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 137화
나는 노래 예약을 마치고 앞으로 나가서 마이크를 잡아 들었다. 내가 반말을 한 것 때문에 여전히 노기가 남아있는 진주는 나를 표독스럽게 째려보며 독기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절만 하고 그만두고 그런 거 없어요. 무조건 2절까지. 못 불러도 최선을 다해서.”
“대놓고 부담을 주시네요. 초보자한테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자, 말은 이제 그만. 노래 시작하겠습니다. 대표님.”
“그래, 진주 누나.”
“…”
꾸욱-.
진주는 나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한 번 얼마나 잘하는지 보겠다는 듯 과장된 동작으로 리모컨을 조종해서 노래를 시작시켰고, 곧 앰프가 쿵쿵대며 연하남의 가슴을 울리는 전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진주는 노래가 시작되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풋-. 하고 작게 웃었다. 워낙 유명한 노래라서 진주 역시 이 노래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후우…집중하자. 집중.’
이 노래는, 진주에게 던지는 나의 승부수였다. 조용히 읊조리기만 해도 평타는 칠 수 있는 잔잔한 노래도 알고 있었지만, 내가 선택한 이 곡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락 발라드풍의 시원한 고음이 요구되는 난이도 있는 곡이었고 가사도 워낙 직설적이어서, 잘만 부르면 누나들의 마음을 폭격하는 박력 연하남의 모습을 연출할 수 있었지만, 못 부르면 이만큼 쪽팔린 곡이 없었다. 아마 이 노래로 고백한다고 꼴값 떨다가, 처참한 노래 실력 때문에 누나들에게 차인 연하남만 해도 전국에 수만 명은 되겠지.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그중의 한 명이 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노래를 진지하게 불러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진주 같은 노래 고수 앞에서 부르려니 여간 긴장되는 게 아니었다.
‘괜찮아. 나를 믿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쏟아부은 돈을 믿는 거야. 어차피 다 몸으로 하는 건데 어려울 거 없겠지.’
그래도 굳게 믿는 구석이 있다면, 바로 ‘신체 강화’였다. 신체 강화를 하면 신체가 튼튼해질 뿐 아니라 각 부위의 기능 자체가 향상되었다. 나는 레오레를 할 때 이런 신체 기능 향상의 효과를 톡톡히 느낄 수 있었는데, 학창 시절부터 레오레에 엄청난 시간을 투자하고 대단히 진지하게 임했기 때문에 나는 나의 실력의 한계가 어딘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체 기능이 향상되자 내가 한계라고 생각했던 벽들이 쉽게 쉽게 깨져나갔고, 나는 연주에게 레오레를 가르쳐주면서 그런 변화들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전에는 그랜드 마스터에서 챌린저 하위권을 왔다 갔다 했는데, 아마 지금 게임을 진지하게 한다면 현역 프로게이머들까지 다 패면서 랭킹 1등도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지금의 나에게 게임은 단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것이라 그렇게까지 빡세게 할 생각은 없었지만.
여하튼, 신체로 하는 거라면 나는 뭐든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노래는 운빨 좆망겜이라고 불릴 정도로 타고난 재능이 중요한 분야였다. 10년 동안 죽도록 노래 연습을 한 사람보다, 재능을 타고난 10살짜리가 가볍게 흥얼거리는 노래가 훨씬 더 듣기 좋은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기에 나는 밀려드는 긴장감을 가라앉히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미친듯한 성능의 내 다이아 성대를 제대로만 이용하면, 경험 따위는 없어도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나를 동생으로만~ 그냥 그 정도로만~”
“…헐?!”
나는 정확한 박자에 맞춰서 첫 소절을 담담하게 흥얼거렸다. 신경 써서 부른다기보다는, 들었던 대로 원곡을 따라 한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깜짝 놀랐다는 듯이 경악성을 내뱉는 진주의 반응을 보니 노래가 썩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진주의 반응에 자신감이 생긴 나는 더욱 편안하게 노래에 집중할 수 있었다.
“누나가 누굴 만나든지~ 누굴 만나 뭘 하든지~ 난 그저 기다릴 뿐~~~”
“…”
슬슬 고음에 접어드는 구간이었지만 목이 전혀 답답하지 않았다. 그런 걸 신경 쓰기 보다는 가사에 ‘준호’의 이름을 넣어서 진주를 저격해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건 너무 꼴값 떠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입을 떡 벌리고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진주의 반응은 이미 더없이 훌륭했기에, 이 이상 오버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 같았다.
“누난 내 여자니까~! 너는 내 여자니까아아~~!!!”
나는 의도적으로 목을 긁어가며 원곡과 유사한 느낌으로 고음 파트를 소화했다. 어떻게 하는 건지 전혀 몰랐지만, 그냥 상상하는 대로 소리가 알아서 나왔다. 이런 게 재능인가 싶어서 짜릿한 느낌이 들었고, 왜 사람들이 노래를 잘 부르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게임으로 치면 매드무비에서나 나올법한 완벽한 콤보를 실제로 재현해내는 느낌이었다. 짜릿한 손맛 대신 짜릿한 성대 맛이라고나 할까.
“너~~ 라고 부를 게~ 뭐~~ 라고 하든지~ 남자로 느끼도록 꼭 안아줄게~~!”
짜릿짜릿한 맛을 느끼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닌지, 진주가 노래를 듣다 말고 소름이 돋는다는 듯 자신의 팔뚝을 쓰다듬었다. 저렇게까지 오버 액션 해주지 않아도 2절까지 완창할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진주의 반응이 더없이 좋은 칭찬으로 다가왔다. 나는 고래처럼 춤을 추기엔 조금 부끄러워서 대신 노래에 더 집중했다. 진주가 보여줬던 대로, 최대한 가사의 의미에 집중해서 부르려고 노력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노래가 끝나 있었다.
‘벌써…? 와, 이거 미친 거 아니야?’
재밌는 영화나 드라마에 흠뻑 빠져서 볼 때, 분명 10분도 안 된 것 같은데 정신 차려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섹스나 게임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재밌는 걸 할 때는 시간이 무척이나 빠르게 흘렀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노래는 단연 최고의 시간 가속 능력을 보여줬다.
벌벌 떨면서 첫 소절을 부르던 게 1초 전 같은데,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노래가 끝나 있었다.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온 것처럼 대단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거, 거짓말!!”
“…네?”
노래의 여운에 흠뻑 빠져있던 나를 깨운 건, 어쩐지 또다시 잔뜩 화가 난 듯한 진주의 성난 목소리였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진주의 물음에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노래에 너무 심취해 있었던 때문인지, 아직도 현실감각이 부족했다.
“노래 안 불러 봤다면서요!! 초보자라면서!! 이게 어떻게 초보자야!!”
“아니…왜 화를 내고 그래요?”
“…근데 진짜 초보자 맞는 거 같으니까 그렇죠! 마이크도 제대로 못 쥐는 사람이 노래는 왜 이렇게 잘 부르냐고요! 돈도 많고 얼굴만 잘생기면 됐지, 왜 우리 불쌍한 가수들한테서 노래까지 뺏어가는데요!”
“허어-…”
나는 상상치 못한 진주의 반응의 깊은 탄식을 흘렸다. 좋은 노래를 들었으면 박력 넘치는 연하남에게 뿅 가기만 하면 될 것을, 진주는 전지적 가수 시점에 감정을 이입해서 나의 재능을 시기하고 있었다.
“이, 이럴 거면 그냥 대표님이 아이돌 하면 되잖아요!!”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건데요.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네.”
“노래 잘하려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하루에 10시간도 넘게 트레이닝 받았었다고요! 그렇게 몇 년을 해야 그나마 노래 좀 한다는 소리를 듣는 건데…! 대표님 같은 사람은 당연히 이해 못 하죠!”
“아, 그렇구나. 정말 고생하셨겠네요. 수고했어요. 진주 누나.”
“재, 재수 없으니까 누나라고 하지 말아욧!”
“그래, 알겠어. 진주야.”
“아으…! 진짜!”
****
잠시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진주와의 노래방 데이트는 성공적이었다.
마지막쯤에는 내가 우겨서 커플 듀엣곡도 많이 불렀는데, 처음에는 질색하던 진주였지만 부르면 부를수록 빠져들어서 나중에는 나보다 더 재밌게 즐겼다.
나는 MJ인베스트먼트에 새롭게 만들어진 비서실 직원에게 연락해서 벤틀니의 뒤처리를 부탁하고는, 진주와 함께 택시를 타고 진주의 집으로 향했다.
진주는 성공한 커리어 우먼답게 한남동 쪽에 위치한 고급 빌라에서 살고 있었는데, 우리 집이랑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이제 잘 걷네요? 식당에서는 비틀거리더니.”
“그럼요. 원래 노래방 가서 놀면 취한 거 다 날아가요.”
“다행이네요. 내일 출근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치-. 이것보다 훨씬 더 취해도 출근할 수 있거든요? 대표님이 한창 급식 먹을 때부터 쌓아온 경험과 연륜이 있다고요.”
“정말요? 믿어도 돼요?”
“그럼요. 아무 문제 없어요.”
“그럼…진주 씨 집에서 술 한잔 더할까요?”
우뚝-.
공원처럼 예쁘게 조성된 단지를 걸으며 던진 내 말에, 진주의 몸이 우뚝 멈춰 섰다.
진주는 나를 돌아봤고, 나도 몸을 살짝 돌려서 진주와 마주 봤다. 키 차이 때문에 진주가 나를 올려다봐야 했지만, 이런 구도가 싫지 않았다. 여자가 촉촉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볼 때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성이 있었다.
“…집에 아무도 없어요. 저 혼자 살아요.”
“더 좋네요. 마침 둘이 있고 싶었는데.”
“무, 무슨…! 그런 건 안 돼요. 그냥 술만 마시는 거면 몰라도…”
“뭐, 그것도 나쁘지 않죠.”
“…대신 약속하세요. 제가 취해도 절대 건드리지 않기로. 만약 이 약속 안 지키시면, 저 진짜 대표님 다시는 안 볼 거에요. 아시겠죠?”
끄덕끄덕.
나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진주는 그 모습을 보며 볼을 확 붉히더니 몸을 홱 돌려서 뚜벅뚜벅 걸어갔다. 나는 말 없이 웃으며 진주의 뒤를 따라서 조용하게 걸었다.
취해도 건드리지 말라니. 차라리 손만 잡고 자자는 약속이 더 현실성 있을 것 같았다.
띵-.
진주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지만, 어색함 때문은 아니었다. 어떤 미묘한 열기가 우리 둘 사이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진주는 그 후덥지근한 공기가 어색한지 볼을 빨갛게 물들이고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힐끔거렸다. 나는 그런 진주를 뻔히 바라보며 웃었다.
“…정말. 왜 그렇게 웃어요?”
“안절부절못하는 누나가 귀여워서요.”
“그, 그건…! 대표님이 자꾸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니까…!”
“네? 제 눈빛이 어때서요?”
“그, 그건…! 그러니까…!”
나는 진심으로 억울해서 진주에게 물었다. 정말 잡아먹으려고 작정한 눈빛을 보낸 거면 몰라도 나는 진심으로 진주가 귀여워서 흐뭇하게 바라봤는데, 단지 머리에 음란한 생각이 가득 찬 진주가, 새끼 양처럼 순수한 나의 눈빛을 곡해하고 왜곡해서 해석하고 있을 뿐이었다.
띵-.
더 말꼬리를 물어서 진주를 음란한 사람으로 몰아가려고 했건만, 타이밍 좋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진주는 급히 내려서 집으로 향했고, 나도 진주를 따라갔다.
띡띡띡띡-. 띡.
진주는 도어락 번호를 빠르게 누르다가 말고, 나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집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진주가 있는데.”
“…하아. 이제는 누나라고도 안 하네.”
철컥-.
문이 열리고, 진주와 나는 나란히 들어가서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진주의 집을 구경했는데, 진주의 말대로 널찍한 집안에는 별것이 없었다. 그나마 한쪽 벽에 있는 큰 장식장만 온갖 소품들로 가득 차 있었고, 나머지는 텅텅 비어 있었다. 필수적인 가구들은 들어와 있었지만, 그나마도 화려한 느낌이 아니라 크기가 작고 디자인이 담백해서, 사람 사는 집이라기보다는 미니멀하게 꾸며놓은 모델 하우스 느낌이었다.
“술이랑 안주 가져올게요.”
“도와줄게. 진주 누나.”
“괜찮아요. 그것보다는, 제발 말투 좀 하나로 쓰시면 안 될까요? 대표님?”
“그냥 누나도 이제 나한테 말 놔. 언제까지 대표님이라고 딱딱하게 부르게. 누나 집까지 들어와 본 남자한테.”
“…네가 무슨 남자야. 꼬맹이 주제에.”
“꼬맹이…?”
“그럼. 스무 살이면 꼬맹이지. 아니, 아가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아가야. 식탁에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 아줌마가 얼른 맛있는 거 해줄 테니까.”
“허허-…”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반박도 못 하고 그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단언컨대 나를 ‘아가’라고 부른 여자는 진주가 처음이었다. 그것도 경험도 없는 처녀 주제에 감히 나를 아가라고 부르다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른다더니, 딱 그 모양새였다.
‘내 빅 맘모스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정말 궁금하네…?’
진주는 주방에서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뭐를 만드는지는 몰랐지만, 손길만 봐도 요리를 하는 데에 능숙하다는 게 딱 느껴졌다. 나는 식탁에 앉아서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일어나서 집에 들어왔을 때 봤던 장식장을 향해 걸어갔다. 대충 보니까 사진이나 트로피 같은 게 수두룩해 보이던데, 장식장을 구경하면 진주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훑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골든 뮤직 어워즈. 올해의 신인상 ‘선샤인’
-바다 소리 차트. 올해의 대상 ‘선샤인’
-워터 멜론 어워즈. 올해의 대상 ‘선샤인’
-올행의 경영인 상. 스타 엔터 부대표 ‘김진주’
-세종 일보 주관 경영인의 밤, 올해의 경영인 ‘김진주’
‘캬. 뻔쩍뻔쩍하네. 우리 진주.’
나는 눈을 빛내며 진주가 받아온 트로피와 상패들이 구경했다. 워낙 많아서 장식장이 꽉 찰 정도였는데, 죄다 굵직굵직 한 것만 있는 걸 보면 자잘한 상들은 아예 이 장식장 안에 넣지도 않은 것 같았다.
‘이건…그룹으로 활동할 때 사진인가? 이준호 전 대표도 있네. 뭐야. 아역 배우도 했던 거야? 허허.’
나는 진주가 걸어온 삶의 궤적들은 흐뭇하게 바라봤다. 이 수많은 트로피와 상패들이 이제 곧 내 여자가 될 진주가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 증명해주는 것 같아서, 무척이나 마음이 흡족했다.
“민준아~ 아가야~ 아줌마 술상 다 차렸는데~? 우리 아가 어딨니~?”
“쯧-…”
하지만 곧 들려온 진주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훈훈했던 감정은 싹 날아가 버리고 마음속에는 독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진주는, 꼭 봐야만 깨달을 것 같았다. 아가에게 달려 있는 그것이, 웬만한 아가보다 더 크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