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 131화
벤틀니에 지윤이를 태우고 회사로 돌아온 나는, 대표실에 들어와 잔뜩 긴장하고 있는 지윤이를 소파에 앉혀놓고, 탕비실에 가서 손수 녹차를 타기 시작했다. 비서에게 시켜도 되겠지만, 이미 교인이 된 지윤이에게는 이런 작은 이벤트 하나하나가 크게 작용할 테니 이 정도 수고쯤이야 별것도 아니었다.
무려 교주이자 대표인 내가 직접 우린 녹차였고, 티백 형태긴 했지만, 최고급 호텔에서나 쓰는 상등품이라 향도 기가 막혔다.
나는 대표실에 은은하게 퍼지는 녹차 향기를 음미하며, 양손에 찻잔을 들고 소파로 향했다. 지윤이의 앞에 녹차를 턱하고 갖다 놓으니, 내가 뭘 하나 조심스레 보고 있던 지윤이가 깜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
“대, 대표님…! 이, 이런 건 제가 해야 하는데…!”
“지윤 씨가 왜요? 지윤 씨는 아티스트지 제 비서는 아니잖아요.”
“그건 그, 그렇지만-. 아, 아무래도 대표님이시니까…”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들어요. 지윤 씨, 아까부터 얼굴이 창백하던데.”
“아…사, 사실 아까 고기가 너무 맛있어서 평소보다 좀 과식하긴 했는데…혹시-. 많, 많이 창백한가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래도 정말 체해버리면 안 되니까 어서 드세요. 녹차가 소화에 좋거든요.”
“아아-…그래서 녹차를…”
지윤이는 뒷말을 희미하게 얼버무리며 자신의 찻잔과 내 얼굴을 번갈아 가며 힐끗거렸다. 그리고는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술을 우물쭈물거렸다.
나는 지윤이의 행동을 훤히 보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여유롭게 찻잔을 들고 녹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대, 대표님은…”
“네…?”
“대표님은…! 매, 매너가 참 좋으시네요…!”
“…?”
뭔가 대단한 선언이라도 하듯, 지윤이는 양손에 찻잔을 든 채 눈을 딱 감고 말을 내뱉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비장한가 했더니, 겨우 매너가 좋다는 말이라니. 첫 만남 때부터 살짝 냄새가 나긴 했는데, 이제 와서는 거의 확실했다.
지윤이는 연애 레벨 최약체인 연주와 거의 동급으로 연애 고자였다.
눈앞에 있는 내가 너무 좋아서 스스로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수준이랄까? 딱 보면 견적이 나온다고, 아마 모태솔로일 게 분명했다.
솔직히 나에게 지윤이는 쉬워도 너무 쉬운 상대였지만, 다행히도 나는 쉬운 여자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쉽거나 말거나 예쁘고 귀여운 여자라면 다 좋아하는 편이었다.
“음. 녹차 한 번 타줬다고 매너 좋다는 소리를 들을 줄이야. 아무튼, 감사합니다. 지윤 씨.”
“단, 단순히 녹차 때문이라기보단…! 그-. 따듯한 느낌이랄까? 대표님이 저를 엄청 배려해 주시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게다가 처음 만났을 때 넘어질 뻔했던 것도 잡아주셨고, 아까 차에서 벨트도 직접 매 주셨고…! 여, 여하튼 너무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서…!”
“뭐, 대표니까요. 소속 아티스트한테 그 정도는 당연히 해줄 수 있죠.”
“아-…그, 그렇구나…그렇겠죠…! 대표님이니까…그 정도는…당연히…”
내가 대표로서 한 행동일 뿐이라고 선을 딱 그어버리자, 겨우 용기를 내서 자신의 진실한 감정을 전하던 지윤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생기를 잃고 굳어버렸다.
어찌나 우울한 티가 나는지, 만약 지윤이에게 꼬리가 붙어있었다면 지금쯤 지윤이의 꼬리는 발기불능 자지처럼 축 처져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이럴 때가, 달달한 간식 같은 멘트를 던져주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그리고…저도 남자라서, 예쁜 여자랑 있을 때는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거든요. 지윤 씨가 제 모습을 좋게 봐주셨다니 기분이 좋네요.”
“아…? 네? 그, 네에-. 예, 예쁜 여자…아, 그렇구나. 대표님도 남자니까-. 아-…? 에…? 방, 방금 뭐, 뭐라고 하신 거예요?”
“제가 말을 너무 어렵게 했나요? 지윤 씨처럼 예쁘고 귀여운 여성이랑 있을 때면…”
“…읏! 대, 대표님! 잠깐만요!”
“네? 왜요?”
“저, 저 지금 심장이 좀 이상하게 뛰어서…! 잠, 잠시만 녹차 좀 마실게요! 대표님이 타주신 녹차! 아, 맛있겠다. 녹차!”
나는 흥미롭게 지윤이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확실히 연주와 레벨은 비슷했지만, 뇌 정지가 온 상황에서의 두 사람의 대처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이와 같은 기능 고장 상황에서 연주는 정말로 아무 생각도 못 하고 뇌가 정지해버리는 타입이라면, 지윤이는 생각은 가능하되 제대로 된 생각은 하나도 못 하는 타입이었다. 그 증거로 지윤이는 뜬금없이 녹차 타령을 하더니 뜨거운 녹차를 순식간에 츄릅츄릅 마셔버렸다.
“으앗, 뜨거.”
“조심해야죠. 그리고 갑자기 왜 그러는 거예요? 속이 아직도 안 좋아요?”
“네에…니요? 잘, 잘 모르겠어요. 대표님.”
“얼굴은 좀 창백하긴 한데…잠시만 제가 좀 실례해도 될까요?”
“네? 실례라니…대표님이 뭘 해주시든 저는 좋…괜찮긴 한데…”
“그럼 잠시만 실례할게요. 지윤 씨.”
여성과 스킨쉽을 할 때는 테크닉 보다는 상황에 맞는 무드를 연출하는 게 훨씬 더 중요했다.
아직 지윤이와 나는 어색한 사이였다. 그러니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건 마이너스. 그렇다고 숙맥처럼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스킨쉽을 하되 내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 필요해서 하고 있다는 걸 제대로 어필하는 게 중요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윤이의 옆자리에 딱 붙어 앉은 다음, 마치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처럼 진중한 태도로 지윤이의 손을 붙잡고, 엄지와 검지 사이에 움푹 들어간 부분을 꾹꾹 눌러주었다. 체했을 때 사람들이 흔히 눌러주는 바로 그 자리였다.
“으앗…! 대, 대표님?”
“여기가 좀 딱딱한 게 정말 체한 거 맞네요. 소고기를 괜히 사드렸나 봐요.”
“아, 아니에요…! 어떻게 그런…! 그런 말씀 하지 말아 주세요. 대표님이 사주신 고기가 제가 먹어본 고기 중에 제일 맛있었어요! 정말 체한 거라고 해도 후, 후회하지 않아요! 다음에 먹어서 또 체한다고 해도 먹을 거예요!”
“…고기야 언제든지 사드릴 순 있긴 한데, 지윤 씨가 체하는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네요. 다음에는 꼭꼭 씹어서 드셔야 해요?”
“네, 네! 꼭꼭 씹어서 먹을게요, 대표님!
지윤이는 내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씩씩하게 대답했고,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살짝 웃어 주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봐도 방금 나눴던 지윤이와의 대화는 무척이나 유익했다. 덕분에 지윤이와 다음번에도 고기를 먹을 명분이 생겼고, 무엇보다 대화에 집중하느라 지윤이는 내가 어느새 자신의 손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화가 끝난 지금에서야 슬슬 느끼고 있는 것 같은데, 이미 흐름이 완전히 주물주물 메타로 넘어온 상태라 지윤이는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었다.
“아, 아으…! 흐, 흐잇! 대, 대표님! 이, 이제 저 속이 괜찮은 것 같기도 한데…!”
“네? 여기가 아직 딱딱한데…아, 혹시 제가 손을 잡고 있어서 불편한가요?”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정, 정말 괜찮아서 그러는…! 흐, 흐읍…!”
“조금 불편해도 참아주세요, 지윤 씨. 한 번 풀어줄 때 제대로 풀어줘야 나중에 탈 안 나요.”
“아, 아으….! 흐앗!”
나는 있는 체기 없는 체기 싹 날아갈 정도로 끈질기게 지윤이의 손을 주물렀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이번 스킨쉽의 포인트는 절대 지윤이의 손을 주무르고 싶어서 주무르는 게 아니라는 걸 어필하는 것이었다.
사심 한 점 없이, 마치 신성한 의식이라도 치르듯 신중하고 냉철하게 혈 자리를 찾아 손을 꾹꾹 누르는 내 모습을 보며, 지윤이는 더는 그만하라는 말도 못 한 채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교주의 오오라에 무방비하게 잠식당했다.
심지어 지윤이와 내가 있는 장소는 스타 엔터 사옥, 모든 교주 스킬의 효과가 강화되는 성역이었다. 안 그래도 강력한 오오라에 성역 버프까지 더해졌으니, 이건 도저히 지윤이가 버틸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흐, 흐앙! 흐잇, 흣! 하으읏…!”
어쩌지도 못하고 나에게 손을 맡긴 채 그저 신음만 내뱉는 지윤이의 야릇한 표정에서, 지윤이의 속에 색욕이 얼마나 한가득 들어찼는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지윤이의 손을 주무르는 데 집중할 뿐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이지 지독한 스킨쉽이었다.
“으읏…! 몸이…저 몸이 이상해요. 대표님. 아읏…!!”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데요? 병원으로 갈까요?”
“자, 자꾸 아래가 저려서어…! 흐읏…! 기분이 너, 너무 이상해서…! 으, 으앙…!!”
결국, 엄청난 쾌감을 참지 못하고 지윤이의 몸이 내 쪽을 향해 스르륵 쓰러졌고, 나는 깜짝 놀랐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지윤이의 몸을 받아들었다.
지윤이는 내 품에 안겨 가쁜 숨을 내쉬었고, 나는 지윤이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며 귓가에 속삭였다.
“하아-. 하읏-.”
“괜찮아요, 지윤 씨? 몸이 무척 뜨거운데…안 되겠어요. 지금 당장 병원으로…”
“죄송해요…죄송해요, 대표님?”
“네…? 뭐가 죄송하다는 거죠?”
“더 이상은…더 이상은 못 참겠어요.”
“그래요? 그러니까 병원으로…읍!!”
역시 그룹의 리더를 오랫동안 맡아서 그런 것일까. 아무리 연애 고자라지만 지윤이는 확실히 추진력은 있었다.
더는 못 참겠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은 지윤이는, 마치 아기 맹수처럼 날렵하게 고개를 움직여서 자꾸만 병원 타령을 해대는 내 입술을 꽉 틀어 막아버렸다.
징조를 느끼긴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과감하게 나올 줄이야.
월척, 월척이로다.
“지, 지윤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나는 손안에 널널하게 잡히는 지윤이의 가녀린 어깨를 잡고 지윤이의 몸을 살짝 밀어냈다. 그러자 내 시야에는 제대로 발정 난 지윤이 얼굴이 가득 담겼다. 눈은 게슴츠레 반만 떠져 있고, 입에서는 타액이 끈적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죄송해요. 저 대표님 좋아해요. 그리고…그리고 대표님만 보면 이상한 짓 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요. 도저히 못 참겠어요.”
“이상한 짓이라니…! 지윤 씨, 이러면 안 되는 거-. 읍…!”
불도저처럼, 지윤이는 거침없이 육탄 공세를 펼쳤다. 오직 내 입술만 보고 나에게 온몸을 부딪쳐왔다.
그래봤자 160 언저리의 키에 40킬로를 겨우 넘을듯한 몸무게를 소유한 지윤이었으니, 이런 깜찍한 육탄 공세쯤이야 한 손, 아니 한 손가락으로도 막을 수 있었지만 나는 너무 깜짝 놀라서 차마 대처하지 못하겠다는 티를 팍팍 내며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전략적 패배였다.
‘이쪽이 더 재밌잖아? 지윤이를 이겨 먹는 거야 너무 쉬우니까.’
솔직히 지금 당장에라도 자궁 팡팡 섹스를 갈겨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무지성 자궁 섹스야 나중에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지금은 단지, 소속사 대표에게 키스를 갈겨버린 이 만행을 지윤이가 어떻게 감당해갈지 지켜보고 싶었다.
“쯥-. 츄읍. 츕.”
“읍…!!”
지윤이는 아이가 어미의 젖가슴을 빨듯 내 입술을 쭉쭉 빨아들였다. 아마 첫 키스일 게 분명한 서툰 키스였다. 하지만 어떻게든 내 입술을 탐하겠다는 그 의지만은 높게 사줄 만했다. 나는 계속해서 갑작스러운 상황에 스턴 먹은 상태를 가장하면서 지윤이의 서툰 키스를 적당히 받아주었다.
‘참. 녹차가 신의 한 수였네.’
점심으로 소고기를 먹어서 걱정했는데, 아까 비싼 녹차를 마셔둔 덕분에 다행히 지윤이에게 소고기 맛 첫 키스를 선사하는 대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또한, 나 역시 지윤이에게서 향긋한 녹차 냄새를 맡을 수 있어서 상당히 쾌적했다.
“츕, 쯔읍-. 죄송해요. 죄송해요, 대표님. 사, 사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알고 있어요. 그래도…그래도 대표님이 너무 좋아요! 대표님한테 첫, 첫눈에 반해버렸어요!”
“…하아-. 그래도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저는 대표고 지윤 씨는 제 가수잖아요.”
“대, 대표님은 제가…마음에 안 드세요?”
“지금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하아-…정말 안 되겠네요, 지윤 씨. 일어나세요.”
“네…?”
“일어나시라고요. 숙소로 모셔다드릴 테니까. 상담은 지윤 씨 마음이 진정된 다음에 다시 하도록 하죠.”
“아-…”
나는 차갑게 말하고는 벌떡 일어나서 차 키를 챙겼다. 그리고 영혼 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있는 지윤이의 손목을 잡고 반강제적으로 몸을 일으켜서 대표실에서 나와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알고 있겠지만, 오늘 지윤 씨가 한 행동 무척이나 프로답지 못한 짓이었어요. 저는 물론이고, 지윤 씨를 응원하는 회사 사람들이나 팬들, 그리고 솔라의 멤버들까지 전부 배신하는 행위였다고요. 솔직히, 조금 실망스럽네요.”
“아, 아으-…죄, 죄송해요. 죄송해요, 대표님…! 그런 뜻이,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띵-.
엘리베이터는 금방 도착했다. 나는 나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려 하는 지윤이의 손길을 차갑게 쳐내고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차가 주차된 곳으로 걸어갔다.
내가 먼저 차에 타서 시동을 걸었고, 지윤이도 영혼이 빠진 강시처럼 느릿느릿 걸어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벨트 매세요.”
“네, 네. 대표님…”
올 때는 내가 매주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일관되게 차가운 태도를 보이며 차를 거칠게 몰았다.
숙소와는 거리가 워낙 가까워서 차는 금방 도착했다. 나는 솔라의 숙소로 쓰고 있는 빌라 뒷골목에 차를 정차시키고 지윤이를 보지도 않고 무심하게 말했다.
“내려서 숙소로 들어가세요.”
“잠, 잠시만요. 대표님. 죄, 죄송해요. 제가 잘 못 했어요. 아까는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그래요? 그럼 숙소로 들어가서 차분하게 생각해 보세요. 저한테 보여준 지윤 씨 행동이 얼마나 무례했었는지.”
“아, 아아-. 안 돼요…! 죄송해요, 잘 못 했어요…! 아으…으흐읏, 흑…! 대, 대표님!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흐읏, 흐아앙…!”
“…하아-.”
엄격한 나의 태도에 지윤이는 결국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소고깃집에서도 그렇게 울었으면서, 또 어디서 눈물이 그렇게 나는 건지 정말이지 경이로운 눈물샘이었다.
나는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이 한숨을 한 번 쉬어주고는, 잠시 기다렸다가 슬슬 지윤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한껏 고조 되었으니 이제는 채찍에 이에 당근을 줄 차례였고, 자고로 제대로 채찍을 맞아본 사람만이 진정한 당근 맛을 아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