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 136화
식사를 하면서 진주는 조금은 새삼스럽다는 눈빛으로 민준을 쳐다봤다. 처음에는 짓궂게 놀리기만 하더니, 대화를 하면 할수록 말이 잘 통하는 기분이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남자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에 러브콜 많이 오지 않았어요? 부대표님 탐내는 회사가 많다고 들었었는데.”
“많이 왔었죠. 그래도 스타 엔터가 아니면 별로 이쪽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음…”
민준은 진주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업계에선 스타 엔터가 아직까지 중견 기획사 중 최강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건 부대표인 진주의 공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컨셉 기획력이 무척이나 세련됐으며 트렌드를 선도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가 많았는데, 문제는 너무 과도하게 탁월해서 시대를 몇 년씩 앞서나간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스타 엔터 소속 그룹들은 발매된 지 몇 년씩 된 노래로 뜬금없이 역주행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때가 되면 이미 그룹이 해체되어 있거나 간신히 목숨은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팬덤의 화력이 너무 약해서 역주행의 불씨를 크게 키우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지만 그건 회사의 규모로 인한 언플과 푸시력의 부족 때문이었지, 진주의 실력 탓이 아니었다. 여러 사정 때문에 자그마한 돌풍에 그치긴 했지만, 매번 역주행을 일으키는 진주의 탁월한 감각은 거대 기획사에서도 침을 흘리며 탐낼만한 것이었고, 실제로 이번 매각 시기에 거대 기획사 여러 곳에서 진주의 영입전이 펼쳐졌었다.
하지만 준호가 세운 스타 엔터를 버릴 수 없었던 진주는 들어오는 모든 제안을 거절해버렸다. 준호가 버린 것조차 버리지 못하는 자신이 미련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영 내키질 않았다.
“좋은 제안이 많이 왔었을 텐데…아무래도 이준호 전 대표와의 의리 때문이겠죠?”
“…아니라곤 못 하겠네요.”
“뭐가 그렇게 좋았어요? 그 사람?”
데이트 중에 언급하기엔 상당히 민감한 주제였지만, 민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며 진주에게 건배를 제의했다.
띠잉-.
적갈빛 와인이 적당히 차 있는 두 개의 유리잔이 부딪치면서 영롱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자연스럽게 와인을 한 모금 마시는 민준을 따라, 진주 역시 와인을 조금 홀짝였다. 술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분위기와 음식이 너무 훌륭해서 그런지 술이 술 같지가 않았다. 머리가 살짝 어질어질한 게 조금씩 취하고는 있는 것 같은데, 평소처럼 속이 메스껍지는 않았다. 진주는 문득, 이 부드러운 와인이 앞에 앉아있는 남자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분명히 건강에 안 좋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너무 달콤해서 자신도 모르게 계속 마시게 되는, 그런 느낌.
“…뭐가 그렇게 좋았냐고요? 음…전부? 그냥 이준호라는 사람이 좋았어요. 어리고 힘들었을 때 저를 진심으로 챙겨줬던 사람이 대표님밖에 없었거든요.”
“그래요? 부모님이랑 멤버들이랑은 사이가 안 좋았나 보네요?”
“그럴 리가요. 사이는 좋았죠. 다만 진심으로 무언가를 나눈 것 같지는 않아요. 제가 항상 선을 그어 놓고 행동하기도 했고…”
“아까 저한테 했던 것처럼요? 음. 그런 거면 조금 이해가 가긴 하네요.”
“…나이 든 사람 놀리니까 기분 좋으세요? 엄청 환하게 웃으시네요.”
“설마요. 진주 씨가 좋은 거죠.”
“…”
진주는 민준의 말에 굳이 대꾸하지 않고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 정상적인 대화를 하다가 느닷없이 느끼한 멘트를 던져오는 민준의 화법은 이미 간파한 상태였고, 대처법 또한 확실했다. 어차피 여기서 말을 더 이어봤자 가슴이 쿵쾅대고 머리가 핑핑 돌아서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으니, 차라리 입을 닫고 와인이나 한 모금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상황을 넘기는 게 더 나았다. 더군다나 이렇게 하면 빨개진 볼의 이유도 숨길 수 있었다.
12살이나 어린 꼬맹이에게 설레어서 볼 빨개진 게 아니라, 단지 취한 것뿐이라고. 민준과 자신을 속일 수 있었다.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아요. 잘하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치-. 이제 와서 말리는 거 너무 속 보이는 건 아세요? 젊은 사람이 어쩜 그렇게 음흉해요? 능구렁이 같아.”
“원래 남자는 다 그래요. 특히, 마음에 드는 여자 앞에서는요.”
“그만…! 그만 하세요. 더는 못 마시니까. 저 지금도 충분히 취했어요.”
“제가 술을 마시라고 한 적은 없지만…뭐, 취한 것 같긴 하네요. 그럼 이만 일어날까요?”
“벌써…가 아니라. 슬슬 일어나긴 해야겠죠. 네, 그럼요. 먹을 만큼 먹었으니까…아, 맛있었다.”
자칫 벌써 일어나는 거냐고 말실수를 할뻔했던 진주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하지만 굳이 다 듣지 않아도 진주가 어떤 말을 하려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기에 민준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진주에게 물었다.
“그렇게 아쉬우면 2차 갈까요?”
“안, 안 돼요. 여기서 더 취했다가는…”
“술 먹는 거 말고 다른 거 하면 되죠. 진주 씨 친구 없다면서요. 평소에 가고 싶었던 곳 없어요? 가고는 싶은데 혼자 가기는 창피한 장소라던가…”
“아-…”
민준의 말을 듣자마자, 진주의 머릿속에서는 한 장소가 떠올랐다. 평소에 너무나 가고 싶었지만, 같이 갈 사람이 없어 도저히 가지 못했던 그런 장소가.
“노래방…”
“노래방이요?”
“…네.”
“평소에 친구가 없어서 노래방을 못 갔어요?”
“어른 놀리는 거 아니라고 했는데…왜 자꾸…”
“아, 미안합니다. 어서 가죠. 노래방.”
민준은 진주에게 잽싸게 사과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물이 그렁그렁 거리는 게 더 놀렸다가는 진주가 정말 울어버릴 것 같았다.
****
진주에게 노래방 같이 갈 친구도 없냐고 놀리기는 했지만, 사실 나도 노래방에 가본 적은 인생을 통틀어서 손에 꼽았다.
노래방은 엄연한 인싸 문화였고, 나는 인생 태반을 조용한 아싸로 살아왔기 때문에 접해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 시간에 고독하게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게임을 하고 다른 사람들과 욕 베틀을 뜨기에 바빴달까. 뭐, 덕분에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능력이라든지 논리력이 많이 향상되었기에 후회는 없었다.
여하튼. 나에게 노래방이란 인싸들만의 문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 적조차 없어서, 만나기만 하면 노래방에 가는 부류들을 이해 못 하는 편이었는데, 진주와 함께 노래방에 와보니 그런 생각이 확 깨져버렸다.
“두 번 다시~ 사랑 안 해에에에~~~~”
노래방의 분위기 자체가 어색해서, 나는 진주의 노래를 들으며 적절한 리액션을 해줄 수가 없었다. 옆에 있는 형광 탬버린을 쳐 주기에는 너무 부장님 같을 것 같았고, 진주가 오자마자 분위기 축축 처지는 슬픈 발라드만 불러 제껴서 적당히 리듬을 타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진주의 노래를 듣는 수밖에 없었는데, 나의 소극적인 리액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주는 잘만 놀았다.
마치 노래 못 불러서 한이 맺힌 사람처럼 쉬지도 않고 몇 곡씩 열창했는데, 아이돌 출신답게 노래 실력이 기가 막혀서 확실히 듣는 재미가 있었다. 확신할 순 없었지만, 티비에 나오는 중견 가수들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것 같았고, 덕분에 슬픈 발라드만 계속 듣는데도 귀가 전혀 피로하지 않았다.
‘귀 호강 제대로 하네. 선곡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러나~~ 그 시절에에~~ 너를~ 또 만나서~~ 사랑~ 할 수~~ 있을 까아아아~~~”
듣기만 해도 눈물샘이 따끔거릴 정도로, 진주의 목소리에서는 애절한 감정이 묻어나왔다. 아마 절절하게 사랑했던 한 사람을 떠올리며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데, 현 썸남의 입장으로서 듣고 있기가 조금 거북했다. 질투라기보다는 언짢은 느낌이 강했다.
젊고 잘생기고 돈 많고 대물 자지까지 장착한 이 시대 최고의 스윗 가이가 옆에 있는데, 감히 다른 남자를 떠올리며 노래를 부른다고?
뭐, 살짝 이런 느낌.
“난 아직 열애 중~~ 헤어져도 헤어진 적 없어~ 언젠가아~! 내가 너와 이별 할 수 있을~~까~!!! 흐윽…너만…모르게…흐윽, 씁-. 나는 아직 너와…열애 중.”
‘얼씨구? 진짜 울어?’
술이 좀 들어가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진주는 노래를 부르다가 감정이 복받쳤는지 실제로 훌쩍이기 시작했다. 출중한 노래 실력만큼이나 엄청난 감수성이었고, 평소의 진주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 관찰하는 재미가 있었다.
기껏 노래방 왔더니 혼자서 마이크 독점하고 분위기 축축 져지는 발라드만 부르다가 훌쩍거리는 30대 아줌마.
이렇게만 표현하면 진상에 가까웠지만, 거기에 엄청난 노래 실력과 눈부신 외모가 추가되니까 신기하게도 하는 짓이 귀여워 보였다.
‘음. 예쁘긴 진짜 너무 예쁘네.’
나는 티슈를 들고 노래를 다 부르고 훌쩍이고 있는 진주에게 다가가 눈물을 툭툭 닦아주며, 아주 가까이서 진주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동물에 빗대어 보자면, 진주는 완벽한 사막여우 상이었다. 조막만 한 얼굴에 날렵한 V자 턱선,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포인트였는데, 섹시하면서도 귀여운 느낌을 동시에 풍겨대서 얼굴만 봐서는 도저히 30대처럼 보이지 않았다.
여리여리한 몸매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풍성한 바스트 역시 매력 포인트였는데, 미현 누나에 비하면 귀여운 응애 수준이었지만 같은 슬랜더 계열인 다영이보다는 적어도 두 컵 정도는 커 보였다. 다영이가 작은 게 아니라, 진주가 슬랜더 치고는 워낙 거유였다.
“흑, 쓰읍-. 흐우…이, 이제 괜찮아요. 대표님. 노래 부르다가 갑자기 울어버려서 죄송해요.”
“뭘요. 진주 씨가 안 울었으면 제가 먼저 울었을걸요? 원래도 이렇게 축축 처지는 발라드만 불러요?”
“그, 그런 건 아닌데…! 그냥…오랜만에 와인 마시니까 이런 노래들이 땡겨서…”
“그럼 댄스곡도 하나 불러주세요. 아! 진주 씨 아이돌 활동할 때 불렀던 노래 불러주시면 되겠네요. 노래에다가 안무도 같이 곁들여서.”
“네?! 말도 안 돼!! 안 돼요! 절대 못 해요! 십, 십 년도 전에 하던 걸 어떡해…”
“하…정말 이러기에요? 지금까지 진주 씨 노래 다 들어준 저한테, 그 정도는 해주실 수 있는 거잖아요.”
“으윽…그, 그러면…! 그러면 대표님도 노래 하나 하세요!! 저한테 노래시키시려면 대표님도 한 곡 정도는 불러주실 수 있는 거잖아요!”
진주가 나와 같은 논리를 사용해서 역공을 펼쳤다. 내가 노래를 못 부를 거라 생각했는지 진주는 꽤나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진주의 요구에 응했다.
“그래요. 어려울 거 없죠.”
“…이렇게 쉽게? 맨날 듣기만 하고, 한 번도 다른 사람 앞에서 노래 불러본 적 없다면서요!”
“네. 그래도 상관없어요. 진주 씨가 춤추면서 노래하는 거 꼭 보고 싶거든요.”
“…”
“진주 씨 먼저 하세요. 저는 그다음에 부를게요.”
“…정말 부르시는 거죠? 아줌마한테 거짓말하면 안 되는 거예요?”
“아줌마는 무슨. 진주 씨, 남들 몰래 결혼이라도 하셨어요?”
“여, 여하튼. 약속 꼭 지키세요!”
아줌마 프레임을 이용해서 자꾸만 나에게서 선을 그으려다가, 어느새 스스로를 아줌마라고 하는 게 익숙해져 버린 것인지. 진주의 입에서는 자꾸만 아줌마 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주보다 더 어리지만 최고로 육덕진 미현 누나에게 ‘아줌마’라고 하는 건 엄청난 꼴림 포인트였지만, 전형적인 슬랜더 계열에 얼굴까지 동안인 진주에게는 아줌마 타이틀이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스스로를 낮추기 위한 억지 프레임에 불과하달까. 차라리 누나라고 하면 몰라.
“아으…정, 정말…”
“최고로 귀엽고 깜찍한 곡으로 부탁해요. 진주 씨.”
“싫, 싫거든요!”
띡띡띡띡.
말로는 싫다고 하면서도 진주는 능숙하게 노래방 리모컨을 누르고는, 마이크를 들고 스테이지 위로 올랐다. 스테이지라고 해봤자 ㄷ자 소파와 대형 모니터 사이에 있는 널찍한 빈 공간일 뿐이었지만, 그 빈 공간에 진주가 서 있으니까 티비 돌리다 여자 아이돌이 나올 때만 가끔 멈춰서 보는 음악방송 무대 같이 느껴졌다.
뚜루루루-. 뚜루-. 뚜루루루-.
노래가 시작되자 요즘에는 들을 수 없는 클래식하고 서정적인 멜로디가 들려왔다. 최근에 유행하는 걸크러쉬, 걸스 힙합 컨셉과는 전혀 상반된 느낌이었는데, 최신 노래들과 비교하면 확실히 촌스러웠지만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아마 진주의 곱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출렁이는 가슴 덕분이겠지.
“지친 내 마음을 위로해주는 사람~ 그대뿐이죠~ 사랑해요. 그대~ 우리 이제 사랑할까요~ 그대 위해서 아껴놓은 내 마음 전부 줄게요~!”
‘캬. 가사 좋고.’
나는 리듬에 맞춰 고개와 발을 까닥거리며 흐뭇하게 춤추고 노래하고 있는 진주를 바라봤다. 노래방 레이저도 수백만 원짜리 무대 효과로 바꿔버리는 진주의 고품격 무대는 대단히 훌륭했다. 칼박에 맞춰 딱딱 들어가는 안무와 그러면서도 놓치지 않는 정확한 음정에, 이게 라이브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어느 분야에서 통용되는 ‘답답하면 네들이 뛰던가.’라는 명언이 있었는데, 진주라면 실제로 연습생들 다 퇴출시키고 자기가 나가서 음악방송을 뛰어도 충분할 것 같았다.
띠리링-. 띠링-.
“하아…하아…”
프로답게 마지막까지 집중해서 포즈를 취하고 있던 진주는, 노래가 완전히 끝난 뒤에야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를 휙 째려봤다.
“이거 원래 다섯 명이 부르는 노래거든요. 게다가 대표님 덕분에 춤까지 추면서 부르려니까 엄청나게 힘들었는데…왜 그렇게 웃고 계세요? 대표님도 아줌마가 이러는 거 보니까 웃기죠?”
“뭘 그렇게 삐딱하게 생각하세요. 보기에 너무 좋아서 그러죠. 춤추고 노래하는 진주 누나가 너무 빛나 보여서.”
“…진, 진주 누나?”
“네. 진주 누나.”
“누, 누구 마음대로 누나라고…!”
“그럼 너라고 할까요?”
“…대표님 태어날 때 저는 초등학교 졸업했는데…하-. 됐다. 그냥 대표님 마음대로 하세요.”
“알겠어. 진주야.”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