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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플쓰는 밤의 황제-171화 (171/270)

〈 171화 〉 171화

민준이 거절 의사를 표시하자, 주변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냉랭해졌다. 대형사고도 이런 대형사고도 없었다.

모두의 표정이 얼음처럼 차갑고 딱딱했지만, 정작 민준만은 별거 아니라는 듯 담담한 톤으로 말을 이어갔다.

“미안하지만 선약이 있어서요. 춤은 다음 기회에 추시죠.”

민준의 말에 세아의 미간이 깊이 패였다. 예지가 그토록 보길 원하던 세아의 찌그러진 얼굴이었지만, 정작 예지 역시 민준의 행동에 놀라서 깨닫지는 못했다.

‘뭐 이런……뭐 이런 남자가 다 있지?’

세아는 미간을 찡그린 그 상태로 민준을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호수같이 깊고 고요한 눈동자에 일렁이고 있는 밝은 빛에는 거짓 한 점 없었다.

일부러 일성을 적대하는 것도, 딱히 자신이 싫어서 춤을 거절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정말로 춤을 먼저 추기로 한 선약 때문에 저러는 것 같았다.

‘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 제안을 거절해?’

하지만 세아는 민준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도, 민준의 거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애초에 세아는 거절이라는 행위 자체에 익숙하지 않았다. 해보긴 많이 해봤는데 당한 적은 없었다.

‘근데…근데 너는 뭔데 내 제안을 거절해? 그것도 고작 선약이 있다는 이유로…?’

화가 났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차라리 민준이 악의적으로 거절했다면 오히려 수긍하기 편했을 것이다.

일성과 선을 긋는 행위로 받아들이고, 알아서 길 때까지 적당히 밟아주면 끝이었다. 주제를 모르면 주제 파악을 시켜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민준은 그저 순수하게 자신의 제안을 거부하고 있었다. 세아는 그것 자체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선약이 춤 약속이라서 못 추시겠다고 하시는 거 맞죠? 몸이 아프시거나 춤을 못 추셔서 둘러대시는 게 아니고.”

“네. 먼저 추기로 약속한 분이 계셔서…”

“그럼 괜찮겠네요. 저랑 같이 추시고 나중에 약속을 지키셔도 되잖아요.”

“아니요. 꼭 그분이랑 먼저 추기로 해서요. 하하-.”

“……누군데요? 그 사람이?”

민준의 앞에 서 있는 세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미간은 아까부터 찌푸려져서 되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모두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이렇게까지 표정 관리를 실패한 건 세아의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음-. 섹시하네. 역시 미녀가 최고야. 화내는 모습마저 섹시하게 보이니까.’

민준 역시 딱딱하게 굳어가는 세아의 표정을 보고, 세아가 극대노 상태에 접어들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준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순진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리고 아무리 세아가 울고불고 난리를 쳐도 이 자리에서 절대 세아와 춤을 같이 출 생각이 없었다.

‘원래 공주님들을 꼬실 때는, 자존심부터 건드려 줘야 하는 법이지.’

세아를 처음 봤을 때부터, 표정이나 눈빛을 보고 직감적으로 세아가 얼마나 오만하고 도도한 여자인지 알 수 있었다.

민준은 그때부터 세아에게 어떤 태도를 취할지 결정해 놓은 상태였다. 일명 ‘내 뺨을 때린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 전법이었다.

물론, 뺨을 때린다는 건 비유적인 표현이었지만, 세아는 실제로 뺨을 맞은 것보다 훨씬 더 얼얼해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사실상 대한민국의 공주나 마찬가지인 여자가 언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런 수모를 겪어봤겠는가.

세아에게는 지금 이 상황이 일생일대의 충격적인 사건처럼 느껴질 게 분명했다.

덕분에 세아의 머릿속에 화인처럼 찍혀버려서, 파티가 끝나더라도 세아의 머릿속에서 김민준이라는 남자가 지워질 일은 절대로 없었다.

일종의 충격요법이었고, 인상에 강렬하게 남는 만큼 분노를 유발할 수 있는 양날의 검이었지만, 민준은 자신이 있었다.

세아를 꼬실 자신도 있었고, 설령 못 꼬셔서 세아가 독기를 품고 자신에게 칼을 휘두른다고 해도 막아낼 자신도 있었다.

“음-…글쎄요. 이름을 밝히는 건 조금 곤란하네요.”

“…그래요. 말하기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하지만요, 민준 씨…”

“네. 세아 씨-.”

“저는 두 번째는 싫어해요. 민준 씨한테 두 번째 여자가 될 수는 없으니, 저는 민준 씨와 춤을 출 수 없겠네요.”

“이런-. 아쉽네요.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라……그럼, 즐거웠습니다.”

“……하-.”

민준은 얘기가 끝났다고 판단하자, 세아에게 가볍게 눈인사만 건넨 체 거침없이 등을 돌렸다.

미련 한 점 없이 당당한 민준의 뒷모습을 보며, 결국 세아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도 안 나는 지경이었다. 이런 상상도 못 한 대접이라니. 그것도 남자에게.

‘뭔데…? 뭔데 그렇게 도도한 거야, 김민준? 얼굴 좀 반반하게 생겼다고……나한테 이렇게 무례하게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꾸욱-.

세아가 민준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째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아으, 뜨거워라. 뒤통수 다 타겠네.’

한편, 세아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등을 돌린 민준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예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이 다가오자 당황해서 어찌할 줄을 몰라하는 예지를 가벼운 걸음으로 지나치며, 살며시 귓속말을 건넸다.

“30분 뒤에 정원으로 와요.”

“읏-……잠, 잠시만…!”

곧장 아는 체를 할 줄 알았던 민준이 귓속말만 건네고 스치듯이 지나가자 예지가 당황해서 민준을 불러봤지만, 그 사이 민준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예지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흩어지는 사람들을 따라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파티장 곳곳에서 방금 있었던 헤프닝에대한 열띤 토론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이미 머리가 가득 차서 터질 지경인 예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설, 설마-. 나 때문에 이세아의 부탁을 거절한 걸까? 고작 나 때문에? 그, 그런 건 아니겠지?’

이세아를 지독하게 싫어했지만, 그만큼 이세아가 어디까지 악독해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공들여 만든 사업체가 마음에 든다며 자신에게 팔라는 세아의 부탁을 거절했다가, 예지는 바닥에 나앉기 직전이었다.

악랄한 이세아는 일성의 힘까지 빌려서 예지의 사업체는 물론 모기업까지 숨통을 끊어놓는 중이었다. 그것도 닭 모가지를 비틀듯, 무척이나 쉽게.

그런데 민준은 세아가 얼마나 무서운 여지인지도 모르고, 세아의 제안을 너무도 단호하게 거절해버렸다. 그리고 그 이유가 아무래도 자신 때문인 것 같았다.

‘안 돼…! 잘못하다가 민준 씨가…민준 씨마저 나처럼 되면 어쩌지? 아무리 이세아가 민준 씨의 기업을 높이 평가했다지만, 그래도 상대는 일성인데…’

예지는 불안감에 손이 덜덜 떨려왔다. 민준을 만났을 때만 해도 행복하기 그지없었는데, 지금 와보니 후회만 가득했다.

그때, 지갑을 돌려주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최소한 민준이 붙잡았을 때 뒤돌아보지 않고 미련 없이 떠났어야 했다.

자신이 욕심을 부린 탓에, 이세아에게 민준까지 망가져 버릴지도 몰랐다.

‘아-. 제발…제발……’

민준에 대한 걱정만이 가득했던 30분이었다. 예지는 초조하게 시계를 보다가, 조용하게 민준과 거닐었던 미로 정원의 입구로 향했다.

부디, 민준이 나와 있지 않기를 빌면서.

‘제발…제발…이세아한테 가세요. 민준 씨. 지금이라도……지금이라도 가면…’

하지만 하늘도 무심한지, 예지의 눈에는 미로의 입구에서 자신을 보며 미소 짓고 있는 민준의 얼굴이 보였다.

“……민준 씨-.”

“왔어요? 딱 맞춰왔네요. 사실 저는 10분 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 부담 주려는 건 아니고…그만큼 보고 싶었다고요.”

“……”

예지는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렇게 오지 말라고 빌었으면서도 막상 민준이 보이자 기뻐하다니. 보고 싶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렇게 가슴이 벅차다니.

예지는 차마 민준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우리가……우리가 언제부터 봤다고…그렇게 저를 보고 싶어 하시는 건데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그만 하세요.”

“언제부터 봤는지가 중요한가요? 예지 씨는 저 안 보고 싶었어요?”

“전혀요. 전혀 안 보고 싶었어요. 아까 헤어지고 당신 생각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예지 씨는 거짓말을 할 때 말이 조금 빠르게 나와요. 알고 있어요?”

“그, 그게 무슨……”

“정말로…정말로 안 보고 싶었어요?”

“……”

“저는 예지 씨 생각 엄청 했는데…”

민준은 덤덤하게 말하면서, 예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예지의 손을 깍지껴 잡았다.

예지는 느껴지는 민준의 손길에 흠칫하면서도, 민준을 돌아보지는 않았다.

“조금 걸을까요? 입구에서는 누가 볼지도 모르니까-.”

“……”

예지의 답은 없었지만, 민준이 발을 먼저 내딛자 예지는 민준과 발걸음을 맞춰 걸었다.

“…이세아 무서운 여자예요.”

민준과 말없이 정원을 거닐던 예지의 첫마디였다.

예지는 깍지낀 손으로 전해지는 민준의 크고 따스한 손길을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말을 이었다. 한껏 다운되어 있는 예지의 목소리에는 세아에 대한 두려움과 패배의식이 짙게 깔려있었다.

“저는 그 여자한테 모든 걸 뺏겼어요-. 이세아는…자기 마음에 드는 건 모조리 뺏어야지 직성이 풀리는 여자예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민준 씨를 가지려 할거에요. 안되면……망가트려서라도…”

“걱정하지 마요. 저희 기업이 작다고는 했지만, 약하지는 않거든요. 자본도 탄탄해서 일성에서 흔든다고 해도 흔들릴 걱정도 없고.”

“민준 씨 생각보다…훨씬 더 악랄하게 괴롭힐 거에요. 단지 돈으로만 수작을 걸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일성의 그늘은 대한민국 어디에나 펼쳐져 있어요…정말 어디에나…”

“됐다니까요. 그런 것보다 저는 예지 씨의 얘기를 듣고 싶은…”

“제 얘기 같은 걸 들어서 뭐하게요…! 지금 민준 씨가 위험하다고요! 아직도…아직도 이해 못 하시겠어요?!”

민준과 걷던 예지가 멈춰 서서 참아왔던 울분을 터트렸다.

예지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모든 게 다 억울했다.

힘이 없어서 누군가를 함부로 좋아하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하고 한스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흐윽-. 제발 그만 좀 하라고요…! 안 그래도 미치겠는데 왜 민준 씨까지 제 말을 안 들어 주는 건데요! 당장…당장 파티장으로 돌아가서 이세아한테 가라니까요…!!”

“…예지 씨는, 이세아 그렇게 무서워요?”

“당연하죠! 이세아 뒤에는 일성이 있으니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우리 같은 건 반항도 못 하고…! 읏…!!”

쿵-!

순식간이었다. 민준은 열변을 토하고 있는 예지를 벽에 밀어 넣고, 벽을 강하게 내리쳤다.

갑작스레 엄청난 위압감을 풍기는 민준의 모습에, 예지는 얼어붙어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 민준을 올려다봤다. 민준은 몸을 숙여서 점점 예지와 얼굴을 밀착시켰다.

“읏…! 민, 민준 씨-. 잠시만요…이, 이러면 안 돼요-. 진, 진정하세요.”

“다시 말해봐요. 예지 씨. 이세아가 무서워요…아니면 제가 더 무서워요?”

“아, 아아-. 가, 가까이 오면 안 돼요. 제발…제발요. 민준 씨-.”

“이세아가 정말 예지 씨의 모든 걸 다 뺏어간 거 맞아요? 제가 뺏어가고 싶은 건…아직 안 가져간 것 같은데-.”

“잠, 잠시…! 읏, 읍…! 으읍, 으브으…!!”

민준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대는 예지의 얼굴을 한속으로 가볍게 고정시키고, 곧바로 예지의 입술을 훔쳤다.

예지는 어떻게든 민준을 밀어내보려고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민준의 가슴을 힘껏 밀고 툭툭 때려봐도 끄떡도 없었다. 민준이 단단히 잡고 있어서 고개를 휘젓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입술을 벌리지 않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는데, 민준의 화려한 테크닉에 얼마 못 가 예지의 입술이 벌어졌고, 민준은 그 틈을 타고 들어가서 예지의 입술을 거칠게 농락했다.

“으읏-. 으음, 하응…! 읏, 우읏…!”

“츕-. 쮸웁-. 쯉, 쮸읍-.”

예지의 입술에선 싱그러운 과일 향이 느껴졌다.

민준은 싱그럽고 야들야들한 과육을 탐하듯이, 예지의 입술을 먹어갔다.

압력을 줘서 예지의 입술을 삼켜버릴 듯 자극하다가, 혀를 집어넣어서 치아와 잇몸을 거칠게 훑었다.

예지의 혀를 강제로 갖고 놀며 가볍게 깨물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강압적으로 예지의 탱글탱글한 입술을 쪽쪽 빨아드리며 새어 나오는 예지의 타액까지 모조리 삼켜버렸다.

예지는 능숙해도 너무 능숙한 민준의 키스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반항해야겠다는 생각은 날아간 지 오래였다.

민준의 뜨거운 숨결이 닿을 때마다 온몸이 짜릿했고, 민준의 촉촉하고 부드러운 혀가 자신의 입속으로 들어올 때마다 심장이 크게 뛰어서 호흡이 가빠왔다.

키스를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이런 키스는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민준의 입술과 숨결과 뜨거운 열기만이 예지의 속을 가득 채웠다.

“하음-. 흣, 흐브으…! 으-. 하으, 하아아-.”

“쓰읍-…후으-.”

격정적이었던 키스를 끝내고 민준이 혀를 천천히 떼어내자, 살짝 벌려져 있는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끈적한 은색 실이 길게 늘어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예지의 얼굴에는 홍조가 가득 피어있었고, 예지의 눈은 완전히 게슴츠레 풀려있었다.

민준은 그런 예지의 얼굴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예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

“걱정하지 마요, 예지 씨. 제가 이세아보다 훨씬 더 무서운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이세아 같은 거, 절대로 무서워하지 마세요. 제가 지켜드릴게요-. 제가 이세한한테서 예지 씨 지켜줄게요-. 아시겠어요?”

“흐아, 흐읏-. 민, 민준 씨-.”

민준은 헐떡이고 있는 예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자신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흠칫흠칫 떨리고 있는 예지의 부드럽고 가녀린 몸을 가득 안고 있으니, 가슴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그칠 줄을 모르고 피어올랐다.

민준은 예지를 가득 안은 채, 이번에는 우는 아이를 달래듯 상냥하게 속삭였다. 예지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알아들었으면, 이번에는 부드럽게 해드릴게요. 그러니까, 입 벌려요-. 예지 씨.”

“아, 아으…흐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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