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 166화
설영은 놀이기구를 무척이나 잘 탔다.
어떤 무서운 놀이기구도 비명 한번 안 지르고 깔깔 웃으면서 즐겼는데, 그 모습이 마치 놀이기구를 무서워하는 하찮은 승객들을 비웃는 여왕 같은 느낌이라 참 잘 어울렸다.
게다가 우리가 샀던 티켓이 어떤 기구든지 줄 서지 않고 곧바로 탈 수 있는 프리패스권이라 기다리는 시간도 없이 계속해서 기구를 탔는데, 이제는 중학생 때처럼 놀이기구를 탄다고 속이 매스껍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설영만큼 재밌게 즐길 수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놀이기구보다 열 받아서 람보를 운전할 때가 더 스릴 넘쳤다.
그건 정말 목숨을 담보로 하는 미친 짓이라 그 정도로 생생한 스릴감을 느끼려면 안전 바를 하지 않고 놀이기구를 타야 할 텐데, 내심 한 번쯤 해보고 싶긴 했으나 대표의 체면을 지켜야 해서 실제로 시도하지는 못했다.
뭐 그래도, 내 옆에 꼭 붙어서 아이처럼 좋아하는 설영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놀이공원에서의 시간이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아, 도시락 먹어야 하는데. 어디서 먹는 게 좋을까요? 여보.”
“아까 보니까 피크닉 플레이스라고 테이블 많이 깔려있는 곳이 있던데, 거기서 먹으면 되겠지?”
“으음-. 그런 데는 더러우니까 차라리 놀이공원 안에 있는 레스토랑을 하나 빌리면…”
“더럽진 않을 거야. 설영아. 그리고 레스토랑을 빌리면 기껏 도시락을 싸 온 의미가 많이 퇴색되지 않을까…?”
“네. 알겠어요. 여보 말에 따를게요.”
나는 금방 내 말에 순종하는 설영을 보며 흡족하다는 듯 웃어주곤, 설영과 손을 꼭 잡고 피크닉 플레이스로 향했다.
적당한 테이블에 앉아 도시락을 까기 시작했는데, 솔직히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데다가 가정부를 쓰며 사모님 생활을 하는 설영이, 요리까지 잘할 거라고 기대하는 게 도둑놈 심보였다.
‘그래도 포장은 거의 호텔 도시락 급이네. 이런 게 타고난 감각인가?’
그런데 막상 도시락을 열어보니 고급스러운 나무 그릇에 음식들이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메뉴는 유부초밥에 김밥이 메인이었고 소고기나 장어 같은 비싼 반찬들도 보였다. 후식으로 과일까지 들어있었는데, 설영이 싼 게 아니라 정말로 호텔 도시락에서 파는 도시락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아니야. 기대하지 말자. 원래 겉보기만 그럴싸하고 맛대가리는 하나도 없는 게 도시락 이벤트의 정석이니까…’
나는 설영에게 기계적으로 ‘와~ 이걸 다 직접 싼 거야?’ 하는 느낌의 리액션을 몇 번 해주고는, 나무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맛봤다.
당연히 기대는 전혀 안 하고 기계적으로 ‘와~! 정말 맛있다!’라고 칭찬해주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이게 웬걸. 음식은 너무나도 맛있었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트릴 정도로 훌륭했다.
“와-. 맛있네…”
“정말요? 여보?”
“응. 내가 먹어본 유부초밥 중에 제일 맛있는데…?”
“여보 입맛에 안 맞으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는데…여보가 맛있게 먹어주니까 너무 기뻐요.”
“아니…이 귀한 걸 맛없게 먹는 새…사람이 있을 리가…”
이래 봬도 한창 큰돈을 만지기 시작한 비기너 졸부 시절에는, 매끼를 호텔 파인 다이닝에 가서 최고로 비싸고 맛있는 음식들만 먹고 다녔다.
그런데 설영의 음식은 그 음식들과 비교해도 절대 뒤처지지 않았다. 아니, 호텔 특유의 고급스러운 느낌과 집밥 특유의 정성이 더해져서 오히려 더 맛있는 느낌이었다.
“어디서 요리 배운 거야? 왜 이렇게 요리를 잘해?”
“호호. 신부 수업받을 때 호텔에서 잠깐 배웠어요.”
“음-. 신부 수업.”
신부 수업이라니. 21세기에 그런 문화가 남아있을 줄이야.
좀 놀랐지만, 딱히 중요한 건 아니기에 곧 신경을 끄고 설영이 싸 온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다. 원래 싸 온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 맛없어도 맛있게 전부 비워주는 게 국룰이었는데, 심지어는 맛있기까지 하니 도시락이 주는 감동이 열 배는 더 대단했다. 내가 먹는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 보고 있는 설영이 갑자기 훨씬 더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당장에라도 박아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와-. 진짜 잘 먹었어. 설영아.”
“네. 여보. 맛있게 드셔주셔서 고마워요.”
“다음에는 뭐할까? 다리 아프지 않아? 더 걸을 수 있겠어?”
나는 설영이 `그렇다`라고 말하기를 간절하게 바랬다. 마침 5성급 호텔인 샤롯호텔이 놀이공원 옆에 붙어 있었기에, 설영이 다리 아파서 쉬고 싶다고 하면 곧장 그쪽으로 가서 따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설영은 내 기대를 배신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요. 하나도 안 아파요. 여보랑 손잡고 걸어서 그런지 멀쩡해요.”
“아, 그래…? 그럼 소화할 겸 조금 걸을까? 커피도 한잔하고.”
“좋아요. 여보.”
설영이 소담한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호텔로 갈 수 없다는 사실에 시무룩해졌던 내 자지가, 설영의 고혹적인 웃음을 보고 또다시 팽팽해지려고 했다.
아, 따먹고 싶다. 빨리 섹스하고 싶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요.”
“네~ 고객님. 적립이나 포인트……”
속마음은 섹스로 가득 차 있었지만, 나는 미안해서 차마 섹스하러 가자고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오늘 하루 데이트하자고 해놓고 점심 먹고 바로 호텔로 가버리면 평소랑 다를 게 없었다.
결국, 우리는 도시락을 먹었던 자리를 깔끔하게 치우고 조금 걸어서 커피숍에 들어왔다. 나는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고, 설영은 화장실에 간 상태였다.
조금은 무료하게 설영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건너편 테이블에서 내가 들어올 때부터 유심히 나를 지켜보던 여자 둘이 나에게 걸어왔다.
‘오. 헌팅인가? 용감한 여성들이네.’
외모가 너무 압도적이면 오히려 헌팅도 잘 안 당하는 법이었다. 그저 홀린 듯 바라보다가 알아서 포기하고는 했는데, 이번 여자들은 조금 달랐다.
뭐, 둘 다 몸매도 잘 빠졌고 얼굴도 나름 괜찮은 게, 충분히 자신감을 가질 만한 여자들이었다.
“저,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
“갑자기 실례지만, 혹시 저희 모르세요…? 저희 둘 다 치어리더로 활동하고 있거든요.”
“아, 그래요? 그런데요?”
“음…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런데…혹시 서로 번호 좀 교환할 수 있을까 해서요.”
“안 돼요. 못 보셨어요? 저 여자친구랑 같이 왔는데.”
“아~ 화장실 가신 분이요? 여자친구인 줄 몰랐는데…나이가 좀 있어 보이셔서…”
먼저 말을 건 한 명이 가차 없이 설영을 깎아내렸고, 상황을 지켜보던 조금 더 육덕진 몸매의 다른 한 명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귓속말을 속삭였다.
“그러지 말고 그냥 저희랑 노는 거 어때요? 아무리 아줌마가 취향이어도…젊은 여자들이 훨씬 더 쫄깃한 거, 오빠도 알고 있죠? 우리가 더 잘해줄게요. 오빠.”
“맞아요. 원하는 거 있으면 다 해줄게요. 오빠. 줄 때 안 먹으면 후회할지도 모르는데…자꾸 그렇게 뚱한 표정으로 있을 거예요?”
말하는 본새를 보니까 쫄깃하기는커녕 너덜너덜할 것 같긴 했지만, 나는 굳이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게, 내 눈에는 치어리더를 가장한 비치년들을 무표정하게 쳐다보며 다가오고 있는 설영의 모습이 보였다.
“뭐 하는 거지. 지금?”
설영이 다가와서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자, 두 비치년들이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이 정도 상황까지 됐으면, 살벌한 기세를 풍기고 있는 설영에게 쫄아서 죄송하다고 하고 갈 줄 알고 긴장을 풀고 있었는데, 옆에서 들려온 말소리에 나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놀라서 동공이 튀어나올 만큼 눈이 크게 떠졌다.
“아……안녕하세요. 어머니. 아드님이 너무 잘생기셔서 헌팅 좀 하고 있었어요. 어떻게 이렇게 잘생긴 아드님을 낳으셨어요?”
“큭, 그러니까요. 게다가 아드님하고 놀이공원까지 같이 놀러 오시고. 모자끼리 사이가 상당히 좋으신가 봐요.”
“…”
설영은 비치녀들의 막말을 듣고, 눈살을 강하게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곱디고운 입가가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는 걸 보니, 분노 지수가 급등하고 있어서 말도 잘 안 나오는 것 같았다.
짝-. 짝-.
느닷없이, 커피숍에 경쾌한 소리가 벼락처럼 울렸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었다.
설영은 망설임 없이 왼쪽 비치녀의 뺨을 후려치더니, 얼빠져 있는 오른쪽 비치녀의 뺨도 야무지게 때려버렸다. 설영의 손이 곱고 가늘어서 그런지 유독 매워 보였다.
뺨을 맞고 한순간 정신을 놓고 있던, 왼쪽 비치녀가 설영에게 고함을 질렀다.
“이…이 늙은 년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뺨을 때려?!”
“그러게. 대체 누군데 이렇게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를까. 이름이 뭐지?”
“하. 뻔뻔하게 말하는 꼬라지 봐. 당신 지금 경찰에 신고할 거야! 폭행죄로 깜빵에 처넣을 거라고!”
분위기가 끝을 모르고 과열되고 있었다. 나는 정신을 다잡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설영을 등지고 서서 설영과 두 여자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 정도만 합시다.”
“뭘, 뭘 그만 해요! 이 늙은 년이 우리 뺨을 때렸는데!!”
“그쪽이 먼저 제 여자친구 신경 긁은 거 아닙니까. 그쪽도 잘한 거 없습니다.”
“그래도 폭력은 아니죠! 우리는 일방적으로 맞은 피해자라고요!”
“하아-. 그래요. 그건 미안합니다. 그래도 그쪽이나 저희나 체면이 있는데 여기서 떠드는 건 그만합니다. 치어리더라고 하지 않았어요? 알아보는 사람 있으면 어쩌려고.”
내 말에 정신이 조금 들었는지 비치녀들 두 명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커피숍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주말 드라마 보듯 우리를 보고 있었다.
“…제 명함입니다. 나중에 이쪽으로 전화해 주세요. 그럼 이만.”
“잠, 잠깐만요, 당신…! 어디 가요…!!”
“미친 늙은 년! 고소할 거야! 고소할 거라고!”
나는 MJ인베스트먼트 대표 명함을 던져주고 뒤에서 있는 설영의 손목을 끌고 커피숍을 나왔다.
뒤에서 비치녀들이 소리를 질러댔지만, 철저히 무시하고 밖으로 나와서 쭉 걸어가는데, 뒤에서 설영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만요. 여보. 저 잠깐만 다시 다녀올게요. 벌레들 때문에 화나서 도저히 못 참…”
우뚝-.
나는 설영의 말에 몸을 멈춰서서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내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발견했는지, 잔뜩 굳어있던 설영의 표정이 당황스럽게 변했다.
“여보. 왜, 왜 그렇게 화난 표정을……”
“내가 지금 화가 안 나게 생겼어? 뺨을 대체 왜 때리지?”
“그건 너무 화가 나서……여보 설마, 제가 뺨 때린 것 때문에 화났어요? 그, 그래도 그런 년들을 가만히 둘 수는…! 여보한테 대놓고 꼬리치고 저한테 모욕을 주는데 그걸 어떻게 참아요…!”
“손 줘 봐.”
“네…? 앗-. 여, 여보.”
나는 설영의 손을 잡아채서 손바닥을 펼치도록 만들었다. 뺨을 때린 여파로, 하얗고 이쁜 설영의 손이 빨갛게 부어있었다.
“이럴 줄 알았지. 이 손이 얼마나 귀한데……잘못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 여, 여보……”
“손만 문제야? 뺨 때렸다가, 당신이 맞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 상대는 두 명인데 왜 그렇게 겁이 없이 굴지?”
“그, 그건…맞더라도 나중에 복수하면 되니까…그리고 여보가 지켜줄 거니까…”
“아니지. 지키는 게 문제가 아니야. 자칫 당신이 한 대라도 맞았다면, 나 그년들 정말 어떻게 해버렸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런 위험한 짓 하지 마. 나를 위해서도. 알겠지…?”
“아…알겠어요. 여보. 흑-. 미안해요. 걱정하게 해서. 너무 미안해요. 그래도 너무 화나서…흐윽…그년들이, 그년들이 감히 내 앞에서 여보한테 꼬리치니까…”
설영이 내 품에 꼭 안겨 오면서 훌쩍댔다. 나보다 10살은 더 많은 아줌마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요염하고 사랑스러운 몸짓과 목소리였다. 그리고 진실된 설영의 감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평소에는 가공된 여우 짓의 향이 조금 난다면, 지금은 완전히 나한테 감동해서 주체할 수 없는 마음에 안겨 오고 있다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좋은 기회였고, 나는 설영을 위한 멘트를 날려주었다. 원래 평소에는 적당히 밀어내다가, 기회가 왔을 때 확 당겨주면 복종도가 팍팍 오르는 법이었다.
“됐어. 그런 수준 떨어지는 여자들은 그냥 잊어버려. 나는 벌써 기억도 안 나. 내 앞에 한설영이 있잖아.”
“아-…여, 여보.”
“당신이 최고야. 이 놀이공원에서 제일 아름다워. 아무도 당신 못 이겨.”
“맞아요. 제가, 제가 최고예요. 그리고…저한테는 여보가 최고예요. 여보만이 저를 가질 수 있어요.”
자기애 넘치는 대화들이었지만, 놀이공원 분수대 근처에서 하고 있으니까 나름 로맨틱했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조심스럽게 뽀뽀부터 했다. 그리고는 입술을 떼자 설영의 눈이 이미 게슴츠레 풀려있었다. 아마 나도 마찬가지겠지.
“…여보. 잠시만 귀 좀 주세요.”
설영의 부탁에 나는 허리를 숙여서 귀를 설영의 입가로 갖다 댔다. 설영은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끔 아주 자그맣게 내 귓가에 속삭였는데,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설영의 달콤한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느낌이 무척이나 야릇했다.
“여보가…너무 좋아요. 여보를 먹고 싶어서…못 참겠어요-. 우리…호텔로 갈까요…?”
“……”
심장이 터질 듯이 쿵쿵 뛰어댔다. 엄청난 흥분감에, 피가 너무 빠르게 온몸이 타버릴 것 같이 뜨거워졌다. 코끼리도 발정시킨다는 초강력 최음제를 맞은 기분이었다.
“앗-. 여, 여보.”
나는 즉시 설영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놀이공원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곧장 샤롯호텔로 향했다.
프런트에서 카드를 주고 가장 좋은 방으로 잡아 달라고 말한 뒤, 객실로 향했다.
덜컥-.
객실의 문이 열리고 세련된 느낌의 호텔 방이 펼쳐졌다. 나는 신발도 대충 던져버리고 설영을 끌고 가서, 침대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짐승처럼 설영의 몸을 덮쳤다. 여름이라 서로의 살결이 끈적끈적 붙고 있었지만, 그런 감촉마저 야릇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여, 여보 잠시만요. 저 아직 안 씻었는데…”
“안 돼. 못 참겠어.”
“흐읏, 하읏…!! 여, 여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