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107화
멍하니 명함에 쓰여있는 글귀를 읽어보는 나정의 입에서 ‘대표’라는 소리가 나오자, 테이블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서 ‘헤엑’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내 옆에 있던 정혜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알려준 적이 없으니 그럴 만했다.
‘캬~ 이 맛에 대표하지. 회사를 차려놓길 참 잘했어.’
만약 회사 대표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나의 재력에 대해 납득이 가도록 설명하기란 무척이나 어려웠을 게 분명했다. 아마 높은 확률로 가상화폐 투자 덕분에 대박이 났다고 둘러댔겠지. 재벌이라고 했다간 어떤 기업인지 물어올 텐데, 요즘 같은 정보화 시대에 그건 너무 뻔한 거짓말이었다.
뭐, 여하튼. 대표라고 하니까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도 보기 좋았고, 굳이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좋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분 좋은 것은, 비주얼에 능력까지 갖춘 완성형 수컷을 눈앞에서 목도하고 거무죽죽해진 김인호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꼬리를 내린 패배자를 굳이 찾아가서 조롱하는 취미는 없었지만, 독기를 잔뜩 품고 있는 약자를 멸시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아….아…아싸아~! 자, 이거 봐. 민준 씨는 그냥 회사 대표였어. 평범한 회사 대표였다고! 그러니까 우리 내기 무효다! 인정? 어 인정!”
“아니지. 인베스트먼트면 투자회사잖아. 따지고 보면 투자로 성공하신 거 맞는 거 아니야?”
“와 맞네. 인베스트먼트! 인.베.스.트.먼.트!”
이런저런 소란이 있었지만, 결국 나정의 내기는 무효로 돌아갔다.
나정은 테이블 위에 꺼내놓은 지폐를 위풍당당하게 회수해가면서, 싱글벙글해진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와~! 근데 민준 씨는 어떻게 젊은 나이에 대표까지 되신 거예요? 아, 혹시 정확히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진즉에 여쭤봤어야 했는데 저희가 내기에 너무 정신이 팔려서 그만…”
“아, 저는 스무 살입니다.”
“아……?”
“에……?”
레오레를 하다 보면,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들이 벌어질 때가 있었다.
우리 팀 기지에서 쏘아진 이주리얼의 궁극기가 바론 둥지에 있던 상대방을 몰살시키고, 바론 남작까지 처지 하던가.
1대 3으로 맞붙는 불리한 상황에서 오로지 기적 같은 피지컬로만 모든 걸 극복하고 트리플킬을 따내던가.
여하튼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면 화면에는 무수한 물음표 핑이 찍히곤 했는데, 지금 상황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나의 나이를 이미 알고 있던 정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나를 향해 물음표 핑을 수도 없이 찍고 있었다.
심지어는 김인호도 마찬가지였다.
“스무 살…이요? 저희 학교 1학년들하고 동년배…라는 말씀이신 거죠?”
“네. 그런데요.”
“아 씨-. 이게 말이 되나…? 우리 애들은 그냥 고등학생이던데…? 왜 민준 씨는 걸어 다니는 조각상인데요? 네? 우리 1학년 중에는 민준 씨 같은 사람이 왜 없나요? 네? 어째서죠, 정혜 양?”
“그걸 저한테 물어봐도……”
한동안 충격에 빠져있던 나정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호들갑을 떨자, 가라앉았던 테이블의 텐션이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정은 분위기를 띄우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여자였다. 텐션 높은 다영이와 같이 붙여놓으면 아주 볼만할 것 같았다.
“정혜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이거 완전 도둑냔이었네…”
“네? 저는 민준 씨랑 1살 차이 밖에 안 나거든요?!”
“응~ 민준 씨가 늦은년생이었으면, 님 아청법 위반으로 잡혀감~”
“빠른년생도 아니고, 늦은년생이 대체 어디 있는데요!!”
“아몰랑~ 부러워~ 부러워서 미칠 것 같아~”
“큭큭-.”
내가 한참 어리다는 걸 알고 편해져서 그런지, 아니면 슬슬 취기가 돌아서 그런지.
원래도 단연 돋보였던 나정의 주접이 한층 더 강화된 느낌이었다.
정혜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예쁘장하니 귀염귀염하게 생긴 사람이 저렇게까지 주접을 떠니까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정혜가 대학교를 통틀어 한 명쯤 있을 법한 캠퍼스 미의 여신이라면, 나정은 친근하면서도 얼굴도 적당히 예쁜 동네 누나 느낌이었다. 편의점에서 가끔 지나칠 때마다 괜스레 가슴이 설레이는, 그런 누나.
“어? 민준 씨 웃었다! 아니…? 민준이 웃었다. 그래, 그래. 민준이는 아직 애긔니까 이 누나가 말 편하게 놓을게…?”
“네. 그래요. 누나.”
“어머~ 웬일이니!! 누나래! 나보고 누나래! 어머, 어머-! 정혜야, 나도 도둑 할까? 응? 우리 팀플로다가 도둑질 같이 한번 해볼래?”
“선배!!”
“아-. 주님. 제발 오늘도 제가 정의로운 도둑이 되는 걸 허락해 주세요. 아메엔-.”
“야!!!”
짜악-.
너무 깝죽대다가 정혜에게 등을 세게 한 대 맞았지만, 나정은 술기운에 아프지도 않은지 실실거릴 뿐이었다.
“민준아. 누나 잔 받을 줄래? 이 누나가 소주를 정말 기가 막히게 따르거든. 술 따르기가 과목이었다면 이 김나정! 무조건 A+라고. 알아들어?”
“와. 정말 대단하세요. 그럼 한잔 받겠습니다.”
“하~ 김나정 진짜. 또 또 술 먹고 흑역사 생성하네.”
끊임없는 주접에 정혜도 이제는 지쳤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민준 씨. 너무 안 받아주셔도 돼요. 민준 씨가 받아주면 나정 선배 내일 이불킥만 더 할 건데…”
“왜요. 재밌는데요. 제가 대학을 안 다녀봐서 이런 게 다 신기하거든요.”
“아니-. 그야 저 언니가 분명 재미는 있는데 그래도 인권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정혜는 말렸지만, 이미 말린다고 말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굳이 나와 페이스를 맞춰서 술을 마셨던 나정과 나정과 함께 내기를 진행했던 인싸 여학우 두 명은, 이미 술기운이 올라온 지 오래였다.
테이블에는 술병이 나뒹굴었고, 자꾸만 젓가락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잔이 깨져나가고 있었다.
주변에 감싸고 있는 게 공기가 아니라 알콜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우리 테이블에서는 진한 취기가 내뿜어지고 있었다.
중간에 김인호가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진즉에 이런 분위기가 되었겠지.
역시 이래서 술맛 떨어지게 하는 놈들하고는 겸상하는 게 아닌데.
여하튼, 이미 놀자판이었고, 나는 놀자판의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마음에 들었다.
나에게 이질감을 느끼게 했던, 젊은이들 특유의 과장된 가면을 다들 한 꺼풀씩 벗어던진 느낌이랄까. 여하튼 젊은이들의 진솔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대표님~~~!! 김민준 대표님~~~!!!”
“네, 나정 누나.”
“저 나중에 취업시켜 주실 거죠? 네? 스포츠카 옆자리는 정혜한테 양보할 테니까 저는 부디 취업만 시켜 주세요. 그럼 평생 대표님의 멍멍이로 살겠습니다. 멍멍!”
“나정 누나는 전공이 어떻게 되는데요?”
“저는 철학과입니다! 대표님!! 가장 존경하는 철학가는 소크라테스 형님 입니다!”
“음…저희는 투자회사라 철학과는 별로 선호하지 않는데…”
“그럴 줄 알고 경영학도 복수전공 했습니다! 멍멍!”
나정의 주정은 대단했는데, 단순한 형용 어구가 아니라 정말로 술을 마시고 개가 되어 버렸다.
회식한다고 가게를 통째로 빌려서 다행이지, 일반적인 술자리였다면 나 역시 나정이 창피할 것 같았다.
여하튼 지금은 뭐라 할 사람 하나 없었기에, 나는 알콜이 모든 걸 지배하고 있는 이 분위기를 기꺼이 만끽했다.
만끽한다고 해봤자, 술자리를 하드 케리하는 나정의 추태를 공개 코미디 방청하듯이 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푸하아~ 인생 쓰다~ 진짜 김정혜 절라 부럽다아~~ 나도 민준이 같은 썸남!! 아~~ 하느님, 아버지! 제가 후배의 남친을 뺏고도 과연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야!! 김나정!!!”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이제는 다른 테이블 사람들까지 와서 나정의 술주정을 촬영하고 있었다.
나는 얼마든지 더 마실 수 있었지만, 이 정도 되니 나정의 인권을 위해서는 이쯤에서 정말로 자리를 파해야 한다는 정혜의 의견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가게가 떠나가라 노래를 불러제끼고 있는 나정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정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 민준 씨. 왜요?”
“정혜 씨. 아직 계산 안 됐죠? 오늘 술값은 제가 낼게요.”
“네?!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괜찮아요. 손님으로 왔으면 이 정도는 해야죠.”
“잠, 잠깐만요! 민준 씨!”
정혜가 나를 불렀지만, 나는 무시하고 일어나서 카운터로 걸어갔다.
그런데 정혜와 내가 소곤소곤 나눴던 얘기를 그 새 엿들었는지, 나정이 노래를 부르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외쳤다.
“자~!!! 여러분!! 오늘 이 자리는 정혜양의 썸남이자, MJ인베스트먼트을 경영하고 계신 우리 대한민국의 자랑~~~! 존잘민준님께서 쏘신답니다!! 일동~~~ 박수!!”
“꺄아아아앗!!!!”
“멋져요!!! 존잘민준!!!”
“무야호~~~~!!!!”
‘하. 씨발.’
아무리 관심받는 걸 좋아하는 나였지만 어느 정도 선이 있었고, 이건 분명 선을 넘어서 있었다. 쏟아지는 박수갈채가 커질수록 부끄러워져만 갔다.
나는 재빨리 아주머니에게 카드를 건네서 계산을 마친 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끙끙대고 있는 나정을 보니 정혜가 나 대신 등짝을 때려준 것 같은데, 굉장히 속 시원하게 느껴졌다.
“나정 선배! 나정 선배! 빨리 집 주소 불러요! 아니면 그냥 저희 과방에서 재울 거니까.”
“응~ 꺼져~ 민준이 집에서 잘 거야~ 왜냐면 나는 민준이의 멍멍이니까! 멍멍!”
“야!!!”
술자리가 파장되고 모두 각자의 보금자리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나정은 매를 벌었다.
정말로 경이로운 주사였는데, 이쯤 되니 진지하게 교인으로 받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술 마시면 재밌을 것 같았다.
“으아-. 이런 일까지 하게 해서 진짜 죄송해요. 민준 씨.”
“뭘요. 이런 것도 다 추억이죠. 뭐.”
나는 정혜와 연수대를 향해서 걷고 있었다. 내 양옆에는 나정과 내기를 걸었던 인싸녀들 두 명이 매달려 있었고, 정혜의 등에는 나정이 업혀있었다.
내가 나정까지 모두 책임진다고 했지만, 정혜가 죽어도 위험분자인 나정을 나와 붙여놓을 수 없다며 차라리 자신이 업고 가겠다고 주장해서 결정된 포지션이었다.
그렇게 정혜와 나는 세 명의 여인들을 연수대 영문과 과방까지 질질 끌고 가서 눕혔는데, 들어와서 보니 과방이라는 공간은 굉장히 작고 협소했다. 어쩐지 퀴퀴하고 습한 냄새가 나는 게 말이 좋아 과방이지 골방이나 마찬가지였다.
“음냥-. 정혜야. 언니가 미안해. 언니는 강아지야. 민준이의 강아지. 민준이는 여친보다 반려동물을 더 좋아하게 될 거야. 왈왈! 멍멍!”
“아오, 진짜! 콱 밟아버릴까!”
정혜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심신미약에 빠진 나정을 알뜰살뜰 보살폈다.
기다란 소파에 똑바로 눕히고 신발과 양말을 벗겨준 뒤 캐비닛을 뒤져서 담요를 꺼내 덮어주었는데, 동작이 너무 능숙한 게 이런 일을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것 같았다. 나 역시 정혜를 따라서 인싸녀들을 눕혀주었다.
“후아-. 민준 씨. 수고하셨어요. 그리고 정말 죄송해요. 괜히 이런 일 하게 만들어서….”
“정말 괜찮다니까요. 오늘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정혜 씨랑 언제 또 이렇게 술을 마셔 보겠어요. 마침 오늘이니까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내 말에도 정혜는 나를 바라보며 연신 미안한 눈빛을 보내왔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아…!”
나는 그런 정혜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는데, 깜짝 놀랐는지 정혜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는 모든 움직임을 멈춰버렸다.
정혜의 반응에 나 역시 모든 게 멈춘 것만 같았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겨우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주고받는 교감이라기에는 너무 깊고 거대한 감정들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드르르릉-. 퓨우우우우-.”
“큭-.”
“푸흣-. 진짜…”
나정이 코를 골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이어졌을 황홀한 스킨쉽이 끝이 났다. 나와 정혜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을 흘렸다.
서로 나누고 있던 진한 교감의 끈이 끊어질 때 보통은 아쉽기 마련이었는데, 이런 방식으로 끊어지니까 뭔가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이래서 로맨스와 코미디가 항상 붙어 다니는구나 싶었다.
“머리 쓰다듬어 주는 거…그거 진짜 반칙이에요.”
“왜요?”
“그냥요. 묻지는 마세요. 쓰다듬을 받는 게 평생소원이던 소녀 가장의 우울한 가정사 같은 거, 민준 씨 앞에서 꺼내고 싶지 않으니까.”
“아, 죄송합니다.”
“그럼…머리 좀 더 쓰다듬어 주시던가요.”
“얼마든지요.”
쓰윽-. 쓰윽-.
“아이, 좋아. 민준 씨 손 엄청 포근해요. 아빠 같아-.”
나는 또다시 정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전과 달리 정혜는 아예 눈을 감고 제대로 내 손의 감촉을 즐겼다.
웃고 있는 정혜의 얼굴에 피어난 홍조가,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내 손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어째서든, 행복해하는 정혜가 보기에 좋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는 정혜가 충분히 만족할 때까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손을 내리면서 넌지시 물었다.
“나가서 좀 걸을까요? 정혜 씨.”
“그럼요. 아, 제가 초코 우유 사드릴게요!”
“초코 우유요?”
“네, 술 먹고 초코 우유 먹으면 속 하나도 안 쓰리거든요. 저만의 숙취 해소법인데 민준 씨니까 특별히 알려드리는 거예요!”
술을 먹어서 그런가, 정혜가 유독 귀여워 보였다.
가족을 혼자 책임 지면서도 자신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누구보다 당찬 여인 이정혜가, ‘숙취에는 초코 우유!’ 같은 말을 하니까 이제야 20대 초반의 대학생처럼 보였다.
정혜에게서는 내가 싫어하는 설익은 풋내기의 향이 아니라, 진흙 속에서 오랫동안 갇혀있다가 갓 피어난 홍련의 향기가 풍겨왔다. 순식간에 나를 홀릴 만큼 충분히 진한 향기였다.
“정혜 씨.”
“네?”
“키스해도 돼요?”
“에……?”
정혜는 머뭇거렸다. 두리번거리며 나정 일행이 확실하게 잠들었는지 확인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입에서 소주 냄새 날 텐데…그러니까 우리 초코 우유 먹고 하면 안 돼요? 그럼 초코 맛이 날 텐데-.”
“괜찮아요. 저한테 초코 우유는 정혜 씨니까.”
“그, 그게 무슨-. 읍…!! 우읍…!!”
나는 늘 그렇듯이, 허락도 없이 정혜의 입술을 훔쳤다.
정혜의 입에서는 물론 소주 향이 났지만, 나에게는 초콜릿처럼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