 때, 보고 있던 사람들의 몸에서는 절로 소름이 돋아났다.

그 결과 빅스쇼의 최고 시청률은 미 전역에서 5천만 가구에 이르렀고, 이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이벤트인 슈퍼볼의 절반가량 되는 수치였다.

초대박이라는 말도 부족할 정도로 엄청난 성공. 그리고 그 성공은 빅스쇼가 끝나고 이어서 열린 솔라의 쇼케이스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솔라의 쇼케이스는 퀸 메이어 호텔 바로 앞에 정착된 민준의 슈퍼 요트 ‘16’의 갑판 위에서 진행됐는데, 너튜브로 생중계된 쇼케이스가 시작되자마자 수십만 명이 몰려들어서 잠시 너튜브 스트리밍 서비스에 오류가 날 정도였다.

그렇게 한국을 넘어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하는 소식들이 연달아 터지자 모든 언론에서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솔라와 빅스쇼에 대한 기사와 가십을 쏟아냈고, 온갖 인터넷 사이트와 커뮤니티는 모조리 솔라와 빅스쇼에 대한 소식으로 도배됐다.

짠­.

“정말 대단하세요. 김 대표님. 사실은 저번 사교 모임에서의 인연도 있고 하니 조만간 뵙고 적극적으로 밀어드릴 생각이었는데, 참새가 봉황을 도와준다고 설치는 꼴이었네요. 부끄럽습니다.”

“뭘요. 마음만으로도 감사하죠.”

부산의 밤바다를 유유히 항해하는 슈퍼 요트 ‘16’의 위에서는, 이번 행사의 성공을 자축하는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모두가 탈 수 있는 건 아니었고, MJ나 스타 엔터의 관계자들, 그리고 쥬얼리들과 특별히 초청된 몇 명만이 요트 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 세아도 그 특별한 몇 명 중 한 명이었다.

민준과 세아는 요트의 최상층인 7층 갑판 위에 비치된 디자이너 소파에 앉아 단둘이서 샴페인을 마시고 있었는데, 아래층 갑판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나 환호성마저, 밤바다 특유의 적막하고 고요한 분위기에 섞여서 꽤 로맨틱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하지만 민준은 자신에게 감히 이빨을 드러낸 암컷에게, 로맨틱하게 대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무리 일성의 여식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요…이 전무님.”

“네, 민준 씨.”

세아는 자연스럽게 민준을 이름으로 부르면서, 조금씩 더 몸을 민준의 옆으로 몸을 붙였다.

미인계 따위 전혀 써본 적은 없지만, 암계와 음모가 난무하는 사업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타고난 외모도 출중했으니 거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내 들려온 민준의 서늘한 목소리에, 세아의 몸은 우뚝 멈춰버렸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공치사를 주고받던 상냥한 민준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스파이를 심은 것도, 저를 밀어주려고 하신 거죠?”

“…네? 그게 무슨……”

“그런데 어쩌죠. 유송아 실장은 이 전무님 밑으로 다시 안 돌아가요. 이미 저한테 푹 빠져서 정신 못 차리고 있거든요.”

“……”

의도적으로 살포시 웃음을 짓고 있던 세아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하지만 세아는 금방 방향을 잡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선택했다.

미안한 감정을 연기해야 했기에 표정을 침울하게 바꾸고, 목소리도 한 톤 낮췄다.

“…정말 죄송해요. 민준 씨. 하지만 그건 그룹의 의지라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일성 그룹의 임원으로서 제가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세아는 민준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도도하기 짝이 없어서 얼음 공주라고 불리는 이세아가 남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건 경악할만한 일이었지만, 민준은 변함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세아를 몰아붙였다.

“방송가와 연예부 기자들에게 로비한 것도 이 전무님 의지가 아니었나요?”

“…그럼요. 맹세코, 저는 모르는 일이었어요.”

“그럼 레드스퀘어 건은요? 지금 관장이 이 전무님 덕분에 그 자리에 올랐다는 거, 조금만 캐보니까 다 나오던데요. 우리 알만한 사람들끼리 너무 발뺌하지 맙시다. 명색의 얼음공주가, 꼴이 말이 아니네요.”

“……미친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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