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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플쓰는 밤의 황제-201화 (201/270)

〈 201화 〉 201화

* * *

송아가 일성에 들어간 건, 일성이 우리나라 1등 기업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다른 기업이 1등이었다면, 일성이 아니라 그 기업으로 갔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1등이 되어야 한다는 야망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었다. 적당히 넉넉하게 인정받으면서 살면 그걸로 그만.

다만, 그 적당히라는 기준이 남들보다 조금 높았을 뿐이었다. 가족들이나 친구들까지 전부 챙기고, 원하는 건 큰 고민 없이 살 수 있을 정도.

큰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성의 임원 정도만 되면 딱 그렇게 살 수 있었다. 그래서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노후까지 바라보며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아마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며 인생이라는 지루한 레이스를 견뎌내고 있는 거겠지. 아무 생각 없이 놀면서 살아도 원하는 건 다 할 수 있는 금수저들은 좀 다르겠지만 말이야.

‘아……또 나와 버렸다. 금수저 혐오. 이거 진짜 좀 고쳐야 하는데.’

젊은 나이에 꽤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지만, 아직까지 자신은 예약도 할 수 없는 그런 최고급 요정이었다.

송아는 차분하게 앉아서 민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민준 대표와의 첫 식사 자리였고, 식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속이 매스꺼웠다.

스무 살짜리 핏덩이가 이런 최고급 요정을 이용한다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가 얼마나 금수저인지 대놓고 자랑하는 느낌이랄까. 부모 빽만 뺀다면, 사실은 이유나 본부장 잘 꼬신 것 하나 덕분에 이렇게 떵떵대는 거면서.

‘하아­……뭐, 그런 여자 꼬시는 것도 능력이면 능력인가. 그러면 다른 쓰레기들보단 좀 낫네.’

물론, 자격지심이란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기분이 꿀꿀했다. 돈이 상상도 못 하게 많은 진짜 금수저들을 볼 때면, 송아는 언제나 그랬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덜떨어진 애들이 모든 걸 가지면서 살아간다는 게, 솔직히 배알이 꼴렸다. 자기가 가진 것이 자신에게 과분한지도 모르는 바보천치들이 아니라, 훨씬 더 똑똑한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식의 영양가는 하나도 없는데, 불만만 가득한 쓰레기 같은 생각들이 자꾸 들어서 송아는 금수저들과 만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금수저들이 하나같이 그렇게 나태하고 멍청해서, 이용해 먹기 편한 건 대단히 좋았지만.

‘우리 대표님은 어떨까 궁금하네. 이유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이려나? 그럼 좀 곤란한데……’

송아는 괜히 옷매무새를 한 번 더 정리했다. 오피스 룩이었지만 아찔할 정도로 관능적인 느낌이 강했다.

쫙 달라붙는 미니스커트는 아슬아슬하게 팬티 라인을 가리고 있었고, 타이트한 치마와는 대조적으로 하늘하늘한 느낌의 하얀 블라우스는 단추가 두 개 정도 풀려 있었다.

그냥 있을 때는 몰라도 허리를 살짝 숙일 때, 예를 들어 옆자리에서 술을 따라줄 때면, 가슴골이 은근하게 보일 수 있는 정도였다.

다리에는 검정 스타킹이 신겨져 있었고, 귀에는 평범한 오피스 스타일링에 포인트를 줄 수 있는 블링블링한 귀걸이가 걸려 있었다.

당연히 이런 옷을 입고 회사에서 일했던 건 아니었다. 퇴근하자마자 집에 들러서 갈아입고 온, 말하자면 스무 살 금수저 청년을 꼬시기 위한 송아만의 전투복이었다. 다소 과하게 화끈한 느낌은 있었지만, 혈기왕성한 스무 살을 꼬시기엔 딱 맞았다.

민준과 처음 만나는 거라 이 전투복이 먹힐지 안 먹힐지는 송아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안 먹혀도 그만이었고 먹히면 그만큼 좋은 게 없었다.

‘마침 차 바꿀 때가 됐지……가방도 괜찮은 신상들이 좀 나왔던데……우리 대표님한테 빨대 꽂으면, 그 정도는 우습겠지?’

저번에 사귀었던 남자는 애매하게 금수저라서 무척이나 불만족스러웠다. 물론, 기가 막힌 밀고 당기기로 원하는 건 모두 얻어내긴 했지만, 송아는 그런 노력을 들이는 것 자체가 억울하고 귀찮았다. 일종의 불공정 계약이랄까.

이렇게 예쁘고 똑똑한 여자를 가지고 싶다면, 그만큼 바쳐야 하는 게 당연했다. 돈이랑 마음까지 전부. 아, 김민준은 특별히 MJ인베스트먼트에 대한 정보까지 내놔야 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마찬가지인 이세아한테 줄을 서려면, 그게 꼭 필요했다.

드르르륵­.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다미 문이 열렸다. 송아는 짐짓 당황한 척 다급하게 일어나서 방 안으로 들어오는 민준에게 인사했다.

너무 당황해서 미쳐 손으로 가리지 못한 블라우스 속 어여쁜 가슴골이 민준에게 잘 보일 수 있도록 각도를 세심하게 조절해서 허리를 숙이는 게 포인트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표님. 저는 유송아라고 합니다.”

“아……네. 유 팀장님. 아니, 이제는 유 실장님인가요? 이유나 본부장님한테, 유 실장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영광입니다. 대표님.”

“영광은요. 그것보다 어서 자리에 앉으세요. 편하게 밥이나 한 끼 하자고 부른 거지, 유 실장님 불편하게 하고 싶어서 부른 게 아닙니다.”

“아, 감사합니다. 대표님.”

송아는 민준에게 고개를 끄덕 숙이고 자리에 앉았고, 송아의 바로 옆에 붙어있는 테이블의 상석에 민준도 자연스레 자리를 잡았다.

곧 종업원이 들어와서 순식간에 상을 차렸고, 송아는 그동안 곁눈질하며 민준의 모습을 살폈다.

‘하도 여직원들이 난리이길래 어느 정도인가 싶었는데……진짜 엄청나게 잘생겼네?’

한참 민준만 했을 때 몇 번 가본 클럽에서 모델들이나 연예인들도 봤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돈 많고 잘생긴 사람들에게 자연스레 우월감이 배기 마련이었는데, 민준에게서는 그런 메스꺼운 느낌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척 봐도 서글서글하고 착하고, 순해 보이는 인상인 데다, 행동거지 역시 얼굴에서 내뿜는 선한 느낌과 딱 맞아떨어졌다. 남을 먼저 배려하고 편하게 해주는 스타일이랄까.

‘저 얼굴에, 저런 성격. 게다가 금수저라니……확실히 이유나가 푹 빠질만하네.’

눈치가 빠르고 직관력이 뛰어난 송아는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 민준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적어도 송아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민준을 꼬시는데 더욱 진심이 되어 버렸다.

이유나랑 사귀고 있는 건 거의 확실한 것 같았지만, 틈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송아는 민준의 시선이 어느 쪽으로 쏠리고 있는지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저렇게 선해 보이는 민준 역시 엉큼한 수컷인 건지, 시원하게 들어낸 다리와 가슴 쪽을 자꾸만 흘기고 있었다. 다만, 그래도 필사적으로 참으려 하는 게 느껴져서 귀여웠다.

“흠흠­……여기 코스가 아주 괜찮습니다. 유 실장님 마음에도 드실 겁니다.”

“물론이죠. 대표님이 직접 사주시는 밥인데요.”

“꼭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요. 하하­…”

“후훗­. 감사히 먹을게요. 사실 저 퇴근하고 바로 와서 너무 배고팠거든요.”

송아는 민준과 눈을 마주치고 약간은 은근한 느낌의 눈웃음을 쳐주면서, 거의 친구처럼 민준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눴다.

만난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민준 같은 핏덩이를 몇 분 안에 찜쪄먹는 것 정도야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마음이 따듯해서 어떤 말을 해도 잘 받아주는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한껏 친한 척을 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대게, 당기면 당기는 대로 넘어오기 마련이었다.

“유 실장님, 혹시 술도 좋아하십니까? 유 실장님만 괜찮으시면 한 병 시키려고 하는데……아, 저 때문에 억지로 드시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저 술 좋아해요. 대표님. 대표님이 사주시는 공짜 술이면 훨씬 더 좋고요.”

“하하하­. 그래요. 그럼 마음 편하게 주문하겠습니다.”

“히히. 네. 대표님.”

서로 마주 보며 부드럽게 미소지은 뒤 민준은 종업원에게 술을 주문했고, 송아는 언뜻 수줍어하는 듯한 얼굴로 자꾸만 민준을 은근하게 흘겼다.

민준이 워낙 잘생겨서 연기하는 게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아니, 이쯤 되니 송아는 자신이 하는 게 연기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구별이 잘되지 않을 정도였다.

꼭 꼬셔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더라도, 민준 같은 남자라면 어떻게든 꼬시기 위해 노력했을 것 같았다. 돈 많고 예의 바르고 착해서, 갖고 놀다 버리기 딱 좋은 남자였으니까.

‘뭐, 질리지만 않으면……아예 살림 차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지도…? 큭. 뭐라는 거야. 유송아.’

어느새 민준과 살림까지 차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송아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결혼이라니. 가벼운 만남을 지향하는 자신에게는 너무나 맞지 않았다. 민준이 이렇게 마음에 들다가도, 자신의 성격상 얼마 못 가서 훅 식어버릴 게 분명했다. 그건 사람의 본성 같은 거라서, 어떻게 고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유 실장님, 왜 그렇게 웃어요? 뭐가 웃겨요?”

“네? 아……아니요. 그냥 좋아서요.”

“네? 뭐가요?”

“…직원들 사이에서 대표님이 엄청난 미남이라는 소문이 자자했거든요. 저는 솔직히 아랫사람들이 으레 해주는 입바른 소리 같은 건 줄 알았는데……진짜 너무 잘생기셔서, 사실 들어오실 때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잘생긴 대표님이랑 일하다니……매일 눈 호강할 생각에 벌써 기분이 좋네요.”

“…크흠­. 쑥스러우니까, 너무 금칠해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유 실장님.”

“에이­. 저 연기자 아니에요. 대표님. 거짓말이면, 이렇게 리얼하게 못한다고요! 대표님은 제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보이세요…?”

송아는 그렇게 말하고, 결백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민준을 뻔히 바라봤다.

마치 눈싸움을 하는 것 같았는데, 결국 먼저 고개를 돌려서 시선을 피해버린 건 민준이었다.

“흠­. 흠­……대표가 어리다고 해서 너무 놀리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유 실장님.”

“호호­. 네, 대표님. 죄송해요. 잘생긴 대표님이랑 일할 생각에 너무 신나버렸나 봐요.”

“그러는 유 실장님도……”

“네……?”

“아, 아닙니다.”

화아악­.

두 사람의 볼이 동시에 불타올랐다. 민준은 말을 삼켰지만, 맥락상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송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상상도 못 한 특별한 멘트라거나 그런 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세게 쿵쾅댔다. 예상치 못할 때 훅 들어온 기습 공격이라서 더 그랬다.

“…”

“…”

송아가 진심으로 당황하자, 내내 매끄럽게 이어지던 대화가 뚝 하고 끊기고 둘 사이에는 짙은 침묵이 흘렀는데, 완전히 어색하기만 한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분명 조용하기만 한데 어딘가 간질간질하고 뜨거워서, 온탕에서 나온 뜨거운 수증기가 방안에 꽉 들어찬 것만 같았다.

“아, 술이……왔네요.”

“……그러네요. 대표님.”

짧지만 강력했던 둘 사이의 침묵이 깨진 건, 민준이 주문한 술 한 병 덕분이었다.

아주 고급스러운 병에 들어가 있는 사케였고, 실제로도 가게에서 가장 비싼 사케였다. 평소의 송아라면 또 열등감이 욱 치밀어 올라서 돈 지랄을 한다고 속으로 욕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능숙하게 술병을 개봉한 민준에게서 술을 받을 때까지도 어딘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심지어 아직 술은 한 잔도 마시지 않았는데도.

“어, 대표님…! 제가 따라드릴게요…!”

“아닙니다. 유 실장님. 술이나 따르게 하려고 유 실장님같이 귀한 분 모시고 온 게 아닙니다. 게다가 요즘 사회적인 분위기도 그렇고……저는 제가 따라 마시겠습니다.”

“제 술잔은 대표님이 채워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대표님 자작하시는 걸 보고만 있겠어요. 술병 이리 주세요. 대표님.”

스윽­.

송아는 술병을 향해 팔을 내밀었고, 술병을 맞잡고 있던 민준의 손과 송아의 손이 스치듯이 맞닿았다.

비록 티도 안날만큼 작은 스킨쉽이었지만, 어쩐지 손이 따끔했다. 벌에 쏘이기라도 한 것처럼 찌릿찌릿한 느낌.

“아­……”

“…크흠­. 그,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유 실장님.”

“아, 네에­……제, 제가 따라드릴게요!”

자꾸만 툭툭 얼이 빠지고 있어서, 송아는 어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작업을 쳐야 하는 건 자신이었는데, 역으로 작업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송아는 눈을 껌뻑거리면서 정신줄을 꽉 붙잡고, 민준이 내밀고 있는 술잔에다가 사케를 졸졸 따랐다.

계획한 대로, 민준이 단추가 위에서부터 두 개 풀려 있는 블라우스 사이로 빵빵한 가슴골을 은근하게 볼 수 있는 각도를 유지하면서.

“……흠흠.”

“자, 됐다. 대표님 설마, 건배도 안 하신다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건배합시다. 유 실장님. 우리 회사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도요. 만나서 반가워요­. 대표님.”

짠­.

술잔이 마주치고, 깔끔하게 비워졌다. 싱그러운 곡물 향이 입안에 깊게 퍼지고, 식도를 부드럽게 감쌌다. 비싼 술은 다 이유가 있었다.

술맛이 너무 좋아서 송아는 자기도 모르게 약간은 아저씨처럼, 감탄사를 내뱉어 버렸다.

“아, 술맛 좋다.”

“큭­. 그러네요.”

“…뭐야. 대표님, 왜 그렇게 웃어요?”

“아닙니다. 그냥 술맛이 좋아서요.”

“……저도 좋아요. 술맛.”

두 사람은 대화는 계속해서 그런 식이었다.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웠고, 거북하지 않게 은근하고 촉촉했다.

화하게 취해가는데도 전혀 깨닫지 못할 만큼, 술이 술술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한 마디 두 마디, 음식보다는 대화를 안주 삼아 술을 넘겼고, 테이블 한쪽에는 점점 술병이 쌓여갔다.

평소의 송아라면 혹시나 취해서 실수할까 봐 진즉에 그만 마셨겠지만, 오늘은 뭔가 좀 이상했다. 가슴이 편하고 따듯했다. 이게 술 때문인지, 아니면 옆에 있는 남자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유 실장님은……원래 옷을 그렇게 입고 다녀요?”

그러다 문득, 송아는 술이 확 깨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이 몽롱했던 머리가 순식간에 맑아졌다.

예를 들면, 드려놨던 낚싯대가 갑자기 휙 휘어지는 느낌.

송아는 느껴지는 묵직하고 짜릿한 손맛만으로, 미끼를 덥석 물어버린 물고기가 얼마나 월척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네……? 대표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옷차림이…이상한가요?”

“……아닙니다. 제가 취해서 주제를 넘었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딱히 죄송하다는 말이 듣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

“대표님은……제 옷차림이, 신경 쓰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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