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1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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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 띠-. 띠. 띡.
회사에 마련된 개인 연습실에 가서 한참 동안 보컬 연습을 하고 돌아온 지윤은, 숙소의 도어락을 아주 조심스럽게 눌렀다.
시간은 이미 자정이 훌쩍 넘어가 있었기에, 한창 자고 있을 멤버들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누른다고 기계음이 작아지는 건 아니었지만, 빠르게 누르는 것보단 느리게 하나하나 누르는 게 신경에 덜 거슬리는 건 확실했다.
스윽-.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지윤은 소리하나 내지 않고 신발을 벗고는 깨끼발을 한 채 살금살금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뭐야, 이채린. 아직도 안 자고 게임을 한다고…?’
하지만 정작 방에 들어오니 룸메이트인 채린은 자고 있기는커녕 헤드셋까지 낀 채 게임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은 지윤은 그런 채린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한번 푹 쉬고는, 채린에게 다가가 쓰고 있던 헤드셋을 벗겨버렸다.
게임 소리가 얼마나 큰지, 헤드셋에서 퍼져 나오는 소리가 지윤의 귓가에도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다.
“어, 뭐야? 언니 왔어?”
“이채린. 너 내가 게임 소리 이렇게 크게 듣지 말라고 했지. 이러다가 청력 손상되면 어쩌려고 이래?”
“됐네요. 빨리 그거나 내놔. 지금 중요한 거 하고 있으니까.”
“…그거만 하고 게임 끌 거야?”
“글쎄? 내일 스케줄도 없는데 내가 왜?”
“…”
채린이 그렇게 말을 해버리자 지윤은 할 말이 없어서 우물쭈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3년 전이였다면 나이로 밀어붙여서 강제로 게임을 끄고 자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 그룹의 막내인 채린 역시 어엿한 성인이었다. 내일 스케줄도 없으니 늦게까지 게임을 하겠다는데 딱히 말릴 명분이 없었다.
그저, 내일도 스케줄이 없다는 그 사실이 마음을 씁쓸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 그래도 언제 무슨 일 생길지 모르니까 적당히 하고 자야 해. 알겠지…?”
“참나. 내가 왜 언니 말을 들어야 하는데?”
“뭐…?”
“언니도 내 말 하나도 안 듣잖아. 보컬쌤도 연습 그만하라고 하는데 맨날 연습실에서 가서 성대나 혹사 시키고 오고…그리고 그 미친 스토커가 언니 어떻게 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매니저 오빠도 없이 이렇게 늦게까지 돌아다니는데?”
“그, 그야 숙소 바로 근처니까…딱히 상관없잖아.”
“됐어. 언니도 내 말 하나도 안 들으니까 나도 언니 말 절대 안 들어. 언니는 리더가 아니라 독재자니까.”
“뭐? 너 지금 언니한테 뭐라 그…”
탁-.
체린은 지윤의 말을 전부 듣지도 않고, 지윤의 손에 걸려 있던 헤드셋을 낚아채서 귀를 막아버렸다.
소통을 아예 단절해버리는 듯한 채린의 모습에 충격받은 지윤은, 한참 동안 채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스트레스가 심한지 요즘 들어 부쩍 까칠해진 건 알고 있었지만, 언제나 귀여운 막내였던 채린이 이렇게까지 반항적인 모습을 보일 줄이야.
겨우겨우 발걸음을 옮겨 몸을 씻고 침대에 누웠음에도 지윤은 도저히 심란한 마음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다 내 잘못이야…채린이가 저렇게 된 것도…리더인 내가 똑바로 가르치지 못해서…내가 더 열심히 해서 솔라가 인기가 있었다면…’
잘나가는 그룹에는 불화가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었다. 하는 일마다 잘 풀리고 세상이 모두 자신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서로 언성을 높이고 싸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솔라는 잘나가는 그룹이 아니었다. 데뷔 3년 차였기에 완전 무명은 아니었지만, 히트곡도 하나 없어서 아이돌 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름조차 모르는 그런 그룹이었다. 그나마 워낙 착하고 순한 아이들이라 지금까지는 큰 문제 없이 지내 왔지만, 언젠가는 잘 될 거라 믿으며 긍정적으로 지내는 것도 어느새 한계였다. 반항적인 채린의 태도를 보면서, 지윤은 그 사실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어쩌겠어. 버티면서 더 열심히 해야지.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서…열심히 해서…’
지윤은 자꾸만 울컥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삼켜냈다. 울어봤자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시간에 안무와 노래 연습, 하다못해 사람들에게 보여줄 개인기라도 준비하는 게 이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한 훨씬 더 올바른 방법이었다. 당연히 알고 있었고, 지윤은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
3년 동안 밥도 안 먹고 연습을 하다 실신한 적이 몇 번인지 모른다. 시간 날 때마다 들리는 개인 연습실에서도 노래를 부르다 쓰러지기 일쑤였고, 그럴 때면 다시 일어나서 노래를 불렀다. 직원들과 팬들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서 지윤은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고, 그러다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서 또 몰아붙였다. 쌓이고 쌓인 이 노력들을, 사람들이 알아줄 그 언젠가를 위해서.
‘열심히…열심히 하면…대체 언제까지……’
타다다닥-.
지윤은 옆에서 들려오는 키보드 소리가 듣기 싫다는 듯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실은, 혹시라도 채린에게 펑펑 우는 모습을 들킬까 봐 무서웠다.
아무리 안 풀린다고, 리더가 무너져버리면 그땐 정말 끝이었다.
지윤은 그 생각 하나로,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를 겨우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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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어제 라면 먹고 잤니? 눈가가 통통 부었네.”
“네? 아, 아니요, 오빠. 그냥…어제 좀 늦게 잤더니 부었나 봐요.”
“그래…? 지윤아, 아무리 스케줄 없다고 해도 관리는 해야지. 오늘처럼 언제 무슨 일 생길지도 모르는데.”
“네, 오빠. 죄송해요.”
“죄송은 무슨. 그냥 그렇다고.”
새로운 대표의 호출로 솔라의 멤버들은 차를 타고 숙소에서 스타 엔터로 향하고 있었다.
차에 타서 4명의 멤버들이 모두 탔나 확인하던 매니저가 유독 부어 보이는 지윤의 얼굴을 확인하고 한마디 하긴 했지만, 그 뒤로 차 안은 조용했다.
평소에도 막 시끄러운 건 아니었지만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분위기에, 채린의 옆에 앉아있던 같은 막내 라인이자 일본인 멤버 유이가 눈치를 보다가 채린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 뭐?”
새벽까지 게임을 하다가 잠을 거의 못 자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던 채린은, 자신의 휴식을 방해한 유이에게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너. 어제 지윤 언니랑 싸웠지?”
“…”
“아침부터 지윤 언니랑 왜 한마디도 안 해? 지윤 언니 눈 부은 거 보니까 네가 지윤 언니 울린 거 아니야?”
“…됐어. 나 잘 거니까 건들지 마.”
“뭐래. 막혀도 10분이면 도착인데.”
“아, 10분 동안 쉴 거니까 건들지 말라고!”
채린은 유이에게 한 마디 톡 쏘아주고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그리고 채린과 유이의 앞줄에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혜나는, 옆에 있던 지윤과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진짜야. 언니? 어제 채린이랑 싸웠어?”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혜나야? 채린이랑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괜히 시치미 떼지 말고. 언니, 세상에서 거짓말 제일 못하잖아.”
“뭐, 뭐래. 그, 그 정도는 아니거든…?”
끝까지 발뺌하는 지윤이었지만 눈치 빠른 혜나는 어젯밤 지윤과 채린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혜나는 고개를 움직여서 지윤에게 귓속말로 속닥거렸다.
“매니저 오빠 몰래 연습하고 왔다가 방에 들어왔는데…아마 채린이가 게임을 하고 있었을 거야. 그치?”
“윽…”
“그런데 채린이는 언니가 혼자 다니면서 밤새 연습하는 거 싫어하니까 꽤나 반항적이었겠지. 그만하라고 해도 계속 게임만 하고…언니 눈이 이렇게까지 부어있는 거 보면 싸가지없게 틱틱대기도 했겠네. 맞지…?”
“싸, 싸가지라니…! 그, 그런 건 아니야. 채, 채린이도 나름대로 날 생각해서…”
“그러니까-. 채린이랑 무슨 일이 있던 건 맞다는 거네? 오케이, 그럼 됐어.”
“아, 아니. 그런 게 아닌데…”
혜나는 유도 신문에 가볍게 성공하고 싸늘한 눈빛으로 뒷자리에서 눈을 감고 있는 채린을 노려보며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지윤은 그 모습을 보며, 오늘 혜나가 채린을 제대로 잡을 거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맏언니인 지윤에게는 어리광도 잘 부리고 성질도 잘 내는 채린이었지만, 서열로 두 번째인 혜나에게는 유독 꼼짝하지 못했다.
혜나는 팬들에게 얼음 공주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화려하면서도 도도한 외모가 한몫했지만, 그보다는 얼굴만큼이나 냉철한 성격 때문이었다. 선을 넘는 실수에 있어서는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해도 봐주지 않고 오직 팩트로만 조목조목 따져가며, 실수한 사람에게서 진정성 있는 사과가 나올 때까지 논리적으로 몰아붙였는데, 혜나의 팩트 폭행의 주된 피해자는 막내 라인인 채린과 유이였다. 맏언니자 팀의 리더는 지윤이었지만 사실상 솔라의 군기반장은 혜나가 맡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언니. 회사에서는 안 혼낼 거니까.”
“아, 아니. 꼭 혼낼 필요는…”
“자, 도착했다. 내리자.”
지윤은 눈을 차갑게 빛내는 혜나를 살살 달래보려 했지만, 그 사이 이미 차량이 회사 주차장에 도착해 있었다.
익숙하게 차량에서 내린 멤버들은 안무 연습실로 이동해서 몸을 풀었는데, 그때까지도 서로 말이 없자 딱딱한 분위기를 참지 못한 유이가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먼저 말문을 열었다.
“…새로운 대표님. 완전 이, 이케멘이라던데?”
“이케멘? 그게 뭐야?”
“음…꽃미남? 훈남? 여튼 그런 뜻.”
어색한 분위기에 실수로 일본어가 나와버리긴 했지만, 유이는 원래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 있었다.
‘대표’라는 키워드가 딱 정해지자, 언제 조용했었냐는 듯 멤버들의 입이 술술 열리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중동사람이라고 들었는데…?”
“나도. 그럼 잘생긴 아랍 왕자님 같은 느낌이려나?”
“…나는 이목구비 진하게 생긴 사람 별로야. 그래서 중동 남자는 좀…”
채린이 느닷없이 중동 남자들의 머리채를 쥐어 잡자, 유이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가 찾아왔음을 느꼈다. 안 그래도 아침부터 저기압이었던 분위기를 제대로 바꿔내기 위해서는 한 번 정도 광대 짓을 할 필요가 있었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제대로 판을 깔아주는 채린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유이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얄밉게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채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응~ 중동 남자들도 채린 짱같은 빈유는 안 좋아한다데스.”
“헐. 뭐, 뭐래…! 너, 너도 가슴 없잖아…!!”
“응~ 그래도 와따시 A컵은 아니다데스. 후우-. 불쌍한 채린 짱, 밤새 게임만 하다 보니 학교 성적은 F지만 가슴은 A가 되어버린…”
“뭐?! 그러는 너는 밤새 이불 속에 들어가서 뭐하는데? 핸드폰으로 야, 야한 동영상 보면서 이상한 짓 하는 거 모를 줄 알아?”
“하이? 와따시 니혼진카라 한국어 모른다데스. 쓰미마센, 빈유빈유 체린짱…!”
“아오! 이럴 때만 일본인이래!! 나보다 한국말도 잘하면서!! 그리고 빈유라고 하는 거 다 들리거든!!”
유이가 주도하는 판이었기에 일본식 코미디의 냄새가 진하게 나긴 했지만, 그래도 아까보다 분위기는 훨씬 더 좋아져 있었다.
티격태격하던 유이와 채린의 모습을 웃으면서 지켜보고 있던 지윤이, 박수를 쳐서 멤버들의 집중을 끌어모았다.
“자-. 애들아. 잡담은 그만하고 일단 1집 노래들부터 간단하게 맞춰보자. 새로운 대표님이 오셔서 뭘 시킬지 모르니까 전부 한 번씩 연습해 보는 거야.”
지윤의 말에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갔다.
그리고 멤버들이 한창 연습을 하고 있을 무렵, 민준은 연습실 안으로 몰래 들어와서 구석에 앉아 조용히 멤버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잘한다. 잘해. 내 새끼들.’
교주의 심안을 써서 솔라의 멤버들의 재능을 확인한 민준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나가질 않았다.
기왕 버프를 줘야 한다면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예쁜 여자들에게 주고 싶은 게 당연했는데, 그게 딱 솔라의 멤버들이었다.
게다가 지윤의 경우 무척이나 찾기 힘들었던 S급 성물, 아다다스 레깅스까지 입고 있었기에 유독 더 관심이 갔다.
‘목소리 들으니까 딱 알겠네. 그래, 다영이랑 섹스할 때 찾아왔던 불청객이 너였구나. 열심히 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그렇게 민준이 대단히 흐뭇하게 솔라의 멤버들을 지켜보는데, 이제야 민준을 발견한 솔라의 매니저가 헐레벌떡 다가와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솔라 매니저 김진혁 팀장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김 팀장님. 지금은 잠시 지켜보고 나중에 얘기 나누시죠.”
“네! 대표님!”
민준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솔라의 모습을 지켜보려 했지만, 솔라 멤버들은 다급하게 움직이는 김 팀장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확인하고 대표가 연습실에 도착해 있다는 걸 눈치챈 상태였다.
대표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 포즈를 취하고 있던 멤버들을 노래가 멈추자, 서로 눈치를 보다가 거의 동시에 몸을 돌렸다. 그리고 민준을 발견한 네 사람의 동공이 일제히 커다래졌다.
‘헐…너무 잘, 잘생겼어…!’
‘…대박.’
‘와…’
중동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한 번, 그리고 미남 배우 뺨치도록 젊고 잘생긴 대표의 비주얼을 보고 한 번 더 놀란 멤버들을, 두근대는 심장을 겨우 달래며 쭈뼛쭈뼛 민준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리더인 지윤이 먼저 선창을 하며 고개를 푹 숙이자, 다른 멤버들도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네, 안녕하세요. 스타 엔터의 새로운 대표를 맡게 된 김민준이라고 합니다.”
멤버들의 인사를 매너 있게 받아준 민준은, 먼저 손을 뻗어 멤버들과 악수를 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걸그룹과 손을 마주 잡고 싶어서 하는 짓은 아니었고, 이렇게 야금야금 스킨쉽을 해가면서 조금이라도 빠르게 멤버들의 호감을 얻기 위함이었다. 원래도 성욕의 화신인 민준이었지만, 지금은 성물을 보고 눈이 완전히 돌아가서 훨씬 더 발정 난 상태였다.
민준은 선지자의 목소리와 교주의 오오라까지 발동시킨 채, 한명 한명과 진하게 아이컨택을 하며 악수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저는 솔라의 메인보컬이자 리더를 맡고 있는 박지윤입니다.”
“그래요. 반가워요. 지윤 씨.”
그렇게 채린과 유이를 거쳐 민준과 지윤이 악수를 나누던 순간, 민준의 손을 부여잡는 지윤의 입에서는 느닷없이 야릇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참으려고 했지만, 민준과 손을 마주 잡자 전신에서 느껴지는 찌릿찌릿한 느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흣-. 아, 아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