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화 〉 19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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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장. 아가씨의 표정을 보십시오! 잔뜩 경직된 게, 싫어하는 티가 역력합니다.”
“흠. 확실히. 아가씨가 저 아시안 남자에게 푹 빠졌다는 정보는 거짓일지도 모르겠군.”
분명 올리비아의 얼굴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하지만 억지로 손을 놓기는커녕 민준에게 점점 달라붙고 있다는 걸 뻔히 보고 있음에도 용병들은 애써 그 사실을 무시했다.
중세 시대의 기사들 그 이상으로 메이어 가문에만 충성하는 용병들은, 천사 같은 올리비아가 곱상한 기생오라비 같은 동양인에게 넘어가는 걸 인정할 수가 없었다.
“슬슬 오는군. 준비해라.”
“네. 조장.”
그들은 민준과 올리비아를 지켜보다 말고, 산책로로 걸어갔다.
주어진 작전은 단순했다. 민준에게 의도적으로 시비를 걸어서, 올리비아 앞에서 못난 꼴을 보이게 하는 것.
양아치 짓에 가까웠지만,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뒤탈 없이 깔끔하게 협박해서 끝내던 지난날과 달리, 아가씨 앞에서 저 동양인이 얼마나 무력하고, 열등한지 똑똑히 보여줄 수 있었으니까.
‘…뭐지? 저 좆같은 눈빛은?’
한편, 민준은 알콩달콩 올리비아와 산책 중에, 마주 오는 용병들을 발견하고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거의 2m쯤 돼 보이는 건장한 백인 남성 두 명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기세라던가 눈빛이 매우 좋지 않았다.
‘제기랄. 설마 말로만 듣던 퍼킹 레이시스트인가…?’
요즘 아시아인 대상 혐오 범죄가 판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낮의 센트럴 파크도 안심할 수 없는 수준인 건 명확했다.
민준은 올리비아가 눈치채지 못하게끔, 조심스럽게 용병들을 경계했다. 주먹이라도 날리면 바로 피한 다음에 카운터 펀치를 먹여줄 생각이었다.
“큭. 눈치는 좋네.”
“약자로 살아가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조장.”
싸움에 이골이 난 전문 용병들은 자신들을 살피는 민준의 눈빛과 살짝씩 경직된 몸만 보고도, 곧바로 민준이 자신들을 경계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상관은 없었다. 자신들을 발견한 즉시 도망치지 않은 이상, 이미 작전은 완료된 거나 다름없었다.
체격은 나름대로 괜찮아 보이지만, 어차피 일반인이었다. 그들에게 일반인 하나 담그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오늘 제대로 한 번 혼나보자…얼굴만 믿고 깝치는 제비 새끼.’
다가오는 민준을 쏘아보던 조장은 속으로 민준을 한 번 더 씹어주고, 민준이 지근거리로 다가왔을 때 강하게 어깨빵을 쳐버렸다.
매일 지옥 같은 훈련으로 단련된, 벤치 200kg을 밥 먹듯이 들어 올리는 괴물 같은 상체의 힘을 모두 실어서, 단번에 퍽!!
“악!! 제기랄!!”
털썩.
하지만 정작 쓰러진 건 민준이 아닌 조장이었다. 조장은 산책로에 철퍼덕 앉아서 자기 어깨를 감싸 안았다. 상황 파악이 잘되지 않았다.
‘내…내가 지금 뭐랑 부딪힌 거지…?’
분명 사람의 어깨를 쳤는데, 무슨 철근에다 들이박힌 느낌이었다. 어깨가 탈골됐는지 삐걱거렸다.
조장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깜짝 놀란 표정으로 민준을 쳐다봤고, 민준은 그런 조장을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비릿하게 웃어주었다.
“아, 쏘리. 괜찮습니까? 제가 미처 피하지 못했네요.”
민준은 올리비아를 의식해 한껏 착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입매가 기괴하게 비틀린 채 실실 쪼개는 것 같은 민준의 표정은 사람을 머리끝까지 열 받게 하기에 충분했다.
‘철괴! 천근추! 에라~ 이 새끼야. 너희가 동양 무술의 신비함을 알겠냐? 감히 누구한테 어깨빵이야? 무례한 양키 쉐리들.’
스윽.
민준은 허리를 숙이고 넘어진 조장에게 손을 내밀면서, 속으로는 얼큰하고 구수한 한국식 욕지기를 뱉어댔다.
놀리는 게 분명한 민준의 표정과 행동을 보고 조장은 즉시 극대노 상태에 들어갔다. 어쩐지 속이 쓰릴 만큼 화가 나서, 어깨에서 오는 고통도 생각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 이 미개한 원숭이 새끼가…!!”
쉬익.
조장은 엉덩방아를 찧은 그 상태에서도, 매섭게 주먹을 휘둘렀다. 타점도 완벽했고 힘도 제대로 실린 주먹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한껏 방심한 채 넘어진 자신을 부축하기 위해서 손을 내밀고 있는 상태. 당장이라도 이 주먹이 민준의 턱주가리를 으스러트릴 것 같았다.
하지만 민준은 여유롭게 몸을 빼내서 조장의 주먹을 피해버렸다. 조장은 당황했지만 프로답게 금방 마음을 진정시키고, 주먹을 휘두른 반동을 이용해 날렵하게 바닥에서 일어나 전투 자세를 취했다.
“꺄앗! 민, 민준!”
“괜찮아. 올리비아. 그냥 미친놈들인가 봐.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 그냥 도망가자.”
“괜찮으니까. 조금만 물러서 있어.”
민준은 올리비아를 조금 뒤로 물린 뒤, 이미 전투태세를 취하고 있는 용병들을 돌아봤다.
그리고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희 뭐냐? 무슨 KKK단이야? 다짜고짜 어깨빵에, 주먹질에. 완전히 정신 나간 양키 새끼네. 이거.”
“닥쳐! 좆같은 원숭이 새끼!”
“염병. 코쟁이 새끼가 대낮부터 지랄이네. 에라~ 양키 고 홈! 이 새끼야!”
“이익…! 이 좆같은 새끼가…!!”
조장은 ‘양키 고 홈’이라는 단어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치 집으로 꺼지라는 듯한 뉘앙스에 어이가 없어서,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집에 쳐들어온 게 누군데, 집에 가라니. 또라이도 이런 개또라이가 없었다.
타다다닷.
두명의 용병들이 폭발적인 스텝으로 동시에 민준에게 돌진했다. 화가 나 있긴 했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우월한 피지컬을 이용해서 민준을 넘어트린 뒤, 살인 관절기로 단숨에 제압할 생각이었다.
“어휴. 이 무식한 새끼들. 무술을 모르네. 무술을.”
한편, 민준은 여유롭게 용병들이 다가오는 걸 바라보다가, 사정거리 안으로 그들이 들어왔을 때가 돼서야 양손을 펼쳤다.
그리고 순식간에 팔을 뻗어서, 달려오는 속도에 맞춰 용병들의 가슴팍에 ‘지건’을 꽂아줬다.
지건은 손가락(?)이 마치 총(gun)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학창 시절에 수도 없이 봐온지라 어렵지 않게 구사해낼 수 있었다.
“지건!”
“커헉!!”
“카학?!!”
멧돼지처럼 맹렬하게 돌진하던 용병들이 민준의 지건에 맞아 가슴팍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마치 총알이 가슴팍을 뚫고 간 것만 같은 고통이었다. 가슴 한가운데에 구멍이 꿇리기라도 한 듯 숨이 잘 쉬어지질 않았다.
분명 가드를 단단히 하고 달려들었건만, 어떻게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민, 민준!!”
한편 핸드폰을 들고 제레미에게 당장 연락하려던 올리비아는, 순식간에 건장한 고릴라 두 명을 처치해 버리는 민준을 보고 눈을 똥그랗게 떴다.
무서워서 덜덜 떨리고 있던 손이 언제 그랬냐는 듯 진정되면서, 가슴속에서는 다시 한번 민준에 대한 사랑이 몰아쳤다.
민준은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도 여자를 보호해줄 수 있는 남자였다. 얼마나 믿음직한지, 뒷모습만 봐도 황홀했다.
“됐다. 가자. 올리비아.”
“아, 응!! 근, 근데 이, 이 사람들 구급차 안 불러줘도 돼? 엄청 아파 보이는데……”
“스스로 자초한 건데 뭘…아, 참. 올리비아. 인종차별이 이래서 무서운 거야. 동양 무술은 진짜거든.”
“그, 그러니까! 어, 어떻게 그렇게 잘 싸워? 민준은 어디에서 무술을 배운 거야? 완, 완전 영화 같았어!”
“뭐, 가끔 구경하다 보니까…어쩌다 힘의 원리를 깨달아 버렸달까?”
“우, 우와!! 대, 대단해엣!!”
뚜벅뚜벅.
그렇게 민준과 올리비아는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유유히 센트럴 파크의 산책로를 걸어갔다. 원래는 깍지를 끼고 있었지만, 이제는 팔짱이었다. 가벼운 소란은 오히려 둘의 사이를 더욱 끈끈하게 만들어줄 뿐이었다.
“크흣…!! 저, 저…”
“크헤엑. 죽, 죽인다…!”
침을 질질 흘리며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진 용병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머리에 혈관이 터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흠뻑 패서 망신을 주려고 했더니, 오히려 처참하게 맞아버리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직 끝은 아니었다.
용병대는 많았고, 그들은 단지 한 개의 조일 뿐이었다. 올리비아 앞에서 민준을 망신 주기 위한 작전은 계속될 예정이었다.
다만, 용병대의 작전이 그들이 계획한 대로 흘러갈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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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럴 파크에서의 산책은 환상적이었다. 중간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같이 있으면 있을수록, 올리비아는 민준에게 흠뻑 빠져들었다.
따듯한 손에, 보폭이 작은 걸 배려해주는 여유로운 발걸음에,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봐주는 눈빛에 젖어 들어가는 시간.
원래는 노숙자들이나 쓰레기가 넘쳐나는 공영 공원을 다니지 않는 올리비아였지만, 민준과 함께라면 어디든 좋을 것 같았다. 민준에게라면 뭐든지 해주고 싶었다.
“핸드폰을 왜 그렇게 열심히 봐? 기다리는 연락이라도 있어?”
“응? 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을 마치고 출출해진 두 사람은, 올리비아가 자주 다니는 파인 다이닝에 와서 배를 채웠다.
별 세 개짜리 식당답게 음식은 무척이나 맛있었다. 그런데 올리비아는 음식을 맛있게 먹다가 자꾸만 초조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확인하곤 했다.
민준은 의아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래…? 디저트 나온 지도 모르고 보길래……나 말고 딴 놈이랑 연락하나 했지.”
“그, 그럴 리가! 절대 아니야! 나, 나는…!!”
“나는…?”
“으우……으아……”
“큭, 됐어. 디저트나 먹자.”
“으, 응.”
올리비아는 의기소침해져서, 힘없이 디저트로 나온 푸딩을 들고 영혼 없이 퍼먹기 시작했다. 달콤한 맛이 부드럽게 입안을 감쌌지만 잘 느껴지진 않았다.
머리를 콩 쥐어박고 싶은 기분이었다. 민준이 저런 식으로 능글맞게 나와버리면, 할 말도 못 하고 어버버 거리는 바보가 되어버렸다.
너밖에 없다고 말하면 될 텐데, 그 짧은 말이 그렇게 어려웠다.
주륵.
“아…”
영혼을 빼놓고 푸딩을 먹던 올리비아의 입에서, 푸딩 위에 뿌려진 캐러멜 소스가 흘러나왔다.
올리비아는 몹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엄격하게 식사 예절을 교육받고 자라서, 이런 실수를 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하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입안에 있는 걸 흘리다니. 너무 부끄러워서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에효. 식사에 집중 안 하고 핸드폰 보니까 그렇지. 자, 이리 와봐.”
“으, 으브…”
올리비아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린 채 가만히 기다렸다. 아마도 민준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주려는 것 같았다. 부끄럽지만, 그만큼 행복했다. 수치를 무릅쓰고 입안에 있는 푸딩을 조금 더 흘려버리고 싶은 지경이었다.
스윽.
“으, 으읏…!”
하지만 올리비아의 예상보다 민준은 언제나 한 발짝 더 앞서 있었다.
민준은 냅킨이 아닌 맨 손가락으로 올리비아의 입꼬리를 타고 흘러내린 끈적한 캐러멜 소스를 쓱 훑어냈다. 그리고 아기 입가에 붙은 밥알 떼먹듯, 자기 입으로 가져가서 가볍게 쏙 빨아들였다.
“아, 아우! 더, 더러워!”
“뭐가 더러워. 맛만 있는데.”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 내 입에 들어갔던 거잖아…! 그, 그런 것까지 먹으면 어떻게!”
“그래. 그러니까 더 맛있네.”
“으으……바, 바보야! 바보, 바보, 바보…!”
얼얼할 만큼 달콤한 푸딩의 맛이 밋밋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올리비아는 차마 민준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바닥을 보며 바보라고 외쳐댔다.
현기증이 온 것처럼 머리가 핑 돌았다. 피가 아니라, 뜨겁게 녹은 캐러멜 시럽이 온몸에 돌고 있는 기분. 입에서는 절로 달큰한 숨이 뱉어졌다.
“하으, 하아……”
그러면서 올리비아는 자꾸만 매끈한 허벅지를 끈적하게 비벼댔다. 터질 것 같은 가슴도 가슴인데, 하복부에서 오는 감각 역시 미치도록 이상했다. 근질근질해서 어쩐지 참을 수 없게 돼버릴 것만 같았다.
위이잉.
“올리비아. 기다리던 연락이 왔나 본데?”
“아, 아…응, 연, 연락. 연락이 왔나 봐…”
거의 죽어가던 올리비아를 구한 건, 마침내 도착한 문자 한 통 이었다.
올리비아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문자를 확인했다. 이내 문자의 내용을 확인한 올리비아의 입술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호선을 그려냈다.
핸드폰 화면과 민준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힐끔거리며 머뭇거리던 올리비아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있, 있잖아. 민준.”
“응. 왜.”
“밥 다 먹으면…허, 허드슨강을 보러 가자…! 거, 거기도 엄청 유명해. 영, 영화로도 나온 적 있어.”
“…괜찮겠어? 산책할 때 꽤 많이 걸었잖아. 발 아플 텐데?”
“괜찮아! 괜찮으니까 가자. 꼭 가야 해. 응?”
“…뭐, 그래.”
“응! 고, 고마워!”
올리비아는 민준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해왔던 대로 기품있게, 그러나 조금은 더 빠르게 수저를 움직여가며 푸딩을 금방 해치웠다.
민준 역시 올리비아의 속도에 맞춰서 식사를 마쳤고, 두 사람은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허드슨강으로 향했다.
커플들이 넘쳐나는 공원에서야 별거 아니었지만, 팔짱을 끼고 도심을 돌아다니니 몰려드는 시선이 장난 아니었다. 민준과 올리비아의 엄청난 비주얼 때문에 더욱 그랬다. 올리비아는 구경거리가 된 것 같아서 무척이나 부끄러웠지만, 그럴수록 민준의 팔을 더욱 파고들었다.
“너무 붙지 마. 올리비아.”
“미, 미안! 혹시 불편해…?”
“아니. 네 살결이 자꾸 느껴지잖아.”
“싫, 싫어? 나, 나는 좋은데……”
“싫다는 게 아니라……”
“몰, 몰라. 나는 이거 절대 못 놔!”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