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 18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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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허드슨강을 쭉 따라 동쪽으로 가다 보면, 메이어 커뮤니티가 나온다.
미국에서 가장 큰 넓은 개인 사유지 중 하나이자, 메이어 가문의 직계와 그들을 위해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커뮤니티로, 커뮤니티 경계에는 바리케이드가 처져 있고 특수부대 출신 경호원들이 24시간 순찰을 하기 때문에 외부인은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비밀스러운 장소.
미현과 연주가, 민준에게 신나게(?) 혼나고 있는 바로 그 시간. 메이어 커뮤니티 중심에 있는 메이어 저택에서, 제레미는 안색을 굳히고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이제야 잠든 건가?”
“네. 회장님. 울다 지쳐서 잠이 드신 듯합니다.”
집사와 함께 올리비아에 관한 얘기를 나누던 제레미가 눈살을 강하게 찌푸렸다.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 울다 지쳐서 잠들었다는데, 아비 된 입장으로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것도 남자 문제 때문이라면 더욱.
“……듣기에 썩 좋은 소리는 아니군.”
“죄송합니다. 회장님.”
“자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겁도 없이 올리비아한테 접근한, 그 찢어 죽일 놈의 탓이지.”
올리비아는 뉴욕과 할리우드에서 악동으로 대단히 유명했다. 엄청난 사치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로는 잘생겼다고 평가받는 배우나 모델들과 틈만 나면 스캔들을 터트려 버리는 화끈한 남성 편력 때문이었다.
때문에 일반인들은 올리비아를 남자를 꽤 밝히는 발랑 까진 상속녀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사정을 깊게 들여다보면 얘기는 조금 달랐다.
올리비아가 남자들과 썸을 타고 사귀는 것까지는 맞았다. 하지만 거의 모든 경우에, 남자들이 먼저 올리비아에게 달라붙었다. 뉴욕과 할리우드 존잘남들 사이에서, 올리비아의 호구력은 너무나 유명했다.
썸만 타도 명품 의류들은 기본에, 이빨만 잘 털면 최소 몇억짜리 슈퍼카까지도 무난하게 받을 수 있다는 평가가 대부분. 그리고 그 평가는 사실이었다. 올리비아는 맘에 드는 남자들에게 무조건 퍼주고 보는 초슈퍼 호구녀였다.
다만, 아버지인 제레미에게는 여포가 따로 없었는데, 딸의 호구 짓을 참다못한 제레미가 남자들에게 위협을 가하면 올리비아는 단식 투쟁 따위로 제레미의 속을 까맣게 타버리게 만들었다.
물론, 그럼에도 제레미가 나서면 올리비아가 뿌리고 다닌 모든 사치품이 회수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기에, 남자들은 제레미의 신경을 안 건드는 선에서 올리비아를 갖고 놀기 위해 노력했다.
뽀뽀나 포옹까지는 아슬아슬하게 오케이. 하지만 키스라도 하는 순간, 그날 밤 메이어 가의 용병대가 그 남자의 집을 찾아가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다.
허나, 아름답고 순진한 올리비아에게 스킨쉽을 할 수 없다는 건 아쉬웠지만 그래도 선만 넘지 않으면 올리비아에게서 떨어지는 꿀을 쪽쪽 받아먹을 수 있었기에, 존잘남들은 끊임없이 올리비아에게 추파를 던져댔다.
하지만 슬슬 올리비아의 일탈이 끝나길 바랐던 제레미는, 어느 순간 용병대 출동 기준을 훨씬 더 엄격하게 만들어버렸다.
키스에서 입술 뽀뽀로, 그다음에는 포옹이나 손잡기도 금지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올리비아를 24시간 밀착 감시하고 있다가 가벼운 썸만 타도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협박했다.
협박의 성능은 확실해서 올리비아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이 뚝 끊겼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올리비아는 결국 남자들이 자신만 보면 귀신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는 이유가 제레미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제레미와 대판 싸운 후 가출을 해버렸다. 또 감시하면 아빠랑은 평생 얼굴도 보지 않겠다는 으름장을 남긴 채.
제레미 역시 아빠의 마음은 하나도 몰라주는 올리비아에게 화가 나서 하루 정도는 그냥 가출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이틀째는, 걱정되었지만 한다면 하는 올리비아의 똥고집을 생각해서 감시하라고 시키려다 말았다.
어차피 미국에서 올리비아의 뒤에 메이어 가문이 있다는 걸 모르는 남자는 없었기에, 애써 걱정되는 마음을 삼키며 내일은 꼭 돌아와 달라고 전화를 걸 예정이었다.
그런데 단 이틀 만에, 올리비아는 집으로 돌아왔다. 영혼이 통째로 빠져나가서, 곧 죽을 듯한 시체 같은 얼굴로.
그리고 방에 틀어박히더니, 새벽 내내 펑펑 울다가 이제야 지쳐서 잠들었단다.
쾅!!
“어떤 개새끼인지……참 겁도 없지. 내가 그놈은 꼭 찢어 죽일 거야……갈가리 찢어서 상어 밥으로 던져줘야겠어.”
제레미가 마호가니 원목으로 만들어진 최고급 집무 책상을 주먹을 강하게 내려쳤다. 자기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제레미의 푸른 눈에서는 서슬 퍼런 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집사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제레미의 진득한 살기에 침을 꼴깍 삼켰다.
올리비아의 똥꼬집은 아비를 쏙 닮은 부분이 있었다. 즉, 제레미야 말로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아마 지하 수족관의 있는 상어들은, 곧 포식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집사는 제레미가 극한으로 화나 있는 상황에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했지만, 지금 침묵하면 나중에 자신이 상어 밥이 될 수도 있었기에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회장님. 명령하신 대로 아가씨를 저렇게 만든 놈의 신상과 사건의 정황을 캐왔습니다. 그런데 그게……”
“뜸 들이지 말고 말하도록. 대체…어떤 놈이야?”
“나이는 20살이고 MJ인베스트먼트라는 회사를 운영하는 경영인입니다. 이번에 제임스의 빅토리아 스페셜을 인수하기 위해서 뉴욕에 들렀다가 아가씨와 우연히 만나, 제임스가 주최한 파티에 같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한데……이 남자 민준 킴이라는 이름의, 동양인입니다. 회장님.”
“뭐? 동양인? 우리 올리비아가……?”
“네, 회장님. 목격담에 의하면 할리우드 배우들보다도 훨씬 잘 생겼다고……파티에 있는 모든 여자가 그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끊임없이 추파를 던졌답니다. 그래서 질투가 난 아가씨가……”
“쯧. 됐어. 그 이상 알 필요 없겠지. 어차피 상어 밥이 될 놈인데 말이야.”
“하지만 회장님. 갓난아이 때부터 아가씨를 모셔왔지만……지금처럼 패닉에 빠지신 아가씨는 처음 봅니다. 더군다나 파티에서 워낙 화려하게 일이 벌어져서……지금 바로 그놈을 처리하면 곧바로 저희에게 의혹이 쏠릴지도 모릅니다. 아가씨는 더 큰 충격을 받으실 거고요.”
“끄응. 맞는 말이군.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제레미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어조로 집사에게 조언을 구했다. 제레미는 타고난 천재 사업가였지만, 딸에 관련된 것에 한해서는 바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남의 조언을 귀담아들을 줄 안다는 점이, 진짜 바보들과 제레미의 차이점이었다.
“아마 아가씨가 일어나신다면……회장님을 찾아와, 그 민준이라는 남자에게 줄 만한 선물을 요구할 겁니다.”
“그건 그렇지. 올리비아는 뭐든지 선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때 적당히 반대하시다가 마지못해 선물을 넘겨주시고, 아가씨께서 선물을 가지고 그 남자를 찾아갈 때를 노리면, 어렵지 않게 그 남자를 떼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강압적으로 일을 진행하다 보면 자칫하다가 아가씨 마음에 큰 상처로 남을 수 있기 때문에, 아가씨께서 자연스럽게 그 남자에게 실망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그리고 아가씨가 그 남자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을 때, 조용히 처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하긴, 올리비아가 그 동양인 놈에게 하도 푹 빠진 것 같으니까……우선 정이 뚝 떨어지게 만든 다음에 처리하자는 거지? 과정은 조금 더 귀찮겠지만 말이야.”
“바로 그렇습니다. 회장님.”
“좋은 계획이야. 아주 좋은 계획이라고. 집사.”
“…천만의 말씀을.”
고개를 푹 숙여 보이는 집사를 보고, 제레미는 턱을 쓱쓱 쓰다듬으며 흡족하게 웃었다.
또 손을 과하게 썼다가 올리비아한테 미움받을까 봐 걱정됐는데, 집사가 알려준 방법대로 한다면 별문제 없을 것 같았다.
올리비아의 견제만 없다면 이름 없는 동양인 사업가 한 명쯤 상어 밥으로 만드는 건, 제레미에게 아이 손목 비틀듯 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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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미안해요. 민준.
소란 피워서 죄송해요. 그때는 내가 너무 흥분했나 봐.
미안하다고. 전화 좀 받아줘. 제발. 나 너무 슬퍼.
그년들이랑 무슨 짓 하고 있는 거 아니지?
미안해. 잘못 보냈어. 그냥 전화 좀 한 번만 받아줘. 부탁이야.
나 집에 왔어. 왜 아직도 연락이 없어? 누구랑 있어?
“……”
올리비아는 채 몇 분도 안 되는 선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머리맡에 둔 핸드폰을 켜서 민준에게서 온 연락이 있는지 확인했다.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지끈거렸지만, 민준에게 연락이 와 있다면 얼마든지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핸드폰을 확인한 올리비아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시체 같았다.
올리비아는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한 번 더 문자를 보냈다. 전화는 몇십 통을 걸어도 안 받고 있지만, 그래도 문자는 보내놓으면 읽기는 할 테니까.
갖고 싶은 거 없어? 나 이제 집에 와서 너한테 뭐든지 해줄 수 있어. 제발 연락 한 번만 해줘. 민준을 위해서라면 내가 뭐든지 다 줄게.
보고 싶어. 꼭 연락해줘.
보고 싶다고. 목소리 들려달라고.
제발요. 제발 전화해 주세요. 미안해요.
“흑, 흐읏…”
문자를 보내며 마지막으로 봤던 민준의 싸늘한 표정과 따끔한 손찌검이 떠오른 올리비아가 또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민준을 생각하면 시간을 뛰어넘은 어떤 거대한 감정이 느껴졌다. 민준에게 비교하면, 다른 남자들과 썸을 탈 때 느꼈던 설렘은 그저 장난에 불과했다. 이 세상에서, 이 남자가 아니면 절대로 안 될 것 같은 기분. 운명적인 사랑.
틱틱대는 것도 짜증 내는 것도 비아냥대는 것도, 심지어는 무섭게 혼내주는 것도 좋았다. 어쩌다 칭찬이라도 받으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는 같이 있을 수가 없었다. 올리비아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고장 난 수도꼭지 같았다.
“흐아아……절대…절대로 이렇게는 못 끝내.”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올리비아는 옷을 훌러덩 벗고 욕실에 들어가서 샤워를 하며 굳은 각오를 다졌다. 체면이나 자존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 심지어 파티에 있었던 그 여우 같은 년에게 무릎 꿇고 사과를 할 수도 있었다. 민준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끼이익.
“아빠. 들어갈게.”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은 올리비아가, 제레미의 집무실로 향해서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한참 집사와 민준을 어떻게 상어 밥으로 만들지 궁리하던 제레미는 깜짝 놀라서 몸을 흠칫 떨었지만, 곧 노력하게 표정을 관리했다.
“…왔구나. 어때 가출해보니까 느끼는 게 좀 있지? 집 나가면 고생밖에 없단다. 아가야.”
“됐어. 아빠가 카드를 끊어버려서 그런 거잖아.”
“그, 그거야 카드를 안 끊으면 몇 날 며칠이고 밖으로 나돌 테니까…!”
“그래. 그래서 아빠 덕분에 완전 고생했어. 애초에 아빠가 24시간 내내 나를 스토킹해대니까 가출을 한 거지만 말이야.”
“……그게 뭐 어때서! 네가 사고치고 다니니까 그런 거잖니…올리비아. 이제는 사고 그만치고 정신 차릴 때도 됐단다. 괜찮은 신랑감 찾아서 가정도 꾸리고 아빠한테 떡두꺼비 같은 손주도 안겨주면 얼마나 좋겠니……”
“아빠가 툭하면 상어 밥으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협박하는데, 나하고 결혼할 남자가 어딨겠냐고…!!”
“흥. 그 정도 객기도 없이 어떻게 메이어 가문의 문턱을 넘겠느냐? 그놈들은 다 그 정도뿐인 놈들인 거야.”
“…하아.”
올리비아는 안 그래도 지끈거리던 머리가 제레미와 대화하자 한층 더 아파지는 걸 느꼈다. 제레미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자신을 아끼는 건 알지만 방식이 무척이나 어긋나 있었다.
친구라도 만들려고 치면 그 친구 집안까지 싹 털어서 흠결이 있나 없나 살핀 다음에,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억지로 관계를 끊어버렸다.
그러면서 말로는 맨날 가정을 꾸리라고 하는데, 제레미가 인정하는 사윗감이라고 해봐야 전 세계에 10명 남짓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대부분 올리비아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엘리트 명문가의 샌님들이었다. 설렘이라는 게 생길 리가 없었다.
그런 녀석들과 결혼해봐야 평생 집에 박혀서 테니스나 승마 따위를 하며 시간을 죽여야 할지도 몰랐다. 올리비아는 그런 인생은 절대 사절이었다.
특히, 민준을 경험한 지금에 와서는, 민준과 결혼할 수 없다면 차라리 혀 깨물고 죽어버릴 생각이었다.
“좋아. 아빠. 나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 동양인이고, 사업가야. 능력은……그래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어.”
“안 된다. 능력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순수혈통을 지켜온 메이어 가문에 열등한 동양인의 피가 섞이게 할 수는 없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사람은 달라. 나 이제 그 사람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그러니까 아빠…”
“……”
제레미는 집사와 슬쩍 눈치를 주고받았다. 왠지 올리비아의 입에서 예상했던 대사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고, 제레미의 생각은 거의 정확히 들어맞았다. 다만, 생각보다 올리비아의 요구가 훨씬 더 강력했다.
“카드 풀어줘. 그 사람한테 선물 줘야 해. 그리고 내 요트 중에 하나, 그 사람한테 줄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허.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장 방으로 돌아가거라, 올리비아. 머리 좀 식으면, 그런 동양인 따위는 금방 잊을 게다.”
“동양인 따위라고 하지 마…!!”
“…뭐? 올, 올리비아. 지금 아빠한테 화낸 거냐? 고작 동양인 때문에?”
“이 씨. 아빠한테 말투 옮아서 동양인 따위라고 했다가, 그 사람한테 얼마나 미운털이 박힌 줄 알아?! 그것만 아니었어도…그것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흥! 다 아빠 때문이야!”
“올리비아! 아빠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니!”
“몰라! 아빠 미워!! 아빠는 인종차별주의자야!!”
“올, 올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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