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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플쓰는 밤의 황제-190화 (190/270)

〈 190화 〉 190화

* * *

쿵쿵­!

올리비아는 집무실 바닥이 부서져라 쿵쿵대며 방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제레미에게 마지막 통보를 날렸다.

“지금 당장 카드 안 풀어주면, 나 정말로 밥 안 먹을 거야!! 확 굶어서 죽어버릴 거라고!!”

“아, 아가야! 알겠으니까 이리 오렴. 또 어딜 나가려고 그러는……!!”

쾅­!!

올리비아는 제레미를 협박하기 위해 일부러 더 씩씩대며, 제레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제레미에겐 조금 미안했지만, 오랜 경험을 통해 이렇게 강하게 나와야 아빠가 더 약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차피 겪어야 될 일이야……나중에 민준과 결혼하려면 아빠의 저 똥고집을 미리미리 꺾어놔야……잠깐만. 결, 결혼?’

우뚝­.

올리비아는 생각을 하다 말고, 목각 인형이 된 듯 그 자리에 딱딱하게 멈춰 섰다. 이내 올리비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불그레해졌다.

우연히 민준과의 결혼 생활을 상상해 봤을 뿐인데, 몸과 마음이 뜨거운 불판 위에 올려진 것처럼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열을 식히기 위해 손으로 부채질도 해봤지만, 어림도 없었다. 달아오르고 또 달아올라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릴 것만 같은 기분.

“하아­……”

올리비아의 입에서 달뜬 숨이 뿜어져 나왔다. 어느새 머릿속에서는 민준이 호텔 방에서 해줬던 조금은 거칠고 강압적인 스킨쉽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때는 정말이지, 온몸이 정전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가볍게 만져줬을 뿐인데, 온몸에 신경이 민준의 손길을 따라 요동치는 것만 같았다.

그때 민준이 보여줬던 야수 같은 눈빛, 그리고 거친 호흡까지도. 올리비아는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아마 그대로 민준이 더 심한 짓까지 했다면……그대로 민준의 아래에 깔려서….

“무, 무슨­! 으읏…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올리비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털어냈다. 절대 성관계를 쉽게 가져선 안 된다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교육받아온 올리비아였다.

그건 올리비아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가문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 덜컥 임신이라도 해버린다면, 가문이 난리가 날 게 불 보듯 뻔하니까.

그래, 아무리 민준이 좋아도 그렇게 쉽게 성관계를 가질 수는….

“아니…?! 오, 오히려 좋을지도…?!”

콰광­!!

올리비아의 머릿속에 벼락이 내려쳤다. 사람들이 흔히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운명의 순간이었고, 올리비아는 감히 진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거대한 깨달음을 목도하고 온몸에 닭살이 돋아오는 걸 느꼈다.

“어, 어차피……결, 결혼할 사람이니까……홧김에 임신해 버리면…! 아빠도 어쩔 수 없겠지…?! 동, 동양인이면 어쩔 거야…! 내 아이의 아빠인데…! 아빠가 그렇게 원하는 손주를 안겨줄 남자인데!”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던 올리비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러더니 올리비아는 비밀 요원처럼 잽싸게 움직여서 핸드폰을 꺼내 들고 민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어쩐지 민준이 전화를 받아줄 것만 같았다. 민준과 함께하는 핑크빛 미래를 그리다 보니 너무 기쁘고 행복해져서 혼자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예감이 그랬다.

‘아니. 이건 운명이야! 민준과 나는 운명의 실로 이어져 있으니까……느낄 수 있는 거야!’

띠리링­. 띠리링­.

세상에서 가장 떨리는 벨 소리가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럴수록 올리비아는 점점 조여오는 압박감에 식은땀을 흘려댔다.

운명. 운명. 운명­.

올리비아는 속으로 같은 단어를 되뇌었다.

그리고 마침내,

딸깍. 하고 운명이 연결됐다.

“여, 여보세요…!! 민준! 민준…! 나, 나 올리비아야. 듣고 있어?”

­응. 들려.

“…끅!”

드디어 들려온 민준의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안 그러면 ‘꺅­!’하고, 당장이라도 소리를 질러버릴 것 같았다.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어, 어디야? 호텔? 지금 뭐 해?”

­…호텔.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해. 그리고 올리비아….

“응…? 뭐, 뭔데?”

갑자기 민준의 목소리가 진지해지자, 올리비아는 심장이 또다시 조여오는 걸 느꼈다. 하늘에 오른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지옥 끝까지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올리비아는 너무 무서워서 차라리 이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정신병자 같았지만, 정말로 마음이 그랬다. 민준이 무슨 말을 할지 너무 두려웠다.

설마 어제 했던 말처럼,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몰라. 가슴이 너무 아파서 죽을지도 몰라­.

­…어제 일은 미안했어. 아무리 그래도 뺨을 때려선 안 됐는데……사과할게. 진심으로.

하지만 수화기 너머서 들려온 버터보다 더 부드럽고 꿀보다 더 달콤한 민준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달콤함이 조금씩 온몸에 퍼지는데, 이게 정말 현실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올리비아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무심결에 민준에게 다시 물었다.

“…응?”

­미안해. 올리비아. 화가 나서 뺨을 때리고, 네 전화도 다 무시해버려서.”

“……”

주르륵­.

올리비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제 민준에게 뺨을 맞고 나서 온몸에 수분을 다 쥐어짜듯이 눈물을 흘려댄 올리비아였지만, 이번 눈물은 조금 달랐다. 눈물을 흘리는데 기뻤다. 슬퍼서 흘릴 때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달콤했다. 이런 눈물이라면, 평생이라도 좋았다.

“흐, 흐아­.”

­뭐야. 너 설마 울어?

“아, 아니야…! 흣, 흐응­. 아, 아니야. 민준. 나 안 울어. 절대 안 울어. 미, 미안해.”

­뭐래……집에는 잘 갔냐? 잠은 잘 잤고?

“으, 응! 잘 들어갔어. 잠도…잠도 잘 잤어!”

­그래, 다행이다. 그럼 이만…

“잠, 잠깐! 잠깐만…!!”

올리비아는 속절없이 전화를 끊어버리려 하는 민준은 다급하게 붙잡았다. 이미 몸과 마음이 전부 민준에게 가 있었는데 이대로 만나지도 못하고 하루를 보내버리면, 정말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어떻게 해서든 민준을 보고 싶었다. 봐야만 했다.

­아, 귀청이야…왜?

“미, 미안…! 근데 혹시 지금 시간 있어? 오, 오늘 만나면 안 돼?”

­좋지. 마침 약속도 없고……올리비아 같은 미인이라면 얼마든지.

“아, 아으…!”

­뭐야, 너무 느끼했나?

“아우, 으으…몰, 몰라! 어, 어쨌든 우리 만, 만나는 거다. 알겠지…?”

­그래. 그러자. 뉴욕 구경 좀 시켜줘. 높은 곳에서 야경만 실컷 보고 정작 돌아다니지는 못했네.

“좋, 좋아! 내가 곧 갈게! 전, 전화할 테니까 꼭 받아줘야 해?”

­오케이. 그럼 끊을게.

뚝. 뚝­. 뚝——.

올리비아는 꿈처럼 스쳐 지나간 민준과의 통화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한참 동안핸드폰을 그대로 뺨에 대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화들짝 놀란 올리비아가, 후다다닥 자신의 방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제일 예쁜 옷. 제일 아끼는 옷. 제일 섹시한 옷.

셋 중에 뭐를 입고 민준을 만나러 가야 할지. 벌써부터 행복한 고민으로 가득했다.

****

연주와 미현을 사이좋게 기절시켜 버리고, 올리비아의 전화를 받은 민준은 호텔 방에서 나름대로 힘을 줘서 단장한 뒤에 맨해튼의 거리로 나섰다.

큰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예방 접종이기는 하나, 올리비아에게 너무 못되게 군 게 미안해서 오늘은 오랜만에 ‘스윗 민준’ 모드를 가동할 생각이었다.

누구 하나 달콤해서 죽기 전까지 꺼지지 않는 이 모드는 올리비아에겐 너무 위험할지도 몰랐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다.

손바닥에 전부 들어가고도 한참이나 남는, 작고 가녀린 올리비아의 뺨을 쳐버린 쓴맛이 계속 손에 남아있었다. 행복하다 못해서 죽을 것처럼 달콤해 하는 올리비아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쉽사리 죄책감을 씻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민준은 센트럴 파크 입구에 도착하자, 목표를 너무 쉽게 설정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올리비아는 얼굴을 보자마자, 달콤해 하고 있었다.

“민, 민준…! 여기…! 여기야! 나 여기 있어!”

올리비아는 민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방방 뛰면서 손을 흔들어댔다.

공주처럼 나풀나풀거리는 하얀 원피스에 쇄골에서 딱 떨어지는 길이의 화려한 진주 목걸이를 매고 나온 올리비아의 모습은 인형 같았다. 선선한 바람에 찬란한 금발이 하늘하늘 흩날렸고, 호수처럼 푸른 눈동자가 생기롭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오로지 한 남자만이 들어 있었다.

민준은 자신을 격하게 반겨주는 올리비아를 향해 다가가며, 피식 웃었다. 딱히 스윗 모드라서가 아니라, 그냥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왜, 왜 웃어…?”

“그냥. 좋아서.”

화아아악­!

그냥 좋다는 딱 두 마디에, 민준을 반기느라 강아지처럼 헥헥대고 있던 올리비아의 얼굴이 순식간의 사랑에 빠진 숙녀처럼 화악 붉어졌다.

마음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민준만 보면 자꾸 이상해서, 올리비아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질러버렸다.

이런 건 좋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가만히 있다가는 정신이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이상해졌을지도.

“…………정말!! 너 뭐 잘못 먹었어?!”

“…뭐?”

“왜, 왜 이렇게 다정한데…! 저, 적응이 안 된단 말야!”

“싫으면……다시 딱딱하게 할까? 나는 뭐, 그것도 어렵지 않은데.”

“아니! 그건 싫어!”

“그럼 어쩌라고.”

“조, 조금씩 다정하게 하면 되잖아! 나,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니까…!”

“그래? 지금보다 조금씩 더 다정하게 해달라는 거지?”

“응…? 아니…! 말, 말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그냥 조금만 다정하게 해줘도 충분하니까…! 아, 아흐…?”

쓰윽­.

민준이 아기 새처럼 짹짹대고 있는 올리비아의 머리를 무심한 듯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바람결에 흐드러지고 있던 올리비아의 금발 머리가 쓱쓱 지나가는 민준의 손길에 순식간에 단정해졌다. 반대로 올리비아의 눈동자는 태풍에 휩쓸리고 있는 것처럼, 매우 빠르고 강력하게 빙글빙글 돌아갔다.

“………”

“됐다. 예쁘게 하고 왔는데 망가지면 안 되잖아.”

“………고, 고마워.”

“됐어. 별것도 아닌데.”

“그, 그게 아니라……! 아, 아니야! 그, 그냥……고마워­.”

예쁘다고 해줘서 고맙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입술이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수도 없이 들어본 예쁘다는 말 중에 바로 지금, 민준에게 들은 게 단연 최고였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무서웠다. 그래서 입술을 오물오물거릴 뿐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흐아­……”

올리비아는 과도한 행복을 감당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미처 알아채지 못했었는데, 발가락마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아, 나 지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행복해하는 거구나.

“가자. 올리비아.”

“아, 어…?”

“가자고. 공원에서 산책 좀 하면서, 뭐할지 생각해 보기로 했잖아.”

“아, 아, 맞, 맞, 맞아.”

“…말을 왜 이렇게 더듬어? 혹시 벌써 힘들어? 산책은 포기할까?”

“아, 아니! 괜찮아! 좋, 좋아해.”

“뭐를? 나를?”

“그, 그게 아니라…! 산책하는 거! 산책 좋아해!”

“그럼 나는?”

“아……아으…그, 그게…! 그러니까…!!”

빙글빙글빙글빙글­. 보글보글보글­.

올리비아는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에 빠져서 휩쓸리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빠져나가려고 해봐도, 몰아쳐 오는 물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제는 숨 좀 쉬고 싶은데, 더 이상 휩쓸리면 정말 어떻게 돼버릴 것 같은데, 자꾸만 입안으로 민준의 달콤한 멘트들이 거칠게 쏟아져 들어왔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익사를 하듯, 행복해서 죽어버릴 것 같았다.

“아으­……으아­……”

“뭐, 괜찮아. 일단 산책부터 하자. 올리비아.”

“으, 응­……고, 고마워……후아아­…”

의례적인 말이 아니었다. 정말 심장이 터져버리기 딱 직전에 민준이 화제를 돌려주어서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올리비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 한숨이 채 입 밖으로 다 나가기도 전에, 다시 한번 올리비아는 목숨이 위험해져 버렸다.

꽈악­.

민준은 다짜고짜 올리비아의 손을 잡고 깍지를 끼더니, 별거 아니라는 듯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올리비아 역시 홀린 듯 민준의 걸음에 맞춰서 따라가고 있었지만, 정신은 이미 한계였다. 행복사 직전이었다. 아니면 벌써 죽어있는지도 몰랐다. 이곳이 센트럴 파크가 아니라, 천국이라도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올리비아는 그때, 사람이 너무 행복하면 얼굴 근육이 바들바들 떨려와서 웃기는커녕 무척이나 경직된 표정을 하게 된다는 걸 처음 깨닫게 되었다.

****

“저, 저­. 저 퍼킹 엘로우 몽키가!! 감히 아가씨의 손을!!”

“쉿­. 조용히 해. 작전에 실패한다.”

“죄, 죄송합니다. 조장. 하, 하지만 아가씨가…!”

“그래. 나도 치가 떨리는군. 감히 올리비아 아가씨를……저 더러운 새끼……”

한편, 센트럴 파크 으슥한 골목에 숨어 망원경으로 민준과 올리비아의 모습을 훔쳐보던 두 명의 건장한 백인은, 멋대로 올리비아의 손을 잡아버리는 민준을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서 이빨을 뿌득뿌득 갈아댔다.

그들의 정체는 메이어 가에서 파견된 용병들로, 그들은 메이어 커뮤니티 안에 있는 백인 전용 보육원에서 자라 평생토록 착실하게 메이어 가문의 사냥개가 되기 위해서 키워진 이들이었다.

원래는 전쟁터나 뒷세계를 누비며 메이어 가문의 질서에 불복종하는 이들을 처단하는 게 주된 업무였지만, 이들은 메이어 가의 용병 중에서도 실력과 충성심이 가장 높은 이들로서 가문의 직계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지금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단 두 명에서만 조를 이루고 있었고, 여유롭게 센트럴 파크를 산책하는 뉴요커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몸매나 눈빛은 일반인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실전에서 쓰이는 근육들로만 압축된 탄탄한 몸과, 명령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살인이라도 서슴지 않는 살벌한 눈빛.

그리고 그들의 살벌한 눈빛 속에 담긴 남자는, 바로 올리비아의 손을 꽉 잡고 걸어가는 민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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