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 182화
올리비아는 성큼성큼 걸어가 민준과 라라의 일행 앞에 섰다. 올리비아의 살벌한 기세에 자연스럽게 주변 공기가 얼어붙었고, 분위기가 이상해진 걸 느낀 라라 일행은 민준을 유혹하던 손길을 멈추고 한 명씩 올리비아를 돌아봤다.
키가 거의 20cm씩 차이 났기 때문에 슈퍼 모델들과 마주 선 올리비아는 어른과 맞서고 있는 꼬마처럼 보였지만, 그 기세만큼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서슬 퍼런 눈을 한 채 민준을 보며 따지듯이 물었다.
“떨어져-. 당장.”
“뭐? 갑자기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그년들한테서 떨어지라고. 왜 날 놔두고 거기에 있는 건데? 파티에 같이 왔으면 나부터 챙기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막무가내로 따라온 건…”
올리비아에게는 논리가 없었고, 그런 걸 가지고 싶지도 않았다. 꼭지가 완전히 돌아버린 올리비아는 무슨 수를 쓰든 민준에게서 저 여우 같은 년들을 떼어놓을 작정이었다. 정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몰라…! 그런 거 하나도 모르겠으니까…제발 그냥 떨어지라고…!! 안 그럼 나 미쳐서 어떻게 돼버릴 것 같으니까 빨리 떨어지라고!!”
“아아-. 말하는 게 너, 너무 살벌하고 무서워요. 민준-. 이, 이 여자 누구예요…? 민준의 여자친구…?”
“아니. 신디. 그런 거 아니야. 오늘 우연히 만난 사이라고.”
신디는 팔짱을 껴안으며 겁이 난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민준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인형같이 자그마한 올리비아에게 진짜로 겁먹은 건 아니었다. 하물며 신디는 올리비아의 정체도 알고 있었다. 메이어 가의 상속녀이자 말썽꾸러기로 워낙 유명해서 모르는 게 간첩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신디는 의도적으로 민준에게 귓속말을 하며 민준과 몸을 바짝 접촉시켰고, 눈으로는 올리비아를 힐끔거리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악질 질투녀가 나타났을 때 이득을 보는 법을, 신디는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아, 정말요? 그럼 저 여자는 왜 저렇게 무섭게 구는 거예요? 민준의 여자친구도 아니면서-.”
“이익…! 떨어지라는 말 안 들려?! 이 여우 같은 게…!!”
“잠, 잠깐만요…! 다, 다가오지 말아요!”
올리비아는 민준의 팔뚝에 딱 달라붙어서 귓속말을 건네는 신디를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여우 같은 신디는 민준에게는 온갖 무서운 척을 다 하면서, 정작 눈으로는 자신을 자꾸 힐끔거리며 놀리듯이 비웃고 있었다.
다급한 비명을 내지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신디의 입가에는 하려면 해보라는 듯 얄미운 호선이 그려져 있었다.
신디의 도발은 수준이 너무 높아서, 도발에 내성이 거의 없는 어수룩한 올리비아가 받아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완전히 이성이 나가버린 올리비아가 신디에게 다가가 따끔하게 손찌검을 하기 위해 손을 휘둘렀다.
휘익-. 척!
“이익…! 이, 이거 놔! 너 설마 지금 저 여우 년을 보호하는 거야…?! 벌써 홀려버린 거냐고…! 이 바보야!!”
하지만 신디의 뺨에 불이 나기 전에 민준이 올리비아의 손목을 가볍게 낚아챘고, 올리비아는 억울해서 민준에게 손목을 잡힌 채 방방 뛰었다.
민준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올리비아를 바라봤다. 올리비아는 신디 때문에 민준에게 싸늘하고 시선을 받아야 된다는 사실에, 더욱더 이성을 잃고 신디에 대한 적개심을 나타냈다. 민준이 손목을 잡고 있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신디를 두들겨 팰 기세였다.
물론, 몸싸움으로 번진다면 신디 못지않게 가녀린 데다가 키가 훨씬 작은 올리비아가 질 게 불 보듯 뻔했지만, 적어도 올리비아의 기세만은 흉포한 맹수와도 같았다.
“…올리비아. 그나마 나랑 계속 알고 지내고 싶으면 여기서 그만해. 이미 충분히 꼴사나우니까.”
“놔! 놓으라고! 저년…! 다 저년 때문이야! 저 여우 같은 게 널 홀려버려서…! 저년이 널 오염시키고 있다고…! 근데 내가 어떻게 그만해!!”
“하아-. 안 되겠다. 민폐 부리지 말고 파티장에서 이만 나가. 아니면 내가 널 쫓아낼 거니까.”
“내가 이딴 볼품없는 파티에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다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조용히 하고 따라와. 나 진짜 화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잠, 잠깐만…! 이, 이거 놔앗!!”
민준은 올리비아를 손목을 잡아끌어서 파티장에서 내보내려 했다. 올리비아는 이대로 끌려나가면 파티장에 남은 여우들이 민준에게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으니 필사적으로 민준에게 저항해봤지만, 민준의 힘이 워낙 좋아서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민준에게 질질 끌려가는 올리비아를 보며, 신디는 해맑게 웃으며 입 모양으로 올리비아에게 마지막 인사를 날려주었다.
-잘 가. 바보야. 민준은, 내 꺼.
“저, 저게 진짜…!!!”
순간 머리끝까지 분노로 차오른 올리비아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축구공을 차듯 발목을 강하게 차서 구두를 확 벗어 던져 버렸다. 그러자 높이 차이 때문에 손목에 어느 정도 공간이 생겼고, 올리비아는 재빨리 민준의 손목을 뿌리친 뒤 신디에게 뛰어갔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샴페인 잔을 들어서 신디의 얼굴에 시원하게 뿌려버렸다.
촤악—!
“꺄얏…! 뭐 하는 거야!!”
갑자기 풀려난 맹수 같은 올리비아를 보며 당황한 신디의 안면에, 톡 쏘는 샴페인이 가득 뿌려졌다. 신디의 얼굴에서부터 줄줄 흐르는 샴페인이 그녀의 옷과 바닥을 흠뻑 적셨다.
하지만 비 맞은 생쥐 꼴이 된 신디를 보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올리비아는, 아예 근처에 있던 아이스 버킷을 들어서 신디의 몸에 뿌려버렸다.
주변 사람들이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다가 기겁을 하며 말리려 했지만, 이성을 잃은 채 극도로 과감해진 올리비아의 움직임을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촤아아악-. 촤아아악-.
“꺄악…!! 차가워…!! 이, 이 미친년아…!!”
샴페인을 맞을 때까지만 해도 오히려 민준에게 점수를 딸 수 있겠다 싶어서 흡족해하던 신디였지만, 얼음 세례까지 참을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헐렁한 드레스를 입은 터라 빈 공간이 많았고, 그 공간 안에 얼음 조각이 가득 차서 온몸이 시려왔다. 금방에라도 동상에 걸려버릴 듯 전신이 따끔거렸다. 기분이 끔찍하기 그지 없었다.
“이익…!! 가만히 있으니까 이게 진짜…!”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신디는 올리비아의 뺨을 피 터지도록 후려주기 위해서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신디보다 먼저, 민준의 손이 올리비아의 뺨을 화끈하게 만들었다.
짜악-.
올리비아의 손목을 강하게 낚아채 뒤를 돌아보게 만든 민준이 올리비아의 뺨을 때리자 경쾌한 소리가 울렸고,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숨을 죽인 채 이 사단을 지켜보고 있었다.
“……”
신디는 어안이 벙벙해서, 얼얼한 뺨을 손으로 문지르며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돌아가 버린 고개를 똑바로 돌려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지금 느껴지는 이 고통이, 누구에게서 온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올리비아는 흔들리는 눈으로 서서히 민준을 돌아봤다. 얼음장처럼 싸늘해진 민준의 얼굴을 확인하니, 울컥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맞은 건 뺨이었지만 마음이 훨씬 더 아려왔다.
“너…너…너가 어떻게-……”
“닥치고 나가-.”
“내 잘못이 아니야…!! 저년이…! 저 여우 같은 년이 너한테 꼬리치면서 나를 놀려대니까…!!”
“말조심해. 함부로 남을 비하하는 여자, 최악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변명 들어줄 생각 없으니까 당장 꺼져. 꼴도 보기 싫으니까.”
“……”
올리비아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곧 참아낼 새도 없이 닭똥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자신이 울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이건 현실이 아니라 악몽일 거라고 간절하게 스스로를 속이느라, 다른 걸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꺼지라는 말……이해 못 했나?”
“……싫어. 못 가……절대로 못 가……이렇게는 절대로 못 간다고……”
멘탈이 완전히 부서져 버린 올리비아가 영혼이 빠져나간 공허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이대로 가버리면 민준과 완전히 끝나버릴 것 같아서, 도저히 발걸음을 돌릴 수가 없었다. 민준에게 뺨을 몇 대 더 맞든, 얼마나 구차해지든, 여기서 버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민준은 그런 올리비아를 싸늘하게 쳐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서 훌쩍거리고 있는 신디를 챙겨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위층으로 올라가면 올리비아는 따라올 수 없었다.
“어, 어디가……가지 마-! 가지 말라는 말 안 들려?! 대체 그 여자랑 같이 어디 가는 거냐고…!!”
민준이 신디를 데리고 성큼성큼 멀어지자, 올리비아는 체면도 잊은 채 민준을 따라가며 소리를 질러댔다.
“죄송하지만, 여기에는 타실 수 없습니다.”
“놔…! 이거 놓으라고…! 둘이서 어디 가는 건데…! 왜 나만 버리는 건데…!”
“이만 파티장에서 나가주셔야겠습니다. 회장님의 명령입니다.”
“거짓말!! 다 거짓말이야!! 민준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 내가 뭘 잘못했다고…! 진짜 잘못한 건 저 년이란 말이야!!”
하지만 민준은 올리비아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신디와 함께 1층 구석에 있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그 앞에 있던 가드들이 막아서서 올리비아는 더 이상 민준을 따라가지 못했다.
가드들에게 붙잡힌 올리비아는 아등바등하며 발악했지만, 가드들보다 몸집이 세배는 작은 올리비아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바뀌는 건 없었다.
올리비아는 그대로 파티장에서 끌려나갔고, 민준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미안하다. 올리비아야. 그래도 한번은 겪어야 할 과정이니, 차라니 미리미리 겪어놓는 게 낫겠지.’
평생토록 수동적으로 살아와 아무것도 가져본 적 없는 연주는, 올리비아만큼이나 소유욕이 강했지만, 굳이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최대한 속으로 삭이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쉽게 가져온 올리비아는 달랐다. 서슴없이 모든 걸 가지려 했고, 그러니 엄격한 교육이 필요했다. 안 그러면 언젠가는 다른 여자들과 트러블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처음에는 잘 지내다가도 점점 사랑과 욕심에 눈이 멀어서, 다른 여자들에게 칼을 꽂을지도 몰랐다. 조금 전 상황만 봐도 올리비아의 자제력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는데, 심지어 올리비아에게는 메이어 가문의 막대한 힘까지 딸려 있었다. 아이한테 핵폭탄 발사 버튼이 들려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미리미리 충격 요법을 통한 예방 접종을 맞춰놔야, 안심하고 올리비아를 김민준 하렘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도……뺨을 때린 건 좀 너무했나? 힘을 최대한 빼고 치긴 쳤는데…’
민준은 쥬얼리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올리비아가 열폭할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완전히 미쳐서 날뛸 줄은 차마 알 수 없었다.
그대로 놔두면 신디한테 흠씬 두들겨 맞을 것 같아서 차라리 먼저 선수를 치긴 했는데, 뺨을 맞고 영혼이 완전히 빠져나간 것 같던 올리비아의 표정이 잊히질 않았다.
시은과 과격하게 섹스할 때면 뺨도 마구 치면서 놀기는 하지만, 플레이 중에 뺨을 치는 것과 아무런 대비도 안 되어 있는 가녀린 여자의 뺨을 치는 건 너무나 다른 느낌이었다.
‘…뭐야-. 민준, 설마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거야…? 그렇게 세게 때리지도 않은 것 같던데…’
신디는 민준이 올리비아의 뺨을 때렸던 쪽 손바닥을 바라보며 안 좋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고, 민준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건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너무 달콤하잖아-. 그런 정신병자 같은 년은 훨씬 더 흠뻑 패줬어도 되는데……그래도 고마워, 올리비아 메이어. 덕분에 민준에게 점수를 많이 딸 수 있겠어.’
신디는 남자가 우울해하고 있을 때, 여자로서 위로해줄 방법이 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신디 역시 민준을 원하고 있었으니, 이런 좋은 기회를 만들어준 올리비아에게는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으아-……하아, 하으-…”
“아-. 조금만 기다려요. 신디. 따듯한 물로 씻고 옷 갈아입게 해줄 테니까.”
“고, 고마워요. 민준.”
신디는 민준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면서, 온기가 필요하다는 듯 민준에게 꼭 달라붙었다. 서로의 몸이 달라붙자, 민준의 몸이 살짝 경직되는 걸 느낀 신디는 작게 웃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4층에 멈춰 섰다. 2, 3층에도 화장실은 많았지만, 신디가 입을 수 있는 옷은 4층에 밖에 없었다.
민준이 뻘쭘하다는 듯 턱을 긁으며, 신디에게 말했다.
“일단 샤워실로 가서 씻고 있어요. 신디. 입을만한 옷을 찾아서 갖다 줄 테니까. 제임스가 집으로 데려온 여자들을 코스프레 시키기 위해서 준비해 둔 옷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갈아입는 게 나을 테니까…”
“괜찮아요. 민준.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그, 그런데 부탁이 하나 있어요.”
“뭔데요? 뭐든 말해 봐요.”
“옷 가져오면…나가지 말고 욕실에 같이 있어 주세요…”
“네…? 그게 무슨?”
“…아까 일 때문에 놀라서 아직 너무 무섭거든요. 민준이 같이 있어 주면 좋을 것 같은데……안될까요?”
신디는 두려워 죽겠다는 듯 몸을 덜덜 떨면서, 불쌍하고 가여운 표정을 지은 채 민준을 올려다봤다.
‘와. 신디가 여우는 진짜 여우네. 올리비아는 싸워도 하필……’
민준은 신디가 연기하고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진심으로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로 신디의 연기는 매소드 수준이었다.
“알겠어요. 옷 금방 찾아서 가져갈 테니까, 먼저 따듯한 물로 씻고 있어요. 얼음 때문에 동상에 걸릴 수도 있으니까-.”
“고마워요. 민준-. 민준이 있어 줘서 정말로 다행이에요.”
그렇게 신디를 욕실로 데려다준 뒤, 민준은 방을 돌려면 신디에게 입힐만한 옷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무난한 옷 따위는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다 요염하기 그지없었는데, 뭘 입히든 팬티를 제대로 가리지조차 못할 것 같았다.
그나마 입힐만한 건 주황색 컬러의 미국 죄수복이었는데, 죄지으라고 비는 것도 아니고 멀쩡히 살고 있는 신디에게 죄수복을 가져다주기에는 조금 곤란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진짜 이거 말곤 없는데….
‘아, 몰라. 그냥 갖다 주자. 오히려 신디라면 좋아할지도 모르잖아. 노예 플레이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