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 130화
사람은 생각보다 더 멍청한 동물이라, 자신의 마음조차 제대로 알기 힘들었다.
일례로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서로에게 더 쉽게 호감을 느끼곤 하며, 아직은 어색한 새내기 커플들에게 공포영화를 추천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흔들다리든 공포영화든, 일단 심장이 떨리기만 한다면 인간은 그것을 운명적인 사랑의 느낌으로 받아들이기 일쑤였다.
그런 의미에서, 지윤은 민준을 좋아하느냐는 혜나의 물음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민준과는 오늘 처음 본 사이였고, 악수 한 번 하고 대화 몇 마디 나눈 게 전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에게 반한다면, 그건 첫눈에 반한다고 하기에도 좀 미안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윤은 자신이 민준 앞에서 보였던 행동들과 느꼈던 감정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점점 혼란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좋은 의미에서, 첫인상이 충격적이었는가?
손을 마주 잡았을 때,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찌릿찌릿한 느낌이 느껴졌는가?
지금도 머릿속에서 민준의 얼굴이 떠오르는가?
‘…’
지윤은 단 하나의 질문에도,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모든 정황이, 민준이야말로 운명으로 맺어진 자신의 첫사랑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왜 대답이 없어, 언니? 설마 진짜로…?”
“에이-. 장난치지 마. 혜나야. 그냥 대표님 앞이라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그런 거지…”
“정말…?”
“그럼. 그리고 내가 이 상황에 무슨 연애야. 그것도 대표님 상대로…나도 내 분수를 알거든?”
“…음. 그래? 내가 괜히 오해했나 보네.”
혜나는 꽤나 태연해 보이는 지윤의 모습에, 그제야 미심쩍은 기색을 거두어들였고, 지윤은 그런 혜나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미안해, 혜나야. 정말로…내 분수를 내가 알아야 할 텐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윤은 이미 빠져버린 지독한 거미줄에서 쉽사리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다.
발버둥 치려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들 것 같아서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또다시 민준을 만나게 된다면 자신이 어떻게 되어 버릴지 자신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여기네…”
“헐. 오빠, 여기 맞아요…? 슬쩍 봐도 너, 너무 비쌀 것 같은데?”
“헤엑-. 한우? 최고급 한우 전문점? 서, 설마 150g밖에 안 되는 코딱지만 한 소고기 1인분이 막 몇만 원씩 하는…그, 그런 식당?!”
“아, 제발. 대표님 살려주세요! 이런 거 부담스러워, 부담스럽다고! 우린 돈도 못 버는 그룹이란 말이야!”
“혼또니, 과분! 중소기업 솔라에게 한우는 과분! 구내식당 오네가이시마스!”
민준이 인도한 한우 전문점에는, 주차장에서부터 점심으로 소고기를 먹으러 온 팔자 좋은 사람들이 타는 호화 외제 차들이 쭉 깔려 있었다. 심지어 식당의 외관조차 따봉을 들고 있는 귀여운 소 캐릭터가 그려진 흔한 소고깃집 느낌이 아니라, 럭셔리 파인 다이닝 전문점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세련된 디자인을 자랑했다.
그 사치스러운 광경을 목격한 채린과 유이가 부담스럽다며 난리를 쳐댔지만, 이미 식당까지 도착한 상태였기에 도저히 못 먹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쯤 되니 사태에 심각성을 느낀 지윤 역시 김 팀장을 따라 식당으로 들어가며, 멤버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제일 싼 거. 무조건 제일 싼 부위로 시켜. 그리고 고기는 맛만 보고 되도록 밑반찬이나 냉면 같은 거로 배 채워야 해. 알겠지?”
“에에-. 하지만 막상 소고기를 보면 못 참을지도.”
“안 돼. 유이야. 방금 검색해 봤는데 여기 가장 싼 고기도 1인분에 10만 원이 넘어. 심지어 1인분도 120g밖에 안 되고, 부가세 별도에 봉사료도 내야 한 데.”
“헤엑…! 도, 도둑놈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미친듯한 가격을 듣고, 시크한 혜나마저 혀를 내둘렀다. 멤버들은 지윤의 말대로 밑반찬과 냉면으로만 배를 채우겠다며 굳게 다짐하며,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가장 안쪽에 마련된 ‘특실’로 향했다. 그냥 방도 아니고 하필 또 특실이라 멤버들은 더더욱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고, 민준은 이미 방 안에 앉아서 메뉴판을 살피고 있었다.
민준과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멤버들은, 민준이 뭐를 먹을 건지 물어올 때를 대비해 입안 가득 ‘냉면’이라는 두 글자를 담아놨지만, 정작 민준은 멤버들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호출 벨을 띡. 눌러버렸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멤버들의 얼굴이 거무죽죽해졌지만, 민준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온 종업원을 보며 입을 열었다.
“가격은 신경 쓰지 마시고, 알아서 좋은 부위들로 가져다주세요.”
“네, 고객님. 음료나 식사는 괜찮으시고요?”
“식사는 고기 먹고 생각해볼게요. 그리고 운전해야 하니까 술은 안 되겠고…콜라나 사이다는 좀 그렇겠죠, 김 팀장님?”
“예, 예! 대표님. 굳이 탄산음료까지 시켜주시지 않아도…”
민준의 물음에 김 팀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고, 그런 김 팀장을 보며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탄산음료는 건강에 안 좋으니까…그럼, 여기 있는 프랑스산 미네랄워터 탄산수로 5병 주세요.”
“네, 고객님.”
멤버들은 주문을 다 받고 돌아서는 종업원을 붙잡고, 미네랄워터 탄산수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제발 시원한 냉면이나 한 그릇씩 말아 달라고 빌고 싶었지만, 당연히 실제로 그럴 수는 없었다.
대충 계산해봐도 백만 원은 훌쩍 넘을 듯한 점심 밥값에, 밥을 먹기도 전에 체기가 올라온 멤버들은 진심으로 방에서 탈출해버리고 싶었지만, 대표가 떡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탈주를 하는 것도 역시 불가능했다.
하지만 막상 고기가 나오고 불판 위에 구워지기 시작하자, 분위기는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물론, 어느 정도 뻥튀기된 가격이기는 했지만 비싼 고기에는 다 비싼 이유가 있었고, 입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아버리는 소고기 맛에 멤버들은 냉면도 밑반찬도 잊고 고기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식탁 위에 고기가 담겨 있던 빈 그릇이 쌓여갈수록 마음은 무거워져 갔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젓가락질을 멈추기 힘들 정도로 고기 맛은 일품이었다.
“다들 맛있게 먹어주니 보기 좋네요. 특히, 지윤 씨.”
“읍…! 네, 네에! 대표님!”
“많이 먹어요. 지윤 씨 철분 보충시켜주려고 소고기 먹으러 온 거니까요. 맛있게 먹고 힘내야 해요?”
“쿨럭-. 쿨럭-. 아…감,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제야 이 모든 참사가 자신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지윤은 안 그래도 무거웠던 속이 꽉 얹혀버리는 기분이었지만, 티를 낼 순 없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지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소고기를 맛있게 먹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든 부위 중 가장 맛있었던 꽃등심을 두 번이나 더 시켜 먹고 난 뒤에야 식사를 마친 멤버들은, 들어 올릴 때보다 훨씬 더 멋쩍게 젓가락을 내려놨다. 냉면은커녕 비싸고 맛있는 부위로만 골라 먹어서, 이제는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민준에게 미안한 지경이었다.
“식사 다했으면, 잠깐 일 얘기 좀 해도 될까요?”
“네, 대표님!”
김 팀장이 대답했고, 멤버들이 동시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미 소고기로 배를 가득 채운 멤버들은 민준이 갑자기 태세를 전환해 엄청난 독설을 뱉는다고 해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더 자세히 말하면, 냉면이 아닌 소고기를 탐했을 때부터 이미 욕먹을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였다.
‘돈도 안 되는 그룹한테 이런 비싼 밥까지 사주시고…얼마나 뭐라고 하기 미안하셨으면…’
‘죄송합니다. 대표님. 부디 저희를 마음껏 욕해주세요. 너희가 지금 소고기가 넘어가느냐며 욕해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설마 해체하라고 하시는 건…아니겠지?’
의미 없는 호의는 돼지고기까지라는. 유명한 명언이 있었다.
젊었지만 나름대로 인생의 쓴맛을 느껴본 멤버들은, 하나같이 민준의 입에서 절대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성적을 내고 있다는 건, 누구보다 그녀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고, 큰 죄책감과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 죽을 듯이 노력했지만, 3년 차에도 이 정도면 사실 가망은 없다고 봐야 했다. 가끔 기적처럼 역주행하는 그룹들이 있긴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결실을 보지 못한 노력이란 너무나도 허무했고, 이미 끝없는 허무함에 익숙해져 버린 그녀들이었다. 스스로도 한심했지만, 패배와 실패가 오랜 친구 같았다. 이제는 이 암흑 속에서 벗어날 희망조차 저버렸으니, 자신들은 욕을 먹어도 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준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까 연습실에서 여러분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잠깐밖에 못 보긴 했지만…여러분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충분히 엿볼 수 있더군요. 거울을 보면서 춤을 추는 여러분 한 명 한 명에게서, 빛이 나더군요.”
“아-…”
“에…?”
예상치 못한 민준의 발언에 멤버들의 동공이 하나같이 똥그래졌다. 그저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멤버들은 민준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신뢰감이 가득 담긴 그윽한 눈빛으로 자신들을 한명 한명 쳐다봐주는 민준을 보고 있으니,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민준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을수록 마음이 자꾸만 따듯해져서, 어쩐지 민준에게 기대고 싶은 느낌이었다. 한없이 미약한 자신의 존재를 전부 민준에게 맡기고 싶었다.
‘크. 역시 고생하던 애들이라 그런지 반응이 남다르네. 확실히 재능들이 있어.’
그리고 그런 멤버들의 극적인 반응을 보며, 민준은 뿌듯함을 느꼈다. 대부분 교주의 스킬 덕분이긴 하겠지만, 꼭 스킬빨 만은 아니었다.
연습실에서 화난듯한 모습을 연출한 것도, 멤버들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워할 걸 뻔히 알면서도 비싼 소고기를 먹인 것도, 모두 이런 극적인 반응을 끌어내기 위한 빌드업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려가는 화가처럼, 상황이 자신이 설계한 대로 딱딱 맞아떨어져 가니 무척이나 흥미진진했다. 마치 제갈량 같은 뛰어난 모사꾼이 된 느낌이었다.
“마음고생 하고 있을 거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감히 제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심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겠죠. 하지만 이제는 그런 부담감을 좀 놓아주셨으면 합니다. 성공하지 못한 건 여러분의 탓이 아니고,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단지 기회가 없어서 그런 거니까, 여러분들은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하던 대로만 해주시면 됩니다. 기회는 회사의 대표인 제가 꼭 만들어 내겠습니다.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대표 자리에 앉았으니까요.”
“…대, 대표님.”
“여러분들이 흘렀던 땀방울이 열매를 맺는 모습을 꼭 보여드릴게요. 솔라의 컴백을 위해 모든 걸 최고로만 준비하고 있으니까, 다른 건 걱정하지 말고 잘 먹고 잘 쉬고 계세요. 아시겠죠? 특히, 지윤 씨는 무대에서 쓰러지지 않게 철분제 꼭 챙겨 드시고.”
“…”
“…지윤 씨?”
“아-. 죄, 죄송해요. 대표님. 이, 이러면 안 되는데…흐윽-…”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지윤의 흐느낌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방안에는 멤버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감동의 눈물은 언제나 호감과 복종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민준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멋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흐뭇하게 웃었다.
멤버들의 울음 4중주가 어떤 오케스트라의 연주보다 듣기 좋았다.
‘그래, 바로 이거지. 사이비면 어때. 진짜 구원이 여기 있는데.’
구원이 뭐 별거겠는가. 필요할 때 필요한 걸 내어주는 것이 바로 구원이었다.
그리고 지금 솔라의 멤버들에게 필요한 건, 모두 내가 내어줄 수 있었다.
믿음, 용기, 희망, 의지.
3년 동안 넘어지고 좌절해온 그녀들에게는 절실한 것들이었지만, 대표 자리에 앉은 나라면 별거 아닌 말 몇 마디와 사소한 지시만으로 얼마든지 채워줄 수 있었다.
대신 그녀들은 나의 신실한 종이 되어서, 내가 원하는 걸 채워주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몸과 마음을 모두 나에게 바치고, 행복해지면 그만이었다.
‘캬~. 이런 게 진짜 윈-윈 전략이지.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워낙 기분이 좋아서 표정 관리가 좀 힘들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멤버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숙인 채 펑펑 울고 있어서 내 표정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김 팀장마저 고개를 돌리고 훌쩍이고 있었다.
“감, 감사합니다. 대표님. 흐윽…사실은…사실은 이, 이런 말들을 꼭 듣고 싶었는데…”
“저런…이런 말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데…앞으로는 힘들면 꼭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지윤 씨.”
“그, 그렇게 따듯하게 말해주시면…흐윽, 흐아앙…!”
다들 울음바다였지만, 특히 지윤은 눈물로 태평양을 전부 채울 생각인지 쉼 없이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리더로써 힘든 것도 있겠지만, 아마 멤버들 중에서 가장 나에 대한 복종도가 높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연습실에서 손을 마주 잡을 때부터 유난히 강력한 반응을 보인 걸 보면, 아마 지윤은 날 만나기 전부터 혹은 날 만난 바로 그 순간부터 복종도가 50을 넘겨 교인이 된 게 아닐까 싶었다.
“음…김 팀장님.”
“예, 예! 대표님.”
“특별한 일 없으시면 다른 멤버들 데리고 먼저 숙소로 돌아가시겠어요? 리더인 지윤 씨와는 언젠가 따로 면담을 하고 싶긴 했는데…이렇게까지 우는 걸 보니 빨리 진행해야겠다 싶네요.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 있는 것 같습니다. 면담이 끝나면 지윤 씨는 제가 따로 숙소까지 데려다주도록 하죠.”
“네, 대표님. 알겠습니다.”
내가 김 팀장에게 조용히 쑥덕거렸다. 내 말에 김 팀장은 정신없이 울고 있는 멤버들을 추슬러서 방에서 나갔고, 방에는 지윤과 나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놀랍게도 지윤은 그 뒤로도 진심전력으로 우느라, 한참이 지나도록 멤버들이 퇴장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나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지윤의 옆으로 다가가, 테이블에 있던 냅킨을 몇 장 빼 들어서 지윤을 얼굴을 닦아 주었다.
툭툭-.
“흐, 흐에…대, 대표님? 언, 언제 오셨어요?”
“…원래 이렇게 눈물이 많아요?”
“네…? 아…! 그, 그런 건 아닌데…조, 조금 많기는 한데……그-. 다, 다른 멤버들은 어디에…?”
“먼저 보냈어요. 지윤 씨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서.”
“매, 매니저 오빠도 없, 없이요? 대표님하고…단, 단둘이요? 둘이…서요?”
“왜요? 싫어요?”
“아, 아니. 그, 그게 아니라…제, 제가 너무 떨려서…아, 아니 이상한 뜻으로 떨리는 게 아니라…긴, 긴장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