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114화
회의실로 가는 동안 내 옆에서 가이드를 맡은 박준성 팀장을 비롯해서 열댓 명 정도 되는 아저씨들이 나를 졸졸 따라왔는데, 느낌이 참 묘했다.
유나가 직접 픽한 아저씨들이었으니 하나같이 능력 빵빵한 사람들일 텐데, 그런 사람들이 내 뒤에 단체로 딱 달라붙어서 경직되게 걷고 있다니. 인생이란 참 아이러니한 게 아닐 수 없었다.
“편하게들 자리에 앉으시고 박준성 팀장님부터 한 분씩 보고 진행해 주시죠. 기본적인 것들은 이유나 본부장에게 대부분 전해 들었으니 너무 세세하게 짚어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네, 대표님. 저부터 보고 드리겠습니다.”
회의실에 도착한 뒤 곧바로 업무 보고가 시작되었다.
밥만 먹고, 어쩌면 밥도 굶어가며 승진을 하고 기업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내기 위해 살아온 사람들이라 그런지, 갑작스러운 업무 보고에도 전혀 막힘이 없었다.
자신이 하는 것과 해야 하는 일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나에게 자세히 보고할만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확실하게 구분해서 보고했다.
보고만 들었는데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각 부서에서는 어떤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눈앞에 생생히 그려지는 수준이었다.
심지어는 따로 물어봐야 할 정도의 전문 지식 같은 것도 거의 언급하지 않았기에, 내가 아니라 평범한 학력의 고등학생이 이 자리에 앉아 있었어도 얼추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전문 용어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눈치로 충분히 때려 맞출 수 있는 수준이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초특급 엘리트 인력들이 펼치는 고품격 업무 보고 쇼를 관람하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너무 깊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벼워 보이지도 않는 문제에 대해서만 간간이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다가 직원들의 입에서 그럴듯한 답변이 나오면, 꼭 그 사람의 능력에 대해 칭찬을 해주었다.
가령 ‘그게 최선입니까?’ 하며 도발적으로 질문을 던지다가도, ‘오. 정말 그게 최선이었네요. 역시 들은 대로 훌륭한 업무 능력을 갖추셨군요.’ 라는 식의 멘트를 던져주면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전략이었는데, 연인끼리의 밀당과도 비슷한 이 조련 기술은 놀랍도록 잘 먹혀들었다.
남자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더니, 젊은 대표를 보며 못 미덥고 심드렁한 시선을 보내던 이들도 취향을 저격하는 칭찬에는 부끄러워하며 헛기침을 흘렸다.
그래서 처음에는 에어컨을 풀파워로 틀어 놓은 듯 냉랭했던 회의실의 분위기는, 업무 보고가 끝날 때쯤에는 아주 훈훈해져 있었다.
자신들의 밥줄을 책임지는 대표가 연신 칭찬만 내뱉는데 직원들의 분위기가 안 좋아 지려야 안 좋아질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런 좋은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받아서 마무리 발언을 준비했다. 아무리 고품격 업무 보고 쇼라지만 이 정도가 내 한계였다. 이미 충분했다.
더 자세하고 머리 아픈 일은 유나가 하도록 놔두고, 나는 믿음직한 리더이자 대표로서의 이미지만 챙겨가면 그만이었다.
“흠흠. 잘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보고를 들으며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과, 과찬이십니다. 대표님.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일인걸요.”
내가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자,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박준성 팀장이 받기 과분하다는 듯 겸양을 떨었다.
자연스럽게 말까지 한번 더듬어주는 것이, 이 아저씨도 사회생활 스킬이 장난 아니었다.
“아닙니다. 사실 저야 아직 배운 것도 많지 않습니다. 있다고 해도 여러분들에 비하면 별것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 이 MJ인베스트먼트를 이끌어가는 주역들은 제가 아닌 바로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입니다. 그러니 주인의식을 갖고 열심히 노력해 주세요. 아무리 어리고 미숙하다지만 그래도 제가 대한민국 그 누구보다 지갑만은 두둑하다는 거, 이미 알고 계시겠죠?”
“중동 왕자가 한국에서 수상한 사업을 벌인다고, 이미 업계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대표님!”
“허허허허.”
“하하하하.”
인사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아재가 회심의 드립을 날렸고, 다른 아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회사에서 썩을 대로 썩은 고인물들이라 그런지, 다들 상사 기분 좋게 해주는 티키타카 실력이 미친 수준이었다.
나는 자연스레 입술에 웃음을 머금고, 말을 이어나갔다. 진지하되 분위기가 너무 처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썼다. 또, 교주의 오오라와 선지자의 목소리를 동시에 발동시켜서 최대한 만전을 기했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가 내가 이 사람들을 이 자리에 모이게 한 진짜 이유였다.
“그래도 저한테, 지갑만큼 두둑한 게 있다면 바로 ‘야망’입니다. 제 꿈은 저만의, 그리고 우리 회사만의 문화를 만들어내서 세계로 널리 퍼트리는 것 입니다. 그래서 엔터사를 인수한 것이었고, 앞으로도 MJ의 문화에 기여할 수 있는 기업들을 꾸준하고 공격적으로 사들일 계획입니다. 다양한 분야에 있는 자회사들이 상호협력하여 MJ만의 문화를 창조하고, 그것을 대중들이 열망하게끔 만드는 것. 기존에 자리 잡고 있는 전 세계의 문화와 충돌하여, 문화의 승리를 이뤄내는 것이 여러분들이 앞으로 해나가셔야 할 일입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앉아있는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내가 뿜어내는 열기에 슬슬 전염 당하고 있는지, 그들의 눈에서도 야망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하긴, 남자는 야망이라면 껌뻑 죽는 존재였다. 모험과 도전, 그리고 성취를 위해 사는 동물이 바로 남자였다.
나는 지금, 그런 타고난 야망가들에게 당신들이 진정으로 이뤄내야 할 원대한 목표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대표로서 앞으로 회사가 쟁취할 것은 전세계의 문화라는 것을 오만하게 선언하고 있었다.
허황되고 미친 소리로 듣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오직 그런 미친 소리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이 분명히 있었다. 더 많이 현실에서 동떨어진 소리일수록, 오히려 매력은 증가했다. 도무지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 이상향을 그리고 있는 종교와 이념의 체계가, 수십억 명의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분야를 가리지 않겠습니다. 예산도 아끼지 않을 겁니다. 영화와 드라마, 음악과 미술, 사람들이 쓰고 즐기는 온갖 것들에서 MJ의 이름이 도배될 때까지 저는 멈추지 않고 돈을 쏟아부을 생각입니다. 한 사람이 즐기는 모든 것, 전 세계 사람들이 즐기는 모든 것. 그 모든 것들을 독재할 수 있을 때 일어나는 일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우리에게 열광하고 스스로 복종 당하기를 원하는 그런 세계란 얼마나 환상적입니까. 그런 환상적인 세계를, 지금 바로 이곳에 있는 여러분들이 현실로 만들어가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현실은 제가 전부 책임질 테니, 여러분들은 마음껏 가진 능력을 펼쳐서 세계를 바꿔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을 위해, 저는 이 회사를 세웠고, 대표 자리에 앉았습니다-.”
“…”
“…”
“…”
쏟아내듯 이어지던 나의 말이 멈추자 마치 시간마저 같이 멈춘 듯, 사무실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하지만 무언가가, 알 수 없는 어떤 기묘한 열기를 담은 에너지가, 회의실 안을 가득 채우고도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시한폭탄처럼 쌓이고 쌓이던 에너지가 결국, 펑-. 하고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짝짝짝짝짝짝—!!!
짝짝짝짝짝짝-!!!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대표님!!”
“대표님의 훌륭한 비전, 꼭 이뤄내 보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씀 감사합니다. 대표님!!”
쏟아지는 박수갈채와 목소리 크기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공간 자체가 거대한 회의실이고 죄다 아재들이라서 그런지, 어쩐지 리액션들에서 영화 속에 나오는 거대한 폭력 단체의 향이 진하게 났다.
왜 있지 않은가. 드루와 형님이라든지, 거 죽기 딱 좋은 날씨라든지.
대표님이라는 단어를 ‘형님’이라고만 바꾸면, 지금 이 자리가 조직 두목의 취임식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뭐, 어쨌든 그만큼 열정적으로 환호를 받고 있다는 건 사실이었기에 기분은 좋았다.
‘이거지. 잘했다. 김민준.’
사실 이 자리는 나에게 시험대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과연 남자들까지 열광하게 하고, 복종하게 만들 수 있는지 궁금했다.
소꿉놀이만 할 거면 여자만으로 이루어진 교단도 상관없었지만, 더 크게 가려면 남자도 안고 가야 하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시험해 봤는데, 결과를 보니 대단히 괜찮았다. 말 몇 마디로 이 사람들이 완전히 나의 수족이 되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한순간이라도 열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정도만 되도 충분했다. 그렇게 서서히 물들여 가다가 딱 복종도 50만 넘으면, 그때부터는 명실상부 무한금욕교의 교인이었으니 딱히 케어해주지 않아도 컨트롤 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섹스 없이 오로지 카리스마와 리더쉽 만으로 남자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흔들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는데, 이제 보니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회의실 분위기는 열광적이었다. 단순히 사회생활을 잘하기 위해 대표에서 아부를 떠는 단계를, 몇 계단이나 뛰어넘은 상태였다. 어쩌면 야망과 리더쉽에 목말라 있던 몇 명 즘은 이미 교인이 됐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크흠. 감사합니다. 여러분. 앞으로 업무를 하실 때도 이렇게만 해주시면 좋겠네요.”
내가 뻔한 멘트로 장내의 이목을 집중시키자, 아재들은 잘 훈련된 기계처럼 일제히 박수를 멈추고 한번 웃음을 터트리더니 나에게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글거리는 눈빛들이 좀 부담스러웠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은 척 옆에 있는 박준성 팀장을 보며 물었다.
“우리 회사에는 회식이 따로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네. 아직까지 부서 내에서 따로 시행한 회식은 없습니다. 본부장님의 방침이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이유나 본부장은 제가 가장 믿고 맡기는 사람이고 제 뜻을 본부장을 통해 전달할 때도 잦을 테니, 언제나 본부장의 말에 잘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대표님!”
나는 공식적으로 유나에게 힘을 팍팍 실어 주었다. 이렇게 힘을 실어준다고 해도 그걸 받아낼 만한 그릇이 안 되면 말짱 꽝이었지만, 내 말에 당연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유나의 그릇이야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오늘은 본부장보다 대표 명령을 먼저 따라주셔야겠습니다. 박 팀장님 이거 받아주세요.”
“이, 이건…?”
나는 세한은행에서 발급한, 이제는 이름도 제대로 기억 안 나지만 어쨌든 돈이 짱짱 많은 사람에게만 발급되는 최고 등급의 카드를 지갑에서 꺼내 박 팀장에게 건넸다.
“오늘 저녁에는 단체 회식입니다. 제 카드로 마음껏 먹고 즐기세요. 얼마나 썼는지 내역서 꼼꼼히 따져볼 거니까, 저에게 책 잡히지 않도록 통 크게 노셔야 할 겁니다.”
“감, 감사합니다만, 그럼 대표님은 혹시 참석하지 않으시는 것인지…?”
“아, 저는 저녁에 따로 약속이 있어서요.”
“허어. 알겠습니다. 대표님. 다음에는 꼭 같이하시죠.”
“네, 그러죠.”
능청스럽게 대답했지만, 다음에도 회식을 같이할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저번처럼 파릇파릇한 20대 대학생들과의 술자리라면 모를까, 거무죽죽한 아저씨들과 폭탄주를 돌려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유나도 있고 회사 내에 여직원들도 있기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회식 자리에서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건 뭐 텅 빈 강정도 아니고, 전혀 갈 이유가 없었다.
단합이야 열심히 일하는 아랫사람들끼리 하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대표니까 마음껏 놀라고 카드나 주고 빠지는 게 여러모로 좋은 선택이었다.
“자, 그럼. 이만 마치도록 하죠.”
“네, 대표님.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회의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박 팀장부터 쪼르륵 나를 따라서 일어나서는 내 뒤에 붙었다.
그대로 MJ 임원단 무리를 거닐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니, 무리 중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와서 나 대신에 엘리베이터 버튼을 미리 누르고는 다시 대열에 복귀했다. 아마 영업 파트 쪽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접대의 수준이 너무 굉장했다.
“타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먼저 내려가시지요. 대표님.”
“네, 정 그러시다면…”
엘리베이터가 도착해서 아무런 생각 없이 먼저 올라탔는데, 다른 사람들은 엘리베이터 앞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는 타라고 해도 타지 않으니, 나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상태로 로비층을 눌렀다.
쓰윽-. 쓰윽-.
그런데 갑자기 정장 마이를 정돈하는 소리가 동시 다발적으로 들려오더니, 임원 군단 아재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서 고개를 깊게 숙였다.
심지어 엘리베이터의 문이 양옆으로 완전히 닫힐 때까지, 그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로지 고개를 숙인 채 나를 배웅했다.
놀라운 광경에 우우웅-. 하면서 엘리베이터가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할 때까지, 나는 그만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와…지리네. 이래서 사람들이 승진을 하고 권력을 쥐려고 발악하는 건가?’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마구 휘몰아치고 심장이 쿵쾅댔다. 겨우 단체 인사 한번 받았을 뿐인데, 내가 저기 저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마피아 두목이 된 기분이었다.
이런 게 권력의 맛인가 싶었는데, 막상 찍어 먹어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달콤했다. 섹스와는 결이 완전히 달랐지만, 결코 섹스에 못지않았다.
자기객관화를 꽤나 잘한다고 자부하는 나조차, 내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후우-. 사람 흥분되게 하면 곤란한데…”
나는 주차장에 도착해서 차에 올라탄 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좀처럼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섹스라도 해서 풀어내야 할 것 같았다.
“시은 누나. 시은 누나한테 연락하려고 했었지.”
나는 뜨거운 콧김을 내뱉으며 전화번호부에서 시은 누나의 번호를 찾았다. 벌써 이런 기분이라면 정말 오랜만에 흑염룡이 날뛸지도 모르니, 섹스 파트너로 시은 누나가 제격일 것 같았다.
위이이잉——.
“뭐야. 마침 이때 연락이 오네.”
그렇게 핸드폰을 뒤지고 있는데, 때마침 시은 누나에게 카톡이 날아왔다. 나는 곧바로 카톡을 확인했다.
시은 누나[민준아, 오랜만이야! 이거 한 번 볼래? 나 너 말고 새로운 주인님 찾았어! 이쪽 세계에 눈뜨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김민준 씨 ㅎㅎ.]
“뭐, 씨발?”
어처구니없는 메시지 내용에, 내 입에서는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