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117화
안방으로 올라가니 연주는 내가 명령한 대로 씻은 뒤에 침대에 누워서 뒹굴뒹굴하고 있었다.
다만, 또다시 빨래통에 들어있던 나의 와이셔츠를 꺼내와 냄새를 킁킁 맡고 있었는데, 그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우우, 우읏-! 민, 민준 씨이!”
“연주 씨…연주 씨 무슨 강아지예요?”
“아, 아니에요! 강아지, 강아지 아니에요! 이, 이거언-. 이건 그냐앙…”
개도 아니고 강아지였다. 딱히 비아냥거리는 의미도 아니었는데, 연주는 지레 혼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우물쭈물 변명을 내뱉었다.
나는 성큼성큼 다가가서 연주의 옆에 비스듬히 누워서 연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혼나는 줄 알고 눈을 질끈 감았던 연주는, 머리에서 따스한 손길이 느껴지자 곧 헤벌쭉한 표정을 지었다.
참나. 이렇게 쉬운데, 진짜 강아지가 아니야?
“…오늘 유나 씨는 야근일 거예요. 아주머니는 언제 오기로 했어요?”
“아응, 우응. 그…미, 미현 언니는 한 30분 뒤에…”
“언니…? 언제 아주머니랑 그렇게 사이가 좋아졌어요?”
“그야 언니가 맨날 맛있게 밥 차려 주시잖아요! 게임 하고 있으면 간식이랑 음료수도 가져다주세여! 미현 언니 너무 조아요!”
“아하-.”
“그리고 언니랑은 얘기도 잘 통하고, 엄청 친절하고 포근해서 같이 있을 때마다 행복해요. 사실은 이런 사람이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아, 아으-. 방, 방금 얘기는 취, 취소할게요.”
“네. 네. 그러세요.”
나는 연주의 얘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단순히 밥 주고 간식 줘서 미현 누나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는 연주가 정말 강아지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머릿속에서 미현 누나가 밥을 차려놓으면 식탁에 앉아 꼬리를 열심히 흔들며 밥을 먹는 연주의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졌다.
그런데 계속 얘기를 듣다 보니, 단순히 식모와 식객의 관계가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 두 사람은 꽤 많은 대화와 교감을 나누고 있던 것 같았다. 연주가 마냥 온순할 것 같아도 유나와는 아직까지 대립각을 세우고 있을 정도로 나름대로 고집이 있어서 걱정했는데, 아주 잘된 일이었다. 가정이 화목해야 나도 마음 놓고 바깥 일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긴, 미현 누나가 인품 하나는 진짜 최고지. 옆에 있으면 나까지 마음이 따듯해지니까.’
나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만 해도 웅장해지는 가슴만큼이나 넓은 마음씨를 갖고 있는 미현 누나였다. 늘 사람에 대한 애정에 목말라 있는 연주라면 그런 미현 누나에게 끌리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띡.띡.띡.띡-.
“어…? 언니가 벌써 왔나 봐요!”
“그러게요?”
안방 문을 닫아놓지 않아서 현관문 도어락 비번을 누르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연주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벌떡 일어나서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언, 언니 마중하러 가요. 민준 씨!”
“네. 알겠어요.”
미현 누나가 연주와 내가 사이좋게 자신을 맞이해주는 장면을 과연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연주를 따라갔다.
‘그래도 역시 연주랑 있으니까 힐링 되네. 있다가 듀오나 한판 하자고 할까?’
시은 누나의 동영상 테러 때문에 피로 물든 웅덩이에서 뒹굴고 있는 더러운 기분이었는데, 연주가 옆에 있으니 점점 정서가 안정돼가는 느낌이었다.
내 손목을 잡고 딸기향 샴푸 냄새를 풀풀 풍기는 단발머리를 살랑이며, 현관으로 폴짝폴짝 뛰어가는 연주의 뒷모습은 힐링 그 자체였다.
연주와 함께 있으니 내가 해놓고도 지금 이 집안에 한 명의 여자가 납치 감금되어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연주에게서 전해지는 느낌은 그 정도로 파릇파릇했다.
“어, 언니…!”
“안녕. 연주야.”
연주가 신발장에서 신발을 벗고 있던 미현 누나에게 우다다 달려가서 안겼다.
미현 누나의 풍만한 가슴안에 쏙 안긴 연주는, 여간 기분이 좋은지 코를 킁킁대며 살 내음을 맡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돌려서 미현 누나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여, 연주야-. 민준이 앞에서 이러면 언, 언니 부끄러워…”
“우으응-. 죄송해요. 언니. 히히.”
미현 누나가 내 눈치를 살피며 연주를 말렸다. 과연 엄마처럼 미현 누나를 잘 따르는지, 연주는 곧장 미현 누나의 가슴 골짜기 사이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뭐야, 왜 아쉽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연주와 미현 누나가 진한 스킨쉽을 나누는 장면은 무척이나 꼴릿했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자면, 귀여운 연주가 무표정일 때는 누구보다 도도하게 생긴 미현 누나에게 당해야 할 것 같은데, 되려 연주가 적극적으로 들이대고 미현 누나가 부끄러워하니까 오묘한 배덕감이 느껴졌다. 뜻밖에 발견한, 무척이나 고급스러운 변태로움이었다.
‘허어-.’
뭔가 금단의 선을 넘는 느낌이었지만,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 머릿속에서는 저절로 연주와 미현 누나가 몸을 섞는 장면이 떠올랐다.
-언, 언니! 비, 비빌게요?
-잠, 잠깐만 연주야! 우, 우리끼리 이러면…! 흐읏, 하응!
-아응, 흐응-. 조아아-. 흐응-. 거기끼리 비비니까아-. 미끌미끌 거려서엇…! 언, 언니잇…!
-안 돼…! 하응, 흐아앙-! 연, 연주야…!
“오, 오우야…”
“네? 민준 씨! 뭐라고 하셨어요?”
나도 모르게 나온 감탄사를 들었는지, 연주가 순진무구한 말투로 말을 걸어왔다. 미현 누나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제 들어가요. 연주 씨. 누나도 어서 들어와.”
“응. 실례할게.”
“매일 오면서 실례는 무슨.”
“그…그래도.”
현관에서의 자그마한 헤프닝이 끝나고, 미현 누나는 사 온 요리 재료들을 가지고 주방으로 가서 저녁을 차리기 시작했고, 안방으로 올라간 연주와 나는 저녁이 다 만들어질 때까지의 막간을 이용해서 봇듀오를 한판 돌렸다.
즐기려고 하는 일반 게임이 아니라, 나의 부캐와 연주의 본캐를 가지고 돌리는 랭크 게임이었기에, 우리는 전투에 나서는 검투사의 마음으로 게임에 임했다.
“민, 민준 씨! 로밍 와요! 잘 큰 지드가 로밍 와요!”
“괜찮아요. 들어오면 잡는다는 마인드. 지드가 저한테 궁 쓸 때 변이만 잘 넣어주세요. 알겠죠?”
“네, 네엣!”
압도적인 실력 차이로 이미 상대 봇은 박살 난 상태였다. 밥만 먹고 게임만 하는 연주야 말할 것도 없이 물이 올라 있었고, 나야 이 구간은 마우스로만 플레이해도 케리 할 수 있었다.
이대로 가면 게임을 절대 못 이긴다는 걸 알았는지, 잘 큰 상대 지드가 정글까지 끼고 회심의 봇 로밍을 오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해도 원딜 케릭으로 잘 큰 지드에게 대드는 건 어려웠다. 하지만 내 옆에는 내가 손수 가르친 미친 재능의 서포터 ‘연듀공듀’가 딱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연주를 믿고 과감하게 앞으로 나가 포탑 골드를 뜯었고, 그 틈을 노리고 지드가 WR콤보를 사용해서 번개처럼 진입했다.
“민, 민준 씨이!”
타닥-.
하지만 지드가 들어오는 순간, 연주는 곧바로 지드에게 변이를 걸어버렸다. 나는 순식간에 딜을 욱여넣어서 바보가 된 지드를 녹여버리고는, 지드가 죽는 걸 보고도 에라 모르겠다 하고 줄줄이 따라 들어오는 상대 캐릭터들 역시 가볍게 농락하면서 쿼드라킬을 만들어냈다.
게임의 판도를 순식간에 굳혀버리는 로밍 결과에, 멘붕이 온 상대 플레이어들은 결국 분열을 일으켰다.
[지드] : 바텀 GAP. GG.
[코그몽] : 응~ 무지성 풀콤충이 제압 킬 줘서 게임 따였쥬?
[블리츠크랭키] : ㄹㅇ 지드 킬값 ㅈㄴ 못함. ㅋㅋㄹㅃㅃ.
[지드] : 미드 오픈. 밀어주세요.
내분이 난 적을 상대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었다. 연주와 나는 채 15분이 되기도 전에 바텀 고속도로를 개통하고, 그대로 쭉 밀고 들어가서 상대방의 넥서스까지 가볍게 부실 수 있었다.
“흐앙! 민, 민준 씨!”
승리의 맛에 취해서인지, 아니면 그걸 빌미로 사심을 채우려는 건지, 화면에 ‘승리’ 표시가 뜨자마자 게이밍 의자에 앉아있던 연주가 헤드셋을 벗어던지더니 나에게 폴짝 안겨 왔다.
유나라는 아주 능력 있는 도둑고양이를 상대하다 보니 어느새 자신도 도둑고양이가 되어 버렸는지, 요즘 들어 상당히 엉큼해진 연주였기에 계획적으로 행동했을 확률이 높아 보였지만, 뭐 그런 거야 아무래도 괜찮았다.
가볍게 레오레 한판 땡기고 승리를 거머쥐었더니, 나 역시 머릿속이 싹 비어져서 상당히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나는 내 무릎 위에 앉아 방실방실 웃고 있는 연주의 입술에 냅다 키스를 박아버렸다.
“우웁…! 웁!”
“츄릅츄릅츄릅츄릅-.”
“으아앙-. 아응-.”
어쩐지 연주가 너무 소중하고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텐션을 잔뜩 끌어올렸다. 자동차로 키면 ‘스포츠’ 모드였다. 그리고는 정말 오랜만에 내가 갖고 있는 진심 전력으로 현란한 키스 테크닉을 선보였다.
이건 키스가 아니라, 차라리 서커스나 곡예에 가까웠다.
“츄릅츄릅츄릅츄릅-. 씁-. 츄르르르룹-.”
“흐에, 헤읍-. 흐응, 아응…!”
키스를 할수록 연주의 온몸이 여름날의 소프트 콘처럼 녹고 있는 게 느껴졌다.
눈빛은 촉촉하고도 야릇했고, 입에서 입으로 느껴지는 달콤하고 가파른 연주 숨은 내 심장을 한없이 가파르게 뛰게 했다.
나는 참을 수 없어서 키스를 계속하며 연주를 들어 올려서 그대로 침대 위에 눕혔다.
“헤응…! 민, 민준 씨! 안, 안돼요오!”
“왜요. 연주 씨도 쌓여있잖아요.”
“아, 아니이! 뒤, 뒤에! 뒤에에…!”
“…네?”
연주는 팔다리를 휘저어가며 다급하게 뒤라고만 외쳐댔지만, 어쩐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서서히 돌려서 뒤쪽을 확인했다. 어느새 활짝 열려있는 방문 사이로 한없이 냉랭한 표정의 미현 누나가 보였다.
“…두 사람 다 밥은 먹고 하지?”
“아, 응.”
“조, 좋아요! 어, 언니!”
미현 누나의 한 마디만으로 잔뜩 달아올랐던 섹스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확 식어버렸다.
먼저 뒤돌아가는 미현 누나를 보며 연주가 자그맣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여자의 감은 무섭다고, 해도 해도 너무나 싸늘한 미현 누나의 반응을 보고 연주 역시 깨닫는 바가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어, 언니도 민준 씨를 좋아하는 걸까요? 그, 그건…그러면 안되는데에. 언니는 너무 좋은데에-. 도, 도둑고양이는 따, 따로 있는데…”
아, 연주야 미안. 사실은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저 미현 언니가 내 아다를 떼준 여자란다. 말하자면 내 첫사랑이고, 어쩌면 미현 누나에게는 네가 도둑고양이처럼 보일 수도…?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연주와 미현 누나가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썩 보기 좋았기에 나는 굳이 입을 열지 않고 연주와 손을 마주 잡은 뒤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 차려져 있는 음식은 언제나 그렇듯 화려하면서도 정갈했다.
단지 플레이팅과 가짓수로만 조지는 게 아니라, 반찬 하나하나가 간장게장급 밥도둑이었다.
무슨 엘프도 아니고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대부분 과일과 야채라서 거의 평생을 과일과 풀떼기들만 먹고 살아왔다던 연주 역시, 이 엄청난 밥상 앞에서는 엘프 귀를 싹둑 잘라내고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웠다.
“누나.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응? 아니. 그런 일 없어. 왜?”
“그냥 얼굴이 좀 어두워 보여서, 집에서 무슨 안 좋은 일 있나 싶었지.”
“무슨…그런 일이 어딨겠어. 어차피…이제 곧, 이혼할 건데.”
“뭐. 그건 그렇지.”
식사가 시작되고, 나는 연주의 밥그릇에 간고등어를 살살 발라주던 미현 누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연주보다는 훨씬 나은 축에 속했지만, 미현 누나 역시 거짓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아니라고 하고 있었지만, 우울하게 젖어 드는 미현 누나의 꽃사슴 같은 눈망울을 보니 영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한 것 같았다. 보나 마나 남편 문제겠지.
‘안 되겠다. 더 이상은 안 되겠어.’
시은 누나에게 크게 당하고 배운 게 있다면, 소중한 것들은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소중하게 다루는지, 그 방법이야 제각각이겠지만 어쨌든 조금이라도 방임, 방치 하다가는 언제 어디서 생각지도 못한 엿 같은 일들이 펼쳐질지 몰랐다. 더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미현 누나의 자유 의지를 조금 제한하더라도, 어떻게든 내 걸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예 집에 보내지 말든지, 아니면 확실하게 준비해서 남편 엿 먹이고 이혼 도장 찍게 만들어야겠다.’
시은 누나를 참교육시키고, 미현 누나까지 케어해주려면 해야 할 게 꽤 많을 테지만,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의 대가라고 생각하면 그 정도야 얼마든지 감당해낼 수 있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연주와 미현 누나와 함께하는 평화롭고 행복한 저녁 식사 시간은 맹세하건대 나에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안락함을 선사해 주었다. 이 시간 만큼은 아무런 걱정도 없이 온전히 행복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이런 시간을 누리기 위해서라면, 이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정말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민준 씨! 민준 씨! 고등어 맛있어요! 고등어 드셔 보세요. 미현 언니가 다 발라놨어요!”
“아, 네. 연주 씨.”
“흐흣-. 연주는 정말 어쩜 이렇게 귀여워?”
“아우-. 저, 저는 귀, 귀엽지 않아요! 어, 언니가 훨씬 더 귀여워요!”
연륜이 있는 만큼 여유롭게 역공을 할 줄 알았는데, 귀엽다는 칭찬에 미현 누나의 양 볼이 빨개졌다.
예상했던 전개는 아니지만, 이건 또 이것대로 볼만했다. 다만, 내 안에서 아주 요상한 욕망이 달아오르는 게 걱정될 뿐이었다.
‘하아-. 이걸 비벼 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