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플쓰는 밤의 황제-105화 (105/270)

〈 105화 〉 105화

‘빡빡하네……’

메모장에 들어있는 일정은 거의 10분 단위로 쪼개져 있었다. 오늘 만나기로 한 여자들만 8명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웃스타 4인방에다가 정혜, 혜미, 설영, 다영이까지 따먹어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그나마 아웃스타 4인방은 오늘 안에 한꺼번에 따먹을 수 있도록 세뇌를 걸어둘 생각이었지만, 그것도 한 명씩 따로 만나서 작업을 쳐야 했기에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열심히 해야지. 유나한테 쪽팔리지 않은 대표가 되려면.’

유나는 내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잘해도 너무 잘하고 있다는 것.

물론, 아무렇게나 쓰는 게 아니라 오로지 회사의 빠른 성장을 위해서 쓰고 있었고, 그래도 지금까지는 여유롭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내 생각보다 더 빠르게 스타 엔터의 인수를 논하게 된 것이 문제였다.

무려 600억짜리 인수 계획이었으니 자금을 조달하려면 나도 여유만 부릴 수는 없었다.

지금보다 더 수익성 좋은 복종도 갈취 구도를 만들고, 열심히 떡을 쳐야 했다.

‘그래. 더 많은 떡을! 더 효율적이고 강력한 떡을!’

꽈아아아앙—.

도심이 떠나가라 요란스레 달리는 람보 안에서, 나는 오늘 하루를 불태우리라 다시 한번 마음먹었다.

****

-민준 씨, 지금 어디쯤이세요?

“거의 다 와 가요. 한 10분쯤?”

-아, 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뭐가요?”

-이런 평범한 대학생들 술자리 불편하실 것 같아서……감히 추측해 보자면 민준 씨 같은 부르주아 계층들한테는 조금 야만적으로 느껴질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네…… 하하. 뭐, 괜찮아요. 정혜 씨 얼굴 보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나는 지금 정혜가 있는 연수대 근처 술집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무슨 무슨 행사가 끝나고 연수대 회장단들끼리 하는 회식이라는데, 취업을 위해 총학생회 회장이라는 스팩을 노리고 있는 정혜는 이런저런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카페 알바에 학점까지 쏠쏠하게 챙기고 있었으니, 경찰서에서의 만남 이후로 사실상 나와 정혜는 랜선 연애를 하고 있었다. 정혜가 너무 바빠서 도저히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오늘 저녁에 만나기로 한 것이었는데, 정혜를 제외한 나머지 7명의 여자를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하고 시간이 붕 뜬 나는 정혜에게 더 일찍 만나자고 제안을 건넸다. 그러자 정혜는 회장단끼리 회식 약속이 있어서 그건 곤란할 것 같다고 말했고, 나는 그렇다면 내가 그 회식 자리에 끼면 되는 거 아니냐고 정혜를 설득했다.

정혜는 내 발언에 당황스러워하면서도 회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일단 양해를 구해보겠다고 했고, 무조건 합석 가능이라는 대답이 나와서 나는 원래 약속 시간보다 훨씬 더 일찍 정혜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야만적이라고…… 거 참 두근두근하네.’

어플이 생기기 전에, 나는 대학생이 되어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는 걸 상상하곤 했었다. 당연히 대학생들 특유의 파이팅 넘치는 회식 자리 역시 경험해보고 싶었다.

로망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인생을 살면서 한 번쯤은 경험해보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에 정혜를 통해 이루게 되어서 내심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그럼 기다릴게요. 민준 씨.

“네, 금방 갈게요.”

정혜와의 연락을 끊고, 나는 젊음의 거리인 신촌을 가로지르며 회식 장소로 향했다.

‘너무 노땅같이 입었나……’

차 안에서 지나다니는 젊은이들(?)의 패션을 보고 있자니,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요즘 유행인지 인싸 패션인지는 몰라도, 애들이 입고 있는 옷들은 하나같이 찢어지거나 펑퍼짐했다. 상의 하의 가리지 않고 펑퍼짐해서 블루 컬러 노동자, 그중에서도 어쩐지 군밤 장수 아저씨를 생각나게 했다.

물론, 어디서나 보이는 모나미룩 친구들도 많긴 했지만, 조금 꾸밀 줄 안다 싶은 애들은 전부 힙합 아니면 노동자 감성이라서, 발목에 맞춰 딱 떨어지는 팬츠와 니트에 코트까지 걸쳐 입은 내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거리 위의 이방인같달까.

‘괜히 이런 걸 신경 쓰게 되네.’

나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다가, 젊음의 거리로 와보니 느껴지는 게 많았다.

사실 나도 따지고 보면 젊은이 중의 젊은이였는데, 내 눈에는 어쩐지 그들이 너무나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딱히 패션뿐만이 아니라, 거리 자체가 나와는 조금 동떨어져 있는 기분이랄까.

내가 회식 자리에 온다고 했을 때, 정혜가 우려했던 부분이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이정혜……이 귀신같은 여자.’

나는 정혜의 혜안에 놀라면서도, 굳이 회식 자리에 끼겠다고 한 걸 그리 후회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런 대학생들 특유의 분위기를 동경한 게 아니었다. 단지 궁금할 뿐이었는데 궁금증을 풀었음에도 역시 내 입맛에는 별로 맞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올 뿐이었다.

이 거리를 지나다니는 젊은이들에게서 통통 튀는 생명력이 전해지긴 했지만 아직은 너무 설익은 느낌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핏덩이 같았다.

그저 쓱 지나가면서 이런 평가를 한다는 게 웃기긴 했지만, 나에게 전해지는 직감이 틀릴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들의 가볍고도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를 보고, 격하게 과장된 웃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원래의 자신이 아니라, 되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억지로 끄집어내고 있는 느낌이었다. ‘젊은이들’이라는 특성에 자신을 투영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핏덩이들을 보고 있자니 나까지 피로해지는 기분이었다.

뭐랄까. 사람으로 치면 정혜의 여동생 은혜 같은 느낌이랄까.

역시 나는 이런 것보다는, 푹 익어서 진하디진한 맛이 나는 이미현이나 이유나 같은 쪽이 훨씬 더 좋았다.

섬세하고 배려할 줄 알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인생을 진지하게 마주하며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에게서만 느껴지는 진한 향기가 나를 설레게 했다.

꼰대틀딱이니, 미시충이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지만….

뭐 정말로 어쩌겠는가. 내가 이렇게 태어난 것을.

끼이이익-.

가게 주변에 차를 댈 곳이 없다고 했으니 주변 골목에다가 차를 세워두고, 정혜가 알려준 가게로 향했다.

‘여기구나, 연수대포.’

얼마 걷지 않아서 술판이 벌어지고 있는 대학 주점가 거리 한가운데 위치한, 허름하고 토속적인 느낌의 주점을 찾을 수 있었다. 이름이 ‘연수대포’였는데, 안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오는 게 이미 회식 자리가 한창 무르익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가서 문을 열었다. 솔직히 이런 분위기는 내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내 인생에서 처음 경험해보는 젊은이들과의 단체 술자리였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으니,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자! 위하……”

“아니, 너 좌파였어? 어떻게 그런……”

“씨발, 발파이트를 픽하면 아트룩스를 어떻게 이기냐고 이 빡대가……”

왁자지껄-.

분명히 그랬다. 그리고 내가 허름해 보이는 문을 열고 들어간 뒤, 한 1초 정도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그런데 거짓말같이, 순식간에 가게가 싹-. 조용해졌다.

서로의 시선이 엉키고 분위기가 얼어붙었는데, 어쩐지 나 때문인 것 같아서 솔직히 즐거웠다.

음, 뭐랄까. 생태계를 유린하는 황소개구리의 등장?

“…………와, 씨. 존나 잘생겼다.”

“……어? 저 사람 누구야?”

“미친…………어떻게 나 심장 떨려.”

“나도…………심장 말고 다른 곳까지……”

“미친련…………그건 아니지…………”

“염병……세상 좆같네…………”

저마다 수군수군하는 소리들.

일반인이었다면 듣지 못하겠지만, 돈을 왕창 쏟아부어서 소머즈급 청력을 자랑하는 내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외모 칭찬을 받은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비좁은 술집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는 건 처음이었는데,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휙휙-.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은근히 의식하며, 모델이 포즈를 취할 때처럼 고개를 간지나게 돌려가며 정혜를 찾았다.

내가 생각해도 재수 없었지만, 원래 잘생긴 놈들은 재수 없는 짓을 해줘야 마땅했다. 잘생긴 데다가 재수까지 있다면, 그거야말로 세상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아? 민준 씨! 여기요!”

“아, 정혜 씨!”

마침 식당 한가운데 있는 기다란 테이블에 다른 사람들과 옹기종기 앉아서 막걸릿잔을 들이키던 정혜가, 나를 발견하고 무척이나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정혜의 인사를 받으며 자연스럽게 그쪽 테이블로 향했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정혜야, 혹시……아까 말했던?”

정혜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안경잡이 여자 한 명이 정혜와 나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아, 선배. 맞아요. 아까 회식 자리에 불러도 되냐고 물어봤었잖아요. 그분이세요.”

“그……너랑 썸 탄다던?”

“선, 선배!”

여자 선배는 눈치가 있는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나에게 다 들릴 정도로 크게 얘기했다.

정혜가 황급히 그 여자 선배의 입을 가렸지만, 이미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과 나의 귀에 모든 정보가 입수된 뒤였다.

그 소식을 듣고 여학생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며 그럼 그렇지라는 기색을 내보였고,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학생들은 동시에 나에 대한 적의를 불태웠다.

‘큭큭. 눈빛 봐라.’

무슨 지들이 정혜 아빠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면서, 나를 보며 눈을 부라리는 남자들을 보고 있는 게 솔직히 우스웠다.

뭐, 같은 남자로서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 보니까 되게 가소롭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응~ 그렇게 째려봐도 니들은 정혜 못 가져.

“안녕하세요. 정혜 씨 썸남 김민준이라고 합니다.”

속마음을 숨기며 건넨 당찬 자기소개에, 뭔가 어색하고 억눌려 있던 술자리의 분위기가 한 번에 불타올랐다.

“우우우!!!”

“썸남썸녀는 신성한 술자리에서 썩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 우리 테이블 이미 꽉 찼다!!”

“너나 물러가 이 새끼야!!”

“맞아! 오빠 어서 여기로 앉으세요!”

반응도 제각각이었고 되게 어수선했지만, 어찌어찌하다 보니 정혜의 옆에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걸 위해 나에게 물러가라고 선동 구호를 외치던 남학생 한 명이 테이블에서 나가리 되었지만, 내 알 바는 전혀 아니었다.

“어서 앉으세요! 민준 씨!”

“아, 네. 감사합니다.”

처음에 말을 꺼냈던 안경잡이 여자가 나를 보며, 정혜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저 안경 선배가 이 테이블에서 가장 큰 권력자인 것 같았다.

나는 권력자의 명에 따라 냉큼 가서 정혜의 옆자리를 차지했고, 썸남썸녀라는 소리에 얼굴이 붉어져 있던 정혜는 내가 다가오자 부끄러운지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자, 그럼 입장샷에 착석샷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빠밤!”

“선, 선배!”

입장샷, 착석샷.

둘 다 처음 들어보는 어휘였지만,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입장했으면 술을 마시고, 자리에 앉았으면 술을 마시는 게 이쪽 세계의 문화인 것 같았다.

나는 어느새 세팅되어 있던 소주잔을 들어서 안경 선배에게 자연스레 건넸다. 권력자를 위한 가벼운 아양으로써,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는 것도 있지 않았다.

“한 잔 주시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아-…………그, 그-. 제가, 제가 감사하죠!!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앗!”

내 미소를 본 안경 선배의 움직임이 순간 뚝 하고 멈췄다가, 겨우겨우 이어졌다.

쪼르륵-.

내 잔을 가득 채운 안경 선배는 이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술잔을 마저 채웠고, 왜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자!! 어명입니다! 우리 대 영문과 회장 이정혜양의 썸남이신, 존잘민준 씨와 건배해야 하니까 술잔들 채우세요!! 빨리잇!!!”

이미 다들 거나하게 취했는지, 아니면 평소에 쌓아둔 민심이 좋았는지.

사람들은 하나같이 안경 선배의 말에 따라서 술잔을 채우고 잔을 들어 올렸다.

‘단합력은 장난 아니네. 이래서 대학생들 데모가 무서운 건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치껏 잔을 들어 올렸다.

안경 선배가 내뱉은 ‘건배~!’라는 우렁찬 구호와 함께 모두가 함께 잔을 부딪쳤고, 순식간에 수십 개의 술잔이 비워졌다.

그렇게 술잔을 한번 섞고 나자, 나는 자연스레 술을 계속 받으면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정혜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으며, 어떤 점이 좋았냐는 둥.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건지 정혜와 나의 러브 스토리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물었고, 나는 술자리 분위기가 깨지지 않도록 적당히 유머러스하게 답변을 해주며 시간을 보냈다.

‘뭐, 나쁘지는 않네.’

사람들이 북적북적 거리는 술자리는 확실히 매력이 있었다.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왜 한국 사람들이 이 맛에 빠져서 회식을 그렇게 많이 해대는지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개판이긴 했지만, 그것마저 매력이 되는 마력을 가지고 있달까.

옆에 있던 정혜는 내가 자신의 조금이라도 일찍 보기 위해 일부러 회식 자리에 와 준 걸 무척이나 고마워하면서도,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냐며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왔지만, 어차피 소주가 아니라 양주를 들이부어도 멀쩡했기에 나는 걱정하지 말라며 정혜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한 30분쯤. 조금도 쉬지 않고 스퍼트를 달리며 테이블에 융화되어 재밌게 술을 마시고 있을 무렵, 갑자기 내 건너편에 앉아있던 족제비상 남자 한 명이 나에게 시비조로 말을 걸어왔다.

내가 올 때부터 나를 은근히 째려보고 있던 녀석이라 언제 시비를 걸어주려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그럼 민준 씨는 군대는 다녀온 건가? 설마 우리 정혜한테 고무신 신기려는 건 아니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