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 192화
* * *
잠깐의 설전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닭살 커플처럼 딱 달라붙어서 허드슨강을 따라 쭉 걸었다.
민준은 올리비아가 자꾸만 어딘가를 향해 자신을 이끌어 가고 있다는 걸 진즉에 눈치챈 상태였지만, 굳이 티를 내진 않았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릴 정도로 신나 있는 올리비아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저기…! 저기로 가자 민준.”
“왜? 유람선 타고 싶어?”
“아, 아니! 그, 그냥 따라와 봐…!”
올리비아는 거대한 여객선과 유람선, 그리고 개인 요트들이 정착된 선착장 쪽으로 민준을 잡고 걸어갔다.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가장 끝에 정박되어 있는 요트 하나를 가리키며, 민준에게 물었다.
“저, 저거! 민준, 저 요트 어때?”
“뭘, 어때. 딱 봐도 여기 있는 모든 배 중에 가장 비싸 보이네.”
“그치? 사실 저 요트는, 민준 꺼야.”
“…뭐?”
“그……내 선물이야. 달, 달링한테 주는 선물.”
올리비아는 온몸을 꼼지락꼼지락하면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민준을 보며 말했다.
설마하니 요트를 선물로 줄지는 몰랐던 민준은 얼이 빠져 있다가, 올리비아가 거의 속삭이듯 고백을 건네오자 그 즉시 자지가 뻐근해짐을 느꼈다.
올리비아가 몹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물론, 척 봐도 몇천억은 되어 보이는 초호화 럭셔리 요트 때문은 아니었다.
“올리비아.”
“으, 응? 왜, 왜 그렇게 봐…?”
“정말 저 요트가 내꺼란 말이지?”
“아, 응! 그럼! 이미 명의도 다 바꿔놨어. 안에 있는 고용인들 급여도 내 용돈에서 알아서 나가니까…달, 달링은 그냥 아무런 신경도 쓰지 말고 요트를 타면 돼.”
“지금 당장 탈 수 있어?”
“응! 당연하지.”
“그래? 그럼 지금 타러 가자.”
“좋아! 내가 안에 뭐가 있는지 소개해 줄게!”
올리비아는 요트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 민준의 반응에 몹시 기뻐하며, 앞장서서 민준을 요트 ‘16’을 향해 이끌었다.
미국에서는 어린이에서 숙녀가 되는 여자의 16살 생일을 크게 챙기는 문화가 있었는데, 이 ‘16’ 요트 역시 제레미가 올리비아의 16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몇 년 동안이나 공을 들여 준비한 선물이었다.
특급호텔의 최고급 스위트 룸보다 훨씬 더 호화로운 10개의 방과 헤어샵, 마사지샵, 디스코텍, 레스토랑, 개폐식 수영장, 농구장, 테니스장, 영화관 등이 구비되어 있었고, 2개의 헬리콥터와 3개의 초고속 보트, 그리고 비상용 미니 잠수함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창문은 모두 방탄유리에 파파라치 방지를 위한 레이저 디펜스 시스템까지 있는 이 요트 ‘16’은, 메이어 가문이 운영하는 기업들이 협력해 만들어낸 세계 탑티어급 슈퍼 요트로, 가격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이 특급 요트 ‘16’을 그냥 아끼는 요트쯤으로 민준에게 소개했고, 민준 역시 바다에 떠다니는 호텔 정도로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안에 침대나 샤워 시설 같은 것도 다 있는 거지…?”
“당연하지!”
“그래. 어서 가자.”
민준과 올리비아는 싱글벙글 요트로 향했다. 하지만 요트 선착장 쪽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웬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당황하며 일단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길이 전부 막혔는데?”
“이, 이상하다? 따로 연락이 온 건 없었는데…?”
이런 일이 있으면 요트 안에 있는 사용인들이 진즉에 연락을 해줬을 텐데,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한 올리비아는 크게 당황했다.
민준에게 어서 요트를 구경시켜 주고 싶은데, 무식하게 길목을 전부 다 막아놓고 공사를 하는 놈들 때문에 일이 틀어져 버릴 것 같았다.
화가 난 올리비아가 입구를 통제하고 있는 안전 요원에게, 싸늘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물론, 그 사이에도 민준의 팔짱은 놓지 않았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요트에 타야 하는데, 길을 막고 있으면 어떻게?”
“죄송합니다. 하지만 급한 공사라…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니…아무리 급해도 길을 전부 다 막아놓으면 어떡하냐고! 이거 책임자 누구야! 뉴욕 시장이야?!”
“죄송하지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 너 나 알지? 나 지금 시장한테 전화 건다? 당장 공사 그만두게 해줘?!”
“……”
올리비아가 인형 같은 눈을 부라리며 시장까지 언급해가며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지만, 안전 요원은 요지부동이었다.
다만, 입구에서 일어나는 소란에 공사가 잠시 중단되고 인부들이 민준과 올리비아를 쳐다봤는데, 민준은 인부들과 눈빛을 마주한 그 즉시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오는 걸 느꼈다. 등골이 쭈뼛 솟아올랐다.
‘씨발……이 새끼들 눈빛이 왜 이래?’
마치 센트럴 파크에서 만났던 고릴라들처럼 흉흉한 눈빛. 일반인들은 절대 낼 수 없는 은은한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점점 상황이 싸해지는 걸 느낀 민준은, 조심스럽게 인부들을 경계했다.
‘확실히 이상해. 이거 아무래도……아침에 만났던 그놈들이랑 한패 같은데…?’
인부들이 전부 다 백인인 것은 그렇다고 쳐도, 하나같이 2m쯤 되어 보이는 장신에 터질듯한 근육까지 장착하고 있었다.
게다가 무슨 공사인지는 몰라도, 인부들이 들고 있는 공구들이 하나같이 제각각이었다.
멍키스패너나 오함마, 해머 드릴, 어떤 놈은 아예 기다란 쇠 파이프를 한 손에 쥐고 있었다. 건전한 공사를 한다기보다는, 사람을 공구리 치기 위해 준비된 흉기를 들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무차별적으로 클레임을 걸고 있는 올리비아를 볼 때는 동네 아저씨처럼 온화한 눈빛을 하는 녀석들이, 자신을 볼 때만 살기를 띤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발…뭔지는 몰라도…’
상황이 안 좋다는 걸 느낀 민준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고 어플을 실행시켰다.
맨몸으로 싸우면 모르겠는데, 인부들은 사람 두개골쯤은 쉽게 함몰시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공구들을 들고 있었다. 딱히 맞아본 적이 없어서 지금 저들과 싸우면 얼마나 다칠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지금 상태로도 전부 때려눕힐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민준은 더욱 안전한 길을 선택하고 싶었고, 어플을 키자마자 미친 듯이 신체 강화를 하기 시작했다.
빅스를 워낙 싸게 인수한 데다, 레깅스까지 전부 복사해놓은 상태라 돈이 꽤 쌓여있었다.
적당히 할까도 했지만, 어차피 돈은 또 벌면 되니까 그냥 모조리 쏟아부었다.
1억, 100억, 1,000억, 그리고 1조. 돈이 순식간에 증발하고 있었지만, 그 덕에 민준의 온몸에서는 힘이 흘러넘쳤다.
“어이. 핸드폰 쓰지 마. 신고라도 하려는 건가?”
“뭐, 뭐야! 지금 내 달링한테 뭐라고 한 건데? 너 미쳤어?”
“…핸드폰 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귓구멍이 막혀버린 건가? 아니면 내 말이 우스워?”
“잠, 잠깐만! 뭐 하는 건데!! 달링한테 가까이 가지 말란 말이야…!!”
앞에서 소란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지만, 민준은 신체 강화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1조가 넘어가는 돈을 쏟아부은 신체 강화가 끝났을 때, 띠링. 하는 경쾌한 효과음과 함께 메시지가 한 통 날아왔다.
오랜만에 보는 히든 퀘스트 완료 메시지였다.
——
[히든 퀘스트 : 정원사처럼 조, 경, 해.]
* 연속된 신체 강화로 1조 이상의 돈을 소모하기. (O)
보상 : 스킬 [교주의 심안], [교주의 오오라 강화] 강화.
전투를 앞두고 신체 강화에 돌입하였습니다. 상황에 맞게 스킬이 추가로 강화됩니다.
교주의 심안이 강화됩니다. 발동 시, 어떤 복잡한 싸움에서도 최적의 투로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교주의 오오라가 강화됩니다. 발동 시, 오오라에 물리력이 부여됩니다. 오오라를 칼날처럼 쓴다면 쇳덩이도 무처럼 잘라낼 수 있고, 방패처럼 쓴다면 총알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 이외에도 다양한 활용이 가능합니다.
——
민준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꼼꼼하게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랜만에 깨버린 히든 퀘스트의 보상이, 상상 이상이었다.
“아악…! 너, 너 지금 날 밀친 거야…?! 미, 미쳤어?”
“…숙녀분은 잠시 비켜 계십시오.”
“뭘 비키라는 거야! 우리 달링한테 손끝 하나 대기라도 해! 이 고릴라야!!”
“……”
앞을 막아선 올리비아가 다치지 않도록 옆으로 살살 밀어놓고, 민준을 향해서 다가가는 안전 요원의 얼굴이 강하게 찡그려졌다.
그는 사실 안전 요원이 아니라, 메이어 가의 자랑스러운 베테랑 용병이었다. 인부들로 위장해 있는 모든 용병 중에서도 가장 경력이 길었고, 실력도 뛰어난 대장급 용병이었다. 그렇게 한평생을 메이어를 섬기며 살아왔는데, 고작 저런 기생오라비 때문에 올리비아 아가씨에게 ‘고릴라’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니.
민준을 바라보는 용병의 눈이 더욱 사납고 거칠어져만 갔다.
우뚝.
“핸드폰 내놔. 이 좆만 한 새끼야.”
용병이 민준의 앞에 서서 위협적인 기세를 발산하며 으르렁거렸다.
애초에 억지로 트러블을 일으켜서 민준의 곱상한 얼굴을 흠씬 두들겨 준 뒤, 팬티 바람으로 바닥에 무릎 꿇린 채 머리를 박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게 만드는 것이 이번 작전의 개요였다.
올리비아의 앞에서 민준의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을 낱낱이 까발릴 생각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폭력을 참을 필요가 없었다.
민준의 얼굴을 곤죽으로 만들어 줄 상상을 하고 있는 용병의 온몸에서, 거칠고 강력한 투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핸드폰? 내가 왜?”
“내놓으라면 내놔. 당장 내놓지 않으면, 그 곱상한 얼굴을 피떡으로 만들어 주지.”
“얼씨구. 안전 요원이 아니라 깡패 새끼였네. 뒤에 연장 들고 몰려오는 놈들도 한패인 것 같고…너희 정체가 뭐냐? 아침에 공원에서 지랄한 놈들도 너희지?”
“……”
“뭐야. 정답, 맞춰버렸네? 큭.”
“…이 좆같은 새끼가!!”
쉬이이익!
안 그래도 밉상이었던 민준에게 얄밉기 그지없는 도발을 당하자 극히 분노한 용병의 입에서는 험악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휘둘러진 용병의 주먹은 빠르고 강력했으며,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최단 거리로 민준의 얼굴로 쏘아진 초음속 미사일 같은 파괴적인 주먹. 하지만 민준은 허리를 젖히는 것만으로 가볍게 주먹을 피해냈다.
그러나 이미 민준이 무술에 상당한 일가견이 있다는 걸 보고 받은 용병은 당황하지 않고 연이어 주먹을 휘둘렀다.
왼쪽, 오른쪽. 공기를 펑펑 찢는 소리를 내며 주먹이 정신없이 날아들었다.
민준은 피할까 반격할까 고민하다가, 호기심에 교주의 심안을 켜봤다. 안 그래도 강화된 스킬 효과가 궁금했는데 마침 실전 격투에서 써볼 기회였다.
‘오. 이런 식으로 보이는 거구나?’
마치 야구 게임에서 투구 지점을 예측해주는 것과 비슷한, 직관적인 시스템이었다.
민준은 교주의 심안을 켜자마자 시야에 떠오른 빨간 실선들이, 주먹이 날아오는 궤도라는 것을 곧바로 캐치 할 수 있었다.
슉. 슈, 슉.
민준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위협적으로 사방을 조여오는 빨간 선들을 날렵하게 피하고, 미처 피하지 못할 만큼 날카로운 궤적으로 들어오는 주먹은 손으로 튕겨내며 오히려 용병 앞으로 전진했다.
소나기처럼 떨어지는 주먹세례를 뚫고 앞으로 다가오는 민준의 움직임에 당황한 용병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기 위해 백스텝을 밟았지만, 그 전에 민준의 어설픈 어퍼컷이 용병의 턱주가리에 호쾌하게 꽂혔다.
물론, 자세가 어색하다는 거지 그 안에 담겨 있는 힘은 사람의 턱뼈를 부숴놓기에 충분했다. 민준이 혹시라도 용병이 죽을까 봐 힘을 많이 뺀 상태임에도 그러했다.
“끄흣…!!”
퓨슈우웃. 털썩.
어퍼컷에 맞은 용병이 만화처럼 뒤로 날아가더니 바닥에 널브러졌다. 강냉이가 모두 털려서 입안에서는 진득한 핏물이 터져 나왔고, 눈에서는 흰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단 한 방에 케이오였다.
“민, 민준…! 민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상황에 민준을 향해 슬금슬금 몰려들고 있던 용병들이 단체 스턴에라도 걸린 듯 우뚝 멈춰 섰다.
올리비아는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용병들이 얼타고 있는 틈을 타 민준에게로 우다다다 뛰어갔다.
“뒤에 물러서 있어. 올리비아. 조금만 기다리면 다 처리해 줄게.”
“하, 하지만 저 사람들…! 무, 무서운 걸 들고 있는데…! 일단은 그냥 도망치고…!”
“괜찮아. 도망쳐야 하는 건 우리가 아니야. 저 약골 새끼들이지.”
민준은 용병들에게 도발하듯이 말을 던졌고, 대놓고 무시당한 용병들의 얼굴을 악마처럼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고작 동양에서 온 이름 없는 사업가에게, 열 명이 넘는 전투의 프로들이, 전쟁터의 사신이라고 불리는 메이어 용병들이 싸잡아서 모욕당하고 있었다.
“…씨발. 나는 그냥 공구 쓰련다.”
“그래……퇴직하게 된다고 해도……저 새끼만은 담그고 가야겠어.”
“솔직히…웬만해선 깔끔하게 제압할 수도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용병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들고 있던 공구를 더욱 꽉 잡아 쥐었다. 올리비아에게 큰 트라우마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흉기는 단순히 위협용으로만 쓰고, 되도록 타격기나 관절기로 깔끔하게 민준을 제압하라는 지시 사항이 있었다.
그러나 용병들은 민준이 어퍼컷 한 방으로 대장급 용병을 녹다운 시키는 걸 목격한 상태였다. 조금 과하게 손을 쓴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메이어 용병을 무시한 민준을 피떡으로 만들어 주고 싶은 욕심도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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