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 102화
유나와의 만남은 커피숍에서였다.
세계 정복을 꿈꾸고 있는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치고는 굉장히 검소했지만, 원래 모든 위대함은 사소한 것들로부터 시작되는 법이었다.
“그러니까 팀을 꾸려야 한다는 거죠?”
“네. 어차피 이번 인수 건으로 일이 끝날 것도 아니니까. 제가 팀을 꾸려서 사업체를 하나 만들고, 민준 씨는 그 사업체의 대표이자 투자자가 되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알아들었어요. 음, 팀원들을 구하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요. 해봐야 알겠지만…제가 알고 있는 유능한 분들을 수월하게 저희 팀으로 영입하려면, 그분들이 기존에 다니던 직장에서 받는 연봉보다 최소 1.5배에서 2배 정도는 제시할 필요가 있어요. 아니면 관리자급만 몇 명 엄선해서 뽑고 나머지는 신입사원들로 채우는 방식도 있는데…민준 씨는 일을 최대한 빠르게 진행시키는 걸 원하시는 거죠?”
“뭐, 그렇죠.”
“그러실 것 같긴 했는데…음. 그러려면 아무래도 자금이 많이 필요할 거에요. 제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수준의 사람들을 2배의 연봉을 보장해서 영입한다고 가정하고, 사무실을 빌린 다음 본격적인 일에 착수할 때까지…거칠게 계산해도 대략 한 달의 시간과 몇십억의 자금이 소모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곧바로 인수 작업에 들어갈 수야 있겠지만, 솔직히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비용 대비 성능이 너무 떨어지는 것 같아서…그야, 민준 씨가 돈이 많다는 건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적자를 최소한으로 해서 회사를 운영하려면……”
“음, 유나 씨.”
“네. 민준 씨.”
역시나 유나는 정말 대단했다. 딱히 재촉을 한 적도 없는데, 대화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 내가 어떻게 해서든 회사를 빠르게 성장시키고 굴려 나가고 싶다는 걸 정확히 예측하고 간언을 쏟아냈다.
나야 회사를 키우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무한금욕교의 교세를 확장하고 퀘스트를 깨는 게 진짜 목적이었다. 그러니 회사 설립을 그저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한 현질 정도의 수준으로 여기고 있었다. 얼마가 소모되든 빠르게 결제하고 다음 챕터로 넘어갈 수만 있다면 장땡이었다.
그러니 나와 달리 진지하게 회사에 대해서 고민하고, 더욱이 나의 주머니 사정까지 고려하여 최대한의 가성비를 가져가고 싶어하는 유나의 입장에서는, 부정적인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어쩔 수 없는 견해 차이였다.
하지만 나쁜 일은 아니었다. 이렇게 똘똘하고 책임감 넘치는 유나에게 일을 맡긴다면 얼마나 수월하게 회사가 굴러가겠는가. 내가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고 해서 회사가 엉망으로 운영돼도 된다는 건 아니었다. 캐쉬템이 얼마나 비싼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지만, 제대로 된 성능을 보여주느냐는 중요했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회사를 만들기 위해서, 나의 이런 마인드만 유나에게 제대로 심어주면 될 것 같았다. 나머지 실무 같은 것이야 유나가 알아서 할 테니.
“혹시 온라인 고스톱 같은 거 해봤어요? 꼭 고스톱이 아니더라도 포커나 홀덤 같은…사이버 머니로 하는 게임이요. 아니면 어렸을 때 교회 가면 주는 가상 화폐 같은 거 있잖아요. 뭐, 달란트라고 하던가?”
“아, 달란트야 받아본 적 있는데…게임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네요. 근데 갑자기 달란트 얘기는 왜…”
“앞으로는 있잖아요. 유나 씨가 회삿돈을 달란트처럼 여겼으면 싶어서요.”
“네…?”
갑자기 튀어나온 달란트 타령에 유나는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와 유나가 생각하는 ‘돈’의 가치가 너무도 달랐기에, 이런 식의 과격한 비유가 아니면 쉽사리 그 차이를 좁힐 수가 없었다. 정말로 나에게는, 현금이 사이버 머니나 마찬가지일 걸 어쩌란 말인가.
“음…예를 들어 볼게요. 만약에 이 카페를 사야 한다고 칩시다. 적정가는 1억이지만 1억에 구매하기 위해서는 몇 달을 기다려야 하고, 2억이면 몇 주 안에 구매할 수 있으며, 5억이면 즉시 구매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가정해 볼게요. 유나 씨는 어떻게 할 것 같아요?”
“그야…매입 시기에 따른 손익을 따져보고, 결과적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결정할 것 같은데요?”
“아니죠. 제가 방금 말씀드렸잖아요. 이제부터 현금은 그냥 달란트라니까요? 찍어내면 찍어내는 대로 생기는 사이버 머니라고요. 당연히 5억에 매수하는 게 맞는 선택이죠. 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시간은 금이라고. 그런데 그 귀한 시간을 현금도 아니고 사이버 머니로 살 수 있다면, 유나 씨는 안 살 거예요?”
“으음……”
상식을 벗어난 설교에 유나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이게 맞나?’ 하며 고민하는 것 같은데 좀처럼 믿지 못하는 유나에게 나는 조금 더 강한 확신을 줄 필요가 있었다.
“자, 유나 씨 들어봐요. 이번 연말에 적자가 1천억이 찍히든 3천억이 찍히든 저는 유나 씨를 탓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의 목적은 사이버 머니를 얼마나 잘 벌고 잘 아끼느냐에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무조건 시간을 삽니다. 돈을 얼마나 들이던 시간을 단축시켜서 회사를 초고속으로 성장시키는 것. 그것 말고는 신경 쓰지 마세요.”
“하아-. 제가 알던 회사의 개념과는 많이 달라서…일단 민준 씨가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는 알겠어요. 수익보다는 최대한 회사의 빠른 성장을 중점에 두라는 거겠죠?”
“으음…”
메시지는 제대로 파악했지만, 아직까지 ‘수익’이라는 고상한 단어를 쓰는 거 보면 유나는 아직도 얼마나 돈을 하찮게 여겨야 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마 유나의 머릿속에서는 성장이 1순위이고 수익이 2순위쯤으로 생각되고 있겠지. 하지만 내가 무한금욕교의 교주인 이상 회사에서 벌어들이는 작은 수익 따위야 사실상 고려할 필요도 없었다.
복종도라는 시스템 자체가 시간이 갈수록 쌓이는 속도가 상승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회사를 설립하려는 건 단지 이 구조를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함이었고, 그렇게만 되면 나는 실제로 현금을 사이버 머니처럼 쓸어담을 수 있었다. 몇천억을 넘어 몇조까지도 가능할지도 몰랐다. 물론, 아직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연주라는 마르지 않는 샘이 있었으니 회사 하나 운용한다고 삐걱 거릴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 유나는 수익 걱정은 전혀 하지 말고, 복종도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해서 미친 듯이 돈을 쏟아붓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자, 유나 씨. 그럼 제가 딱 가이드 라인을 내려드릴게요.”
“네. 그래 주시면 더 명확하게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긴 해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루에 최소 10억 이상을 회사의 성장을 위해서 소모하세요. 100억을 쓴다고 10일 치를 채우고, 이런 식이 아니라 별일이 없더라도 매일매일 10억을 쓰세요. 뭐, 커피 머신을 100대씩 사도 좋고, 틈만 나면 건물을 사들이셔도 좋습니다.”
“네…?”
“대표로서 유나 씨한테 드리는 과제입니다. 정말로 하루에 10억씩 매일 썼는지 매달 한 번 씩 보고받을 테니까, 괜히 돈 아낄 생각은 하지 마시고요.”
“민준 씨. 정말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네. 뭣 하면 진짜 우리가 있는 이 카페를 사셔도 돼요. 옆에 있는 편의점을 사도 되고, 유나 씨 타고 다닐 영업용 스포츠카 같은 것도 마음껏 질러 버리세요. 뭐, 당연히 지금 당장은 엔터사 인수에 집중해야겠지만, 나중에 정 할 게 없으면 그렇게 하면 된다는 소리예요. 아시겠죠?”
“……”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유나를 보며, 나는 작게 웃으며 시켜놓은 커피를 홀짝였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경제, 경영을 평생 공부하던 유나이다 보니, 수익에 대해 너무 진지하게 고려하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그래서 나는 유나의 고정 관념을 깨트릴만한 과제를 던져주었다.
하루에 10억. 이렇게 말하면 커 보였지만 복종도로 치환하면 단 10이었다. 연주의 머리만 좀 쓰다듬어 줘도 벌어들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더 솔직히 말하면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쌓이는 복종도가 10보다는 훨씬 더 많았다. 게다가 나에게는 연주를 제외하고도 10명가량의 신도들이 있었고, 앞으로는 신도들의 숫자 역시 훨씬 더 늘어날 예정이었다.
그러니 10억 정도야 정말로 마음껏 소모해도 괜찮았다. 물론, 유나가 그럴 리가 없겠지만.
‘유나는 돈을 마음껏 쓰라고 해서 정말로 막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유나는 평생 돈에 대해 공부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돈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었으니 목에 칼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 정말로 커피 머신을 100대씩 살리는 전혀 없었다. 매일매일 10억을 쓰랬다고 해서 돈 한 푼을 대충 다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유나였기 때문에 나는 흔쾌히 10억 퀘스트를 던져 주었다. 10억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쓸지 고민하기 위해 들어가는 유나의 정신적 에너지는, 즉시 회사의 성장으로 이어질 테니까.
“너무 힘든데…하루에 10억을 대체 어떻게…민준 씨, 이게 정말…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정 그러면 원래는 인건비는 다 빼려고 했는데, 인재 영입에 들어가는 연봉 같은 것도 카운트해드릴게요. 그러니까 오늘은 연봉 5억짜리 인재 두 명만 영입하시면 되겠네요.”
“네?! 그거 오늘부터였어요?”
“네, 오늘부터.”
“으읏…! 잠, 잠시만요. 민준 씨!”
그렇게 말하고는, 유나는 다급하게 핸드폰을 집어 들고 맹렬하게 문자와 통화를 날리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인재 영입전에 뛰어든 것 같은데, 그런 유나를 보면서 나는 10억 퀘스트가 정확하게 잘 먹혀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역시 범생이들은 이렇게 과제를 주면 환장하거든.~’
모범생들을 다루는 법.
대표로서 배워야 할 비지니스 스킬을 하나 깨달아서 그런지, 내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나가질 않았다.
——
“하아~”
스타 엔터의 대표 이준호는 사무실 의자에 몸을 기울이고 앉아서 짙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경영진들과 회의를 나누고 왔지만, 회의의 내용은 언제나 그렇듯 회사의 현재 상황이 영 별로이며 이를 쇄신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도들과 경영 혁신이 필요하다는 내용뿐이었다. 이런 회의를 나눈 지 어언 몇 년째라 이제는 눈을 감고도 회의장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그런 지루한 곳에서 1시간을 넘게 버티다 왔으니 이준호의 입에서 한숨이 뿜어져 나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래서 먹물 먹은 놈들이란…하아-.”
경영진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하나같이 옳았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원래 옳은 말은 듣기에 거북한 법이었다. 뭐, 애초에 옳은 조언을 듣기 위해서 뽑아놓은 사람들이었으니, 그들 딴에는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셈이었지만.
“누가 하기 싫어서 안 하냐고. 못하니까 문제지…”
로드 매니저에서부터 쭉 실무를 거치며 대표의 자리까지 오른 준호는, 그들이 말하는 것들이 하나같이 허울좋은 말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새로운 투자 유치? 이미 적자로 돌아선 지 오래였다. 과거의 영광 덕분에 어찌저찌 망하지는 않고 있지만, 그 영광마저 점점 빛바래져 가서 그래도 어느 정도 정체되어 있던 적자 폭이 근 몇 년 사이에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다른 잘나가는 엔터들을 놔두고 굳이 스타 엔터에 투자할만한 돌대가리 투자자들은 없었다. 아니면 이미 굶어 죽었던가.
실무진들의 교체와 영입? 이것도 말이 안되는 게 애초에 이 바닥의 실무진이라고 해봤자 솔직히 거기서 거기였다. 요구되는 최소한의 능력치야 있겠지만, 이미 오래된 회사였기에 다들 짬밥도 먹을 만큼 먹었기에 능력이 부족해서 사고 치는 실무진은 거의 없었다. 뭐, 그렇다고 연예계에 특출난 인재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이들은 벌써 초거대 기획사에서 채간 지 오래였다.
연봉 삭감과 구조조정? 이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패쓰였다. 차라리 대표 자리에서 내려왔지 제 식구들의 살을 깎아 먹을 생각은 없었다.
새로운 그룹을 데뷔시켜서 대박 터트리기? 그래. 이게 그나마 현실성 있는 방법이었지만 문제는 현실이라는 게 그리 녹록지 않았다. 매년 데뷔하는 그룹이 100팀이라면 그중에서 3년을 제대로 가는 팀이 많아 봐야 3팀 정도였다. 데뷔와 동시에 탄탄한 팬층이 확보되는 초거대 기획사들 빼고는 사실상 엔터계는 도박판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런 현실을 몰랐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럼에도 자신이 있었다. 자신은 실력과 운을 겸비해 연속으로 대박을 터트리며 대표까지 올라온 사람이었다. 누구는 도박판에서 패가망신을 당하지만, 그중 아주 소수의 몇몇은 떵떵거리며 이 세상 모든 돈을 쓸어담기 마련이었다.
준호는 자신이 그 소수의 몇 사람이 되리라고 의심하지 않았고,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아왔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거짓말처럼 저조해진 성적 때문에, 준호의 자신감 역시 바닥을 기고 있었다. 아니, 이제는 지하 깊숙이 파고 들어가서 무덤에 안착해 있는 수준이었다.
바깥에서 보면 명맥은 유지하는 수준이었지만, 그 정도로는 도저히 미래가 없다는 걸 준호는 알고 있었다. 한류를 뒤엎고 엔터사들이 끝없이 성장하는 이 시기에 지지부진하다는 것 자체가 뒤처지고 있다는 소리였다.
“씨발, 또 지랄이네.”
평생 욕을 거의 안 하던 준호였지만, 스트레스 때문에 탈모가 와서 사무실 책상에 머리카락이 나뒹굴고 있는 꼴을 볼 때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게 다 대표라는 자리의 책임감 때문이었다. 공식적으로 자신에게 딸린 사원들만 약 100명이었다. 가정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으니, 생각해보면 수백 명의 인간의 자신의 등에 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깨가 너무 무거웠다. 무너질 것 같았다.
“씨발. 그냥 월급쟁이나 할 걸. 뭐 한다고 대표까지 해서는…”
대표가 되면 분명 더 즐거울 것 같았다. 그럴 때도 잠깐은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후회뿐이었다. 연예계를 리드한다고 여기던 자신의 감각은 일시적일 뿐이었다. 트렌드는 끝도 없이 계속 바뀌었고 자신은 그 흐름에 올라타지 못했다. 그걸 깨닫고 단단히 절치부심해서 모든 걸 담아 데뷔시켰다고 자부했던 걸그룹이 ‘솔라’였다. 그런 솔라마저 망한 뒤에는 영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아~ 누가 나 대신 대표 좀 안 해주나.”
이게 준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스스로 모든 걸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젊은 날의 이준호는 이제 없었다. 할 만큼 했으니 이제는 좀 내려놓고 쉬고 싶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그 때, 대표 책상에 설치된 회사 내선 전화가 울렸다. 비서에게서 온 전화였다. 준호는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무슨 일?”
-대표님. MJ 인베스트먼트라는 곳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대표님이랑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시네요.
“MJ 인베스트먼트?”
처음 듣는 회사명이었다. 준호의 목소리에는 의문이 가득 섞일 수밖에 없었다.