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 2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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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가 일성에 들어간 건, 일성이 우리나라 1등 기업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다른 기업이 1등이었다면, 일성이 아니라 그 기업으로 갔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1등이 되어야 한다는 야망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었다. 적당히 넉넉하게 인정받으면서 살면 그걸로 그만.
다만, 그 적당히라는 기준이 남들보다 조금 높았을 뿐이었다. 가족들이나 친구들까지 전부 챙기고, 원하는 건 큰 고민 없이 살 수 있을 정도.
큰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성의 임원 정도만 되면 딱 그렇게 살 수 있었다. 그래서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노후까지 바라보며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아마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며 인생이라는 지루한 레이스를 견뎌내고 있는 거겠지. 아무 생각 없이 놀면서 살아도 원하는 건 다 할 수 있는 금수저들은 좀 다르겠지만 말이야.
‘아……또 나와 버렸다. 금수저 혐오. 이거 진짜 좀 고쳐야 하는데.’
젊은 나이에 꽤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지만, 아직까지 자신은 예약도 할 수 없는 그런 최고급 요정이었다.
송아는 차분하게 앉아서 민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민준 대표와의 첫 식사 자리였고, 식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속이 매스꺼웠다.
스무 살짜리 핏덩이가 이런 최고급 요정을 이용한다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가 얼마나 금수저인지 대놓고 자랑하는 느낌이랄까. 부모 빽만 뺀다면, 사실은 이유나 본부장 잘 꼬신 것 하나 덕분에 이렇게 떵떵대는 거면서.
‘하아……뭐, 그런 여자 꼬시는 것도 능력이면 능력인가. 그러면 다른 쓰레기들보단 좀 낫네.’
물론, 자격지심이란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기분이 꿀꿀했다. 돈이 상상도 못 하게 많은 진짜 금수저들을 볼 때면, 송아는 언제나 그랬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덜떨어진 애들이 모든 걸 가지면서 살아간다는 게, 솔직히 배알이 꼴렸다. 자기가 가진 것이 자신에게 과분한지도 모르는 바보천치들이 아니라, 훨씬 더 똑똑한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식의 영양가는 하나도 없는데, 불만만 가득한 쓰레기 같은 생각들이 자꾸 들어서 송아는 금수저들과 만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금수저들이 하나같이 그렇게 나태하고 멍청해서, 이용해 먹기 편한 건 대단히 좋았지만.
‘우리 대표님은 어떨까 궁금하네. 이유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이려나? 그럼 좀 곤란한데……’
송아는 괜히 옷매무새를 한 번 더 정리했다. 오피스 룩이었지만 아찔할 정도로 관능적인 느낌이 강했다.
쫙 달라붙는 미니스커트는 아슬아슬하게 팬티 라인을 가리고 있었고, 타이트한 치마와는 대조적으로 하늘하늘한 느낌의 하얀 블라우스는 단추가 두 개 정도 풀려 있었다.
그냥 있을 때는 몰라도 허리를 살짝 숙일 때, 예를 들어 옆자리에서 술을 따라줄 때면, 가슴골이 은근하게 보일 수 있는 정도였다.
다리에는 검정 스타킹이 신겨져 있었고, 귀에는 평범한 오피스 스타일링에 포인트를 줄 수 있는 블링블링한 귀걸이가 걸려 있었다.
당연히 이런 옷을 입고 회사에서 일했던 건 아니었다. 퇴근하자마자 집에 들러서 갈아입고 온, 말하자면 스무 살 금수저 청년을 꼬시기 위한 송아만의 전투복이었다. 다소 과하게 화끈한 느낌은 있었지만, 혈기왕성한 스무 살을 꼬시기엔 딱 맞았다.
민준과 처음 만나는 거라 이 전투복이 먹힐지 안 먹힐지는 송아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안 먹혀도 그만이었고 먹히면 그만큼 좋은 게 없었다.
‘마침 차 바꿀 때가 됐지……가방도 괜찮은 신상들이 좀 나왔던데……우리 대표님한테 빨대 꽂으면, 그 정도는 우습겠지?’
저번에 사귀었던 남자는 애매하게 금수저라서 무척이나 불만족스러웠다. 물론, 기가 막힌 밀고 당기기로 원하는 건 모두 얻어내긴 했지만, 송아는 그런 노력을 들이는 것 자체가 억울하고 귀찮았다. 일종의 불공정 계약이랄까.
이렇게 예쁘고 똑똑한 여자를 가지고 싶다면, 그만큼 바쳐야 하는 게 당연했다. 돈이랑 마음까지 전부. 아, 김민준은 특별히 MJ인베스트먼트에 대한 정보까지 내놔야 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마찬가지인 이세아한테 줄을 서려면, 그게 꼭 필요했다.
드르르륵.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다미 문이 열렸다. 송아는 짐짓 당황한 척 다급하게 일어나서 방 안으로 들어오는 민준에게 인사했다.
너무 당황해서 미쳐 손으로 가리지 못한 블라우스 속 어여쁜 가슴골이 민준에게 잘 보일 수 있도록 각도를 세심하게 조절해서 허리를 숙이는 게 포인트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표님. 저는 유송아라고 합니다.”
“아……네. 유 팀장님. 아니, 이제는 유 실장님인가요? 이유나 본부장님한테, 유 실장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영광입니다. 대표님.”
“영광은요. 그것보다 어서 자리에 앉으세요. 편하게 밥이나 한 끼 하자고 부른 거지, 유 실장님 불편하게 하고 싶어서 부른 게 아닙니다.”
“아, 감사합니다. 대표님.”
송아는 민준에게 고개를 끄덕 숙이고 자리에 앉았고, 송아의 바로 옆에 붙어있는 테이블의 상석에 민준도 자연스레 자리를 잡았다.
곧 종업원이 들어와서 순식간에 상을 차렸고, 송아는 그동안 곁눈질하며 민준의 모습을 살폈다.
‘하도 여직원들이 난리이길래 어느 정도인가 싶었는데……진짜 엄청나게 잘생겼네?’
한참 민준만 했을 때 몇 번 가본 클럽에서 모델들이나 연예인들도 봤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돈 많고 잘생긴 사람들에게 자연스레 우월감이 배기 마련이었는데, 민준에게서는 그런 메스꺼운 느낌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척 봐도 서글서글하고 착하고, 순해 보이는 인상인 데다, 행동거지 역시 얼굴에서 내뿜는 선한 느낌과 딱 맞아떨어졌다. 남을 먼저 배려하고 편하게 해주는 스타일이랄까.
‘저 얼굴에, 저런 성격. 게다가 금수저라니……확실히 이유나가 푹 빠질만하네.’
눈치가 빠르고 직관력이 뛰어난 송아는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 민준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적어도 송아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민준을 꼬시는데 더욱 진심이 되어 버렸다.
이유나랑 사귀고 있는 건 거의 확실한 것 같았지만, 틈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송아는 민준의 시선이 어느 쪽으로 쏠리고 있는지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저렇게 선해 보이는 민준 역시 엉큼한 수컷인 건지, 시원하게 들어낸 다리와 가슴 쪽을 자꾸만 흘기고 있었다. 다만, 그래도 필사적으로 참으려 하는 게 느껴져서 귀여웠다.
“흠흠……여기 코스가 아주 괜찮습니다. 유 실장님 마음에도 드실 겁니다.”
“물론이죠. 대표님이 직접 사주시는 밥인데요.”
“꼭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요. 하하…”
“후훗. 감사히 먹을게요. 사실 저 퇴근하고 바로 와서 너무 배고팠거든요.”
송아는 민준과 눈을 마주치고 약간은 은근한 느낌의 눈웃음을 쳐주면서, 거의 친구처럼 민준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눴다.
만난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민준 같은 핏덩이를 몇 분 안에 찜쪄먹는 것 정도야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마음이 따듯해서 어떤 말을 해도 잘 받아주는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한껏 친한 척을 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대게, 당기면 당기는 대로 넘어오기 마련이었다.
“유 실장님, 혹시 술도 좋아하십니까? 유 실장님만 괜찮으시면 한 병 시키려고 하는데……아, 저 때문에 억지로 드시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저 술 좋아해요. 대표님. 대표님이 사주시는 공짜 술이면 훨씬 더 좋고요.”
“하하하. 그래요. 그럼 마음 편하게 주문하겠습니다.”
“히히. 네. 대표님.”
서로 마주 보며 부드럽게 미소지은 뒤 민준은 종업원에게 술을 주문했고, 송아는 언뜻 수줍어하는 듯한 얼굴로 자꾸만 민준을 은근하게 흘겼다.
민준이 워낙 잘생겨서 연기하는 게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아니, 이쯤 되니 송아는 자신이 하는 게 연기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구별이 잘되지 않을 정도였다.
꼭 꼬셔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더라도, 민준 같은 남자라면 어떻게든 꼬시기 위해 노력했을 것 같았다. 돈 많고 예의 바르고 착해서, 갖고 놀다 버리기 딱 좋은 남자였으니까.
‘뭐, 질리지만 않으면……아예 살림 차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지도…? 큭. 뭐라는 거야. 유송아.’
어느새 민준과 살림까지 차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송아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결혼이라니. 가벼운 만남을 지향하는 자신에게는 너무나 맞지 않았다. 민준이 이렇게 마음에 들다가도, 자신의 성격상 얼마 못 가서 훅 식어버릴 게 분명했다. 그건 사람의 본성 같은 거라서, 어떻게 고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유 실장님, 왜 그렇게 웃어요? 뭐가 웃겨요?”
“네? 아……아니요. 그냥 좋아서요.”
“네? 뭐가요?”
“…직원들 사이에서 대표님이 엄청난 미남이라는 소문이 자자했거든요. 저는 솔직히 아랫사람들이 으레 해주는 입바른 소리 같은 건 줄 알았는데……진짜 너무 잘생기셔서, 사실 들어오실 때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잘생긴 대표님이랑 일하다니……매일 눈 호강할 생각에 벌써 기분이 좋네요.”
“…크흠. 쑥스러우니까, 너무 금칠해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유 실장님.”
“에이. 저 연기자 아니에요. 대표님. 거짓말이면, 이렇게 리얼하게 못한다고요! 대표님은 제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보이세요…?”
송아는 그렇게 말하고, 결백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민준을 뻔히 바라봤다.
마치 눈싸움을 하는 것 같았는데, 결국 먼저 고개를 돌려서 시선을 피해버린 건 민준이었다.
“흠. 흠……대표가 어리다고 해서 너무 놀리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유 실장님.”
“호호. 네, 대표님. 죄송해요. 잘생긴 대표님이랑 일할 생각에 너무 신나버렸나 봐요.”
“그러는 유 실장님도……”
“네……?”
“아, 아닙니다.”
화아악.
두 사람의 볼이 동시에 불타올랐다. 민준은 말을 삼켰지만, 맥락상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송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상상도 못 한 특별한 멘트라거나 그런 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세게 쿵쾅댔다. 예상치 못할 때 훅 들어온 기습 공격이라서 더 그랬다.
“…”
“…”
송아가 진심으로 당황하자, 내내 매끄럽게 이어지던 대화가 뚝 하고 끊기고 둘 사이에는 짙은 침묵이 흘렀는데, 완전히 어색하기만 한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분명 조용하기만 한데 어딘가 간질간질하고 뜨거워서, 온탕에서 나온 뜨거운 수증기가 방안에 꽉 들어찬 것만 같았다.
“아, 술이……왔네요.”
“……그러네요. 대표님.”
짧지만 강력했던 둘 사이의 침묵이 깨진 건, 민준이 주문한 술 한 병 덕분이었다.
아주 고급스러운 병에 들어가 있는 사케였고, 실제로도 가게에서 가장 비싼 사케였다. 평소의 송아라면 또 열등감이 욱 치밀어 올라서 돈 지랄을 한다고 속으로 욕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능숙하게 술병을 개봉한 민준에게서 술을 받을 때까지도 어딘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심지어 아직 술은 한 잔도 마시지 않았는데도.
“어, 대표님…! 제가 따라드릴게요…!”
“아닙니다. 유 실장님. 술이나 따르게 하려고 유 실장님같이 귀한 분 모시고 온 게 아닙니다. 게다가 요즘 사회적인 분위기도 그렇고……저는 제가 따라 마시겠습니다.”
“제 술잔은 대표님이 채워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대표님 자작하시는 걸 보고만 있겠어요. 술병 이리 주세요. 대표님.”
스윽.
송아는 술병을 향해 팔을 내밀었고, 술병을 맞잡고 있던 민준의 손과 송아의 손이 스치듯이 맞닿았다.
비록 티도 안날만큼 작은 스킨쉽이었지만, 어쩐지 손이 따끔했다. 벌에 쏘이기라도 한 것처럼 찌릿찌릿한 느낌.
“아……”
“…크흠. 그,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유 실장님.”
“아, 네에……제, 제가 따라드릴게요!”
자꾸만 툭툭 얼이 빠지고 있어서, 송아는 어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작업을 쳐야 하는 건 자신이었는데, 역으로 작업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송아는 눈을 껌뻑거리면서 정신줄을 꽉 붙잡고, 민준이 내밀고 있는 술잔에다가 사케를 졸졸 따랐다.
계획한 대로, 민준이 단추가 위에서부터 두 개 풀려 있는 블라우스 사이로 빵빵한 가슴골을 은근하게 볼 수 있는 각도를 유지하면서.
“……흠흠.”
“자, 됐다. 대표님 설마, 건배도 안 하신다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건배합시다. 유 실장님. 우리 회사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도요. 만나서 반가워요. 대표님.”
짠.
술잔이 마주치고, 깔끔하게 비워졌다. 싱그러운 곡물 향이 입안에 깊게 퍼지고, 식도를 부드럽게 감쌌다. 비싼 술은 다 이유가 있었다.
술맛이 너무 좋아서 송아는 자기도 모르게 약간은 아저씨처럼, 감탄사를 내뱉어 버렸다.
“아, 술맛 좋다.”
“큭. 그러네요.”
“…뭐야. 대표님, 왜 그렇게 웃어요?”
“아닙니다. 그냥 술맛이 좋아서요.”
“……저도 좋아요. 술맛.”
두 사람은 대화는 계속해서 그런 식이었다.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웠고, 거북하지 않게 은근하고 촉촉했다.
화하게 취해가는데도 전혀 깨닫지 못할 만큼, 술이 술술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한 마디 두 마디, 음식보다는 대화를 안주 삼아 술을 넘겼고, 테이블 한쪽에는 점점 술병이 쌓여갔다.
평소의 송아라면 혹시나 취해서 실수할까 봐 진즉에 그만 마셨겠지만, 오늘은 뭔가 좀 이상했다. 가슴이 편하고 따듯했다. 이게 술 때문인지, 아니면 옆에 있는 남자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유 실장님은……원래 옷을 그렇게 입고 다녀요?”
그러다 문득, 송아는 술이 확 깨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이 몽롱했던 머리가 순식간에 맑아졌다.
예를 들면, 드려놨던 낚싯대가 갑자기 휙 휘어지는 느낌.
송아는 느껴지는 묵직하고 짜릿한 손맛만으로, 미끼를 덥석 물어버린 물고기가 얼마나 월척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네……? 대표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옷차림이…이상한가요?”
“……아닙니다. 제가 취해서 주제를 넘었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딱히 죄송하다는 말이 듣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
“대표님은……제 옷차림이, 신경 쓰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