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화 〉 197화
* * *
청명했던 하늘이 어느새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하지만 구름을 뚫을 것처럼 높이 솟아있는 빌딩들이 제각기 쏘아대는 화려한 불빛은 오히려 선명해서, 선상에서 보는 맨해튼의 야경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뚜벅뚜벅.
올리비아의 방에서 나온 민준은 맨해튼의 야경을 천천히 구경하며,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겼다.
‘열 번…아니, 열한 번인가?’
올리비아에게 몇 번이나 사정했는지 세는 건 기억력이 아무리 좋아졌어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점심께에서 늦은 저녁이 될 때까지 쉬지 않고 올리비아를 따먹었다. 그래서 아무리 기억을 돌려봐도, 올리비아의 모습은 항상 똑같았다. 언제나 정액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중에는 올리비아의 몸에 달라붙은 정액의 끈덕진 감촉이 싫어서 욕탕으로 데려가 씻기면서 따먹기도 했지만, 여하튼 오늘의 올리비아는 새하얀 정액으로 팍팍 절여진 장아찌 같은 인상으로 민준의 기억에 남아있었다.
“끄윽. 이제 뒤처리를 해봐야지.”
길었지만 너무나 짧게 느껴졌던 환상적인 섹스의 여운을 일렁이는 강물에 희석 시키고, 민준은 선체 가장 아래층에 마련된 비품실로 들어갔다.
끼익.
비품실의 문이 열리자 센서가 알아서 불을 켰다. 환해진 비품실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민준의 시야에는 낮에 공사장 안전 요원을 가장해 자신을 습격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케이블 타이로 온몸이 꽁꽁 묶인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탈출해보려고 용을 썼는지, 처음에 묶어뒀던 자리와는 전혀 다른 자리에서 지렁이처럼 기어 다니고 있었다.
“어이. 그만하고 나랑 얘기 좀 하지.”
“……”
민준이 남자를 불러봤지만, 남자는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지렁이처럼 바닥을 질질 기어 다니기를 멈추지 않았다.
솔직히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탈출하려는 노력이 가상했지만, 민준은 일단 걸어가서 남자의 배를 걷어찼다.
대화할 준비가 안 된 상대에게는, 어쩔 수 없이 폭력이 필요했다.
퍼억!!
“케헥!! 켁!! 끄으으읏……”
민준은 나름 가볍게 찬다고 찼지만, 남자는 죽을 것처럼 아파했다. 남자의 입에서는 침과 피가 끈적하게 섞여서 줄줄 흘러내렸다.
“얘기 좀 하자고.”
“크헤엑. 헤윽……큭, 크큭. 차라리 죽여라. 나는 네깟 놈한테 입을 열 생각이 없으니까.”
“에휴……”
민준은 남자의 반응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무 예상대로인 반응이라 어쩐지 이 상황이 식상하게 느껴졌다.
남자의 정체는 아직 알지 못했지만, 액션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엘리트 전투 요원과 비슷한 날카로운 느낌을 풍겼다. 이런저런 혹독한 훈련과 엄청난 실전을 거친 인간 전투 기계랄까.
아무리 독한 고문을 해도 절대 입을 열지 않는 수준의 독기 정도는, 저 남자에게 너무나 당연해 보였다.
그래서 민준은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남자의 꽉 다문 입을 열게 만드는 방법은, 쉬우면서도 역겨웠다.
‘억지로 상처를 낸 다음에, 정액을 발라서 치료하는 걸 반복하면 되기는 하는데……’
어플을 얻은 이후 처음으로, 앞뒤가 꽉 막힌 상황에 빠진 민준은 표정을 굳혔다.
정자의 치유에 붙어있는 갈증 효과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건, 효과는 강력하지만 무척이나 비인도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점은, 오로지 여자에게만 쓸 수 있는 전략이라는 것이었다.
이걸 남자에게 쓰기 위해서는 강한 역겨움을 참아내고 남자의 몸에 정액을 발라줘야 했다. 게다가 그렇게 해서 정액을 갈구하는 노예로 만든다고 해도 문제였다.
상대는 엘리트 전투 요원. 어느 날 일어나보니 침대에 칭칭 속박당해서, 그대로 똥꼬와 꼬추를 동시에 따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보 좀 캐자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큭, 크큿……죽여라. 너 같은 애송이가 사람을 죽일 깡이 있다면 말이지.”
“아이씨. 안 그래도 심란하니까 좀 닥치고 있어.”
“큭큭, 크헥, 케헥…샌님 주제에 싸움만 잘해서는……진짜 전장에서는 상대방을 죽일 용기가 없는 가짜들부터 죽어가는 법…끄읏!!!”
퍽!!
민준은 자꾸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씨부렁거리는 남자의 턱주가리에 다시 한번 사커킥을 날렸다. 깔끔하게 기절했는지 남자는 잠잠해졌다.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정보만 캐내고, 공구리를 쳐서 강바닥에 버리자니……그건 좀 아깝고.’
민준은 같은 자리를 빙빙 돌면서, 손으로 턱을 만져가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정보도 정보지만 남자의 무력 역시 탐이 났다. 저런 남자를 신도로 만들 수 있다면 참 편할 것 같았다.
아끼는 여자들에게 보디가드로 붙여주거나, 맘에 안 드는 사람의 목을 쓱싹해서 가져오라고 해도 곧잘 해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남자의 몸에 정액을 치덕치덕 발라주고 싶지는 않았다.
“흐음. 흐으으음. 일단은…재능이 있는지만 확인해 볼까…?”
민준은 고민 끝에 남자에게 전도 가능성이 있는지부터 확인해 보기로 했다. 성향이나 성격을 보아하니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재능이 있다면 선지자의 목소리로 잘 구슬려서, 정액을 발라주지 않고도 신도로 만들 수도 있었다.
“…아. 그럼 그렇지.”
하지만 교주의 심안을 켜봐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꼴마초 전투 기계 같은 남자였으니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쉬운 길이 막혔으니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
“하아…이렇게 되면 정말로 피떡으로 만든 다음에 정액 치료를 해주는 수밖에 없는 건가……?”
여자도 아닌데다가 원래 자신을 담그려던 놈이라 패는 것까지는 별 감정 없었는데, 역시나 정액을 발라주는 게 무리였다. 아니, 바르는 거야 다른 사람을 시킨다고 해도 자기 정액이 다른 남자의 몸에 흡수된다는 게 너무나 끔찍했다.
민준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댔다.
“아? 어, 어라……?”
그런데, 그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민준의 눈에 수상한 게 포착됐다. 어디선가 영롱한 빛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민준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서 빛이 터져 나오는 쪽을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는, ‘16’의 모양을 그대로 본떠서 만든 요트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것도 성물인 건가? 어쩐지 느낌이 조금 다른데…?’
심안을 켜자 포착된 영롱한 빛은 그 모형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형은 대단히 두꺼운 강화 유리로 보호된 벽면 속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민준은 모형을 조금 구경하다가 주먹으로 냅다 유리를 쳐버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오오라를 집어놓고 볼 생각이었다.
쾅!!
“허? 이걸 받아내?”
척봐도 비싸 보이는 귀중품을 보관하고 있으니 꽤나 단단할 줄 예상하고 힘을 줘서 쳤는데, 강화 유리는 멀쩡했다.
자존심을 구긴 민준은 두세 발짝 물러났다가 후다닥 달려오면서 강화 유리에 전력 팔콘펀치를 날려버렸다.
콰아아앙!!!
민준의 주먹에 두꺼운 강화 유리가 터져나갔다. 민준은 손을 한번 탈탈 털어주고는 뚜벅뚜벅 걸어서 모형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모형의 손을 댄 채 오오라를 집어넣자마자, 위잉. 하면서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
* [성물 : Heart Of Sixteen]
설명 : 16개의 희귀 광석과 운석, 그리고 공룡의 뼈로 만들어진 요트 모형입니다. 모형으로서 세계 최고 수준의 완성도를 자랑하며, 실제로 물 위에서 운행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사치품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대단히 높습니다.
‘돈과 여자의 신’이 사치의 끝판왕인 이 성물을 소유하길 강력하게 원합니다.
‘돈과 여자의 신’에게 이 성물을 진상품으로 공양할 경우, 특별한 보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진상을 거부하고 성물로써 활용할 경우, ‘돈과 여자의 신’이 당신에게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Heart Of Sixteen’을 진상품으로 바치시겠습니까?
[YES/NO]
——
“…진상품? 이런 건 또 처음 보네.”
휴대폰을 확인한 민준은 메시지를 쭉 읽으며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는 별 고민도 없이 손가락을 움직여서 ‘YES’를 눌렀다.
성물이야 찾아보면 꽤 있겠지만, 돈자갓이 이렇게까지 갖고 싶다고 조르는 물건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받은 것도 많은데, 이 정도 선물이야 못 해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언제나 두둑하게 보상해주는 혜자갓에 대한 신뢰감이 민준의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띡.
민준이 버튼을 누르자, 순식간에 요트 모형이 사라졌다. 고개를 들어 요트 모형이 사라진 걸 확인한 민준은 잠시 놀라다가도 어련히 돈자갓이 잘 가져갔겠거니 싶어서 금방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내려 핸드폰 화면을 확인한 민준은, 주르륵 떠오른 메시지들을 확인하고 진하게 미소 지었다.
——
진상이 완료되었습니다!
‘돈과 여자의 신’이 사도에게 처음으로 받은 진상품에 크게 만족하고 있습니다!
‘돈과 여자의 신’이 특별한 보상을 내립니다.
[교주의 심안] 스킬이 크게 강화됩니다.
[교주의 심안] > [교주의 절대 환영 심안]
* [교주의 절대 환영 심안]
설명 : 교주의 심안을 발동하면 교인으로 적합한 인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교단 번영에 도움이 될만한 특별한 장소와 물건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교주의 심안에 환술 능력이 추가되었습니다. 눈을 마주친 상대에게 원하는 환각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환각의 세계에선 1초가 100일이 될 수도 있고, 태양이 달이 될 수도 있지만, 더 많은 내용이 담길수록 더 많은 복종도를 소모합니다.
——
“캬. 이거지. 역시 우리 혜자갓.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없으셔. 음, 음.”
민준은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막혔던 속이 뻥 뚫린 것처럼 개운했다.
한때 닌자 만화를 자주 봤던 민준에게 눈동자 환술을 절대 생소한 능력이 아니었다. 그리고 환술 능력을 어떻게 써먹어야 하는지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살인 전투 고릴라. 넌 내 꺼야…!’
민준은 몸을 돌려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남자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는 남자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뺨을 매섭게 때려가면서 남자를 억지로 깨웠다.
“고릴라야. 고릴라야. 어서 일어나봐.”
“크윽, 큿……이, 이 미친 새끼가…”
“아까는 배짱 좋게 죽이라고 하더니 고작 뺨 좀 맞았다고 미친 새끼는 무슨……여하튼 너 축하한다. 네가 첫 번째 실험체야. 오늘 집에 가는 길에 로또나 한 장 사는 건 어때?”
“무, 무슨 개소리를……”
갑자기 완전히 미친놈처럼 나오는 민준을 보면서, 메이어 가의 최정예 용병 중 한 명인 레이너는 몸을 잘게 떨어댔다.
오랫동안 전장과 뒷골목을 거쳐오면서 쌓인 경험상, 강한 놈들보다 훨씬 무서운 게 미친놈들이었다.
그리고 레이너가 보기에 민준의 눈은 끔찍한 광기로 물들어 있었다. 아니, 저건 단순한 광기라고 하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했다.
“이, 이게 무슨…! 씨발……너……대체 뭐 하는 새끼야……”
꿀꺽.
레이너는 공포에 질려서 침을 꿀꺽 삼켰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케이블 타이로 묶여있기 때문이 아니라 공포가 온몸을 짓누르고 있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위이이이잉.
레이너를 바라보고 있던 민준의 눈이 느닷없이 터져버릴 것 같이 충혈되더니,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동공이 단순히 위아래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잔상을 만들어 낼 만큼 빠르게 원반 모양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에 제임스는 자신이 드디어 미쳐버린 건가 싶었다.
“이…씨, 씨발. 저, 저리 가…! 미친 눈깔 괴물 새끼…!”
“뭐야. 내 눈이 좀 이상한가? 나는 별 느낌 없는데?”
“아, 아으…! 젠장! 망할! 신, 신이시여…!!”
“신을 왜 멀리서 찾아……바로 앞에 있는데.”
민준은 신의 존재를 부르짖는 레이너를 보며, 어떤 식으로 레이너에게 환술을 걸어야 할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성스럽기 그지없는 신의 존재를 상상한 민준은 신의 얼굴을 자기 얼굴로 바꿔버린 뒤, 레이너와 눈을 마주 보며 그 이미지를 그대로 쏟아냈다.
처음 써보는 거라 마구잡이로 시도해봤을 뿐이었는데, 아무래도 곧바로 정답과 맞춰버린 듯했다.
찰나의 순간, 마치 신과 영접한 사람처럼 레이너의 눈이 일순 뒤집혔다가 이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아, 아……무, 무슨 일이……”
민준의 환술에 걸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하늘로 붕 떠올라 전지전능한 신의 얼굴을 목격하고 돌아온 레이너는, 영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갑자기 왜 신의 얼굴이 보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스치듯 지나간 그 성스러운 얼굴은 민준의 얼굴과 정확히 일치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서 레이너는 민준을 멍하니 바라보며 몸을 잘게 떨어댔다.
“말, 말도 안 돼……당, 당신은 대체…!”
“네가 본 것도 믿지 못하는구나. 어리석은 아이야.”
민준은 환술의 강력한 효과에 흡족해하며, 겉으로는 온갖 근엄한 척을 다 하며 신의 강림을 연기했다.
이런 연기가 처음이라 조금 어설플지도 모르지만, 환술에 더해서 선지자의 목소리까지 적극적으로 활용하니 문제는 없었다. 점점 더 떨리는 동공과 무너져 내리는 레이너의 표정을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걱정 말거라, 아이야. 다시 한번, 저 위에 있는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어렵지 않으니.”
“아, 아아……다, 당신이 정말로…!”
민준은 레이너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한 번 더 환술을 걸었다. 또다시 레이너의 눈깔이 휙휙 돌아갔다.
더 많이, 길게 걸 수도 있겠지만 아직 환술을 쓰는데 복종도가 얼마나 소모될지 모르니 단타로만 찔끔찔끔 걸어주고 있었는데, 레이너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세 번째 환술을 걸자, 레이너의 흔들리던 표정 잠잠해졌다. 하지만 민준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전에는 보지 못한 극도의 존경심과 경외감이 들어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민준은 스킬을 발동시켜서, 레이너의 머리 위에 복종도가 떠오르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민준 예상대로, 레이너의 머리 위에는 ‘51’이라는 숫자가 큼지막하게 찍혀있었다.
민준은 흡족한 마음에 진하게 미소 지었다.
메이어 가문의 최정예 용병이, 무한금욕교의 새싹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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