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106화
군대 얘기를 거론하면서 여자친구 고무신 신길 거냐는 물음은….
그래, 친한 사이라면 농담 삼아 던질 수 있는 수준의 질문이었다.
하지만 건너편에 있는 족제비와 나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였고, 말투 역시 시비조에 가까웠다.
정혜를 좋아하든, 아니면 단지 모두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든, 족제비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다는 핑계로 나에게 질문을 빙자하여 꼽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래. 이런 사건·사고가 있어야 젊은이들의 술자리지.’
아무리 푹 익은 맛을 선호하긴 했지만, 이런 상황만은 좀 예외였다.
덜 여문 사람들만 내뱉을 수 있는 수준 낮은 발언과 태도들은 언제나 나를 흥분시켰다.
이때만큼은 마음 놓고 같이 수준이 낮아진다고 해도 마음이 찝찝하지 않았으니까.
‘안 그래도 눈빛이 참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잘 걸렸다 이놈.’
인간이란 참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동물이라, 눈빛만으로 충분히 다른 사람의 기세를 판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눈빛만 가지고 ‘너 눈을 왜 그렇게 떠?’라고 추궁하면, 오히려 본인이 예민한 사람으로 몰리기 일쑤였다.
눈을 좆같이 뜬 사람이 ‘나는 평소대로 떴는데? 네가 예민하게 구는 거 아니야?’라고 한마디만 하면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대게의 경우 상대방의 눈빛을 카메라로 찍어놓을 수도 없었고, 찍어놓았다고 해도 그게 평소의 눈빛이라고 발뺌한다면 딱히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지 눈깔이 원래 그렇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단지 시선에서 끝나지 않고 불편한 기운을 말로써 전달할 때는, 특히 그 상황 안에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경우에는, 아주 엄밀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는 1대1 결투가 아니라 여론을 움직이는 정치력 싸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내 말투는 딱 책 잡히지 않을 만큼만 적당히 좆같은지.
내가 이 사람에게 꼽을 줬을 때, 주변 사람들은 얼마큼 내 의견을 옹호할지.
저 사람의 편은 누구고, 나의 편은 누구며, 중립을 지키는 이는 몇 명인지.
이렇게 세심하게 따져보고 확신이 섰을 때 덤벼드는 것이 아니라면, 말로써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의 사회적 평판은 필연적으로 깎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타고난 정치력을 가진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이용하여 큰 노력 없이 사람들 앞에서 누군가를 개새끼로 만들 수 있었다.
레오레에 빠져들기 전까지는 몰랐지만,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아닌 다른 팀원의 영향으로 게임이 기울었다는 걸 설득력 있게 증명하고 논증할 수 있는 정치의 능력.
그런 능력이 나에게는 있었고, 나는 적어도 머리가 아프지 않은 수준까지는 이 능력을 써먹는 걸 굉장히 좋아했다.
“……야, 야! 김인호! 너 취했냐? 취했으면 들어가서 자라. 흰소리하지 말고.”
“에이~ 취하기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지. 군대를 다녀왔다기엔 피부가 너무 뽀송뽀송하잖아. 우리 정혜가 괜히 고무신 신으면서 마음고생 할까 봐 그래. 내가 군대 다녀와서 아는데, 그거 진짜 할 짓 아니다. 군대 가는 본인도 그렇고, 기다리는 사람도 그렇고.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안경 선배와 족제비 간의 대화였다. 안경 선배의 이름이 나정이고, 족제비의 이름이 김인호인 것 같았다.
꼰대 같은 발언으로 술자리 분위기를 박살 내버린 나정이 인호에게 꼽을 줬고, 김인호는 기다렸다는 듯 나름의 논리로 받아쳤다. 김인호가 무작정 잽을 날린 게 아니라 받아칠 준비를 하고 군대 멘트를 던졌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자신만의 계획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나 그렇듯 계획은 처맞기 전까지만 유효했다.
“그, 인호 씨. 실례지만 정혜랑은 어떤 사이세요?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혹시 친분이 두터우신가요?”
나는 당황해하는 정혜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실실 쪼개고 있는 김인호를 번갈아 보며 젠틀하게 물었다.
이런 정치 싸움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교양을 챙기는 것이 유리했다.
누가 옳은지 그른지, 누구의 입장이 옹호할만한지 판단할 때, 사람들은 말투만으로 큰 점수를 매기곤 했다.
특히 사람 간의 관계성을 중시하는 여성들이 그랬는데, 이 테이블의 반은 여성이었다. 고로, 나는 이미 절반의 배심원들을 설득한 셈이었다.
“저요? 아하하하. 아~~ 아직 정혜한테 얘기 못 들으셨구나. 제가 전년도 영문과 회장이거든요. 지금은 총학생회를 하고 있고…제가 정혜를 신입생 때부터 워낙 아껴서 정혜랑은 많이 가까운 사이예요. 그치, 정혜야?”
“친한 건 맞지만 가깝다는 건 좀……”
턱-.
나는 능글대는 인호의 태도가 심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한 마디 일침을 날려주기 위해 입을 열고 있는 정혜의 손을 꽉 붙잡았다.
정혜가 말을 하다 말고 깜짝 놀라 나를 쳐다봤다.
‘네가 나설 필요 없어.’
나는 눈빛만으로 정혜에게 의견을 전달하고, 다시 시선을 돌려 김인호를 뻔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인호 씨. 평소에도 정혜한테 ‘우리 정혜’라고 하세요?”
“네…? 아-. 그거야 뭐, 다양하게 부르는데…”
“제가 분명히 처음 소개할 때 정혜 썸남이라고 했는데, 굳이 제 앞에서 ‘우리 정혜’라고 하시는 게 어떤 의도인지 궁금해서요. 선후배 사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친근하게 부르시길래 저는 정혜 친오빠쯤 되시는 줄 알았거든요. 실례가 안 된다면 그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아니…뭐, 딱히 이유가 있다기보다는…그냥 술김에 편하게 부른 건데……뭐, 많이 불편하셨나 봐요?”
“불편하죠. 술김에 그러셨다는 게 더 불편하네요. 행동하시는 게 꼭 저한테 정혜와의 친분을 과시하시려는 것 같아서요. 아~ 혹시 남몰래 정혜를 짝사랑하신다거나…”
“무슨 개소리를! 그, 그냥 내가 아끼니까 술김에…!!”
“하하, 진정하세요. 저도 그냥 농담이었어요. 술김에 하는 농담.”
쪼르륵-.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소주병을 들고 김인호의 술잔에 소주를 채워주었다.
멍하니 자신의 술잔이 채워지는 걸 지켜보던 김인호의 시선이 조금씩 올라오더니 나와 마주쳤다.
나는 김인호를 보며 비웃는듯한 느낌으로 미소 지어주며 술병을 건넸다.
누군가를 맥인다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는 느낌이라, 기분이 아주 상큼했다.
“정혜 친하신 선배님한테 한 잔 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 정혜’ 잘 좀 부탁드립니다.”
“……”
내가 뻔히 바라보며 ‘우리 정혜’라는 말에 미묘하게 악센트를 넣어서 말하자, 김인호의 표정이 순식간에 찌그러졌다. 얼마나 몸에 힘을 꽉 줬는지, 쥐고 있는 술병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김인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나의 술잔을 채웠다. 굴욕적일 테지만, 지금 김인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나의 태도와 발언은 딱히 흠잡을 곳이 없었고, 판결도 이미 나와 있었다.
김인호가 나에게 꼽을 주기 시작했을 때부터, 테이블에 착석한 배심원들은 조용히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사건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지금, 그들의 시선과 제스쳐에서 느껴지는 재판의 결과는, 나의 압승.
평소에도 꼰대 짓을 하고 다녔는지 꼴좋다는 듯 인호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나의 정치력에 한 번 더 반했는지 뜨거운 시선으로 열렬한 팬심을 내비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김인호가 입을 꾹 닫은 채 있는 것도, 이 이상 분위기를 씹창내면 정말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수 있다는 걸 감지했기 때문이겠지.
사실은 여기서 더 나대다가 참지 못하고 주먹까지 날려줬으면 더 대박이었는데, 아쉽게도 김인호는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 쉽다. 쉬워. 인호야! 야, 임마! 너는 뺑이 한 번 더 쳐도 나한테 안 돼. 이 덜 떨어진 새캬!’
나는 이들에게 외부자일뿐이었지만, 그럼에도 김인호를 죄인으로 몰고 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가 잘나서라기보단, 단지 정치질의 기본을 간과할 만큼 김인호가 못났기 때문이었다.
“자. 자. 그럼 우리 다들 짠합시다~! 어명! 어명!”
“어명이요~!”
“어명이랍니다~!!”
내 술잔까지 채워지자, 눈치를 보던 나정이 타이밍 좋게 건배를 제의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과 건배를 하며 술잔을 기울였고, 김인호는 마지 못해 잔을 들어서 건배를 한 뒤에도 차마 그 잔을 넘기지 못하고 부들부들거렸다.
무슨 삼전도의 굴욕도 아니고 겨우 술잔 한번 받았을 뿐인데 저렇게까지 부들거리는 걸 보면, 아무래도 김인호는 진심으로 정혜를 짝사랑하는 것 같았다.
‘참 다행이네. 저런 꼰대 새끼가 정혜한테 들러붙기 전에 내가 먼저 정혜를 만나서.’
물론, 김인호 따위가 정혜를 만나고 있었다고 해도 내가 하루 안에 뺏었겠지만.
“아! 민준 씨. 그거 사실이에요?”
“네? 뭐가요?”
“음-. 저도 지나가다 영문과 후배들한테 들었던 건데, 정혜 남자친구는 스포츠카 타고 다닌다고…정혜한테 물어봐도 입 꾹 닫고 아무 말도 안 해주더라고요.”
“선배!!”
“아, 왜. 아니면 아니고 맞으면 맞는 거지. 왜 그렇게 화를 내. 정혜야.”
나정이 눈웃음을 치며 넉살 좋게 물어왔다. 흥미로운 주제가 튀어나오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김인호도 은근히 신경 쓰고 있는지, 술잔을 들고 부들부들대던 몸이 한순간 흠칫 굳어버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고는, 나정에게 최대한 겸손하게 대답했다.
뭐, 아무리 겸손해 봤자 팩트가 달라지겠냐만은.
“음. 그냥 중고로 산 거예요.”
“중고요? 그래도 스포츠카면 비싸지 않나?”
“뭐, 웬만한 차들보다는 비싸긴 하죠.”
“뭐야. 카푸어였구나.”
마지막 멘트는 김인호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었다.
나정은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자꾸 끼어드는 김인호에게 살벌한 눈빛을 흘리다가, 다시 나를 보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
“그래도 스포츠카 타려면 유지비 엄청 나오지 않아요?”
“그렇죠. 유지비 많이 나오죠. 고급유 먹는 데다가 연비도 완전 꽝이니까…어쩌다가 수리비까지 나오면 장난 아니죠.”
나는 정혜를 바라보며 장난스레 웃었다. 정혜는 민망해하며 내 시선을 살살 피했는데, 장난 아닌 수리비를 내게 한 장본인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여동생이었기에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럼 혹시 유지비는 어떻게 충당하세요?”
“선배! 질문이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에요?”
나정의 질문이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는지, 언제 민망해했냐는 듯 정혜가 나정에게 한 마디 탁 쏘아붙였다.
나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정혜에게 괜찮다고 말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일해서 벌죠. 뭐, 다른 방법이 있겠어요?”
“헐-. 그럼 재벌은 아니신 거네요?”
“네? 재벌이요? 그런 건 아닌데……”
“와 씨-. 나 이거 내기 걸었었는데…민준 씨, 정말 죄송한데 혹시 정말 재벌 아니세요? 타고 다니는 차 부모님이 사주신 거라고 한 번만 말해주세요. 제발요.”
“언닛!!”
정혜가 날뛰든 말든, 나정은 굉장히 침울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지갑에서 만원 두 장을 꺼내 들었다.
느닷없는 행동에 의아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테이블 끝쪽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하핫. 꺼억-. 잘 먹겠습니다. 나정 성님.”
“하하. 거, 자알~ 놀다 갑니다~”
불법 사설 하우스에서나 쓸법한 대사를 내뱉은 여자 두 명은, 뱀처럼 요사스럽게 손을 뻗어 나정이 꺼내놓은 지폐에 슬그머니 손을 올렸다.
나정을 놀리는 모습이나 돈을 가로채 가는 손놀림이 타짜처럼 능숙한 게, 이런 일을 한두 번 해본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았다.
“잠깐!!”
쿵-!
“뭐, 뭐야!”
“거 장난질이 너무 심한 거 아니요!!”
내기에 져서 침울해 있는 줄 알았던 나정은, 지폐를 향해 내밀어 오는 두 손목을 순식간에 낚아챘다.
돈이 걸려 있어서 그런지 내 대단한 동체 시력으로도 동작이 흐릿하게 보일 만큼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아모르직다. 아모르직다. 아직 내기는 끝나지 않았어! 민준 씨! 혹시 그러면요…”
“네. 나정 씨.”
나정은 비장한 어조로 물어왔다. 동공이 마치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의 것처럼 날이 서 있었다. 분위기로만 보면 이만 원이 아니라 이억이 걸려 있는 느낌이었다.
뭐, 이런 게 젊음의 맛이려나.
“그 돈 혹시…주식이나 비트코인으로 모으셨나요?”
“아, 당연하지! 민준 씨 외모 딱 보면 몰라? 투자의 귀재처럼 생기셨잖아~ 관상이 그래. 관상이.”
“요즘 스포츠카 타는 젊은이들은 다 가상화폐의 수해자라구욧!”
“아……”
이제야 나는 나를 두고 어떤 내기가 걸렸었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젊은 나이의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는 나의 정체가 과연 무엇이냐. 재벌이냐 아니면 가상화폐 투자의 귀재이냐.
이 두 의견이 팽팽히 맞서 싸운 것 같은데, 충분히 그럴 만했다. 아마 불법적인 일에 발을 담그지 않는다고 전제하면, 젊은 나이에 스포츠카를 모는 이들은 대부분 그 두 분류 안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난 둘 다 아니었다. 내 자금의 출처는 오롯이 돈자갓을 향한 신앙심에 기인했다.
그렇다고 일반인에게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이게 웬걸. 나는 이제 무한금욕교의 교주이자, MJ인베스트먼트의 대표였다.
나는 말 없이 지갑을 꺼내 들어서, 유나가 언젠간 꼭 필요할 거라며 손수 지갑 속에 넣어놨었던 명함 중 한 장을 나정에게 건넸다.
“둘 다 아니고, 그냥 평범한 사람들처럼 돈 벌고 있습니다.”
“헐-. MJ인베스트먼트 대표 김민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