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 170화
“와-…저거, 뭐냐.”
“뭔데…? 아…? 씨발, 저거 진짜 뭐, 뭐냐…?”
“왜 뭔데 그래, 뭔데…?”
“헐. 대박……애들아, 애들아…입구 쪽에…”
“왜? 왜 그러는……헐-.”
왜 그런 타이밍이 있지 않은가. 누군가 조용히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시끌벅적했던 공간이 한순간에 조용해지는.
지금 그런 현상이 연회장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입구를 보며 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서서히 모두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쏠렸고, 웃고 떠드는 소리가 가득했던 연회장은 점점 조용해졌다. 결국에는 재즈 소리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이 숙연해졌는데, 심지어는 재즈 연주자들 역시 입구 쪽을 보고 있었다.
물론, 숙련된 연주자들이라 그러면서도 연주는 끊어지지 않았지만, 만약 연주가 끊겼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파티장 안 모든 사람의 관심은 단 한곳으로 쏠려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민준이 서 있었다.
‘허허-. 이렇게 대놓고 바라보면 부끄러운데…’
1대1로 만남이었다면 부끄러워서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만 내려다봤을 여자들이, 다 같이 구경하는 분위기에 편승해서 넋 놓고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남자들도 민준을 보고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민준은 남자들의 시선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여하튼 모든 시선이 민준에게 쏠려 있었다. 뭐를 하기도 전에 입구에서부터 이러니까 조금 난감했지만, 민준은 여유롭게 걸어서 조금씩 파티장 안의 군중들을 뚫고 들어갔다.
시선을 받는 것쯤이야 이제는 일상적인 일이었고, 그 시선의 주인이 대한민국에서 한가락들 하는 재벌 집 자식들이라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재벌은 무슨. 그래 봤자 개미 코딱지 버는 것들이.’
하루마다 최소 몇백억씩 벌어들이고 있는 민준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일성이고 뭐고 지금의 민준에게는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귀여웠다.
민준이 심심해서 찾아본 결과, 기업이 아닌 개인의 수준에서 지금의 자신에게 비비려면 세계 부자 순위 top 10안에 들어와 있는 초특급 대부호들을 데려와야 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의 민준만큼 돈을 버는 사람은 세계를 다 통틀어도 열 명 남짓이었다.
물론, 경제지에서 꼽는 부자 순위에 들어가지 않는 비공식적인 부호들까지 하면 열 명은 훨씬 넘겠지만, 그래 봤자 100명도 안 되지 않을까 싶었다.
대한민국도 아니고 세계에서 100등 안에 들어가는 수준이었고, 지구의 자원은 유한하지만 무한금욕교의 복종도는 무한하기에 성장 가능성도 무한대였다.
아직 초기투자의 과정이라 본격적인 부를 쌓고 있지는 못하지만, 쌓이기 시작한다면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세계 1등 부자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거의 확실했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새끼들 다 모아봤자, 그냥 좆밥이라는 소리지.’
물론, 돈이 전부는 아니었다. 재벌 기업들의 경우 단순히 기업이 벌어들이는 수익만으로 그 기업의 가치를 평가할 수는 없었다.
대한민국 언론과 정치인들을 입맛대로 주무를 수 있는 능력이나, 사회 전반에 뻗어있는 인맥들이 오히려 수익보다 더 가치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재벌가 사람 중에 법이고 나발이고 안하무인 식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많은 거고.
‘하지만 그것도 적당한 수준에서나 통용되는 소리지. 내가 지금 빌 게이츠고 제프 베조스인데 뭐가 무섭겠어.’
민준의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었다. 돈이 적당히 많으면 재벌들과 손을 잡는 게 필수적이겠지만, 돈이 미친 듯이 많으면 다 좆까고 독고다이로 가도 괜찮았다.
다만, 굳이 귀찮게 독고다이를 자처하는 것보다, 괜찮은 먹잇감이 있으면 신도로 만드는 게 훨씬 더 쉬운 방법이라 이 자리에 참석한 것뿐이었다.
“저…저기-.”
“저어-. 혹시 저희랑……”
그러므로, 민준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뜨내기들한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유나가 선정해준 ‘맛있는 재벌 집 여식 랭킹’ 5위안에 드는 여자가 말을 거는 게 아니면,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 랭킹 1위가 바로 저기에 있고 말이지-.’
민준은 은근슬쩍 들러붙어 오며 말을 걸어대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가며, 예지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설마……설마 진짜로 나한테 오고 있는 걸까.’
한편, 예지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좀처럼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입구를 보며 숙연해질 때부터 민준이 연회장에 들어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절대 그쪽을 쳐다보지 않고 있었는데, 어쩐지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민준은 연회장에서 들어오자마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아는 척하지 말아 달라고……매몰차게 말하고 뒤도 안 보고 가버린 나한테……왜 다시 오려는 걸까-.’
모든 사람의 시선이 민준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준이 자신에게 다가온다면, 이상한 루머들이 재계 곳곳에 퍼질 게 불 보듯 뻔했다. 남편감을 찾고 있는 예지의 입장에서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민준이 정말로 자신에게 다시 한번 다가와 준다면, 예지는 차마 내칠 자신이 없었다. 한번 해봐서, 도저히 두 번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민준이 자신을 그냥 지나쳐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그냥 지나쳐-. 제발……’
예지는 눈을 꼭 감고 민준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동시에 만약 민준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온다면 어떤 모습으로 반겨줘야 할지 고민했다.
너무나 모순적이라, 예지 또한 지금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
하지만 예지의 고뇌는, 결과적으로 쓸모없는 것이었다.
예지는 고막을 울려대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멀어져감을 느꼈다. 민준이 자신을 지나쳐 다른 곳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간절히 바라던 일이었지만, 어쩐지 가슴이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예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민준과 헤어지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와 줄곧 웃음을 띠고 있던 예지였지만, 지금은 웃어 보일 수가 없었다.
“헐-. 대박. 저 남자 이세아가 찍었나 본데?”
“그러니까 이세아 패거리가 직접 와서 이세아한테 데려가고 있네. 와-. 저 남자 누군지는 몰라도 팔자 제대로 폈다. 진짜.”
하지만 주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슬프고 공허한 기색을 담아내고 있었던 예지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분노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꾸욱-.
예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기껏 꾸며놓은 손톱이 다 망가질지도 몰랐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올라서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또…! 또 너야, 이세아?! 언제까지…! 대체 언제까지 내 모든 걸 뺏어갈 건데…! 그 정도 했으면 됐잖아! 내 마음까지 망가트릴 필요는 없잖아…!!’
다른 사람들은 누구든 괜찮았다. 다가오는 민준을 가차 없이 거절한 건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세아만은 아니었다. 이세아가 민준을 가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어라…? 뭐야. 예지 씨. 어디 가요?”
“쟤 뭐야? 그쪽으로 가면 좋은 꼴 못 볼 텐데…?”
“큭큭-. 냅둬. 예지 씨도 잘생긴 뉴페이스가 좋나 보지.”
“씨발, 예지야! 이러면 오빠 진짜 섭섭해…! 부도고 나발이고 책임 안 져준다?!”
뒤에서 일행들이 소리쳤지만, 예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예지는 인파를 헤치고 성큼성큼 파티장의 중앙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 뭐를 할지는 예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냥 이세아의 곁에 민준을 두고 싶지가 않았다.
이성적인 행동은 결코 아니었다. 평소의 예지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사실, 민준에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웃긴 일이었다. 차버릴 때는 언제고 딴 여자랑 만나려니까 이제 와서 아까워하며 기어이 훼방을 놓는, 어리석은 여자로 찍힐 수도 있었다. 명분이고 논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알고 있었다.
‘그래도…그래도……’
그래도 예지는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이세아는 아니었으니까. 이세아같은 악랄한 여자에게 민준이 넘어가는 걸 용서할 수가 없었으니까.
“아…! 이세아 씨. 맞으시죠…?”
하지만 예지가 민준에게 다다랐을 때 느껴지는 분위기는, 예지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민준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앞에 있는 이세아 패거리에 가려, 민준의 옆모습만 살짝 보였지만 그래도 알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을 볼 때처럼, 민준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
온몸에 힘이 과도하게 들어가 뻣뻣하기 그지없던 예지의 몸이, 건전지가 빠져버린 기계처럼 순식간에 축 늘어졌다.
아무 힘도 없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예지는 가만히 서서, 민준과 예지가 서로를 마주 보고 서서 정겹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봤다.
“저를 알고 계시나요?”
“그럼요. 매스컴에 매일같이 나오시는 분을 모를 리가요. 실물이 훨씬 더 아름다우셔서 잠깐 당황하긴 했지만요.”
“훗-. 말을 달콤하게 하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물론 갖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런 재주는 없네요. 그저 사실일 뿐인걸요……아, 저는 김민준이라고 합니다.”
“알고 계신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소개는 해야 하니까……저는 이세이에요. 오늘 사교 파티의 호스트이기도 하고요. 파티에 와주셔서 감사해요. 민준 씨.”
서로를 소개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빈 공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주고받는 대화가 매끄러웠다.
두 사람은 간간이 서로를 마주 보며 눈웃음을 지었고, 예의상 하는 별거 아닌 말에도 크게 리액션을 해주었다.
사교모임에 무척이나 어울리는 모습이었는데, 단순히 사교라기에는 마치 단짝처럼 잘 맞아 보여서 어쩐지 두 사람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화장실에서 그리고 정원에서, 예지와 민준이 그랬던 것처럼-.
‘……’
예지는 혼이 완전히 나가버린 텅 빈 눈으로 두 사람을 지켜봤다.
어떤 생각이 들고 있는지도 정확하지가 않았다. 빨리 감기를 하고 있는 화면의 장면이 넘어가는 것처럼, 감정이 순식간에 쉭쉭 뒤바뀌고 있었다.
자신에게 다가와 대쉬할 때는 언제고 다시 또 금방 세아와 하하 호호 웃고 있는 민준에게 배신감을 느끼다가도, 민준을 차버려 놓고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민준의 앞에서 가식적으로 웃고 있는 이세아를 보며 화가 치솟다가도, 민준과 함께 서 있는 세아의 모습이 너무나 잘 어울려서 슬퍼졌다.
민준과 세아는 선남선녀였다. 30줄에 접어들어서 말라가고 있는 자신과는 다르게, 세아는 화사하게 만개한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죽을 만큼이나 인정하기 싫었지만, 두 사람은 잘 어울렸다.
어쩌면 자신보다 훨씬 더.
“민준 씨는 어떤 회원님들의 추천으로 파티에 오셨나요?”
“음-. 이유나 본부장이랑 한설영 대표님한테 받았습니다.”
“유나 언니랑 한설영 대표님이요…? 실례지만…두 분하고는 어떻게 알고 계시는 거예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조합이라…”
“한 대표님이랑은 단순히 개인적인 친분이고, 유나 씨는 지금 저희 회사에 본부장으로 있어서……어렵지 않게 추천장을 받아냈네요. 하하하-.”
“네…? 그럼 민준 씨가 혹시 MJ인베스트먼트의…”
“네. 그 회사 대표가 접니다.”
“어머…제가 귀한 분을 몰라뵙네요.”
예지뿐 아니라, 주변에서 민준과 세아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고 있던 모두의 눈이 똥그랗게 커졌다. 헛바람을 삼키는 이들도 더러 있었는데, 그만큼 방금 보인 세아의 반응은 놀라운 것이었다.
예의상 해주는 공치사 이상의 빈말은 절대 하지 않는 이세아였다. 세아 뿐만 아니라 일성의 직계들은 모두 그랬다.
그걸 누군가는 제왕의 품위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단지 싸가지가 없는 것뿐이라고 했지만, 여하튼 ‘귀한 분’이라는 단어는 절대 세아의 입에서 나올만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나온다면,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일성과 동등하거나 더 윗줄에 있는 세계적 기업들의 총수에게나 쓸법한 표현이었다.
그런데 그런 단어를, 많아 봐야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민준에게 내뱉다니.
세아를 제외한 주변에 있는 모두가 귀신에라도 홀린 것처럼 멍하니 민준의 얼굴을 쳐다봤다.
“저희 회사를 알고 계세요? 그렇게 유명한 회사는 아닌데.”
“언론에 노출되는 걸 꺼리신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여기저기서 듣는 게 있다 보니…”
“역시 일성이네요. 귀찮아지는 게 싫어서 조용히 처리하고 있는 일들이 많은데 말이죠.”
“단지 남들보다 몇 발 정도 빠를 뿐인걸요. 어차피 몇 달 뒤면 대한민국에서 MJ인베스트먼트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니…”
"그건 좀 그렇네요. 너무 바쁜 건 별로라서. 하하-."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끝없는 수렁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예지는 울렁거리는 속을 최대한 진정시켜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자신이 무얼 놓쳐버린 것인지. 민준은 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지만, 이제 와서 궁금해 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게 소름이 돋을 정도로 끔찍했다.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민준을 차버린 것이 너무나 아까웠고, 이런 걸 아까워하는 자신이 역겨웠다. 혐오스러웠다.
“음-. 민준 씨-. 담소는 여기까지 나누고, 저랑 한 곡 추시겠어요? 마침 왈츠도 시작됐는데.”
점입가경이었다. 여왕이 먼저 춤을 추자고 손을 내밀다니.
단순히 민준이 마음에 들어서 일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다.
지금 세아가 내민 손은 세아의 손이, 아니라 일성의 손이라고 보는 게 타당했다.
기업 간의 대대적인 협력을 뜻하는 거창한 의미는 아니겠지만, 일성에서 작은 호감을 표시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다.
사람들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뚜드려서 세아의 손에 달려있는 가치를 계산해보고, 다시 민준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모든 사람의 눈에 민준이 비쳤고, 다양한 감정이 떠올랐다. 부러움, 시기, 질투, 동경, 그리고 후회.
하지만 민준의 입이 열리고 난 뒤, 모든 감정은 딱 한 가지로 통일되어 버렸다. ‘당혹’이었다.
“이런, 안 되겠네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