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플쓰는 밤의 황제-204화 (204/270)

〈 204화 〉 204화

* * *

국내 최대 종합 아트 센터라는 위용에 걸맞게, 레드스퀘어의 관장실은 넓고, 화려하고, 예술적이었다.

하지만 정작, 집무 책상에 앉아서 직원의 보고를 듣고 있는 관장의 얼굴은 화사한 관장실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거무죽죽했다.

“뭐? 그 새끼들……완전히 미친 새끼들 아니야? 진짜 그렇게 말했다고?”

“예, 관장님……이제 와서 예약 취소하면 위약금 물어야 한다고 하니까, 알고 있었다면서 청구하면 바로 입금해 준다고 하고 끊어버렸습니다.”

“………아니, 씨발!! 그 새끼들 뭐 일성 그룹이야? 재벌이냐고?! 레드스퀘어가 만만해?! 우리 대관 비용이 얼만데, 그 코딱지만 한 회사가 맘대로 위약금을 물겠다 말겠다야!!”

쾅­!! 쾅, 쾅­!!

책상이 부서질 것 같은 관장의 파괴적인 샷건이었다.

직원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관장의 화가 가라앉길 기다렸다. 그러면서 아주 잠시만, 상상의 나래를 펼쳐봤다.

이번 일은 참 이상했다. 스타 엔터 쪽에서 느닷없이 예약을 취소한 것도 이상했고, 위약금을 물고 정당하게 취소하겠다는데 관장이 저렇게 난리를 치는 것도 이상했다.

이미 대관 일정이 한 달도 안 남은 상태였으니, 위약금은 대관료의 100%였다. 관장의 입장에서 보면 이득이면 이득이지, 손해는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난리를 치는 것일까….

뭐, 적어도 일개 직원이 알만한 일은 아니겠지.

“진짜…다시는 대관해주나 봐라. 스타 엔터 이 호로 새끼들…후우­. 알겠어. 이제 나가봐.”

“예. 관장님.”

끼익, 턱­.

직원이 나가자 노발대발하고 있던 관장의 얼굴은 다시 거무죽죽해졌다.

직원이 의심했던 대로 사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어이는 없겠지만, 이렇게 화가 날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특수했다. 이대로라면 하루 전에 스타 엔터와의 대관 약속을 뭉개버리라는, 세아에게서 받은 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스타 엔터가 어디서 어떻게 낌새를 느꼈는지는 몰라도, 이미 일이 틀어져 버렸다는 건 확실했다.

비록 관장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이세아는 누군가의 잘못을 따져가며 사람을 부리는 위인이 아니었다.

잘못했든 아니든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면 그대로 아웃.

아마 이걸로 세아 눈에 찍히면, 꿀물이 뚝뚝 떨어지는 레드스퀘어의 관장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지도 몰랐다.

“씨발……삼진 아웃만 아니어라…”

관장은 오랜만에 신을 찾으면서 전화를 꺼내 들었다. 무슨 질책을 들을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보고가 우선이었다.

띡. 띡.

죽어도 전화하기 싫다는 듯 일부러 더 천천히 세아의 번호를 누르는 관장의 표정은, 점점 더 거무죽죽해져 갔다.

****

“저기, 아리아나다!!”

“뭐, 어디!!”

“헤이, 아리아나!!”

“어디!! 어디!!!”

공항을 빡빡이 채운 취재진이 목놓아 아리아나의 이름을 불렀다.

취재 열기는 가히 콘서트장을 방불케 했는데, 슈퍼스타 아리아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여유로운 태도로 적당히 손을 흔들어주며 공항을 빠져나갔고, 그 옆에는 김진혁 팀장이 꼭 붙어 있었다.

이번 한국행 동안 아리아나를 담당하는 건 김진혁 팀장이었는데, 원래 솔라를 관리하고 있었지만 아리아나의 내한이 급하게 잡히면서 영어도 나름 잘하고 직접 운전을 하는 매니저 중에서는 가장 경력이 많은 진혁이 자연스럽게 아리아나를 맡게 되었다.

위이잉­.

진혁이 스마트키를 조작하자 벤추에서 만든 거대하고 럭셔리한 밴의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아리아나가 미국에서 쓰는 밴이랑 같은 모델이었고, 오로지 주문 제작만 받는 최상등급 모델이라 아리아나는 나름 깜짝 놀라면서 밴 위로 올랐다.

K­pop이 하도 유행이라, 아리아나 역시 한국의 가장 잘 나가는 엔터 소속사 몇 개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들어본 적도 없는 작은 소속사에서 이런 최고급 밴이라니.

‘설마 내가 온다고 특별히 준비한 건가? 뭐, 그래도 무례한 건 마찬가지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리아나의 마음속에서는 최악이라도 생각했던 스타 엔터의 인상이 아주아주 조금은 나아지고 있었다. 아니라면, 이런 똥차에 어떻게 타냐면서 곧바로 클레임을 걸어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럼 바로 부산으로 모시겠습니다.”

진혁은 아리아나의 통역이자 매니저로 따라붙은 미국 에이전시 쪽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통역이 진혁의 말을 아리아나에게 건네주자, 아리아나가 쓰고 있던 명품 선글라스를 도도하게 벗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오늘은 좀 쉴래. 비행이 너무 힘들었어. 서울 구경도 좀 하고 싶고.”

“네? 하지만, 아리아나 님…!”

“그리고……대표는 어디에 두고 딸랑 매니저만 온 거야? 내가 이런 대접 받으려고 한국 왔어? 그쪽 대표한테 전해. 사람을 미국에서 여기까지 불렀으면, 직접 찾아와서 배웅하는 게 예의라고. 굳이 나 같은 슈퍼스타가 아니더라도 말이지.”

“하지만……오늘 부산으로 가지 않으면 일정이 틀어지게 되는데……”

“내가 그쪽 사정까지 신경 써야 해? 잔말 말고, 지금 당장 서울에 있는 제일 비싼 호텔로 가. 오늘은 거기서 쉬다가 저녁에 관광 좀 하고 바로 잘 거니까.”

아리아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의자를 뒤로 홱 젖히고 그대로 누워버렸다. 더는 진혁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뜻이었고, 진혁은 어이가 없었다.

미리 요구도 하지 않아놓고 이제 와서 이러면 정말 곤란했다. 아니, 심지어 아리아나가 미국으로 오기 전에, 미리 아리아나 쪽 에이전시에 서울에서 하루 쉬고 부산으로 가겠느냐고 물어봤었다. 그때는 알아서 하라더니 이제 와서 이렇게 나와버리다니.

진혁은 눈앞이 깜깜했다. 만난 지 몇 분 되지도 않았지만, 아리아나가 천하의 꼴통이라는 건 가볍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진짜. 저거에 비하면 우리 애들은 진짜 천사다. 천사.’

진혁은 몰래 군것질을 하거나 늦잠을 잔다고 솔라 멤버들을 혼냈던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 정도는 애교로 받아줄 수 있었는데 굳이 혼내서, 이렇게 꼴통 슈퍼스타를 맡게 된 걸지도 몰랐다.

‘하아­. 다 내 업보다. 업보야……’

진혁은 혹시라도 아리아나의 심사가 뒤틀리지 않게끔 속으로만 한숨을 푹 내쉬고는, 일단은 차를 출발시켰다. 그러면서 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도……대표님이 나서시면 다 괜찮아지겠지. 뭐.’

민준이 아리아나를 컨트롤 할 수 있을 거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민준에 대한 진혁의 믿음은 확고했다.

민준이 나서기만 하면 언제나 막힘없이 일이 술술 풀리곤 했고, 이번에도 왠지 그럴 것 같았다. 민준을 떠올리자 아리아나 때문에 깜깜했던 눈앞이 환히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진혁이 가진 민준에 대한 믿음은 신앙에 가까웠고, 이런 현상은 비단 진혁뿐만 아니라 매일매일 성역의 영향을 받는 모든 직원에게서 나타나고 있었다.

‘믿습니다. 대표님!’

****

섹스도 미치도록 좋았지만, 섹스 후의 여운을 즐기며 서로의 살결을 느끼는 것도 적잖이 황홀했다.

민준은 가슴팍에 꼭 안겨있는 진주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진주는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갸릉갸릉 하며, 민준의 가슴팍에 고개를 비비적거렸다.

향긋한 살 내음과 민준 특유의 청량한 페로몬 향이 중독될 만큼 좋았다.

“흐응­…민준이 냄새 좋다.”

“큭­. 누나, 강아지야?”

“응. 강아지야. 악덕 대표를 만나서……맨날 개처럼 일만 하잖아……”

“……”

갑자기 들어온 한방에 민준은 쉽사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솔라의 컴백 앨범 제작 일정은 워낙 빡빡했고, 그 모든 걸 총괄한 진주는 아예 출퇴근을 못 하고 회사에서 밤을 지새우며 살고 있었다.

이번 쇼케이스가 끝나면 그 정도까진 아니겠지만, 솔라가 크게 히트 친다면 진주는 금방 또다시 업무의 늪으로 빨려 들어갈 수도 있었다.

물론, 성역 버프가 있고 간간이 정액까지 넣어주니 과로사 따위로 죽지는 않겠지만, 진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내가 뭐 해줄까. 말만 해. 진주 누나.”

“진짜? 해달란 거 다 해줄 거야?”

“그럼. 뭐든지.”

진주가 눈을 다이아몬드처럼 환하게 반짝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민준은 그런 진주를 바라보며 걱정하지 말고 뭐든지 말하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 부대표님이 얼마나 고생했는데…말만 해. 다 들어 줄게.”

“그럼……나이대로 잠들 때까지……같이 있어 줘.”

“뭐…? 집이나 차 말고?”

진주의 말에 한남동에 집을 한 채 해줄까 생각하던 민준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진주는 당황해하는 민준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그런 거 말고 민준이. 집이나 차는 이미 있단 말이야. 누나한테는……민준이가 더 필요해.”

“…”

진주의 말에 불끈­. 하고 고추가 또다시 단단해졌다. 신음을 뱉느라 목이 다 쉬어 버려서 허스키해진 진주의 목소리와 별처럼 빛나고 있는 진주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너무나 섹시했다.

하지만 민준은 진주를 덮치지 않았다. 아무리 침대 위에서는 짐승이 된다지만, 이런 분위기를 깨트려선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 대신, 민준은 조용히 진주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머리를 쓰다듬고, 더 깊게 안아주었다.

진주의 소원대로 진주가 잠들 때까지 같이 있어 주었고, 안 그래도 섹스를 끝내고 노곤한 상태였던 진주는 금방 민준의 품에 안겨서 깊이 잠들었다.

새근새근하는 진주의 숨결이 민준의 가슴팍을 살살 간지럽혔다.

‘……참기 힘들긴 하네.’

진주가 잘 자는 건 좋았는데, 품 안에 잠들어 있는 진주의 살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건 곤란했다.

민준은 이대로면 진주를 또 따먹어버릴 것 같아서, 진주가 깨지 않게끔 조심스레 움직여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진주에게 이불까지 잘 덮어주고 호텔 방을 나오는데, 마침 전화가 울렸다.

“네. 김 팀장님.”

­저, 대표님. 공항에서 내린 아리아나를 무사히 차에 태우긴 했는데…

“네, 혹시 문제가 있나요?”

­그게……

진혁은 민준에게 아리아나가 어떤 요구를 했는지 들려주었다.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서로 일정을 조절할 때는 다 알아서 하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클레임을 거는 건 명백한 비매너였다.

“뭐, 맘에 안 드는 게 있데요? 왜 강짜를 부리지?”

­잘 모르겠습니다만……아마 일정을 무리하게 잡은 것에 대한 보복이 아닐지…

“흠­. 일단은 알겠습니다. 이왕 그렇게 된 거 원하는 대로 해주세요. 호텔도 제일 좋은 곳으로 데려가 주시고 서울 투어도……아니다, 일단은 호텔에 던져두세요. 제가 그쪽으로 직접 갈게요.”

­아,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뚝­.

민준은 진혁과의 통화를 끊고서 호텔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원래는 MJ 타워에 들러서 일(섹스) 좀 하다가 일찍 퇴근해서 집에서 오매불망 자신만 기다리는 강아지들을 돌봐줄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아리아나를 컨트롤 하려면 직접 나서야 할 것 같았다.

“우리 솔라 애들이 아리아나와의 만남을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데……망쳐버릴 수는 없지.”

아무래도 아리아나는 솔라 멤버들처럼 순둥순둥한 강아지가 아닌 것 같았다. 굳이 따지자면 성질 더러운 비글이랄까. 하지만 민준은 자신 있었다.

비글조차 얌전하게 만들어서, 솔라 멤버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교육할 자신이.

****

찰칵­.

아리아나는 호텔 VIP 라운지에 앉아서 여유롭게 셀카를 찍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이 호텔의 명물인 애플 망고 빙수가 올려져 있었는데, 한 그릇에 7만 원이나 하는 사치스러운 음식이었지만 아리아나는 한입 먹더니 입맛에 안 맞는다며 더 이상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하­………’

진혁은 사비로 산 7만 원짜리 애플 망고 빙수가 방치 플레이 속에 속절없이 녹아가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경비처리 할 테지만 회삿돈도 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리아나의 태도가 너무 괘씸했다. 어떻게든 회사에 손해를 끼치겠다는 태도가 너무 뻔히 보여서, 기회만 있다면 저 아담하고 예쁜 뒤통수를 콩. 하고 쥐어박아 주고 싶은 기분이랄까.

“정말……그쪽 대표는 언제 와요? 나 시간 그렇게 많은 사람 아닌 거 몰라요?”

“금방 오실 겁니다. 지금 퇴근 시간이라……”

진혁은 셀카나 찍어대면서 틱틱대는 아리아나에게 이빨을 꽉 깨물고 대답했다.

“참나. 내 알 바에요? 5분 안에 안 오면 저 다시 방에 들어갈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그리고 대표는 내일 다시 오라고 하고.”

“죄송하지만, 그건 좀……대표님이 워낙 바쁘신 분이라…”

“아~~ 여기 그래도 조명이 참 괜찮네. 셀카가 이쁘게 나와.”

“……”

진혁은 할 말이 없었다. 심지어 아직 약속 시간이 지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5분 지나면 들어가겠다고 강짜를 부리니 어이가 털려서, 그대로 아리아나의 강냉이도 털어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냥 때리고 퇴사해…? 하, 우리 애들이랑 대표님이 크게 실망하실 텐데…’

진혁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진혁은 환하게 웃음 지으며 뒤를 돌아봤다.

“대표님!”

“아, 수고하셨어요. 김 팀장님.”

“흐, 흐윽­.”

일단 수고했다는 말부터 던지며 악수를 건내는 민준의 상냠함에 진혁은 왈칵 눈물을 흘릴 뻔했다.

민준은 악수를 하고 등을 두드리며 마음고생이 심해 보이는 진혁을 적당히 위로해주고, 곧바로 아리아나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까지도 전혀 관심 없다는 듯 셀카만 찍고 있던 아리아나는, 민준을 힐끔 보더니 휘둥그레 치켜떴다.

“안녕하세요. 아리아나. 스타 엔터 대표. 김민준이라고 합니다.”

“그쪽이……진짜 대표…?”

“네, 만나서 영광이네요. 평소에도 아리아나의 노래를 참 좋아해서 한 번쯤 꼭 뵙고 싶었는데. 하하.”

민준이 넉살을 부리며 악수를 건넸다. 아리아나는 민준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며 자기도 모르게 민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스타 엔터를 엿먹이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띠껍게 행동하겠다던 굳은 다짐이, 민준의 얼굴을 보자 사르르 녹아버렸다.

“아­……”

민준의 손이 무척이나 크고 따듯해서, 아리아나는 순간 얼굴을 확 붉혔다.

“서울 투어를 하고 싶으시다고 하셨죠? 제가 시켜드려도 괜찮을까요? 마침 차도 따로 갖고 왔는데.”

“뭐­……나쁘지는 않을지도……”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