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110화
‘와, 씨. 나 다시 씻고 또 옷 입어야 해?’
미현 누나를 침대에 옮겨주고 나서 든 생각이었다.
마침 다 준비하고 나가려는 찰나에 미현 누나와 한바탕 해버린 게 문제였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다시 한번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래도 대표인데 구겨진 옷을 입고 정액과 애액 냄새를 풍기며 첫 출근은 할 수 없지 않은가.
‘이 정도면 되겠지?’
미현 누나가 골라준 옷들은 이미 다 구겨져서 엉망이었지만, 최대한 비슷한 느낌으로 챙겨 입었더니 나름 스타일이 괜찮았다.
‘하긴, 이런 얼굴과 몸매에 뭐가 안 어울리겠느냐마는.’
내 몸뚱아리지만 이렇게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언제봐도 새로웠다. 나는 거울 속 남자를 보며 감탄을 흘렸다.
이쯤 되니, 내가 후천적 존잘남이 된 것이 더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태어났을 때부터 잘 생겼었다면, 잘 생겼다는 게 얼마나 행복하고 축복받은 일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겠지.
‘큭. 처음 출근하는 거라 그런가. 별생각이 다 드네.’
나는 마지막으로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차고로 향했다. 아무도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대표로서 사무실에 출근한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걸음걸이가 당당해진 느낌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벌써 대표뽕에 취해버린 것 같았다.
‘람보를 타야 하나? 아니면 뽀르쉐?’
차 두 대가 주차되어 있음에도 텅텅 비어 보일 만큼 커다란 차고에 도착해서,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수리를 마치고 차고에 박아둔 뒤로 한 번도 뽀르쉐를 타본 적이 없었다. 드라이빙의 재미로 따졌을 때 람보가 압도적이라서 그닥 손이 가질 않았달까.
뭐, 그만큼 뽀르쉐가 운전할 때 덜 피로하긴 했지만, 내 몸에 워낙 활력이 넘쳐서 그런 사소한 피로감쯤이야 무시해도 괜찮았다.
여하튼 람보와 뽀르쉐 중에 항상 람보를 선호했는데, 막상 회사에 타고 가려니까 좀 애매한 느낌이었다. 진중한 느낌이 떨어진달까? 그렇다고 뽀르쉐가 진중한 느낌이라는 건 아니었지만….
‘에라~ 모르겠다.’
나는 초등학교 때 자주 써먹었던 ‘코카콜라 맛있다-. 맛있으면 또 먹어~.’로 시작되는 긴 주문을 외우면서, 음절에 따라서 손가락으로 람보와 뽀르쉐를 번갈아 지목했다. 음, 역시 고민될 때는 찍는 게 최고지.
‘딩동댕 동~! 오케이. 뽀르쉐, 너로 정했다!’
척척박사님의 선택은 뽀르쉐였다. 나는 뽀르쉐에 올라타서 곧바로 사무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올라타서 그런지 날 반겨주는 시트의 감촉이 무척이나 안락했다.
‘음……쓸만한 사람이 있나 볼까?’
나는 운전을 하면서 교주 스킬 중 하나인 ‘교주의 심안’을 켜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스캔했다. 교주의 심안을 사용하면 누가 교인에 적합한지 아주 쉽고 직관적으로 가려낼 수 있었다.
SSS급 교인인 연주에게서는 자칫하면 눈이 멀어버릴 듯한 엄청난 후광이 비치고, 그저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꺼져가는 필라멘트 불빛처럼 밋밋한 불빛이 비치는. 그런 방식이라 심지어는 차를 타고 다니면서도 옥석을 가려낼 수 있었다.
여태까지는 교주의 심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지만, 그건 그전에 펼쳐놓은 일조차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내부적으로 신경 써야 할 거리도 거의 없었고, ‘MJ인베스트먼트’나 곧 인수하게 될 ‘스타 엔터’처럼 재능있는 교인을 품고 있을 수 있는 사업체들 역시 확보된 상태였기에,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쓸만한 교인들을 찾아 나설 생각이었다.
‘아-. 쓸만한 사람이 이렇게 없나?’
그러나 아무리 거리를 둘러봐도 쓸만한 교인을 찾는다는 건 그리 쉽지가 않았다. 다들 고만고만한 밝기를 지니고 있었는데 아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뿌듯했다.
현재 나의 보석함에 들어있는 여인들은 교주의 심안으로 관찰했을 때 대부분 영롱한 빛을 뿜어냈다.
그래서 그게 평균인 줄 알았는데, 정작 살펴보니 그녀들이 특별한 것이었다.
딱히 심안을 먼저 쓰고 수집한 게 아닌데도 어쩜 그리 야무진 여자들로만 쏙쏙 잘 골라 왔는지,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음. 빌딩 좋고.’
유나가 찍어준 주소로 도착해서 빌딩을 대충 살펴보니 새로 준공된 건물인지 외관부터 주차장 내부까지 너무 깔끔했다. 나는 흡족한 마음으로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로비 층으로 향했다. 시간대가 애매한 건지 주차장이 꽤 들어차 있는 것 치곤 로비는 한산했다.
‘전화하라고 했는데. 서프라이즈나 한 번 해볼까?’
전화기를 꺼내 들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대표요~’하고 들어가면 물론 융숭한 접대는 받겠지만, 그것보단 몰래 쓱 들어가서 평소의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구경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짜잔~ 사실 제가 대표였습니다!’ 하고 느닷없이 정체를 밝히는 게 훨씬 재밌지 않을까.
뭐,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면 아랫사람들은 죽을 맛이겠지만 딱히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다는데 어쩌겠는가.
‘꼬우면 대표해야지 뭐~’
나는 출근 첫날부터 몰래카메라를 진행할 생각에 흥분되는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고, 안내원 누나들이 곱게 앉아있는 인포메이션 데스크로 향했다.
약속을 하지 않고도 들여보내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비벼볼 생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어떤 일로 방문하셨나요?”
내가 다가가자 안내원 한 명이 나와 눈을 맞추며 친절할 목소리로 물어왔다.
“MJ인베스트먼트에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이유나 본부장님에게 이직 제의를 받았습니다.”
“아,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내원이 전화를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통화에 열중하는가 싶어서 마음 놓고 있었는데, 안내원이 통화를 하다 말고 스피커를 손바닥으로 막고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오늘은 따로 확인된 약속이 없으니, 신분이 어떻게 되시는지 알려달라고 요청하십니다만……”
“아, 이직 전에 회사 분위기 좀 살펴보려고 불쑥 찾아왔습니다. 신분은 이유나 대표님 친한 후배라고 말씀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다시 수화기를 붙잡았다. 몰래카메라라는 게 도중에 별 성과도 없이 들키게 되면 몹시 무안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다행히 통화를 끝낸 그녀의 입에서 긍정적인 답변이 흘러나왔다.
“담당자분이 직접 만나 뵈러 내려온다고 하시네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럼요. 감사합니다.”
“별, 별말씀을……”
나는 안내원에게 시원한 웃음 한 방을 날려주고 차분하게 담당자가 내려오길 기다렸다.
겉은 차분했지만, 내가 범죄 액션 영화에나 나오는 산업 스파이가 된 느낌이라 속으로는 엄청난 스릴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저 사람인가?’
나는 고개를 돌려서 내 쪽으로 걸어오는 사내를 바라봤다. 로비에 설치되어 있는 게이트를 열고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사내는 외모가 꽤 준수했다.
조각 미남까지는 아니어도 누구에게나 쉽게 호감을 얻을만한 그런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는데, 나를 발견하고는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나를 언제 봤다고 눈웃음까지 치는지는 모르겠지만, 신기하게 남자의 눈웃음을 봤음에도 전혀 더러운 기분이 아니었다. 대단히 서글서글한 웃음을 보고 있으니 오히려 내 마음속 경계심이 더 옅어지는 기분이었다.
‘인상 미쳤네. 이게 비지니스 맨인가?’
남자의 온순하고 무해한 인상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리트리버가 생각났다. 남자는 인상만으로 치열한 협상 분위기를 유순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런 사기 캐릭을 사원으로 영입한 유나에게 다시 한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MJ인베스트먼트 인사팀 소속 한수호라고 합니다.”
“아, 예. 저는 김민준입니다.”
“네, 민준 씨. 그……본부장님께 직접 이직 제의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회사 견학을 해보고 싶으시다고요?”
“그렇습니다. 본부장님께서 좋은 조건으로 이직 제의를 해주셨지만……이런 말씀 드리면 실례지만 워낙 신생 회사라……”
“네. 맞습니다. 신생도 그냥 신생이 아니라 태어난 지 며칠도 안 된 신생아급이니까요. 하하하.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긴가민가했거든요.”
“네. 그래서 실례가 안 된다면 회사 견학을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직접 보고 이직을 판단해보고 싶어서 말이죠. 아, 약속도 잡지 않고 불쑥 찾아온 점은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혹시 업무에 방해가 된다면 저는 그냥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 괜찮습니다! 이직 제의를 받으셨는데 견학 정도야 얼마든지 해보실 수 있어야죠. 그리고 민준 씨 덕분에 저도 좀 살 것 같네요. 하하. 민준 씨한테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저희 회사는 많이 주는 만큼 사람을 아주 쪽! 쪽! 빨아먹거든요. 하하하하.”
“하하하. 아, 네에-.”
“자, 그럼 이쪽으로-……”
나는 방금 본 사이지만 마치 불알친구같이 느껴지는 한수호를 따라 로비 게이트를 통과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한수호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 말했다.
“저희 회사는 10층부터 12층까지 쓰고 있습니다.”
“……신생치고는 규모가 굉장히 크군요.”
“그렇죠. 그래도 본부장님이 워낙 공격적으로 영입을 시도해서 하루가 다르게 사무실이 들어차고 있습니다. 게다가 본부장님을 도와 사원 채용을 담당하는 저희 인사과의 규모도 계속 커지고 있는걸 보면, 본부장님은 지금보다 더 빠른 속도로 회사를 키우는 걸 원하고 계시는 것 같더군요. 이미 괴물 같은 수준으로 인재들을 빨아들여서 업계에 소문이 자자한데 말이죠. 아, 혹시 민준 씨도 소문 들으셨나요?”
“안타깝게도 듣지 못했네요. 어떤 소문이죠?”
“MJ인베스트먼는 돈으로 망나니짓을 한다고요. 아직 제대로 된 사업체도 없는 구멍가게 주제에 무서운지도 모르고 돈을 물처럼 쓰면서 인재만 영입 한다나?”
“하하. 그거 참 재밌는 소문이네요.”
“그렇죠? 어느 정도 맞는 소리긴 하지만…뭐, 꼬우면 저희보다 연봉 더 줘야지 별수 있겠어요?”
“음. 음.”
나는 고개를 끄덕여 수호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구멍가게’라는 표현이 조금 거슬렸지만, 곧 쏙 들어가게 만들 수 있었으니 참을만했다.
‘구멍가게에 먹혀봐야 정신 차리지.’
나는 스타 엔터만 인수하고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럴 거면 이렇게 판을 크게 벌일 필요도 없었다.
현재는 지정할 수 있는 성역이 두 곳뿐이라 스타 엔터만 탐내는 거지, 성역 제한만 풀리면 우리 교단을 부흥시키는데 일조할 수 있을 만한 다른 기업들도 싹 다 사들일 생각이었다.
‘성역’이라는 능력이 워낙 사기였기에 내가 조금만 관심을 쏟으면 평범한 사원들까지 엘리트 사원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 그러니 어떤 회사든 일단 삼키기만 하면 더 개쩌는 회사로 만들 수 있었다.
심지어 거기서 끝이 아니라, 성역 버프를 받는 회사의 직원들은 나의 교인이 되어 복종도 마저 바칠 테니 선순환도 이런 선순환이 없었다. 회사라는 개념 자체가 ‘성역’이라는 능력과 너무 잘 맞아떨어져서, 성역 선포의 횟수와 돈만 충분하다면 회사를 사들이지 않을 이유가 하등 없었다.
띵-.
“자, 10층부터 가볍게 둘러보시죠.”
“네-. 수호 씨.”
나는 수호와 함께 10층과 11층을 둘러봤다. 수호는 내 옆에서 회사의 특징에 대해서 하나하나 설명해 줬는데, 유나가 유학파 출신이라 그런지 회사 문화 자체가 굉장히 선진적이었다.
정해진 출퇴근 시간도 없고 정해진 업무량도 없지만, 대신 모든 사항이 수시로 진행되는 각종 회의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려면 회의에는 꼭 참석해야 한다고 말하며, 수호는 분명 자유롭긴 하지만 그만큼 스스로 열심히 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환경이라 피가 말리는 느낌을 자주 느낀다고 투덜댔다. 뭐, 내 알 바야 아니었지만.
“진짜 죽을 것 같다니까요? 하아-. 그래도 이유나 본부장님 보면서 힐링하니까 다행이지…”
“…본부장님이요?”
“네. 피곤하다가도 어쩌다가 본부장님 얼굴만 봐도 피로가 싹 풀려버린달까? 어쩜 그렇게 매일 예뻐지시는지-. 이번에 스타 엔터 매수한다는데, 저는 솔직히 매수할 게 아니라 지금 당장 본부장님이 스타 엔터로 가서 연예인을 해야 한다고 봐요. 진지하게요. 그럼 스타 엔터가 바로 대한민국 원탑 기획사 된다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음……”
흥미로운 의견이었지만, 아쉽게도 받아줄 수는 없었다.
나만의 보물인 유나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정말-. 본부장님 같은 여자는 대체 누가 데려갈지. 상상만 해도 그 남자가 부럽네요.”
“뭘요. 수호 씨도 가능성 있지 않을까요?”
“에이~ 저 같은 게 무슨……뭐, 민준 씨같이 조각처럼 잘생겼으면 시도라도 해봤을 텐데…”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그럼…한 번 해볼까요? 본부장님에게 제 마음을…정말 괜찮을까요?”
팬심과 사랑은 한 끗 차이라고, 유나를 찬양하던 수호의 등을 떠미니까 역시 선을 넘기 시작했다.
나는 정색을 하고 수호에게 경고를 건넸다.
“……기껏 좋은 조건으로 이직했는데 너무 일찍 짤리면 아쉽지 않을까요?”
“하하하하하! 민준 씨는 농담도 참 잘하시네요! 민준 씨 꼭 저희 회사로 이직하세요! 오셔서 저랑 친하게 지냅시다!”
“뭐, 저야 환영이죠. 그 때까지 수호 씨가 회사에 남아 있다면요.”
“으하하하핫! 그만하세요, 민준 씨! 아으, 배꼽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