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1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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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후우-. 하아…”
끼이익-. 덜컹.
데드 리프트를 하고 있던 시은은 무기력한 표정으로 덤벨을 내려놨다.
오늘은 등과 허벅지를 조지는 날이었다. 시은이 좋아하는 부위들이라 평소 같았으면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가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 시은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하아…’
시은은 자신의 마음속을 지배하고 있는 무기력함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가 없었다. 무슨 짓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식단 관리를 잠시 미루고 맛있는 걸 마음껏 먹어봤다. 심지어는 정말 눈 딱 감고 운동 시작하고는 입에도 대지 않았던 아이스크림과 탄산음료까지 먹어봤다.
쉬는 날에는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고, 일하는 날에는 온몸에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운동에 매달렸다.
하지만 그래도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살아 있었는데, 도무지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괴롭힘…민준이한테 괴롭힘당하고 싶어…’
이쯤 되자 시은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짓을 해도 머릿속에 김민준 생각뿐이었다.
자신한테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고, 가축처럼 다뤘던 그 나쁜 새끼가 도저히 잊혀지질 않았다.
그 나쁜 새끼에게 자신이 성 노예처럼 다뤄졌다는 게 인정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지만, 그와 별개로 몸은 자꾸 그 남자를, 그런 상황을 원하고 있었다.
“짜증 나…”
운동을 끝내고 샤워를 하는 내내 시은의 입에서 맴돈 말이었다.
그래. 정말 많이 양보해서 개처럼 다룰 수도 있다고 치자. 그것도 플레이의 일종이었으니 아주 아주 넓은 마음을 가지면 겨우겨우 이해해 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 건, 호텔에서 몸을 섞은 이후로 연락 한 통 없는 김민준의 태도였다.
다른 건 참아도 이것만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먼저 전화라도 해서 적당히 기분을 풀어줬다면, 자신 역시 이렇게 단단히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밀당도 적당히 해야 귀엽지 이건 무례한 수준이었다.
‘나 정도는 아쉽지도 않다. 이거지…? 하, 웃겨.’
김민준은 자신을 장난감처럼, 그중에서도 쓸모없는 장난감처럼 대하고 있었다. 아끼지도 않고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물론, 속마음을 다를 거라고, 맞불 작전으로 자신 역시 연락을 안 하고 있으니 김민준도 꽤나 애나 타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불안했다.
나를 잊은 건 아닐까. 정말 내가 재미없는 장난감이라서 버려버린 건 아닐까.
가장 최악인 건, 이렇게 자신을 버려두고 딴 년들이랑 시시덕거리면서 몸을 섞고 있을 김민준을 생각할 때였다.
그런 상상을 할 때면 가슴 한구석이 뻥 뚫려서, 내장이고 뼈고 안에 있는 것들이 모조리 뒤집혀서 쏟아져 나오는 기분이었다. 매스껍고 어지러웠다. 정말로, 최악이었다.
‘내가 왜…? 내가 왜 이런 걱정을 해야 하는데…?’
쏴아아악-.
우울하고 메말라 가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적시고 싶어서, 시은은 물줄기를 최대한 강하게 틀고 샤워를 했다.
열심히 운동하면서 쏟아냈던 땀들과 감당 못 할 우울감에 울컥 쏟아져 내린 눈물이 같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은,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을 정도로 별로였다.
“……”
멍하니-.
세상이 멈춘 것처럼 멍하니-.
시은은 머리를 말리다 말고 그렇게 멍하니 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면 그 즉시 머릿속이 안 좋은 생각들로 가득 차서, 시은은 요즘 들어 이렇게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멍하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도망치듯 멍한 상태에서 빠져들었다가, 빠져나올 때의 기분은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
쓰윽-. 쓰윽-.
샤워할 때 그렇게 청승을 떨어놓고, 또다시 울컥울컥 차오른 눈물들을 시은은 자신의 손으로 힘없이 닦아냈다.
언제나 당당하던 자신이 왜 이렇게 망가져 버렸을까. 답을 내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인정하기는 싫었다.
“씨발 놈…나쁜 새끼…개 같은 새끼. 이럴 거면 괴롭히지나 말지!”
위이이잉-. 위이이잉-.
시은이 한참 누군가를 향해 욕설을 내뱉고 있는데, 락커에 들어 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
핸드폰의 진동음을 듣자마자, 시은은 쏜살처럼 락커를 향해 달렸다.
누구의 연락인지는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간절하게도 연락이 왔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아-.”
하지만 시은 기대는 이번에도 역시 무참히 짓밟혔다.
락커를 열고 집어 든 핸드폰에는 한 명밖에 없는 섹스 프렌드의 이름이 아니라, 있으나 마나 한 섹스 파트너의 이름이 떠 있었다.
뿌드드득-.
기대가 배신당했다는 사실에 열이 뻗쳐서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강하게 갈고, 시은은 전화를 받았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목소리에는 엄청난 노기가 섞여 있었다.
“…내가 당분간은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 내 말이 뒷등으로 들렸나 보지?”
-죄, 죄송해요! 하지만 시은 씨. 아니, 주인님! 저 더 이상은 못 참겠어요…!
“그래? 그럼 호텔 잡아놔. 내가 너, 오늘 아주 죽여줄 테니까.”
-정, 정말이신가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인…
뚝-.
시은은 채 노예남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 버렸다.
민준과 몸을 섞고 버림당한 이후로, 거느리고 있던 노예들과는 따로 만난 적도 없었다.
아무리 노예들을 괴롭힌다고 해도 자신 안에 있는 지독한 갈증이 채워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 갈증은 너무 독하고 확실해서, 다른 식으로 채우려고 해봤자 감질만 나서 오히려 갈증이 더 심해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뭐라도, 어떻게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당장 목이 말라 죽겠는데 바닷물이라도 마셔야지. 배가 문드러질 것 같은데 썩은 버섯이 대수겠는가.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 구질구질하게라도 참다 보면 먼저 연락이 올지도 몰랐다.
정말 죽을 것 같아도 자존심만은 지키며 버티다 보면, 적어도 그 나쁜 새끼한테 한 방 정도는 먹여줄 수 있었다.
‘자. 이래도 내가 쓸모없어?’ 하고 말해줄 수 있었다.
결국에는 장난감이 되더라도, 적어도 소중하게 다뤄질 수 있는 장난감이 되기 위해서, 시은은 오늘도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
.
.
“…”
하지만 시은은 고작 몇 시간 뒤에, 자신의 선택이 완전히 틀려먹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호텔룸 침대에는 시은에게 괴롭힘당해 걸레 짝이 된 남자가 행복한 표정으로 누워있었고, 시은은 멀쩡한 상태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하지만 남자와 반대로 시은의 표정은 무척이나 침울했다.
끔찍할 정도로 린치를 당한 남자는 미친 듯이 행복해하고 있는데, 정작 린치를 가한 시은은 세상 불행해 하고 있었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었다.
‘이래서…이래서 안 하려고 했는데…’
남자를 때리면서 들었던 생각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 정도가 예상보다 훨씬 심했다. 강박의 수준이었다.
-아, 나도 민준이한테 이렇게 괴롭힘당하고 싶다.
-민준이한테 괴롭힘당하고 싶다. 민준이한테 괴롭힘당하고 싶다.
-괴롭힘당하고 싶다. 괴롭힘당하고 싶다. 괴롭힘당하고 싶다. 괴롭힘당하고 싶다. 괴롭힘당하고 싶다.
끝끝내 삼켜버린 바닷물은 미친 듯이 짰고, 독버섯은 즉사에 이를 정도로 독했다.
몸이 달아올랐는데, 달래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도 달래지지 않았다.
시은은 결국 항복 선언은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짜증 나! 그래, 네가 이겼다. 이 개새끼! 이 나쁜 새끼야!!!”
“우읏…주, 주인님. 죄송해요. 죄송해요. 제가, 제가 주인님을 어떻게 이기겠어요! 그런 말씀 하지 말아주세요.”
“닥쳐. 생각하는 데 방해되니까.”
“네. 네! 주인님!”
까득-.
시은은 손톱을 깨물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자신은 김민준을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깨달아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제 발로 그 가랑이 사이로 기어들어 가기는 싫었다.
그러니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신경에 거슬리게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그렇게라도 해야 속이 편할 것 같았다. 배를 완전히 까고 드러눕기에는 지금까지 당한 게 너무 억울했다.
질 땐 지더라도, 자신이 힘들었던 만큼, 딱 그만큼만 민준 역시 자신 때문에 힘들어 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고, 짜증을 내고, 화를 내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구질구질 방식이라도 좋으니, 민준에게 자신이 아직 쓸모가 있다는 걸 확인받고 싶었다.
‘방법은…그 나쁜 놈을 화나게 할 방법은…’
고민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지금은 김민준 때문에 맛이 가버렸지만, 자신 역시 한때는 여왕이었다. 사람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게 특기였다.
그러니 그런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 어떨 때 가장 극심한 분노를 느끼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노예야. 너 내가 시키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지?”
시은은 침대에 묶여있던 노예남을 보며 물었다. 노예남이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네, 주인님! 당연하죠!”
“그럼 나 때리라고 해도 때려줄 수 있어? 살짝 때리는 척만 하지 말고, 거칠게 나를 강간하고 피나고 멍이 들 정도로 망가트리는 거야. 어때 할 수 있겠어?”
“아, 아뇨! 제가 어떻게 그런…! 저, 저는 그런 거 못 하는 거 아시잖아요. 주인님!”
“그래, 네가 진성 마조히스트인 건 알지. 그럼 이렇게 하자.”
“네?”
“네가 날 먼저 괴롭혀주면, 그 뒤에 딱 그만큼만 내가 너를 괴롭혀줄게. 그러니까 네가 괴롭힘을 받고 싶은 대로 나를 괴롭히는 거야. 어때 그건 할 수 있겠지?”
“아…하, 하지만…제가 어떻게 주인님을…괴롭히다니 그런 건…”
“그럼 여기서 당장 꺼지던가. 너 말고 다른 노예를 불러서 괴롭혀 달라고 해야겠네.”
“그, 그건 싫어요!! 딴 놈들이 주인님을 괴롭히다니…! 그건…!! 그런 건 정말…!!”
쓰윽-. 쓰윽-.
시은은 잘 교육된 노예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시은의 따듯한 손길 한 번에 노예남의 눈길이 곧바로 게슴츠레 풀려버렸다.
“주, 주인니임…”
“다른 놈이 하던가. 그게 싫으면 네가 직접 하던가. 물론, 네가 하지 않으면 나는 널 괴롭혀주지도 않을 거야. 지금 너한테 다른 선택지는 없어. 알겠니?”
“크흥-. 그…그렇다면 차라리 제가, 제가 할게요. 제가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주인님.”
“옳지. 그렇게 나와야 내 노예답지.”
“네! 열심히, 열심히 해볼게요. 주인님!”
철컥-. 철컥-.
시은은 노예남의 확답을 받은 뒤, 곧장 구속구를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노예남에게 씻고 오라고 명령한 뒤 깨끗한 상태의 노예남에게 옷까지 챙겨 입혔다. 그러고 나서 스스로 구속구를 찬 시은은 노예남에게 앞으로 펼쳐질 자신들의 플레이를 녹화하라고 명령했다.
“지금부터는 내가 노예고, 네가 주인님이야. 알겠지?”
“네, 주인…노, 노예년아.”
“후흣. 부디 저를 강하게 괴롭혀주세요. 주인님.”
그 뒤로 시은은 노예남에게 가혹하게 괴롭힘당했다. 처음에는 어색하던 노예남 역시, 보고 당한 게 있는 만큼 빠르게 주인 플레이에 적응해 나갔다.
또 시은은 노예남이 도저히 못 하겠다고 머뭇거릴 때면, 딱 자신이 괴롭힘당한 만큼만 괴롭혀줄 것을 강조하며 노예남에게 의욕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니 노예남은 채찍질부터, 촛농, 그리고 스패킹(구타), 목조르기, 사정 컨트롤 플레이 등 자신이 당하고 싶은 격한 SM 플레이들을 시은에게 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플레이가 모두 끝난 뒤에는 노예남과 마찬가지로 시은의 몸은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시은이 자신의 몸을 살핀 뒤 크게 만족해하며 노예남에게 자신의 몸을 사진으로 찍어 놓으라고 말한 뒤에야, 그들의 역전 플레이는 끝을 맺었다.
그 뒤에 약속한 대로 자신이 당한 만큼 노예남을 실컷 괴롭혀준 시은은, 핸드폰에 찍힌 영상과 사진을 확인했다.
“와-. 잘 나왔네? 진짜 SM 야동으로 만들어서 팔아도 되겠는데?”
사실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과장되게 반응한 게 티가 날까 봐 걱정했는데, 영상을 보니 자신이 정말 아파하고, 그러면서도 주인에게 복종하며 행복해하는 구제 불능의 마조 노예처럼 보였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도 노예들을 괴롭히다 보니까 시은은 어떤 리액션이 가장 노예답고, 주인의 가학심에 불을 지필 수 있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런 시은의 연륜과 경험들이 영상에는 그대로 녹아들어 있었다.
“우리 귀여운 민준이-. 이거 보면 속 좀 타겠는데? 힛-.”
시은은 영상을 확인하면서, 정말 오랜만에 웃음을 터트렸다.
민준이 자신의 장난감을 다른 남자한테 뺏기고, 심지어는 사정없이 망가지는 장면을 본다면 과연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서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미친 듯이 화를 내면서 나를 괴롭혀주겠지? 다시는 다른 남자한테는 눈길도 주지 못할 만큼 나를 망가트려 줄 거잖아. 그렇지 민준아…?’
울컥-. 울컥-.
영상을 보며 화를 낼 민준을 상상했을 뿐인데, 시은의 그곳에서는 야한 즙이 쏟아져 나왔다.
“흐응. 아~ 도저히 못 참겠다. 야, 노예야. 한 번 더 하자.”
“아읏. 주, 주인님-. 저 더 이상은…이미, 이미 한계라서…”
“뭐래. 또 밟아주면 발딱 서버릴 거면서.”
“우앗-!! 크히잇!! 주, 주인님!! 잠시만요!! 끄으으읏!!!”
시은은 아주아주 오랜만에 만족스럽게 성욕을 풀어낼 수 있었다.
자신 때문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민준의 얼굴을 상상하면 할수록, 시은의 그곳은 정숙함 따위는 모르고 사정없이 젖어 들어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